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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6 23:54
대만이는 다리를 다친 이후로 어두워졌던 잠귀가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음. 우울함에 젖어 한 번 잠들면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계속 자던 과거가 무색하게 대만이는 이제 조그만 소리에도 금방금방 눈을 떴음. 제 아이를 품은 어느 작은 코요테 때문이었지.
태섭이는 입덧이 심한 편이었음. 대만이가 이것저것 먹어보라 권유해도 제대로 삼키질 못했음. 육식 동물 수인이 고기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할 지경이니 말 다 했지. 태섭이는 정말 살기 위해 먹었음. 아주 작게 뜯은 고기를 억지로 입에 밀어넣고 치미는 토기와 함께 삼키기를 반복하다 지쳐 자곤 했음. 밥도 잘 안 먹고 하루종일 잠만 자는 모습이 꼭 다리 다친 뒤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 같아서 대만이는 태섭이를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거렸음.
그나마 다행인 건 태섭이가 밤과 새벽 사이에는 입맛이 돈다는거였음. 그래서 태섭이는 새벽별이 뜰 때 잠에서 깨어나 조심스럽게 굴 밖으로 나갔음. 대만이는 뭐가 먹고싶으면 자길 깨우라고 했지만 태섭인 매번 대만이를 깨우지않고 몰래 굴 밖으로 혼자 나갔음. 새끼도 밴 마당에 도망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대만이에게 부탁하고 싶지않았음. 애 낳으라고 끌고 와서 아이를 가졌으니 태섭이가 대만이를 좀 부려먹는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음. 하지만 대만이는 태섭이의 반려도 뭣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태섭이는 대만이가 몇 번이나 당부했어도 꼭 밤이면 혼자 나갔음.
혼자 밤의 숲을 걷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음. 바람도 선선해서 기분이 좋았고 축축한 숲의 바닥에서 쥐나 토끼를 사냥하는 것도 좋았음. 숲 곳곳에 있는 시큼한 열매를 따먹어 입맛이 돌았고 몰래 나무에 자신의 발톱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도 재밌었음.
하지만 신기하게도 혼자 숲에서 놀고 있으면 꼭 대만이가 왔음. 자다 깬 모습으로 헐레벌떡 자기 냄새를 좇아 달려온 대만이는 왜 자길 깨우지않았냐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곧장 태섭이를 굴로 끌고 가지않았음. 태섭이가 사냥을 하고 있으면 몰이를 해줬고 열매가 먹고싶어하면 덤불을 찾아 가르쳐주기도 했음. 태섭이가 그냥 걷고 싶다고 해도 대만이는 얌전히 옆에서 같이 걸어주었음.
밤나들이가 몇 번씩 늘어나자 태섭이는 몰랐던 대만이의 모습을 알게 되었음. 굴 안에만 있던 대만이는 항상 신경질적이고 우울해했는데 숲으로 나온 대만이는 의외로 밝고 장난도 잘 치는 성격이었음. 태섭이가 사냥에 실패하면 킬킬 웃으며 놀리다 잽싸게 놓친 사냥감을 잡아다 주기도 했음. 사냥에 몰이도 하며 숲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다리를 다쳤다는게 믿기지않을 정도로 건강해보였음. 왜 굴 속에만 있는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 다른 늑대들에게 그렇게 모욕을 당할 정도로 약해진 것도 아닌거같은데...정신적 문제인가. 태섭이는 이제 저처럼 바람 냄새를 묻히고 푸푸 자는 대만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음. 나같은 씨받이가 아니라 좋은 반려를 만나서 잘 지낼텐데 어째서... 태섭이는 물음을 삼키고 눈을 감았음.
태섭이는 코요테였지만 씨를 준 쪽이 늑대인지라 임신 초기인데도 태섭이의 배가 많이 부풀었음. 가뜩이나 입덧도 심해서 몸은 이전보다 더 말맀는데 배는 불룩 튀어나와 몸을 움직이는 것도 버거웠음. 아이가 자라면서 태동까지 생기자 태섭이는 점점 힘들어졌음. 태섭이 몸에 비해 너무 큰 아이가 발길질까지 하니 해산일까지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음. 그래서 태섭이는 무리의 의사를 만나러 갔음. 대만이가 같이 가주려 했지만 무리를 껄끄러워한다는 걸 알아서 태섭이는 민망하다는 핑계로 혼자 떠났음. 그렇잖아. 반려도 아닌데 뭘 쫄래쫄래 따라온다는거야. 태섭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사를 찾았음. 아니나 다를까 의사는 태섭이를 보고 혀릉 쯔쯔 찼음. 용케 지금까지 버텼다며 의사는 태섭이에게 한 묶음의 풀을 줬음. 태동이 심해지면 씹어서 삼키라는 처방을 받고 태섭이는 다시 굴로 돌아갔음. 하지만 타이밍이 나빴지. 지난번에 대만이에게 시비를 건 녀석들과 마주치고 말았음. 게다가 사냥까자 실패했는지 심기가 불편해보였음. 태섭이가 보이자 녀석들은 잘됐다 싶어 태섭이를 툭툭 건드렸음.
"씨받이가 이래서야 제대로 된 새끼가 나오겠어?"
"새끼도 다리 저는게 나오는거 아냐?"
"정대만이 굶기냐? 지 씨받이도 쫄쫄 굶기나봐. 꼴이 이게 뭐야."
태섭이는 빡쳤지만 녀석들을 비웃었음. 화를 내면 결국 저 녀석들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는거니까.
"누구들처럼 사냥 실패는 안 해서."
태섭이의 말에 녀석들이 발끈했음.
"그럼 정대만 그 새끼가 널 사냥해 먹인다는거냐?"
"어젯밤에도 토끼 잡아다줬는데. 누구들이랑 달리."
태섭이 코웃음을 치자 녀석 중 한 마리가 으르렁거렸음. 대놓고 위협하는 모습에 태섭은 참지않았음. 비록 몸이 마르고 배가 무거웠지만 태섭은 코요테들 중에서 날래고 사납기로 유명했음. 태섭이는 곧바로 달려들어 으르렁거린 늑대의 코를 콱 물었음. 갑작스런 공격에 깽깽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다른 늑대들이 으르렁거렸음. 태섭도 공격 태세를 물리지않았지. 하지만 대치상태가 이어지자 주위에서 흘금흘금 살피기 시작했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어나자 결국 녀석들이 침을 뱉으며 사라졌음. 태섭은 굳이 그들을 더 도발하진않았음. 수틀려서 진짜 물려죽을 수 있으니까. 늑대들이 사라지고나서야 태섭은 다시 천천히 굴로 돌아갔음.
굴로 돌아가자 힘없이 누워있던 대만이 벌떡 일어났음.
"왜 이렇게 늦었,"
투덜거리던 대만의 눈이 번뜩이더니 태섭의 손을 낚아챘음. 아까 그 녀석들을 만난 여파가 컸는지 굴에 돌아와서도 아직 손이 떨리고 있었음.
"뭐야, 왜 이래?"
대만의 눈이 사납게 빛났음
"무슨 일 있었냐?"
당신 때문에 시비 걸렸다는 말을 할 수도 없어 태섭은 손을 잡아 뺐음.
"무슨 일은...별 일 없었어요."
"별 일 없는 녀석이 손을 떠냐?"
태섭은 으르렁거리는 대만에게 차갑게 말했음.
"무슨 상관이에요? 애를 잃은 것도 아닌데."
태섭의 말에 대만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음. 태섭은 대만을 일부러 보지않고 굴 안 쪽으로 가 누웠음.
"신경쓰지마요. 불편해."
벽을 보고 말하는 태섭에 대만이 으르렁거렸음. 그래도 살붙이고 같이 살았잖아. 매일 같이 자고 내새끼도 품은 네가 손을 떨고 돌아왔는데 물어보지도 못해? 울컥한 대만은 당장 태섭이의 어깨를 붙잡고 따져묻고싶었음. 하지만 사실로만 따지자면 그랬지. 두 사람은 반려가 아닌 씨받이의 관계였으니까.
한참동안 태섭이의 등을 보고 있던 대만은 곧 구석으로 가 털썩 누웠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대만이 눈을 떴을 땐 이미 밤이었음. 끼니를 챙기는 것도 잊고 자는 일은 익숙했지만 최근엔 태섭이를 챙기느라 꼬박꼬박 밥을 먹고 자는 시간도 규칙적으로 변해있던 터라 갑자기 밤에 눈을 뜨자니 당황스러웠음. 태섭이 녀석 배고팠을텐데 깨우지도 않고..걔도 계속 잤나? 대만이 태섭이 누웠던 자리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음. 그런데 자리가 텅 비어있었음. 또 혼자 나갔네. 대만이 한숨을 섞어 으르렁거리더니 굴 밖으로 나갔음.
태섭은 벌써 세번째 사냥을 실패했음. 최근 급속도로 새끼가 자라나 갑작스런 체중변화에 태섭이 몸을 잘 가누지 못한 데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만이랑 같이 사냥을 했던 터라 무거워진 몸으로 하는 사냥이 얼마나 어려운건지 이제야 알게되자 태섭이 숨을 헐떡였음. 그냥 열매나 따먹고 말까. 하지만 사냥 시도만 세 번을 해서 모자란 열량을 채워야했음. 태섭은 다시 사냥감을 찾아 숲을 헤맸음. 그 때 어디서 나뭇잎을 밟고 뛰는 작은 생명체의 소리가 들렸음. 태섭의 뾰족한 귀가 쫑긋거리고 몸이 한껏 낮아졌음. 코와 귀를 쫑긋거리던 태섭의 눈이 한순간 빛났음. 파사삭 하고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숲에 울려퍼졌음. 태섭은 색색거리며 입 안에서 꿈틀거리는 숲쥐의 숨통을 끊었음. 크기가 크진않았지만 입맛은 다실 수 있을 것 같았음. 드디어 성공한 사냥에 숲쥐를 문 채 태섭이 씰룩씰룩 웃었음.
"잡았냐?"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란 태섭이 펄떡 뛰어올랐음. 언제 왔는지 대만이 있었음. 이제보니 대만은 숲쥐가 온 방향에 있었음. 혼자 사냥한게 아니라 몰이를 해준거였나. 당황한 태섭이 숲쥐를 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대만이 씩 웃었음.
"내가 니 걸 뺏어먹겠냐?"
그 말에 태섭이 슬그머니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음. 한 번 씹고 두 번 씹으니 민망함도 사라져 태섭은 정신없이 숲쥐를 씹어 삼켰음. 대만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음. 숲쥐를 다 삼키고 입까지 다신 태섭이 그제야 물었음.
"언제 온거에요?"
"니가 두번째 사냥 실패했을 때부터."
그럼 실패하는 꼴도 다 봤다는거네. 태섭이 민망함에 씨근덕거리자 대만이 말했음.
"다음부턴 나 불러. 몰이 해줄게."
태섭의 배가 불러오는 속도로 보아 아마 조만간 몰이 뿐만 아니라 사냥도 제가 해야할 것 같았음. 하지만 대만은 오히려 그 사냥이 기대되기까지 했음. 제가 잡아온 걸 태섭이 먹고 뱃속의 새끼가 먹는다고 생각하니 허리가 저릿했지.
태섭은 낮에 모진 소리를 듣고도 저를 쫓아온 대만이 이해가 가질 않았음. 하지만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대만의 행동에 설레버린 자신이었지.
"배고파? 더 먹을래?"
대만은 그런 태섭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정하게 물었음. 태섭은 자꾸만 반려처럼 구는 대만에 눈물이 날 것 같았음. 고작 씨받이한테 왜 이러는건지. 씨받이한테도 이리 다정한데 반려에겐 얼마나..... 태섭은 이미 체념해버렸다고 생각한 제 마음이 다시 한 번 구겨지는 기분이 들었음

태섭이 손을 떨고 돌아온게 꽤 충격이었는지 대만이는 태섭이 의사에게 갈 때마다 꼬박꼬박 같이 갔음. 태섭은 안 따라와도 된다고 했지만 대만이는 매번 굴 밖을 나섰음. 처음엔 낮에 굴 밖으로 나가는 걸 꺼리더니 몇 번 한 뒤로는 별 거부감없이 나와 태섭과 함께 무리로 갔음. 무리의 아웃사이더 격인 두 사람이었기에 함께 외출한 모습은 시선을 끌었음. 대만은 의연하게 굴었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는 걸 알아서 태섭은 대만을 위해서라도 빨리 진료를 보고 돌아오려했음. 대충 의사의 질문에 대꾸한 태섭은 태동을 견디게 해주는 풀을 받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음. 그런데 진료를 보고 나온 대만은 혼자가 아니었음. 다른 늑대.. 그것도 암컷과 함께 있었음. 볼품없는 꼬리를 가진 자신과 다르게 대만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늑대는 꼬리가 아주 풍성했음. 가벼운 태도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두 늑대는 천생연분처럼 보였음. 대만은 다리가 어떠하든 외관은 훤칠한 늑대였고 상대도 다른 수컷의 시선을 끄는 매혹적인 암컷이었지. 아마 다리를 다치지않았다면 씨받이에게서 새끼를 보는 대신 저런 멋진 반려를 만나 새끼를 낳고 오손도손 살았겠지. 그 생각을 하자 태섭은 마치 자신이 대만의 다리 부상처럼 느껴졌음. 하긴 제 존재 자체가 그에겐 모욕이었으니. 태섭은 퉁 하고 발길질이 느껴지는 배를 부여잡고 혼자 발길을 돌렸음.
태섭이 반쯤 갔을 때 뒤에서 대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음. 발을 저는 소리가 아니었음.
"나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왜 혼자 가?"
대만이 숨을 헐떡이며 태섭에게 따라붙었음. 숨이 조금 차기만 하지 발을 저는 티가 하나 없는 발걸음에 결국 태섭이 폭발하고 말았음.
"왜 굴에만 있어요?"
"뭐?"
태섭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음. 대만은 부상을 입어 못 쓰게 됐다는 말과 달리 다리는 저는 것 없이 잘만 뛰었고 사냥도 수준급이었음. 도대체 다리가 아프다는게 이해가 되질 않았음. 그런데 왜 아프다고 굴에만 처박혀있어? 왜 당신의 빛나는 생을 낭비하지? 왜 나를 데려와서...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왜 자꾸 당신을 욕심내게 해? 내 존재는 당신의 고통의 상징 밖에 되지않는데...
"왜 등신같이 굴에만 처박혀 있어? 당신 사냥도 할 수 있고 뛸 수도 있잖아!"
태섭의 외침에 대만의 눈이 무섭게 변했음. 하지만 참았던게 터진 태섭의 눈에는 그런 변화가 보이지않았음.
"당신 사냥도 잘 하면서 뭐하러 굴에..."
"입닥쳐."
낯선 목소리에 태섭이 흠칫 몸을 굳혔음. 첫날 잡혀왔을 때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음.
"너도 내가 다리 병신이라 만만해?"
대만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음. 하지만 불꽃 너머로 생채기가 벌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게 보였음
"코요테 주제에 뭘 안다고... 고작 쥐나 토끼 잡아먹으면서."
본디 늑대 알파 후계였던 대만은 쥐나 토끼를 태섭이 오면서 처음 잡아봤음. 어릴 때 사냥을 나갔을 때조차 사슴을 물어오던 차기 알파 유망주였던 대만이었음. 그런 대만에게 쥐나 토끼 사냥은 아무것도 아니었지.
"토끼나 잡는게 사냥이냐? 그것도 못했으면 난 씨빼는 용도로도 못 남았어."
대만은 그런 어정쩡한 상태였음. 코요테에겐 한없이 대단해보이지만 늑대로서는 어린시절의 영광에도 닿지 못하는... 비참함이 울컥 몰려왔음. 대만은 더이상 태섭을 보고 있는게 괴로워졌음. 저녀석은 날 한없이 대단하다 여기지만 실상은 아닌 걸. 태섭이 무리의 녀석들처럼 저를 보게 된다면 정말 살고싶지않아질 것 같았음. 대만은 태섭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달려갔음. 당황한 태섭이 대만의 뒤를 쫓았지만 무거워진 배로는 한계가 있었지.
태섭이 허겁지겁 굴로 돌아왔지만 굴은 텅 비어있었음.


대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