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태섭


태섭이 자꾸 받아먹기 미안해서 그만하고 선배 먹으라고 하는데 자기도 먹고 있다면서 말하는 정대만 앞접시에 가시/껍질 수북함. 태섭이 배불러서 못 먹겠다고 하면 너는 미국에서 농구하는 애가 잘 먹어야지. 하면서 잔소리잔소리...... 결국 태섭이가 귀 막는 시늉까지 하겠지.

아 밥 사주는 거 잔소리하려고 그러는 거죠.
그래 이왕 잔소리하는 거 마음 놓고 하려고 밥 사준다. 됐냐?
에이씨 다음엔 내가 사주고 잔소리할래요.
그러던가.

그 사이에 슥슥 바른 새우/생선/게살 태섭이 앞접시에 갖다주면 태섭이 질색하고 아 진짜 못 먹어요! 하고 밀어내고 그럼 하나만 더 먹어. 하고 한입만더 스킬 쓰는 대만이겠지. 결국 4번 먹고서야 겨우 끝나고 쫌 남은 거 대만이가 호록 먹고 식사자리 끝날 듯.

다음에 들어올 땐 제가 진짜 쏠게요.
너 진짜 나한테 잔소리하고 싶어서 그러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맨날 선배가 사주잖아요.
그럼 맛있게 먹으면 되잖아.
그래도 계속 얻어먹기는 좀...
까불지말고 선배가 사주면 얌전히 받아먹어. 후배는 그래도 돼.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 있다 임마. 내가 괜찮다는데 뭘.

그러니까 너는 사주는 거나 많이 먹어. 내가 후배한테 사주면 사줬지 얻어먹는 놈 아니야. 대만이 자기 차로 태섭이 데려다주면서 그렇게 말하니 태섭이 그냥 네에... 하고 대답하고 맘. 그렇겠네. 대학교에서 다른 후배들도 밥 사주고 그러겠지. 그 생각하니 괜히 울적해졌음. 에잇 정신차려! 냅다 자기 두 뺨 갈기는데 대만이가 ??? 하고 봤지만 따로 설명 안 하는 태섭이었음.

들어가라.
네. 그리고 오늘 고마워요.
고마우면 공항 갈 때 연락 좀 해라.
아 훈련 안 해요?
내가 알아서 해.
저도 제가 알아서 갈게요.
귀염성 없는 놈.
뭔 상관. 빨리 가기나 해요.

태섭이 차에서 내리고 손 흔들면 굳이 창문 내려서 손 흔들어주고 가는 대만이겠지. 태섭이는 항상 대만이한테 미국으로 들어가는 날만 가르쳐주고 정확한 시간은 가르쳐주지 않았음. 들어온 첫 해에는 가르쳐줬는데 정대만이 시간 맞춰 제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 보고 기함을 했겠지. 맨날 밥 얻어먹는데 기사 노릇까지 어떻게 시켜. 태섭이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는 방법이었음.

송태섭이 정대만에게 밥 얻어먹는 연유는 이러했음. 태섭이 거의 1년에 한 번 들어오는데 그 때마다 꼭 밥 사주는 선배 노릇 자처하면서 항상 태섭이가 좋아하고 손 많이 가는 거 사주는 대만이임. 솔직히 이래도 되나 싶은 태섭이인데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지독하게 짝사랑 중인 정대만을 1년에 한 번 밖에 못 보는데다가 같이 밥 먹을 땐 오로지 자신이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라 차마 거절을 못 함. 그리고 마음 먹고 거절한다해도 정대만이 들을 인간도 아니었으니까.

선배가 밥 사주니까 선배가 좋아하는거 먹으러 가자고 하면 나 아무거나 잘 먹어. 하면서 굳이 태섭이가 좋아하는 것만 먹으러 가고 정대만이 손수 까주는 것들 먹으면서 아 다음에는 진짜 내가 산다고 해도 정신차리고 보면 또 정대만이 까주는 거 먹고 있음.

이러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뭐라도 선물하고 싶은데 정대만 도련님이라 왠지 필요한 건 다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방에서 짱돌을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나오질 않으니 한숨만 폭폭 쉬는데 마침 아라가 열린 문으로 들어오더니 왜 그러냐고 묻는거야. 잠시 머뭇거리던 태섭이 여태 정대만한테 밥 얻어먹은 얘기해주면서 나도 뭔가 해줘야할 것 같은데 뭘해주는게 좋을까? 묻는데 아라 눈이 가늘어지더니 그런 걸 사주고 다 발라줬다고? 하는 거임.

응.
허어....
왜?
오빠, 대만 오빠 우리집에 자주 놀러오는 거 알아?
뭐? 언제부터?
오빠가 미국 갔을 때부터.
그 인간이 왜?
나도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다.
뭘 아는데? 아니 그것보다 엄마는 괜찮아하셔?
엄마도 나도 대만 오빠 좋아해. 그 오빠 재밌거든.
아니 왜 이 인간은 나한테 말도 없이....
오빠 진짜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뭘?
대만 오빠가 조금 불쌍하네.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봐.
대만 오빠가 작은 오빠 좋아해.
뭐?!
좋아하면 그런 거 못해줘. 나 먹기도 바쁜데 가시 발라주고 새우껍질 까준다구? 말이 돼?
그, 그럴수도 있는 거 아냐?
절.대.아.냐. 그럼 잘해보세용~ 잘 되면 나한테 선물주기다?

아라는 흥흥 웃으며 제 방으로 갔고 태섭이는 아라가 간 줄도 모른 채 얼이 빠져서 멍하게 있었음. 그러니까 정대만이 다 그렇게 손수 발라주고 까준 게 다 나를 좋아해서? 근데 이게 말이 돼? 전혀 그런 얘기도 낌새도 없었잖아. 아. 아. 말도 안 돼. 송아라가 잘못 안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누웠지만 자꾸 아라가 한 말이 생각나서 진정이 되질 않고 잠도 오지 않으니 나가서 뛰기라도 해야했음. 엄마 걱정 안 시키려고 시차 적응이 안되서 몸을 피곤하게 해야한다는 핑계로 나가서 정신없이 뛰어다녔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자 태섭이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 후 기울었던 상체를 일으켰는데 공중전화가 눈에 들어왔지. 여전히 헉헉거리던 태섭이는 무슨 생각인지 바로 전화를 들어 동전을 넣고 항상 외우고 있는 번호를 눌렀음. 신호가 가고 얼마 안 있어 전화를 받았음.

- 여보세요.
선배 나 좋아해요?
- 응.

미친듯이 뛰고난 뒤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정대만이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고 그래서 미친 척 물어본건데 대만이가 당황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바로 대답할 줄은 몰랐지. 오히려 태섭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면 건너편에서 다 안다는 듯 낮게 웃는 소리가 타고 흘러들어왔음.

- 네가 놀라면 어떡하냐, 태섭아.
안 놀라게 생겼어요?
- 너 진짜 몰랐구나.
...아니 난...
- 나는 네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는데.
.....말을 안하는데 어떻게 알아요.
- 말하면 받아주고?
그건....
- 받아달라는 얘기는 아니었어.
근데 왜 물어봐요?
- 혹시나해서 물어본 거지.
그렇게 좋아만 해도 괜찮아요?
- 응. 너랑 이렇게 전화만 해도 좋아. 그래서 계속 전화하고 편지 쓴 거야.

태섭이는 입을 막고 공중전화에 쓰러지듯 기댔음. 정대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의 둑을 터뜨려 태섭이에게 잔뜩 쏟아부었지. 아 이거 진짜 심한데. 일방적인 줄 알았던 짝사랑이 사실 쌍방이었을 줄이야. 태섭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계속 통화하려면 동전을 넣으라는 안내음이 들렸고 허겁지겁 주머니 속 동전을 뒤져서 겨우 넣은 태섭이었음.

- 너 밖이야?
네.
- 이 시간에 왜?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입은 제멋대로 열리고 말았음.

누가 그러더라구요. 선배가 날 좋아한대요.
- 누가?
안 가르쳐줄래요. 근데 선배가 정말로 날 좋아하네요.
- 응. 나 너 좋아해, 태섭아.
선배.
- 왜?
자꾸 선배 생각이 나요.
- 뭐?
지금도 그랬고 아까도 그랬고 미국에서도 그렇고 고등학생 때도 그랬어요.

선배를 처음 만난 중학생 때부터 온통 선배 생각만 났어요. 다시 한 번 들리는 안내음 덕에 이 말은 겨우 삼키고 숨을 고른 뒤 동전을 넣는 태섭이었음. 통화 연결이 되고 대만이의 숨소리가 들리자 입술은 또 마음대로 움직였지.

그러니까 나 미국 가는 날 공항에 데려다줘요.
- 손도 잡아줄게.
지금처럼 나 미국에서 올 때마다 나랑만 밥 먹어요. 다른 사람들 말고 나랑만요.
- 당연하지.
편지 자주 써주세요.
- 자주 편지할게. 전화도 자주 할게.
전화는 자주 안해도 돼요.
- 네 목소리 듣고싶으니까 자주 할래.
안 받을 거에요.
- 그러지마.

계속 통화하시려면 동전을 넣어주세요. 세번째 안내음에 마지막 동전을 넣자마자 대만이가 다급하게 얘기하겠지. 너 지금 어디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이거 너무 답답하다. 꽤나 참았는지 욱하는 성질이 담긴 목소리에 태섭이는 푸하하 웃어버렸음. 웃지만 말고 어디냐니까? 이미 나갈 채비를 하는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태섭이는 기꺼이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음. 너 딱 기다리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말 걸면 모르는 척 해. 그러면서 전화를 끊는데 자신이 무슨 애인줄 아는 건지. 태섭이는 계속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이미 끊긴 수화기에 대고 행복하게 얘기하겠지. 빨리 와요. 보고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