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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2 18:58
우성은 여학생들의 고백을 죄다 거절해 왔음. 농구 천재라 그렇다던데, 하는 소근거림이 따라붙었지만 우성 본인은 다른 이유임을 알았음.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우성이도 자기가 농구랑 결혼할 운명인 천재라 그런 줄 알았는데 여자애들의 조심스러운 연락보다 자기만 보면 괜히 버럭 소리를 지르던 동급생의 널찍한 등판이 외려 기억에 남던 걸 어쩌란 말임. 정우성의 정신은 단단했음. 충격은 적었고 딸감을 고를 때 망설이는 시간이 줄었을 뿐임.

그런 우성을 요즘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이 한 학년 위 선배의 시선이었음. 그는 정우성과 놀랍도록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음. 농구를 잘한다고 아첨하며 불편하게 들러붙지도 않았고 쓸데없이 견제로 힘을 빼지도 않았고 바라 마지않던 적당한 무관심과 적절한 도움으로 함께 농구하기 좋은 동료 선배의 자리를 고수했음. 처음에는 정우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곤란해하던 2, 3학년 선배들이 차차 그 선배를 중심으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잡아갈 정도였음.

조직장악력이라는 건 신기한 거임. 여태 정우성이 중학 시절에 경험한 그 누구에게도 딱히 없는 거였음. 있다 하더라도 매우 나쁜 방향으로 발휘했지. 이 선배는 감독을 포함해서 어른들의 신뢰를 충분히 얻을 만해 보였음. 우성조차 방어적인 태도를 해제하고 이 선배가 다음 주장이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음. 그런데 그렇게 공적인 사람이 사적인 순간에는 정우성만을 끈질기게 관찰하는 게 어쩐지 으쓱하고 기분이 좋을 수밖에...

그래, 이명헌은 정우성을 묘한 시선으로 쳐다봤음. 그런지 꽤 오래됐음. 조직을 공적으로 다루는 것과 별개로 정우성에게 사적으로 농도 짙은 관심이 있는 것 같은 눈빛을 하는 거임. 정우성에게 편지를 주러 온 팬이 있으면 역시나 그의 시선이 뒤를 쫓았고, 정우성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심이 있다는 걸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음. 근데 그러다가도 우성이가 똑바로 쳐다보고 왜 그러세요? 하고 물어보면 금방 무심하고 무감한 눈빛이 되어서 내가 뭘? 하는 거임. 정우성보다 포커페이스에 능한 사람이라 그때부터는 정우성도 더 할 말이 없었음.

어느 날 우성은 그 선배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신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선물을 주러 온 락커룸까지 들이닥친 열성팬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줬음. 멀리까지 와줘서 고마워, 악수나 할까? 그래 놓고 악수를 하려고 내민 팬의 손을 정면에서 잡고 깍지를 꼬옥 껴줬음. 팬은 고맙다고 얼굴을 발긋 붉히면서 정신없이 우성을 힐끗거렸지만 막상 우성이 감탄하는 건 말없이 조금 떨어져서 저를 보고 있는 선배 쪽이었음. 그 선배가 요령 좋게 락커로 스스로의 표정을 가리면서 우성만 관찰할 수 있는 각도에 서 있었단 말이야. 우성은 신기한 마음과 우쭐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음.

시선에는 질투? 유난? 그런 음습함이 없었어. 분명 저한테 호의적인 선배니까 막 타박하려는 건조한 시선도 아니야. 그렇다면 내게 그런 의미로 호감이 있는 거 아닌가? 마침 나도 남자가 싫지 않아. 정우성은 그 선배가 언제 제게 본격적으로 호감을 표할지 은근히 기다리기 시작했음.

그런데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남. 전국대회를 한 번 치르면서 서로 얼싸안고 환호하고... 아, 이제 우리 많이 친해졌네. 형이라고 부를래요. 그런데 그리고나서 또 한 달, 두 달. 이대로라면 아무런 이벤트도 없이 아키타의 겨울 맛을 보겠어. 정우성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연애를 사절한 것은 딱히 그 형을 의식해서도 아니었고 애초에 농구를 하기 위해 먼 곳까지 온 정우성한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건만 정말로 이대로 사람 단 한 명을 신경 쓰면서 1년을 적적하게 보내게 될 줄은 몰랐음.

락커룸에서 갑자기 돌기 시작한 음담패설에 정우성이 슬쩍 낀 것은 그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만든 형의 탓도 좀 있었음.

으악 난 그 잡지 별로. / 나도.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 벗잖아 우웩... / 꼴알못들아. / 미친, 너 남자한테도 동하냐? / 이쪽이 체위가 상상되니까 좋은 거야. 니네는 동정이지? 해봤자 가슴 주무르는 상상밖에 더 하겠냐. / 씹... 그래도 남자가 팬티만 입고 이렇게 누운걸로 뭐할건데... 몰입이 되냐? / 내 몸이 더 좋아서 몰입됨. / 아 씨발 미친놈.

다른 형들이 한 번에 우르르 빠져나가고 정우성과 그 형만 남은 락커룸에 잠시 정적이 흘렀음. 우연이... 따라주네. 바닥에 툭 내버려진 도색잡지를 정우성이 먼저 큰 동작으로 주워들었음. 음담패설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애써 무시하는 듯하던 형이 우성에게 재빨리 손을 내밀었음.

“이리 줘.”

“왜요?”

“수거해서 버릴 거야. 농구부에 그런 건 반입 금지다 뿅.”

정우성은 잠시 텀을 두고 말을 골랐음. “그냥 저한테 버리는 셈 치세요, 형.”

이명헌이 고개를 기울이고 가늘게 웃었음. “듣자하니 그거 별로 꼴리지도 않는다는데... 우성, 궁하냐?”

“궁하면 뭐, 더 좋은 거 주실 거예요?”

형이 뭘 보고 딸치는지 궁금하긴 하네요. 우성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음.

“제 취향은요...”

“나한테 말할 필요 없고, 정성구한테 가봐라, 뿅. 걔가 우리 학년 딸감통이야.”

“제 취향은 이 누나보...”

“나한테 말할 필요 없다니까.”

하, 정우성이 헛웃음을 냈음. 이 형이 말을 끊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구냐 뿅.”

나는 네 성적 취향을 알고 싶지 않아 뿅.

정우성보다도 더 눈에 힘이 들어가서 목에 열을 빡 주고 말하는 형의 얼굴을 우성은 피하지 않고 빤히 보았음. 파지직 전기 튀기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음. 오늘따라 말이 긴 게 누구인지. 이 형은 알고는 있는 건가? 지금 자기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지? 두 사람은 누구도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렇게 한참을 대치했음. 

정우성이 기회를 열어줬으니 지난 반년간 그렇게 눈끝으로 자기를 쫓은 이 형은 응하는 게 도리일 텐데. 농구할 때는 항상 적정한 판단을 내리면서 왜 이럴 때는 이렇게 과감하지 못해? 내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다가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우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툭 내뱉었음.

“형, 겁이 너무 많으시네요.”

순간 명헌이 웃음기가 싹 빠진 얼굴로 우성을 노려봤음.










뭐 이런 게 보고싶다 릷
반년이면 많이 기다렸지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