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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7 17:42
정우성 곁에는 다정한 배우자가 이미 있고 유아차를 끌며 산책하던 중이었음. 길에서 마주친 이명헌이 투어를 온 관광객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처럼 현지인답게 생활감이 있는 모습일 줄은 상상도 못했음. 놀란 얼굴을 하더니 반갑게 웃으면서 실업리그 은퇴 직후 미국인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 왔다는 말에 기분이 이상해지고 말았음.

잘됐다, 그럼 우리 이제 자주 보겠네요.

얌전하게 차려입은 이명헌이 안도했다는 듯이 웃는 얼굴이 미국의 배경과 동떠 보여서 우성은 일부러 목소리를 더 밝게 키웠음. 고민을 깊게 하고 내린 결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여기 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대. 그러다가 아는 사람을 봐서 안심이 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형의 얼굴이 예전처럼 막 단단해 보이질 않고, 이곳의 촉촉한 날씨와는 달리 혼자서만 버석하고 건조한 질감이었음.

그 뒤로 둘이 자꾸 마주쳐. 장을 보다가 마주치고, 공구함을 따로 두고 살질 않아서 철물점에 갔다가도 마주치고, 우성이 친한 지인 모임에 나갔더니 여기 우리 대학원 코스에 새로 등록을 고민하고 있는 리(Rhee)라고 해서 또 의외의 반가움이라 웃음을 터트리고 그럼.

"형, Rhee가 형이었어요?"

"흔하지 않은 걸 고르다 보니..."

알고 보니 주거지도 겹쳤음. 이 근처에서 젊은 중산층 부부가 다닐 만한 식료품점도 공원도 뻔했고.

그런데 왜 명헌이 형은 장을 보러 다니면서도 셔츠에 구두 차림을 하는 걸까. 희한하지.

기억 속에서 끄집어올린 서로의 모습은 항상 유니폼이나 운동복 차림이었음. 그건 이명헌이나 정우성이나 마찬가지임. 그런데 휴식기의 정우성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명헌은 아직 딱히 고정된 직장이 있는 상태도 아니면서 셔츠에 구두를 맞춰 신은 경우가 많았음. 배우자가 출장이 잦다더니 상대적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서 자기가 장을 보고 집에서 저녁을 혼자 먹는 경우가 많다고 함. 하지만 그건 그의 드레시한 차림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잖아. 은퇴해서 그런가. 나이가 들면서 사복 취향이 바뀐 걸까.

정우성은 민소매 후드랑 회색 집업을 집어넣고 이명헌처럼 셔츠를 차려입고 산책하기 시작했음. 휴식기라서 손질하지 않던 머리도 다시 꼬박꼬박 바버샵에 가서 다듬었음. 우스운 것은 정우성이 그러는 자신을 아주 뒤늦게야 자각했다는 거임. 우성의 딸과 플레이데이트를 하는 꼬마의 부모님부터 시작해서 학부형들을 중심으로 핫하다고 소문이 한참 난 후에야. 자기야, 난 원래도 핫했는걸? 하고 웃어넘겼지만 그건 정우성이 뭔가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음.

누군가와 나란히 서있을 때 어울려 보이고 싶은 내심 깊은 곳의 은밀한 마음을 부정하는게 가능한가?

정우성은 생각해. 이명헌이 은퇴하기 전이었으면 원온원하자고 제안했을까? 그럼 이명헌이 운동복에 운동화로 갈아신고 나올까? 이명헌이 다시 그 시절 선배, 형처럼 되나? 근데... 안 그래도 충분히 보기 좋긴 해. 말끔하고 부유한 차림새도 잘 어울려. 응, 보기 좋아.

그렇게 남들 보기에는 영문 모르게 잘 차려입은 남자 둘이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몇 번 목격되다가 우연찮게도 각자 저녁거리를 사오는 길에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려고 차양 아래 서 있는 날이 생기고... 그러다가 어깨를 부딪히고... 추억 이야기가 슬근슬근 나오고... 형의 배우자는 출장을 간지 오래고 한 달 후에나 귀국하는 데다가 정우성의 배우자도 요즘 야간 근무가 잦더니 최근에는 파견근무까지 겹쳐서 집이 비어 있긴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되고... 그러는거지

꽃다운 시절 달 같은 생기
얼음과 눈 같던 총기
아름답던 삶 다정했던 그대

불륜을 해라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