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56450752
view 4385
2023.07.31 19:35

근데 고거시 결혼은 결혼인데 영혼 결혼식한 상태인 거. 귀신의 어린 신부 정대만

슬라이드1.PNG
* 모브대만 기반의 약 치수대만/태섭대만임

 


대만이네 부모님,, 두분 모두 신체적 문제는 없는데 이상하게 애가 안 들어서서 아주 오랜 시간 고생하다가 겨우겨우 가지게 된 귀한 외동아들이 정대만이었으면.

 

 

적지 않은 나이에 진짜 힘겹게 얻은 아이라서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정말 애지중지 아끼면서 키웠는데, 열 살이 되던 해 생일날 원인 모를 열병으로 애가 쓰러짐 ㅠㅠㅠㅠㅠㅠ

아무리 크고 좋은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취해도 열이 났다 잠깐 꺼졌다 다시 올랐다 수없이 반복하니까 어린 대만이도 덩달아 혼절했다 깼다 반복하느라 정신을 못차리고 이러다 진짜 애 잡을 것 같음

 

 

대만이 부모님 진짜 비상 걸려서 온갖 인맥 동원해서 소문난 명의 수소문하는데 소용이 없고 참담함에 병원 복도에서 펑펑 울고 계실 때 어떤 할머니가 지나치면서 괴상한 소리를 하심. 그 애는 이미 임자가 있다고. 그런데 같은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서 제 세상으로 데려가려고 수를 쓰는거라고.

 

대만이 부모님 할머님 붙들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대체 누가, 우리 아이를 대체 어디로 데려간단 말인가요???? 하며 애원하는데 ... 할머님 병실 안 쪽에 있는 어린 애기의 수척한 얼굴 한 번 힐끔 보더니 혀 끌끌 차면서 안타깝다는 듯 더 말씀하심.

 

 

저 아이는 삼신 할미가 세상에 내려보내기 전, 아직 극락지에 있을 때부터 이미 옆에 착 달라붙은 짝 아이가 있었는데, 삼신 할미가 쟤만 탄생시키고 짝이 될 영혼은 내려보내주지 않아서 이 사단이 난 거라고 함. 그러니까 정대만이 인간의 육신을 얻어 이 땅에 태어났을 때부터 옆에는 육신 없는 반려 영혼이 달랑달랑 붙어있었다는 뜻인 거ㅇㅇ 영혼이 속한 세계는 이승이 아니라 저승이기에, 그 영혼이 저 아이를 제가 속한 세계인 저승으로 얼른 다시 데려가려고 수를 쓰고 있는거라고.

 

 

너무 소름끼치고 기분 나쁜 소리라서 우리 애한테 그게 무슨 망발이냐고 맘 같아선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데 이상하게 할머님이 하는 말씀이 다 사실인 것처럼 들렸던 대만이 엄빠 ㅠㅠㅠ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 애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는거냐고, 제발 방도 좀 알려달라 비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할머니... 저 머슴아 옆에 달라붙은 녀석의 이름을 알려줄테니 모월 모시 어디어디 산 아래에서 둘이 영혼 결혼식을 시키라고. 그렇게 저 혼백의 소유욕을 어느 정도 채워 줘야 애가 살 수 있다고 조언함.

 

 

세상에 고작 열 살 밖에 안된 귀여운 외동아들을.. 강제 결혼... 그것도 산 사람도 아닌 삿된 것이랑....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당장 애가 죽어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혼 결혼식 거행함 ㅠㅠㅠㅠ 할머니가 써준 부적과 대만이 머리칼을 같이 태우면서 부부의 연을 공표해 주었더니, 거짓말같이 그 날부로 열병 싹 낫고 건강해진 갓기 정대만

병에서 회복한 대만이는 앓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음. 똘망똘망 정신 차린 어린 대만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 할머니는 마지막 조언을 남기고 사라지심.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으면 안된다. 비록 네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어도 너는 이제 남편 있는 아낙과 다름 없다."

 

 

열살 시절 저런 기이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무 문제 없이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무럭무럭 자란 정대만은 무석중 포카리 시기를 거쳐 북산고에 입학함. 그리고 그 때부터 뭔가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함.

 

같은 반 남자애들이 야한 잡지를 돌려보고, 몽정 후 가족에게 들키지 않고 속옷 빨래 하는 법 따위를 쑥덕거릴 때 옆에서 멀뚱멀뚱하게만 있었던 정대만. 키는 컸지만 아직 몽정도 한 적 없어서 음 나는 원래 별로 성욕이 없는 타입인가보다! 하고 농구에나 집중하며 살고 있었는데 암만 본인은 성에 관심 없다 해도 외관이 워낙 이케맨이니까 ㅋㅋ큐ㅠㅠㅠ 게다가 운동까지 잘하는 스포츠맨이다? 또래 학생 중 정대만한테 고백 한 두 번쯤 해본 케이스가 없을 리가 없음. 그 날도 오밀조밀 귀여운 여학생 한 명이 뒷뜰로 불러다가 수줍게 편지와 함께 제 마음을 고백했는데, 약간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거절하는 정대만. 멘트는 뭐 뻔했지. 네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은 농구에 집중하고 싶어. 미안해-

 

 

으레 하는 표현이지만 그래도 100% 진심이었음. 고1 정대만의 온 신경은 농구, 그리고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거든. 자신과 같은 나이... 고작 만 16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괴물같은 피지컬을 장착한 센터 채치수. 대체 뭔데. 뭘 먹고 살면 저렇게 거대해질 수 있는 건데.

타고난 재능과 열정 덕분에 어딜 가든 기대주, 유망주 타이틀을 빼앗겨 본 적이 없었던 고1 정대만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저 동갑내기의 모든 것이 샘났어. 아무리 잘 먹고 잘 뛰고 잘 자도 기본적으로 호리호리하기 짝이 없는 제 골격이 채치수만큼 거대하게 펌핑되려면 아마 약물의 도움 없이는 힘들겠지. 아직 어리고 미숙했던 정대만은 경쟁자를 향한 질투심과 열등감을 숨기는 데 서툴렀고, 마찬가지로 어렸던 채치수는 사사건건 부딪혀 오는 건방진 동급생에게 관대하게 굴어주지 않았어. 치수가 내뱉는 모든 말, 행하는 모든 행동들 하나하나가 대만이에겐 발작 버튼이었음ㅋㅋㅋ큐ㅠㅠㅠㅠ

 

그치만 상대방이 거슬리는 만큼 두 사람 모두 하루 종일 서로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원래 편한 사이보다는 불편한 사이가 더..,ㅎㅎ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채치수를 바라보는 정대만의 시선에는 어느덧 다른 감정이 섞이게 되었어. 단순한 동경과 질투를 넘어, 성적인 무언가 말야.

 

나는 저런 고릴라 같은 몸이 취향이었던 건가?

 

채치수가 나오는 꿈으로 첫 몽정을 떼버린 어느 날의 새벽. 대만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벅벅 속옷을 손빨래하며 속으로 마구 욕을 갈겼어. 시발... 하필이면 왜 그녀석이냐고. 어?? 예쁘고 상냥한 수많은 여자애들 다 놔두고 왜 그 땀냄새나는 고릴라 자식이... 내 꿈에!!

팔자에도 없는 세탁 하느라 쪽팔려 죽겠는 정대만ㅋㅋㅋㅋㅋ근데 뭐 그래서 꿈에서 엄한 거라도 했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별 것도 없었단 점에 아쉬움을 느끼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서 더 혼란스러울꺼야. 꿈 속의 자신은 훈련 후 다들 하교하여 텅 빈 락커룸에서,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어던진 채치수의 폭력적일 만큼 선명한 복근을 타고 내려가는 땀방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음. 그리고 제 몸을 열기 어린 눈으로 훑어보는 녀석을 잠깐 응시한 채치수가 이내 손을 뻗어 정대만의 손목을 끌어당겼어. 갑작스런 당김에 휘청거린 정대만이 안착한 것은, 벤치 위에 앉은 채치수의 무릎 위였지. 계속 바라만 보던 가슴팍에 자기도 모르는 새 안겨지자 깜짝 놀란 대만이 힘을 주어 치수를 밀어내려 했는데, 저를 밀어내려는 손을 단단히 붙잡은 치수가 그대로 제 목에 두르게끔 유도하는 장면에서 대만은 깨어나버렸어. 하씨... 쫌 더 잘껄 왜 거기서 깨가지고는...! 지금이라도 자면 이어서 꿀 수 있으려나?

 

 

대만이 한창 아슬아슬한 텐션에 젖어 난생 처음 겪어보는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비극은 찾아왔어. 예상치 못했던 무릎 부상. 물론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을 몸 상태를 제대로 악화시켜 버린 건 뒤쳐진다는 초조함에 함부로 날뛰었던 정대만 자기 자신의 탓이 커. 그러나 사실 근본적으로 그 부상은 ...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정대만의 설익은 첫사랑을 훼방하고자 반려혼이 술수를 쓴 것이었지. 좋아하는 농구를 하지 못하게. 좋아하는 그 사람과 더는 엮이지 못하도록. 아무 감정 없었어도 서로 머리 맞대고 지지고 볶고 육체적으로 계속 부딪다 보면 없던 감정도 샘솟는 게 사춘기인데, 하물며 이미 콩닥콩닥 하고 있는 정대만을 보니 이대로 가다간 안되겠다 싶었던 거지. 네가 감히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아? 

 

 

1차 재활 때만 해도 금방 돌아가리라는 목표로 성실하게 훈련 받곤 했으나 제 욕심 때문에 크게 망가져버린 몸을 붙들고 있으려니 의욕이고 뭐고 다 사라져버린 정대만 ㅠㅠ 텅 빈 죽은 눈으로 병원 부지 벤치에 앉아서 깔깔 뛰어다니는 꼬마애들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대만의 곁에 그 때 그 할머니가 다시 다가와서는 혀를 끌끌 차심.

 

"그러게 내 허튼 곳에 마음 쏟지 마라고 하지 않았니. 네 남편은 질투심이 아주 강한 영이다. 네가 다른 사람을 가슴에 들였다가는 너도, 그 상대도 다 부숴버릴 만큼 센 영력을 지니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는 잊지 말고 자각하고 살거라 아가. 너는 혼인한 몸이다. 살면서 네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거든, 이미 배우자가 있어 안된다고 명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다짜고짜 등장해서 영문 모를 소리만 하고 가는 낯선 할머니의 뒷모습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정대만은, 그 날 저를 데리러 온 부모님께 이런 일이 있었노라 털어놓았고... 한참을 착잡해하던 부모님으로부터 6년 전, 대만이는 기억 못할 열병과 내막에 대해 소상히 듣게 되었어. 그래. 그러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내가 지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웬 귀신이랑 결혼한 상태라 이거지? 그리고 내가 채치ㅅ... 그 녀석을 좋아한다고 판단해서 더는 농구부에 발 못디디도록 무릎까지 박살낸 거라고.

 

 

진짜 좆도 납득할 수 없는 개소리라고, 세상에 그딴 게 어딨냐고. 그럼 나는 평생 이 악령한테 사로잡혀서 좋아하는 것도 마음껏 좋아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만 하냐고 악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인 정대만.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냥 다 됐다고. 이것저것 죄다 진절머리나고 짜증난다는 체념이 피어오르는거임. 원래 사람이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잖아ㅠ... 화내고 분노하는 것도 그걸 받쳐줄 최소한의 체력이 있어야 하는 거지, 이렇게 아픈 상태로는 그냥 다 놓아버리고만 싶어지는거야. 반려혼이 의도했던 것도 정확히 그 부분이었고. 정대만의 몸을 아프게 만들어서 마음까지 약해지게끔.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 다시는, 다시는 어느 누구도 가슴에 품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불안하고 부평초같은 상태가 되게끔 유도한거지.

 

 

그러나 반려혼이 간과했던 점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산 사람의 의지가 죽은 자의 것보다 강하다는 것이었고 개중에서도 정대만이라는 인간의 의지는 더욱 꺾기 어려웠다는 거. 그리고 예상치 못한 복병인 송태섭이 북산에 진학했다는 것 또한. 아무리 억누르려 애써도 정대만은 농구를 너무나 사랑하는 소년이었고, 송태섭은 그런 그의 내면을 가시적으로 들쑤시고 자극했음. 누르고 눌러 없애버리려던 농구를 향한 갈망을, 기어이 폭발시키듯 터트려버린 정대만의 폭심지. 태섭이에게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대만은 농구부에 복귀한 이후로 계속 송태섭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어. 그렇게 잊어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결국 내 눈앞에 농구를 갖다 들이댄 건 너였지. 내가 다시 북산이라는 이름으로 이 코트 위에 설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그 고마움의 마음이란 게 당연히 성애적 감정과는 다른 거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안돼. 나도 다치고 상대방도 상처입을 테니까' 하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ㅎㅎ휴ㅠㅠㅠ 태섭이에게 고맙다고. 네가 있어서 좋다고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괜히 틱틱 얄밉게 구는 정대만. 그러나 눈치 빠른 송태섭 눈에는 다 보임ㅋㅋ큐ㅠㅠㅠ 이 선배, 지금 자기 표정이 어떤 상태인지 알기나 할까? 저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싫다 싫다 해봤자 누가 그걸 싫다고 받아들여;

 

 

 

윈터컵을 앞둔 시점. 치수랑 준호는 은퇴하고 백호는 재활, 태웅이는 국대 활동으로 자리를 비워 자연스레 태섭과 대만 둘이서만 주로 지내는 시간이 잦아졌던 어느 날의 오후. 체육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석양 빛을 받아 평소보다 더 부드러워보이는 정대만의 갈색 머릿결을 바라보던 송태섭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제 마음을 꺼내보였어.

 

"선배."

"응?"

"좋아해요."

 

바보가 아니고서야 저 '좋아해-'가 어떤 의미의 좋아해인지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올곧고 깨끗하게 전해 오는 후배의 두 눈을 바라보던 정대만은 살짝 시선을 내려 태섭이 떨리는 제 손을 주머니 속으로 숨기는 걸 인지했어. 항상 대담하고 여유롭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도 배짱도 두둑한 것 처럼 보이는 송태섭이 생각보다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사실을, 대만은 둘이서 농구부를 꾸려나가게 된 요즈음에야 알게되었어. 보여지는 것 이상의 프레셔를 짊어진 아이라는 걸. 실은 아직 두려운 게 많은 어린 애라는 걸.  

 

이런 애한테 골치 아픈 사정 같은 거 더 얹어줄 필요는 없겠지. 그러니까, 그냥 하자. 바보.

 

 

"ㅋㅋ 뭘 새삼스럽게 그러냐? 나도 내가 좋다 임마."

형이 좀 멋있긴 해. 그치?

 

 

부러 과장된 손짓으로 태섭의 곱슬머리를 복복 문지른 대만은 얼른 자리를 뜨고 싶은지 더 해지기 전에 빨리 강당 문 닫고 집에나 가자며 뒤돌아 밖으로 걸어갔어. 그런 대만의 뒷모습을 놓칠세라 따라붙은 태섭이 대만의 손목을 붙들고 휙 제 쪽으로 끌어당겼어. 

 

"이런 식으로 넘기려 하지 말고요. 나는 적어도 제대로 표현했잖아."

그러니까 선배도, 거절하려면 제대로. 도망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울컥하는지 붉어진 얼굴을 한 주제에 시선만은 여전히 솔직하고 당당한 태섭과 마주한 대만은 짧은 시간 내에 제법 깊은 고민을 했어.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금 이 순간, 이 녀석이 보내오는 것 만큼의 열기와 욕망을 받아내는 일이 또 생길까.

그래. 그러니까 대만이 평생 어느 누구에게도 오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제 리스크를 가족도 뭣도 아닌 태섭에게 꺼내게 된 이유는, 이토록 필사적으로 마음을 받아달라는 어린 애의 순수 앞에는 차마 조금의 거짓도 섞고 싶지 않아서가 되겠지.

 

 

"나, 이미 배우자가 있어. 그래서 네 마음은 받아줄 수가 없어. 미안하다." 

 

 

? 지금 저 선배가 뭐라고 한 거지.

 

송태섭이 예상한 정대만의 거절 멘트는 수 없이 많았어. 지금 이 순간이 닥치기 전에 수백, 수천 번을 시뮬레이션 해 본 태섭이야. 그러나 태섭이 미리 거쳐 보았던 그 어떤 케이스에서도 방금 같은 거절은 없었어. 뭐? 이미 결혼을 한 상태라고? 정대만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 유부남이야? 아니 대체 언제, 하...고등학교도 졸업 전이면서 뭐가 그리 급해서..!"

 

혼란과 괴로움으로 잔뜩 일그러진 태섭의 얼굴을 본 대만이 약간 초조해하며 설명을 덧붙였어. 결혼을 하긴 했는데, 산 사람과 한 건 아니고 영혼 결혼식을 한 거라고. 자기는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에 치른 혼례이고 배우자가 된 영을 느낄 수는 없지만 분명히 곁에 존재한다고. 지금 이 모습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꺼라고.

 

 

"하.. 선배.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혹시 부모님이 사이비.. 뭐 그런 거 믿으시는 거 아니예요? 지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치. 말도 안되지. 말하는 내가 듣기에도 개소리야. 그런데, 그 녀석이 나 농구하는 거 보기 싫다고 무릎까지 부술 줄 누가 알았겠냐."

"뭐라고요? 선배 다친 게 그 귀신 새끼 때문.... 아니다. 좋아. 그렇다고 쳐요. 그럼 그 귀신은 대체 왜 선배가 농구하는 게 싫었던 건데요?"

"... 내가 농구부의 누군가를 좋아했거든. 그 녀석 입장에선 바람 피우는 것 같았나봐. 그러니 다시는 부활동 하러 갈 꿈도 꾸지 마라, 뭐 그런 거 였겠지. 하하.."



아니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착잡한 마음에 애꿎은 신발 끝만 노려보던 태섭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어.
"누군데. 선배가 좋아했다는 그 사람. 누구예요?"

 

 

 

지금껏 태섭이 묻는 질문마다 납죽납죽 잘 대답하던 대만은, 대체 당신이 누굴 좋아했길래 그렇게 큰 대가를 치뤄야만 했냐는 물음 앞에서 만큼은 한참 뜸을 들였어. 그러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고... 그 마음의 당사자는 한평생 알 리 없을 테니. 이 세상에 정대만의 첫사랑을 아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대만은 입을 열었어. 작은 목소리였지만 태섭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어. 정대만의 첫사랑이 송태섭 자신도 잘 아는 사람이어서. 동경하고, 의지했던 이름이라서.

 

 

"채치수."

 

 

그리고 그런 둘의 대화는 빈 교실에서 홀로 자습하다 뒤늦게 하교하러 운동장으로 나온 채치수의 귀에도 선명하게 와 박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