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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3 02:07
A가 일하는 예식장은 중정이 있는 반야외결혼식장 이었는데 기둥 사이로 늘어선 꽃나무가 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 하루에 낮 저녁 딱 두팀만 받는 프라이빗함으로 신랑신부들에게 나름 유명했지. 다만 그 값을 해서 식대도 대관비용도 혀 내두를 만큼 비쌌는데 대신 장식용 꽃 하나 케이터링 음식 하나 재활용 하지 않고 신랑신부의 입맛에 맞게 커스텀을 해주는게 강점이었어.

보통 이런 비싸고 취향 모두 맞춰주는 식장을 고르는 신랑신부들은 몹시 까다로워, 예식장의 디렉터인 A는 행사 때 문제 되는게 없도록 미리 정보를 받고 큐시트를 꼼꼼히 공유했는데...... 오늘의 신랑신부는 너무 힘든 상대였어.......

값비싼 비용에도 이 예약하기 힘든 예식장을 1년 전에 예약해놓고는 식 전날까지 사회자 연락처 하나 보내지 않았지. 똥줄 타는 A의 전화에도 사회자 축가 모두 필요없다며 그냥 조명이나 좀 환하게 켜달라는게 전부였어.

미리 선결제만 안했어도, 식대 대관비용에 풀옵션까지 전부 미리 결제만 안했어도, 남의 결혼이고 뭐고 못하겠다며 취소시켰을텐데 돈에 먼 대표는 그냥 오케이 시키고 만거야. 결국 A의 15년 웨딩 커리어에 큰 흠집으로 남을 결혼식 당일이 됐지.

그리고는 당일. 아무도 안왔어.




A는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지. 예식 시작이 다 되도록 쥐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어. 문제는 식 당사자인 신랑신부 역시 코빼기도 안보인다는 거였지. 이쯤되니 머리 꽃밭인 대표도 똥줄이 타 신랑에게 부재중 전화 수십통을 남겼는데... 신호음만 갈 뿐이었지. 결국 예식 1분 전 열받은 A가 오늘 잘릴 각오로 대표에게 소리를 지르려는데,

"안녕하세요"

그 남자가 들어왔어. 신랑.




검정 정장에 넥타이. 누가봐도 신랑인 남자가 신부와 하객들은 어딨냐는 대표의 질문에 아마 아무도 안올거라고 직원분들 모두 쉬셔도 좋다 말하고는 느릿느릿하게 걸어가 하객석 맨 앞줄에 앉은지 벌써 30분째였어.

정말 아무도 안오십니까? 신부분은요? 직계가족분들도요? 저희 이미 결제하신 건...... 아 네 그렇지만... 예예 알겠습니다. 음료라도 뭐... 아네네 그럼 편하게 쉬세요. 멍청한 대표가 평소보다 더 멍청하게 말을 시키다 쫒겨난지도 30분째라는 뜻이었지.

A는 제 직업 정신에 어긋나는 상황에 화가 나 구둣소리 내며 걷다 결국 하객석 맨 뒷줄에 털썩 앉았어. 직원들은 이미 저 구석에서 남자를 흘깃거리며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것같았지만 거기 끼어 같이 욕할 기운도 없어 A는 그냥 앉아 남자나 멍하니 바라보았지.

남자. 어딘가 뭉툭하게 마감된 둥근 어깨의 남자. 야외 느낌을 내기 위해 반통창으로 되어있는 천정에서 흰 햇빛이 쏟아지는데도 혼자 수심에 가라앉은 듯 어두워 보였지. 그는 돌로 만들어진 불상처럼 조금의 미동도 없이 혼자 단상 위를, 원래대로라면 신랑신부가 반지를 교환했을 단상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지.

마치 그 등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멈춘 것 처럼 보였기 때문에, 또 이 망할 결혼식 때문에 며칠 밤잠 못이뤘기 때문에, A는 깜빡 잠에 빠져들고 말았어.




"선생님"

시간이 멈추기는 무슨. 졸다 깜짝 놀라 일어난 A가 다시 시계를 봤을때는 30분이 더 지난 후였지. 그녀가 급히 얼굴을 닦으며 올려다보자 정물화 같은 남자가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었어. 움직이면 안되는 불상이 움직인것 같은 놀람에 A가 저도 모르게 "네,네??" 삑사리를 내며 대답했지.

결혼식, 진행하고 싶은데,

"도움 부탁 드릴 수 있을까요."


A는 10년 전 막내 시절에나 해본 사회자 겸 예식 도우미를 위해 단상 앞에 서 있었어. A가 잠든 사이 모두 가라진 직원들 때문이었지. 아무리 망한 예식이라지만 신랑이 있는데 자리를 비우다니. 그녀의 직업정신에 어긋난 상황에 나중에 아래 직원들을 혼내겠다 생각하든 말든 남자는 꼿꼿한 자세로 버진로드 끝에 서 있었지. 신랑신부가 없어 쓸고 닦은 의미 없다 생각했는데 이렇게라도 쓰일 모양이야.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A는 할까말까 속으로 수백번쯤 고민한 멘트를 꺼내들었어. "이렇게 와주신 모든 하객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예식은 주례 없는 예식으로..." 그녀의 솔톤 목소리는 하객 없이 썰렁한 예식장에 덩그러니 울려퍼졌지. 그에 A가 묘한 부끄러움을 느끼든 말든 멘트는 끝을 다다라, "그럼 오늘의 주인공 신랑, 입장해주세요!"

남자가 성큼성큼 버진로드를 걸어와 단상 위에 올라섰어. 다리가 긴 탓인지 몇걸음 걸리지도 않았어. 그리고 다음 멘트, A가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든말든 묵묵히 선 남자가 기다리는 눈빛으로 A를 쳐다봤지. A는 속으로 중얼거렸지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그리고 소리쳤어.

"그리고 오늘의 진짜 주인공!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 입장하겠습니다. 모두 박수로 맞아주세요!"




A의 약간의 부끄러움이 동반된 이 기묘한 결혼식은 어려움 없이 흘러갔지. -어려울게 없었어. 혼자 원맨쇼 하는 거니까- 오늘의 사회 겸 예식 도우미를 혼자 원맨쇼로 해내고 있는 A만이 어딘가 해탈해서는 다음 멘트를 기계적으로 뱉었어.

"그럼 다음 순서로 예물교환이 있겠습니다"

정물화 보단 정물 그 자체에 가까운 남자가 움직인건 그때였어. 혼인서약 때도 무뚝뚝한 목소리로 가상의 신부(?)와 잘 살겠다 한마디 하고는 흔들림 없이 서있던 남자는 갑자기 숨이 불어넣어진 석상처럼 움직여 주머니에서 작은 반지케이스를 꺼내 A에게 건넸지.

A는 이 하객도 신부도 없는 결혼식에 뭐라도 할게 있어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반갑게 달려와 케이스를 받아들었음. 그리곤 단상 앞에서 절도 있게 서 남자에게 케이스를 내밀었지. "먼저 신랑님, 신부님에게 반지를 끼워주세요"

남자는 크고 뭉툭한 손으로 천천히 반지를 꺼내들고, 빈 맞은편 자리를 바라보면서 제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어.

"그럼 신부님, 신랑님에게 반지를 끼워주세요" 그리곤 남은 한 반지를 꺼내들려다 아, 하고 멈춰섰지.


이제야 이 미친 결혼식이 맹점을 안 것같은 표정이었지. 그래 시발 반지를 끼워줄 신부가 없다고! A가 묘한 쾌감에 속으로 소리를 지르는 동안 멍하니 서있던 남자가 조용히 말했어. "죄송한데, -A는 이 돌같은 남자가 자기에게 말을 걸거라는 생각을 못해 화드득 놀랐어- 반지 좀 끼워주시겠습니까?"

그래서, A는 단상 아래에서, 옆자리를 비워둔 남자에게 신부 대신 반지를 끼워주었음.




오늘따라 몸이 축축 쳐졌지. 방금 전 저녁에 꽃 하나 케이터링 방향 하나 신경 쓰는 몹시 까다로운 부모가 있는 신랑신부의 결혼식을 치뤄야했거든. 어찌나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던지 일터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지.

처지는 몸을 추슬러 위해 운전석에 올라타는데 부스럭, 주머니 안에서 뭔가 잡혔어. A는 그 봉투를 꺼내들었어. 아, 낮에 결혼한 신랑이 A에게 고맙다며 따로 챙겨준 봉투였어. A는 그 속을 들여보지도 않고 대충 조수석에 봉투를 던져놓았어. 부웅. A의 할부금이 깃든 차가 출발했지.

그러고 보니 낮에 이상한 결혼식을 했었지. 신랑만 있는. 몸도 편하고 돈도 다 받았지만 자부심 있는 웨딩 디렉터인 A로서는 차라리 더 힘들더라도 더 보람있는...


- 오늘 낮 12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NBA 선수로 알려진 정우성 선수가 결혼식을...


그래 이런 결혼식을 하고싶었지. 좀 힘들고 까다롭더라도 보람 있는 결혼식을.

적막감에 튼 라디오에선 유명 농구선수의 결혼 소식이 나오고 있었어. 정우성은 A도 얼굴을 알정도로 유명한 스포츠스타였어. 농구는 잘 모르지만 그의 광고가 시내 이곳 저곳에 걸려있는 걸 보면 아마 돈도 많이 벌거야.


- 정우성 선수의 결혼식은 가족들만 동반하여 소규모로 진행...


아마 소규모로 진행되었다고 해도 허투루 진행되진 않았겠지. 아마 값비싼 샹들리가 걸린 작은 식장에서 그냥 놓여진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 고급품인 식기들과 장식품에 둘러쌓여 결혼했을거야. 장식된 꽃 하나하나도 그 예식 만을 위해 들여온 값비싼 수입품종이겠지 아마 반지도......


그 신랑. 그 반지.

정말 이상한, 15년 동안 예식 일만 해온 A에게도 손꼽히게 이상한 결혼식이었어. 불만 켜진 예식장에서 그 신랑은 로맨틱한 노래도 없이, 신부도 하객도 없이 혼자 반지를 꼈지.

새 반지도 값비싼 반지도 아니고 몇년 되어 사용감 있어보이는 반지였어. A는 그 반지를, 신랑의 네번째 손가락에, 원래대로라면 신부가 꼈을 반지의 위로 끼워주었지.


근데 원래 신부가 껴야했던 반지라면. 그 뭉툭한 남자의 손에 끼워질 수 있나?

그건 신부의 반지라기보단 마치,


- "신현철 선수, 가장 친한 선후배로서 정우성 선수의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가족들만 가는 결혼식이라 초대는 커녕 축의금도 못내서 가장 친한 선후배인지는 모르겠네요. ...농담이구요. 우성아 결혼 축하하고, 진심으로 후회 없는 결혼 되길 바란다."


A는 라디오를 한 귀로 흘려 들으며 저도 모르게 조수석에 놓여진 봉투를 들춰봤어. 祝儀 앞면에는 익숙한 한자가 프린트 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가지런하게 이름 석자가 적혀있었지.


이명헌.


그 뭉툭한 남자 같은 이름이었어.







우성명헌

취소 못한 결혼식 내지 못한 축의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