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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9 22:16
했음 좋겠다 근데 이제 우성이는 약간 사기결혼당한?



명헌이네 집안은 왕족 방계에서 뻗어져나온 집안으로 뼈대굵은 공작가임. 먹고사는데 걱정없고 강한 권력으로 앞날이 창창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런 공작가 부부에게도 걱정이 있다면 여태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음. 간간히 생긴 아이도 유산되기 일쑤였고 겨우 낳은 아이도 두돌을 지나기 전에 숨을 거둬서 부모 마음에 묻어야만했지. 명헌이는 그러고도 몇년 뒤에야 얻은 아이였음. 당연히 집안 어른들은 명헌이를 지키려 혈안이 되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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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이 된 우성이는 아부지 손을 잡고 공작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음. 처음으로 참석한 연회인지라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어른들 중심인 연회는 어린 우성이에게는 지루할 뿐이었음. 우성이는 자리에서 살살 빠져나와 연회장 밖을 돌아다녔지. 집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연회에 집중되어있었으므로 우성이를 저지하는 사람은 없었음.

저택 안의 대리석으로 마감된 높은 층고와 벽은 사뭇 낯선 분위기여서, 정신이 팔린 우성이는 저도 모르게 점점 저택의 깊은 곳으로 향하게 되었음. 그러다 어느 불 꺼진 캄캄한 복도까지 이르러서야 아차 싶었겠지. 뒤를 돌아봤는데 복도와 계단들은 수갈래로 뻗어져 있어 우성은 선뜻 발걸음을 옮길수도 없었음. 사람을 부르고 싶어도 이곳은 왜인지 지나는 사람도 없었고 연회장의 소란스러움조차 전해지지 않을만큼 고요하기만 한거임. 엄마아...... 속으로 울먹거리며 발만 동동 구르는데 저기 복도 안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옴. 우성이는 무서우면서도 호기심이 생겼고... 조심스레 다가가보니 불빛은 열린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것이었음. 무슨 방이지?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본 순간이었음. 어떤 여자아이의 허연 얼굴이 불쑥 들이닥치는 것이었지.

우성이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음. 귀신, 귀신인가봐. 도망가고싶은데 다리가 딱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지. 엄마, 엄마아..... 그러는 와중에 문이 조금 더 넓게 열렸고 그 틈으로 눈이 큰 그 여자애가 얼굴을 내밀었음. 누구야?

너 여기는 어떻게 왔어?

여자아이의 물음에 우성이는 겨우 말했지. 나, 나는......여, 여기 연회에.....! 그러자 여자애는 뜻밖의 답인듯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그랬음. 여기는 오면 안 돼. 돌아가. 근데 우성이는 가는 길을 모르잖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찌할줄 모르고 우물쭈물 하는데 여자애가 도톰한 입술로 한숨을 폭 쉬는거지.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살핀 그 애가 우성이를 다시 쳐다보았음.

너 나 만난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우성이는 멍하니 여자애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여자아이의 창백한 손이 불쑥 내밀어져서 우성의 손을 꽉 잡는 것이었음. 따라와. 그리고 앞장서서 우성을 이끌었지. 우성이는 짙은 빛 공단 치마를 입고 검은 머리칼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음. 허옇고 까만게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것도 같았고.... 그렇게 여자아이의 손길에 얼마나 이끌려갔을까, 긴 복도가 꺾이기 직전 멈춘 여자아이는 그제서야 우성의 손을 놓아주었음. 여기서 꺾어서 쭉 들어가면 연회장이 나와. 우성은 고개만 끄덕였음. 그런데 그때 저 멀리 복도에서 아가씨-! 하며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음. 여자애는 뒤를 돌아보더니 조금 급하게 말하는 것이었음. 나 만났다는 말 하면 안 돼. 알았지? 이번에도 우성은 고개만 끄덕였음. 그러자 못마땅하다는듯 여자애가 말했지. 대답. 우성이 그제야 목소리를 내어 답했음. 응.

그렇게 여자아이는 왔던 길을 달려서 돌아갔고 그 뒷모습이 사라질때까지 쳐다보던 우성은 그애가 가르쳐준대로 걸어가 연회장에 무사히 돌아왔음.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 아이를 만났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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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이는 자라 청년이 되고, 집안에서도 우성의 혼처를 여기저기 알아보았음. 그리고 마침내 짝이 정해졌지. 이 씨 공작가의 하나뿐인 자식 이명헌이었음. 이명헌은 성장기에 몸이 약해 집안 어른들이 꽁꽁 싸매고 보호하느라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인적이 없었음. 그러다 이제 결혼 적령기가 되니 조금씩 바깥에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었지. 그 대단한 공작가의 하나뿐인 자식이다보니 소문이 무성했음. 얼굴이 아주 박색이라더라, 폐를 앓아 숨마다 피가 끓는다더라, 등이 굽었다더라, 하는 무례하기 짝이없는 소문은 안개마냥 실체없이 뭉개뭉개할 뿐이었음. 그러나 우성이는 그게 다 거짓이라는걸 잘 알았음. 제 짝이 공작가의 자제라고 했을때 우성이는 예전 어린 날 보았던 그 여자아이를 떠올렸겠지. 아가씨, 라고 불렸던, 눈이 크고 깊던, 검은 머리가 길게 허리를 덮던, 공단치마를 흩날리며 달려가던 여자아이. 우성이는 제 의견은 하나도 담기지 않는 약혼이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음. 오히려 은근히 기대되었지. 그 여자애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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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혼자를 처음으로 마주하기위해 공작가를 방문한 날, 우성이는 문 앞에서 한번 괜히 헛기침을 하고 주먹을 쥐어 가슴께를 한번 쿵 두드렸음.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그 여자아이를 다시 만나는 날이었음. 우성이는 오늘을 위해 가장 좋은 옷을 입었고, 가장 멀끔한 모습을 보이려 어제는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잠자리에 들었던 차였음. 준비는 모두 끝났음. 이제 그 여자아이와의 재회만이 남아있었지.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환한 햇살이 눈 앞에 쏟아졌으며, 하얀 커튼이 바람결에 하늘하늘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 책을 들고 앉아있는, 남자. 남자?

그건 당연하게도 이명헌이었음.

명헌이네 집에서는 간신히 얻은 자식인 명헌이를 어떻게든 지키려 여러가지 방법을 썼음. 미신도 마다하지 않았지. 그게 아들의 여장일지라도. 그리고 혹시나 바깥 사람의 공기가 아이에게 해가 될까 저택의 가장 깊은곳에 명헌이를 숨겨두고 키운거임. 그렇게 명헌이는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제 방에만 숨어서 자라왔고 그걸 우성이가 우연히 본 것이었음.

집안 사람들의 바람이 온 우주를 감동시킨건지 명헌이는 우려와는 달리 튼튼하게... 굉장히 튼튼하게 자라 열 서넛쯤 되었을땐 여장이 어울리지 않을만큼 껑충 컸겠지. 그제서야 치렁치렁한 치마를 벗고 답답하게 길었던 머리도 짧게 깎아버릴 수 있었던 명헌이었음. 우성의 기억 속에 있던 검고 긴 머리칼은 온데간데 없었지.

잔뜩 기대에 찼던 우성은 정혼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은 채 명헌을 쳐다보고만 있었음. 명헌은 우성이 그러든 말든 들고 있던 책을 덮고 천천히 일어나 우성에게 다가왔지. 천천히 우성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명헌은 뭔가 머릿속에 스친듯 묘한 표정을 했음. 조금 웃는것도 같았는데..... 우성이 그 표정을 해석하는 사이, 명헌이 허리를 숙이고, 우성의 손을 천천히 잡아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음. 도톰한 입술이 살갗에 닿자 그대로 얼어버린 우성을, 명헌이 올려다보며 웃음을 삼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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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의 첫사랑을 잃은 듯한 상실감에 차 있던 우성이.. 명헌이랑 같이 시간 보낼수록 예전 어릴 때 모습 하나씩 발견하면 좋겠다. 검은 눈동자나 깊은 쌍꺼풀이나 도톰한 입술, 단정한 표정같은거... 명헌이가 앞에서 뭐라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그거 하나도 안 들리고 그것만 보임. 그러다 명헌이가 그 시선 느끼고 가만히 눈 맞춰오면 얼굴 붉히면서 황급히 눈 피하는 정우성 보고싶다.... 정혼자 상대로 다시 첫사랑 시작하는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