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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9 00:43
오타있음

몸이 물 먹은 솜마냥 무겁다. 현직 운동선수여도 체급차가 있는 상대를 마냥 지탱하기란 버거운 일이다. 그 예로 이명헌은 질질 끌다시피하며 어깨에 얹혀진 상대를 옮기는 중이다.

하....씨

겨우 입 밖에 나올뻔한 욕을 주워삼킨다. 하필 오늘, 지금 바로 이 시간 점검중이라는 엘레베이터를 지나 계단을 한땀한땀 오른 뒤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경기를 막 끝내기라도 한 것처럼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왜 하고많은 집 중에서 펜트하우스에 사는거지? 명헌은 갈 곳 없는 원망을 부축하고 있는 얼굴로 쏟아내고 싶었다.

우성, 집 키.

하지만 욕을 주워삼키듯 이번에도 딱히 상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따지고보면 술자리에 나간게 명헌의 죄였다. 운동선수의 심박수는 남들보다 느리게 뛴다더니 알코올분해도 같은 원리로 작용하는게 아닌가 싶다. 명헌은 남들보다 배를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 말술이다. 그러니 자연히 술에 꼴아박은 몇십년 전 후배를 떠맡게 되는것 또한 필연적인 그의 몫이다.

우웅......

우성이 몸을 뒤척였다. 쉬지 않고 마실 때부터 알아봤지만 얼굴이 햇고구마만큼이나 빨갛다. 그런 우성을 명헌이 애써 사근사근 달래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집 키 어딨어

낮게 깔리는 부드러운 저음이 조금이니마 우성을 흔들어깨웠는지도 모르겠다. 내내 감겨있던 풀린 눈이 살짝 떠진다. 얼굴이 벌겋긴하지만 대체적으로 눈 빛과 발그레한 뺨이 취객같지 않게 귀여운 모양새였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명헌에게 우성이 웅얼웅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우유주머니 안에.....

지금까지 집이 털리지 않은게 신기하다. 명헌 지체없이 현관에 달려있는 우유배달팩 안에 든 열쇠를 꺼냈다.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다들 전자도어락을 쓰는데 우성의 집은 아직까지도 열쇠였다. 빠르게 현관문을 열고 저보다 머리 한개 반은 큰 우성을 다시 부축해서 현관 복도에 살포시 내려놨다.

그제야 어깨가 뻐근하니 무겁다. 스트레칭을 조금 해준 뒤, 복도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저러고 그대로 자면 속 버리지. 술자리에서 안주없이 깡으로 빈속에 술만 쏟아넣었다. 천천히 마시라고 말려봤자 이제는 고등학생 때 주장 말은 듣지도 않았다.

찬장을 뒤져 언제 선물받은건지 모르겠는 꿀 세트가 보인다. 컵에 물과 꿀을 넣어 섞은 뒤 명헌은 걸어들어온 복도를 되돌아왔다. 그리곤 여전히 바닥에 누워 인사불성이 된 후배를 흔들어 깨워본다.

이거 마시고 방에 들어가서 자

으으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우성이 조금씩 움직였다. 먼저 신발을 벗어던지고 답답했는지 윗옷을 벗는다. 말릴까 하다가 하는걸 두고봤더니 꾸물꾸물 양말까지 벗은 뒤에야 우성은 명헌의 손에 든 컵을 받았다.

꼴딱꼴딱 목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 명헌은 우성이 허물처럼 벗은 옷가지를 모아둔다. 전부 마셨는지 우성은 컵을 내려둔 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컵까지 수거해가는 명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옷은 세탁실 안에 있는 빨래바구니 안에 던져넣고 컵은 개수대에 잘 넣어두었다.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난거겠지. 더 마시면 더 마셨지 결코 우성보다 덜 마신건 아닌 이명헌이 갈 준비를 하는걸 보며 우성의 눈에서 별안간 퐁퐁 하고 눈물이 새어나왔다.

혀엉

갑자기 우는 취객은 하나도 놀랍지 않았기에 명헌은 매정하게 현관문을 박차고 나갈까 하다가 우성의 형 소리에 또 마음이 약해서 하는 수 없이 우성의 맞은편에 다리를 숙여줬다.



혀엉.....형은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잘해줘요
제 꼴 나지 말고여....

약혼자와 깨지고 휴가를 받아 무작정 한국들어 들어온 정우성은 십대 때에도 보여준 적 없는 방황을 보여줬다. 저런 모습이 처음이라 현철도 성구도 동오도 낙수도 심지어 이명헌조차 동요했다. 날마다 술로 고독을 씹는거 같길래 불러서 운동해줘 농구해줘 밥도 같이 먹어주고 나중엔 결국 술친구도 해줬다.

헤어진 이유는 듣기론 너무 뻔한 스토리였다. 우성이 너무 바빠서 외로워진 상대가 다른 사람이랑 바람이 났다...... 그게 끝이었다. 이제는 라디오 사연으로 넣어봐야 겨우 채택될까 말까 하는 수준.

진짜.......최선을 다해요....전 그게 너무 후회되니까....

한숨을 푹푹 쉬듯이 우성의 말이 길게 늘어진다. 평범한 술주정이다. 그렇게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하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명헌이 허리를 숙여 우성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대체 언제 잠들었는지 사실 술주정이 아니라 잠투정이었는지 우성은 세상 모르게 편한 얼굴로 곪아떨어져있었다. 이제 한숨을 쉬는건 이명헌이다.

팔에 힘도 없어서 질질 끌고 침실로 들어가 힘겹게 침대 위로 끄집어올렸다. 그 사이 한번도 깨지 않고 깊게 잠든 우성은 무슨 꿈을 꾸는지 평온한 숨소리였다. 엉망진창이 된 얼굴. 울었던 흔적과 과한 알코올이 만난 얼굴을 찬찬히 보더가 명헌이 툭, 하고 아까의 말에 대답해준다.

그래서 이러고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한테.....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허공에 울리는 목소리가 스스로가 듣기에도 처량하고 멋없어서 명헌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