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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8 22:46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학교 선생만 모르지 양호열은 원래 함부로 아무랑 싸우고 다니는 그런 애가 아니었음
웬만하면 시비도 적당히 흘려 넘기는 편이고 피할 수 없는 싸움에나 나서는 타입이었지
원래 이때까지는 싸우면 서로 잘 한 거 없으니 그냥저냥 넘어갔단 말임
하. 근데 어떤 얌생이한테 잘못 걸려도 더럽게 잘못 걸렸는지 시비는 지가 다 걸어놓고 즈그 엄마까지 불러 경찰서에 가니 마니 난리가 남
설상가상으로 오히려 호열이가 더 많이 맞아줬는데 딱 한 대 때린 게 하필이면 얼굴에 커다랗게 자국이 남았겠지
양호열은 맞는 것도 요령 있게 맞았거든

그래서 결국엔 경찰서로 가게 됐음
거기서 뭐 싸운 애 엄마들이 너네 부모는 어디 갔냐, 당장 보호자 불러라 하며 지랄 지랄을 떨어댔겠지
호열이는 이런 상황이 정말 환멸이 났음
올 부모도 없었을 뿐더러, 부를 사람은 선생 뿐인데 그 선생이 잘도 호열이를 보호해주겠어.
차라리 소년원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선생만큼은 안 불러야지 싶었겠지


"빨리 너네 부모 불러!!!"

"부모 없는데요."

"부모가 없어?! 이래서 부모 없는 것들은..!!"


이런 모욕은 너무 자주 당해봐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음
그냥 지겹고. 뭐 빵을 가든 어떻게 되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싶었지

그 순간.


"호열아!!"


불릴 리가 없는 이름이 불렸음
호열이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겠지
이 곳엔 아무도 자기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양호열!!"


근데 다시 들어도 자기 이름이 맞음
그 사람은 얼마나 달려왔는지 호열이 앞에서 거친 숨을 정리함
익숙한 냄새, 익숙한 흉터, 그리고 익숙한 표정..


"안 늦었지?"


히어로처럼 멋지게 씨익 웃는 사람은 바로 정대만이었음


"당신이 왜.."


호열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경찰이 다가와서 무슨 관계냐고 물음


"호열이 형입니다. 사촌형이요."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엄마들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승냥이떼처럼 정대만을 물어뜯음
뭐 동생 관리를 어떻게 한 거냐, 친 형도 아니면서 니가 뭐냐 어쩌고 저쩌고..

호열이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음
자기가 당하는 건 상관 없지만 처음으로 경찰서에 자기 편을 들어주러 온 사람이 모욕을 당하는 건 정말 참을 수가 없었음
하지만 대만이가 호열이의 주먹을 슬며시 잡겠지
그러고는 바보트리오 대장이었던 모습과는 다르게 또박또박 반박을 하기 시작함
1대 다수로 싸운데다가, 알고 보니까 상대놈들이 호열이보다 한 살이 많은데 잘 하는 짓이라고,
일 더 크게 키우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자기도 가만 있지 않겠대.

어느새 호열이의 주먹은 힘이 풀려 대만이가 꼭 잡고 있었겠지
그 손은 너무 따뜻해서 항상 마음 한 구석이 외로웠던 호열이의 마음까지 위로가 되었음
그 따뜻함이 흘러넘쳐 눈가까지 퍼져가는 걸 호열이는 꾹 참았겠지
그건 너무 멋없으니까.

뭐 피차일반으로 상대도 잘 한 건 없었기 때문에 여차저차 경찰서를 나오게 됨
그 때까지도 정대만은 양호열의 손을 꼭 쥐고 있었음

호열이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음
왜 왔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학교는 어떡하고, 그리고.. 나에게 실망하지는 않았나요. 등등..
하지만 입을 열면 목이 메어 꼴사나운 목소리가 튀어나올까봐 입술만 깨물었음


"대남이가 전화했었어. 니가 경찰서에 있는데 보호자가 필요하다더라고. 마침 훈련 끝나고 휴가 기간이라서 집에 있었거든."


그런데 왜 날 보러 오지 않았어?


"안 그래도 너 보러 가려고 했는데.. 나 사실 좀 전에 도착했다!! 진짜야!! 도착해서 짐 풀고 씻고 나오니까 바로 전화 받은 거야."

"...누가 뭐래요."

"니 눈이 말했거든!"

"눈치도 없으면서..."

"눈치 있어!! 뭐.. 아무튼.. 전화 받자마자 뭔가 너한테 불리하게 작용했겠구나 싶었지."

"..아니면 어쩌려구요."

"그럴 리가 있나!"


정대만이 또 씨익 웃었음

정대만.. 짜증나..

새벽인지라 거리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지
말 없이 걷다 보니 예전에 둘이서 자주 갔었던 공원이 나왔음
대만이는 호열이를 앉히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두 캔을 뽑아 건냄
자연스럽게 꼭 잡고 있던 손은 멀어졌겠지
호열이는 쥐고 있던 음료수 때문에 빠르게 사라져버린 그 체온이 조금 아쉬웠음


"연락은.. 어.. 대학 가서도 하려고 했어.. 했는데.."

안 했잖아.

"너도..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서.. 하고 싶은데 참았어."

거짓말.

"넌 생각이 많으니까. 그래도 백호한테는 한 번씩 물어봤어. 잘 지내냐고. 티 안 나게 묻느라 죽는 줄 알았어. 아니, 근데 걔는 무슨 니 얘기 물으면 단답밖에 안 하냐. 답답해서 다시 학교로 돌아갈까 했지."

"..뭐라고 하던데요."

"호열이는 잘 지내? 이러면 호열이? 잘 지내지. 이러고 끝이었다니까."

"백호답네요."


그러고는 또 침묵이었음
호열이는 좀 불안해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잖음
지금쯤이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볼 법한데 정대만이 묻질 않잖아
예전에는 정대만은 늘 속이 들여다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반년 떨어져 있었다고 이제는 보이지가 않음

당신은 내가 없어도 잘 살았겠지. 원래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 좋아하니까.
나는 당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있었는데...

이제는 날 좋아하지 않는 거야?

호열이는 손도 대지 않은 음료수 캔을 괜시리 만지작 거리기 시작함
아까부터 손이 너무 허전했거든
예전에는 정대만이 더 재잘거렸었는데.. 이젠 오히려 양호열이 더 침묵을 못 견디겠지
그래서


"나한테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하고 먼저 얘기를 꺼내는 수 밖에 없었음


"어? 뭘?"


하지만 돌아오는 건 바보같은 되물음이었지

정대만! 이런 점이 짜증난다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왜 안 물어보냐고요. 내가 진짜 잘못했을 수도 있잖아."

"어..? 이거 아까도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넌 좋은 녀석이니까."


좋은 녀석이라..
예전에도 정대만이 수도 없이 했던 말이었음.
사실 그럴 때마다 양호열은 겁이 났음. 자기가 정대만이 말한 것만큼 좋은 녀석이 아닐까봐.
그걸 정대만이 알게 될까봐.


"...대만군이 뭘 안다고 날 판단해요."

"왜 몰라! 큼큼.. 옛날에도 말했지만.. 나 너 많이 좋아했다! 아, 물론 지금도 좋아하고! 넌 늘 당당하고 멋진 녀석이지만 한 번씩 너 자신한테 냉정하게 굴 때가 있는 것도 알아."


아니.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내가 얼마나.. 얼마나...


"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이 너한테 야박하게 굴고, 가끔은 너조차도 너한테 야박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널 좋아할 자신이 있다 이 말이야. 아, 이거 좀 쑥쓰러운데."


호열이는 더 이상 대만이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음


"그런 의미에서.. 이제 나 받아주면 안 되냐? 솔직히 너도 나 좋아하잖아. 나 사실 아직도 그 때 왜 차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결국 호열이의 눈가를 젖어들게 만들었겠지
뭐, 뒤에 말은 너무 정대만답긴 했지만..


"...대만군은 무슨 고백을 경찰서 갔다온 날에 해요.."

"왜?! 딱 고백 타이밍이었는데!! 나 솔직히 좀 멋있지 않았어?!"


멋있었지. 너무 멋있어서 탈이었지.
양호열은 정대만이 손을 잡아준 그 순간 세상에서 무서울 게 없었음
이 사람만 나를 믿어준다면 그 누가 아무리 자기를 힘들게 해도 다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음

어떻게 이렇게 내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순간에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줄 수 있는지..


"...대만군은 나를 너무 초라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안 받아줬어. 옆에 있으면 내가 더 초라해질까봐. 지금도 봐.. 이렇게 나를 못나게 만들잖아.."


18세의 양호열은 그 다정함에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음
그리고 20세의 정대만은 겉으로는 강해보여도 아직 어리고 외로움도 많이 타는 호열이를 안아줬겠지..


"야.. 니가 왜 못났어. 내 눈에는 니가 제일 잘 생기고 귀엽고 예쁘고 다 하니까 그런 생각 하지마!"

"대만군은 바보야..?"

"그래, 그래.. 오늘은 바보한다, 내가."

"...맨날 바보면서.. 킁."

"어? 콧물 묻는다!"

"시끄러워."


호열이는 대만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이제까지의 외로움을 눈물에 흘려보냈겠지
이제는 양호열의 편이 생겼으니까.




(정대만은 자기 졸업날에 양호열에게 고백해서 차인 전적이 있음)


호댐 호열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