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웃겨서 자꾸 생각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 연하가 정우성도 익히 아는 연하라면, 심지어 좀 예뻐하고 귀여워하던 연하라면...





지지부진하게 썸만 죽어라 타다 연애까지 못 가고 정우성 미국 가버린 연반 우명
맨날 도자기로 빚은 것 같은 얼굴로 표정 하나 안 바뀌던 연하 공항에서 울먹이는 표정 보고 정우성은 나름 확신이 생겼음.

얘, 나 좋아하네. 어쩜 좋아. 나도 얘 좋아하는데.

이거 좋은데? 하는 쾌감이 짜르르 올라오는 거랑 별개로 당장 30분 후에 비행기 타고 미국 갈 놈이 여기서 고백 갈기는 건 좀 그렇잖아.
내가 막 뻗대볼 수 있는 후배면 또 모르겠는데 그래도 나름 한 학년이라도 선배라는 의식이 존재하긴 하는 우성 선배.

-가서도 열심히 하세요뿅.
-응, 명헌이두.
-미국에서도 저...저희...잊지 마시구요.

사실은 자길 잊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게 티가 줄줄 나는데 끝까지 어린애가 힘내서 떠나는 선배 부담 안 주려고 하잖아.
그럼 자기도 거기 보답해야 된다고 생각해, 명헌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말이 뭐였는지 짐짓 모른척 머리 쓰다듬어 주는 우성 선배임.

-또 보자, 명헌아.




또 보자고 했을 때 정우성은 진짜 진심이었음. 그냥 한 소리 아니였어. 다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음.
농구로도 레벨이 훨씬 위인 선수들 상대로 지지 않아야 하는데 생활 면에서도 적응할 게 너무 많았고, 시간이 어쩌다 나도 그 짧은 자유 시간을 활용해서 귀국하기엔 너무 먼 거리였고 너무 많은 돈이 드는 여정이었음.
그러니까 또 보자던 약속이 미뤄진 건 진짜로 고의가 아니었음. 상황이 허락해주지 않았을 뿐.

약속처럼 곧 얼굴을 다시 보진 못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연락은 했어. 생각날 때마다 수시로 편지도 자주 썼고 전화도 자주 했음.
그리고 매번 그렇게 연락할 때 마다 이명헌도 꾸준히 정우성에게 답신을 보냈음.
원정 간 곳에서 갑작스럽게 걔 얼굴이 생각나, 충동적으로 엽서 한 장 사서 개발새발 날린 글씨로 보내고 나면 몇 주 후 편지지 가득 빼곡히 서너장씩 적은 답장이 돌아와.
훈련이 유난히 힘들었던 날, 시차고 뭐고 갑자기 명헌이 목소리가 미치게 듣고 싶어서 그쪽은 새벽일 걸 알면서도 삐삐쳐서 음성 메세지 남겨 놓으면 30분 안으로 거짓말처럼 국제전화가 걸려와.
산왕공고 자퇴생인 정우성이 알기로, 새벽에 기숙사 빠져나가 공중전화 거는 거 쉽지 않을텐데도 걔가 그걸 하잖아. 국제 우편 한 번 보내려면 시내까지 나가야 하는데 걔가 그걸 하잖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키타를 벗어나고, 어딘지도 잘 모르는 대학에 가서도, 걔가 그걸 멈추지 않고 하잖아...이걸 겨우 한 때의, 고등학교 시절 부활동 선배를 위해 할 리가, 도대체 있겠냐고.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굳어질 때쯤 드래프트 성공하면서 처음으로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귀국할 여유가 생김.


-아, 그럼 현필이랑 같이 공항 마중 나갈게요, 삐뇽.
-현필이? 신현필?
-네, 현철 선배 동생이용. 기억 안 나세요?
-아니이, 기억하지. 당연히.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이 낯설어서 정우성 혼자 고개 갸웃함. 기억이 안 나냐면 그건 당연히 아닌데, 현필이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지.
신현철 동생 신현필...명헌이보다 한 살 어렸던 걔. 정우성 3학년 올라가던 때 입학했던 애.
기본기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다 큰 키만큼이나 거대한 체격 때문에 오히려 점프도 대쉬도 아무것도 못하던 걔.
신현철이 하도 제 동생을 쥐잡듯이 잡아서 몇 번인가 끼어들어 말려주고 위로해주고 했던 기억이 있음.
살만 뺀다면 타고난 신장은 확실한 재능이었는데, 애가 성격이 하도 순해 터져서 그게 귀엽고 짠하면서도 이쪽으로 살아남긴 글렀다 싶기도 했었지.
귀여운 후배였어, 맞아. 말끝마다 존경한단 소릴 하던 순한 애. 근데 걔 이름이...여기서 왜....나오지.

전화 끊고 나서 정우성 곰곰 대화 곱씹다가 최근 이명헌한테 온 편지 전부 꺼내 다시 뒤져 봐.
그때그때 순간적인 충동과 감정으로 휘갈겨 보내는 정우성의 짧은 편지들에 비해 후배가 보내온 답장들은 항상 늘 정갈하고 제법 길이가 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게 좀....보고서 같다는 인상이 느껴짐.

방에 틀어박혀 한동안 편지를 훑어보면서 점점 침착하게 가라앉는 정우성.
거기서 형이 잘하고 계시다니 기쁘다,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다음번에 만날 때엔 좋은 소식 전해 드리고 싶다, 같은 글귀들만 취사선택해 읽어왔다는 게 갑자기 느껴져서 기분 이상함.

반면 그냥 가벼운 보고로 생각하고 대충 넘겼던 글귀들이 새삼 새롭게 다가오네...
제가 이번에 주장이 되었는데, 윈터컵에서 우승을 했는데, 현필이가 정말 잘해줬고, 형도 보셨으면 좋아하셨을 것 같고...대학이 확정이 됐어요. 장학금 얘기가...졸업식이 언제언제인데, 형은 아무래도 못 오시겠죠. 졸업 잘 했어요, 애들이 많이 울더라고용, 두번째 단추는 현필이 주기로 했어용, 2학년 애들 하도들 싸워서...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형은 졸업 여기서 안 하셨잖아요.
가실 때 저도 미리 형 단추, 달라고 해볼 걸 그랬나봐요.
벌써 오래 전 얘기니까 이젠 의미 없지만서도용.

그 편지 들고 한참 굳어 있는 정우성...이걸 받고 뭐라고 답장 했더라? 지금은 기억도 안 남. 이미 시간이 꽤 지나서...
막 받았을 땐 그저 우리 명헌이 졸업했구나, 못 가봐서 아쉽다, 명헌이도 내 단추 갖고 싶단 귀여운 생각을 했구나...그런 생각이나 했었지.
지금 다시 그걸 꼼꼼하게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어깨가 뻣뻣하게 굳고 이젠 의미 없다는 문장을 수십번 곱씹게 되는 정우성.

명헌이가 합격했다던 대학이 어디였더라, 한참 뒤지다보니 대학명이 나오기는 함.
뒤적뒤적 오래된 잡지들을 찾아보니, 나름 본국에선 농구팀이 명문인 대학이긴 하네...물론 우성이는 경기를 본 적이 없지만...
한참을 그러고 편지며 잡지 뒤적이다 정우성 진짜 오랜만에 신현철한테 연락함.

-현철아, 나야.
-어, 씨발 뭐냐. 진짜 정우성?

제법 다정하게 건 전화에 신현철 경기하는 반응 돌아와서 정우성 저도 모르게 킥킥 웃음.

-미친 새끼야, 갑자기 전화해서 현철아 이 지랄을 해; 와씨, 너 살아는 있었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현철아.
-매정한 새끼, 맨날 이명헌한테만 전화하고 우린 존나 생까더니 현철아 이러고 있다. 존나 오글거리게...아 그래서 뭔 변덕인데.

툴툴거리면서도 반가움을 숨길 수 없는 기색이, 새삼 그 시절 최강산왕을 함께 외치던 동기라는 게 느껴져서 그간 명헌이한테만 연락하고 동기들에겐 너무 무심했나 싶어지는 정우성.
근데 뭐 반대로 생각하면 저쪽에서도 그만큼 먼저 연락해오진 않았단 말야, 애초에 체육계 남고생들이 그렇지 뭐 뭘 그렇게 알뜰살뜰하게 연락을 챙겨하고 지내겠음.
...그냥 이명헌이...조금 특별했던 거지.

-다른 게 아니라, 나 이번에 들어가게 될 것 같은데 언제 한 번 얼굴이나 보자고. 어? 어, 명헌이하곤 연락했지. 너네 같은 대학이던가?
-이명헌이, 나, 최동오, 다 같은 대학 다닌다. 이 무심한 새끼야, 내 동생도 올해 여기 들어왔고.
-네 동생...현필이?
-어, 어째 그래도 니가 현필이 이름을 다 기억하냐? 걔 고등학생 땐 영 시원찮앗는데. 야 그래도 현필이가 지금은 잘 나가.

요즘 같아선 순수 센터로는 나보다도 윗순위로 불려갈걸. 조만간 국대에서 만나게 되면 너 깜짝 놀랄거다. 군살 다 빠지고 이제 근육밖에 안 남아지고선, 걔가 원래부터 높이가 되잖냐.
한참 동생 자랑을 아닌 척 늘어놓는 신현철에 적당히 대꾸해주다가 정우성 한참만에 슬쩍 묻고 싶던 걸 끼워넣어봐.

-그러게, 안 그래도 명헌이가 현필이 예뻐하는 것 같더라.
-엉? 이명헌이?

전화 통화인데도 알 수 있게 순식간에 싸해지는 분위기. 이거 뭔데....심장 점점 거세게 뛰는 거 느끼면서 정우성 애써 침착하게 호흡 골라 보는데, 신현철 한참만에 곤란한 듯 그, 뭐야, 그...를 남발하잖아.

-그...명헌이가 얘기 안 하더냐? 하 참...이거 뭐, 내가 먼저 얘기하기도 그렇고.
-....뭐를?
-아, 이거 그 참...그렇네. 어차피 알게 되긴 할건데, 내가 말해도 되는 건가.
-뭔데, 곤란하면 비밀로 할게.
-야, 이명헌한텐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마라. 현필이한테도. 어? 말하면 암만 정우성이래도 나 가만 안 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신현철 목소리보다 정체모를 이명이 귓가를 울려서 멍해지는 정우성.


걔네 그 뭐야, 연애...그런 거 한다.
좀 됐어.
이명헌이 졸업할 때 부터던가.
그전부터 현필이가 엄청 쫓아다니긴 했거든.
명헌이도 왜, 걔 후배들 챙겨주는 거 워낙 좋아했잖냐.


-야, 정우성.
-듣고 있냐?
-끊었냐?
-이 새끼, 하여간 빠져가지고....


뚜...뚜...뚜....뚜........




같은 우성명헌 현필명헌 보고싶다...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