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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3 08:57
보고싶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이 마을의 풍년과 번영을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침 받음. 아주 어릴 때는 친구들이랑 같이 공놀이를 하고 여기저기 쏘다니고 놀았지만 사춘기가 지나고부터는 그것마저 금지되어서 정숙하게 앉아 경전을 읽고 삿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씀. 그렇게 완성된 침착하고 깊은 그릇에 마침내 신을 받는 날이 오는데...

신이 너무 조용한 거야. 그동안 정우성이 막연하게 상상한 제 주인이 될 신은 강하고 화려하고 멋진 장군신이었음. 그런데 의식이 다 끝나도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엷은 나비 날개 같은 것이 제 어깨를 살포시 감싸는 것이 고작이라 헛웃음이 나오는 열일곱 정우성 어떤데. 할머니를 붙잡고 이게 제가 모셔야 하는 신입니까? 이게 제가 모시려고 유년기의 즐거움도 꿈도 기회도 포기하고 산골에 틀어박혀서 몸과 정신을 갈고닦게 한 신입니까? 하고 불경한 말을 나직하게 해버리는 거지.

정우성이 화가 나서 강력하게 거부하는 게 느껴지니까 심지어 신은 정우성에게만 들리는 음성으로 그를 달래기 시작했음. 정우성은 그게 오히려 저의 비위를 맞추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를 악물었음. 내 신이 이렇게 나약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미 받은 신을 끊어낼 수는 없었고, 혀를 깨물고 죽기에는 정우성이 타고난 삶의 의지며 생명줄이 질겼던 터라 그렇게 묶여 살아가게 됨. 십 년 가까이가 더 흘러서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돌아가심. 신을 찾아오는 이 지역 사람들이 단시해주는 맑은 물과 정갈한 음식으로 배를 채움. 살아온 가락이 있으니 이렇게 안빈낙도하는 것도 성격상 어렵지는 않았지만 정우성은 가끔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더 먼 곳에 나아가서 바다도 보고 하늘도 보고 큰 뜻을 이루고 싶은데... 내 힘으로 위로 올라가 보고 싶은데.

모시던 사람들이 물러가고 단둘만 남은 고요한 밤에 잠들지 못하는 우성에게 신이 말을 걸어온 것이 오랜만이었음.

우성, 보내줄게.

가.

가서 세상을 보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여기로 돌아와.

그래서 네가 본 것들을 나에게도 말해줘.

그동안 딱히 정우성에게 무엇을 크게 바라고 부탁한 적도 없으면서 혼자 말없이 생각하고 체념해버린 듯한 목소리였음. 그때 무슨 바람인지 우성의 마음에 온풍이 불었음. 갑자기 신이 가엾어진거임. 이름만 신이고 인간의 몸을 빌어 미약하나마 힘을 쓰는 이 희미한 기운은 정우성이 떠나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우성이 충동적으로 제안했는지도.

같이 가요.

같이 가서 세상을 봐요.

내가 넓은 세상에 나가서 정점을 찍는 것을 여기 처박혀서 기다릴 생각 말고 신님도 저를 따라오세요. 당신이 나의 신이라면 나를 축복해.

정우성의 고동에 신의 맥박에 합쳐져서 두 배로 도근도근대더니 신이 수락하듯이 정우성을 풀어내고 이끈 것이 한순간이었음.




우성명헌 릷
미국에 형도 데려가면 안 될까 우성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