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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30 17:50
명태라기엔 태섭이 분량 실종 ㅠㅠ
스크롤 주의
고증안함 주의







기회는 단 세 번. 여행 중엔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길.

여행자에게 전하는 충고라기엔 이상한 주의사항을 한번 되뇌면서 이명헌은 폐 끝까지 숨을 채울 듯이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돌아올 수 없는 편도 여행을 앞두고, 설렘 속에 섞인 약간의 긴장이 오히려 적당한 각성 효과를 주었다. 결정에 이렇게 확신이 들었던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온 몸에 차오르는 자신감과 기분 좋은 떨림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기 위해 경기 전에 하던 루틴이었다. 귓가에는 그 날의 함성이 이명처럼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함성과 열이 오른 몸이 단번에 식을 것 같은 섬뜩한 침묵이 동시에 이명헌을 무겁게 짓눌렀다. 79-78. 스코어만 보더라도 치열한 접전이었다는 걸 누구든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누구도, 심지어 이명헌까지도 예상하지 못했던 건 78이라는 숫자가 산왕 앞에 있다는 것, 산왕의 패배였다. 져도 괜찮은 경기란 없겠지만 이번 인터하이는 이명헌에게 평소보다 조금 더 특별했다. 주장으로서 뛰는 마지막 대회이자 그의 농구 은퇴 무대일 수도 있었다. 여러 대학교에서 오퍼가 왔지만 이명헌은 대학교에서도 농구를 계속 해야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방과 후 활동으로 시작했던 농구가 이명헌의 인생에서 중요해지기 시작하다 결국에는 농구 명문인 산왕공고를 진학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에도 그의 의사를 존중해준 부모님이었으나 대학교는 당신을 따라 의대를 진학했으면 싶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부모님의 기대가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농구를 하는 것에 이명헌 스스로도 회의가 있었다. 이명헌은 농구 지능이 높았다. 너무 높아서 본인의 한계도 명확히 보일만큼. 정우성이 농구선수로서 10점 만점에 10점이라면 신현철은 9.5점, 그리고 자신은 9점이었다. 채울 수 없는 1점.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신체적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사실이 슬프다거나 이로 인해 자기연민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에겐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었다. 그저 농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디스어드밴티지를 가진 상태로, 프로 농구 리그도 없는 곳에서 불투명한 미래를 걸만큼 자신에게 농구가 중요한가 고민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면 지금 이곳이 농구선수로서 마지막 무대일테다.



이명헌은 한 데 뒤엉켜서 기쁨을 나누고 있는 북산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경기 운영이 미숙했거나 아니면 산왕이 자만했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북산의 실력이 산왕보다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번 경기에선 그가, 그리고 무패의 산왕이 졌다. 승패란 그런 것이다. 오늘 경기 동안 그의 매치업 상대였던 북산 선수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안타깝지만 북산은 지학과의 경기에서 질 것이었다. 악담이나 복수심에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예정된 사실로서, 그저 이명헌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 잘 보였을 뿐이었다. 동그란 다갈색 눈동자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기나긴 통로를 걸었다. “기어 올라가자.” 도 감독이 말했지만 그 과정에 이명헌은 없을 것이다. 이명헌은 마침내 답을 내렸다. 아마도 일생일대의 결정이 될 터였다. 농구 코트에서 영영 내려가는 것이 쉽진 않겠지만 결국엔 언제나 그랬듯 해낼 것이라고 그는 자신했다.





이명헌의 은퇴소식에 모두가 놀랐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고, 그 이후 몇 달이나 지속된 다시 복귀할 생각이 없냐는 권유 역시도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부터 수험생 신분에 걸맞게 무섭게 공부에 집중하는 이명헌을 본 이들은 더이상 농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루에 열시간 넘게 공부하는 이명헌의 모습을 별로 보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난 정우성만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정말 다시 농구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긴 했다. 하지만 정우성 역시도 곧 이명헌이 변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공부는 잘했다. 물론 의대 진학을 위해서는 부족한 점수지만 수험은 누구의 엉덩이가 더 무거운지 싸움이라지 않던가. 끈기나 체력, 인내는 이명헌의 특기였다. 그는 목표했던 대로 의대에 합격했고 ‘지독한 놈’이라는 신현철의 평가와 함께 이명헌의 의대 합격기는 산왕 농구부에 오래도록 전설로 남겨졌다.





그 이후 이명헌의 삶은 대체로 평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를 진학했다. 의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지식의 양은 예상했던 것보다 방대했으나 끝없는 체력 덕분에 따라갈 정도는 되었고 정신 없는 실습에 많은 동기들은 절망하기 일쑤였지만 수많은 농구 경기를 운영했던 침착함과 빠른 판단력이 빛을 발휘했다. 남들은 악몽같다는 의대 6년의 생활을 그만하면 무사히 잘 보냈다는 뜻이었다.

가끔은 산왕 동창들을 만나기도 했다. 누구는 대학에서도 계속 농구를 했고 (그 누구는 신현철로 이명헌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은 그처럼 농구와는 상관 없는 길을 걸었다. 동창회 참석 빈도보다 더 드물게 미국에 있는 우성과 연락했다. 처음에는 명헌이 국제 우편을 보내기도 했지만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우성이 종종 전화를 하곤 했다. 미국 대학에서 뛰려니 포인트가드로 포지션을 바꿨다고 했다. 뛰어난 포인트가드였던 그의 조언을 구하는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이미 농구를 그만둔지 몇 년이 된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가도 후배의 질문에는 제법 성실하게 답을 했다. 조언을 핑계로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속내를 모르기엔 이명헌은 눈치가 빨랐다. 한번은 국시를 통과하고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미국 여행을 가서 겸사겸사 우성을 보고 온 적도 있었다. 어느새 한 손으로 셀 수 없는 햇수 만큼 미국에 머문 후배는 혼자 타지에 사는 것이 능숙해보여 안심이 되었다.

그동안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수의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주로 소개로 만났고, 대부분 오래 가지는 못했으며 가장 긴 연애는 1년 정도였다. 주된 이별의 이유는 너무 바빠 연애에 신경을 쏟기 어려운 이명헌 때문이었고 주위 의대 동기들 역시 사정은 비슷했기에 특별할 건 없었다. 국시 통과 후 의적을 등록하고, 임상연수 기간 동안 소개를 받아 만난 사람과 처음으로 1년이 넘도록 사귀고 적극적으로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서 만난지 2년이 조금 넘었을 때 결혼식을 올렸다. 27살. 결혼하기에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나이였다. 결혼 상대방은 이명헌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그 때문에 간간히 참석했던 동창 모임에는 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약간의 과시욕이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결혼 반지나 예식 때 입을 드레스를 몇 번이나 갈아 엎은 전적이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건 없다는 걸 배우는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며, 타협과 협상이 결혼의 전제조건이라 생각해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작고 귀여운 외모에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친화력이 있었다. 까만 편인 피부에 너무 털털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서스럼 없는 성격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걱정을 하기도 했으나 이명헌은 오히려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맞추기 쉽지 않은 사람인 걸 알고 있었고 그를 오래 버텨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녀에게 객관적이지 않게 꽤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이명헌은 객관성 상실이 사랑이라 믿었다.

그의 삶은 지루하다고 할 만큼 평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만나는 사람마다 마치 안부인사처럼 그에게 ‘괜찮은지’를 물어보았다. 이명헌에겐 의문이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그는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대체 그의 어떤 면이 다른 이들에게 괜찮지 않게 보이는 건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 의문은 이명헌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겐 당장 참석해야 하는 학회나 다음에는 어떤 과를 선택할지,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해야할 다른 문제가 많았다.





한 구석으로 치워두고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의문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고 깨닫는 흔치 않은 순간에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결혼 1주년이 다가오던 즈음, 예전보다 더 짜증스러워진 아내와, 아무리 말수가 적은 이명헌이라도 문제라고 생각이 될 만큼 둘 사이에 대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자각 했을 때였다. 예정되었던 스케줄이 일찍 끝나 평소보다 몇 시간 이른 시간에 집에 귀가했을 때 이명헌은 현관에 어지럽게 놓인 남자 신발을 발견했다. 급하게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미처 가지런히 정리할 시간이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가슴을 차갑게 식게 만드는 불길한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허겁지겁 가운을 걸치고 나온 아내는 무척 당황스러워 보였고 만류에도 불구하고 들어간 안방에는 낯선 신발의 주인일 것이 분명한 남자가 티셔츠를 거꾸로 입은 상태로 이명헌을 향해 어색하지만 동시에 싸구려 도취감에 취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뒤로는 진창 투성이 싸움이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들켰다는 당혹스러움은 금방 사라졌는지 이혼 서류를 내민 이명헌에게 아내였던 이는 오히려 이명헌이 자기중심적이고 무뚝뚝해서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다며 이명헌에게 귀책 사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주장이 법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 때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이와 밑바닥을 다 드러낼 정도의 싸움은 남아있는 모든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했다. 이명헌은 인정해야 했다. 포기와 타협이 성숙의 부산물이 아니며 그냥 포기와 타협일 뿐이라는 것을.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삶은 사실 괜찮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잘못됐다. 그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비정상의 냄새를 남들은 더 빨리 맡고 있었다. ‘그’ 이명헌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의 자각과 동시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끔찍한 감각이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난 건 그 때였다. 이명헌 인생에서 처음 겪어보는 후회라는 감정과 함께 눈을 뜬 아침,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늘 일어났던 신혼집이 아니라 병원에서 가까워서 결혼 전에 살던 집에서 눈을 뜬 것이었다. 술에 취해 습관적으로 이전 집으로 왔다기엔 그는 술을 취할 만큼 마신 적도 없었고, 그의 집은 이미 다른 입주자가 살고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집의 인테리어가 그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이명헌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아니면 지나친 스트레스로 뇌가 착란을 일으키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 뒤로 벌어진 일들은 더욱 이상했다. 단순히 집만 바뀐 것이 아니라 아예 1년 전 과거가 똑같이 되풀이됐다. 이미 1년 전에 수료했던 구급 외과를 수련하고 있었고 (기억했던 것과 동일한 환자들이 밀려들어왔다) 주변인들은 모두 곧 있을 결혼을 축하했으며, 아내였던 이는 다시 예전 그대로 (비록 결혼 준비로 짜증을 많이 내곤 했지만) 친근한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다. 기억하고 있는 미래가 꿈인건지, 지금 돌아온 현재가 꿈인건지 이명헌은 혼란에 빠졌다. 시간 여행을 하는 영화나 소설을 보긴 했지만 자신에게 닥칠 거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꿈이든 뭐든 알수 없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거라 생각했지만 2주째 기억하는 과거를 그대로 살아가게 된 이명헌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그가 과거로 돌아온 것일까? 맞다면, 대체 왜 과거로 돌아온 것이며, 하필 왜 이 시점일까?

과거로 돌아온지 15일이 되던 날 아침 그는 타이밍 좋게 대학교 졸업과 맞물려 출범한 프로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신현철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간만에 귀국한 정우성과의 저녁 약속이 내일이니 잊지 말라는 얘기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1년 전 기억이 물밀듯이 몰려들어왔다. 동양인 최초로 NBA에 진출한 이후 처음으로 정우성이 귀국하는 자리다 보니 자주 보지 못했던 이들까지 모두 모이는 자리가 될 예정이었고 이명헌은 그 자리에서 청첩장을 전달하려 했었다 (원래 청첩장 전달 모임으로 시작되었다가 정우성이 끼게 되면서 귀국 환영회로 바뀌게 되었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당일 날에 갑자기 본식 드레스가 마음에 안든다고 대성통곡을 하던 여자친구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었다. 이명헌이 모임에 나가는 걸 별로 탐탁치 않아하던 걸 알아서 눈물의 진위가 의심스러웠지만 곧 결혼할 여자친구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중요했고 결국 이명헌은 그 날 모임에 나가지 못했다. 웨딩플래너를 통해 무척 비싼 고가 브랜드의 샵을 몇 개 더 예약하고 만족할 만한 드레스를 찾을 때까지 같이 샵을 돌아주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고, 나중에 전해들은 바로는 신현철과 같은 팀에서 뛰고 있는 정대만 선수와 정우성과 함께 귀국한 송태섭 등 타 학교 출신 농구 선수들까지 모여서 아주 성대한 모임이었다고 했다. 이명헌이 오지 않았던 걸 다들 아쉬워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거까지 동일하게 재연되는 걸 15일째 확인하면서 이명헌은 본인이 과거로 회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필 결혼을 앞두고 청첩장을 돌리기 직전으로 돌아온 것이 의미심장했다. 결혼을 후회했던 미래의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그렇다면 이명헌이 할 일은 명확했다.





이혼 과정에서 그는 아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바람 상대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혼 이후 이명헌이 아내를 외롭게 해서 바람을 피우게 되었다는 주장은 예상했지만,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신혼집에 들어갈 가전을 고르기 위해 만났을 때 이명헌은 손쉽게 그녀의 휴대폰에서 바람 상대와 나눈 비밀스러운 대화를 찾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바꾼 웨딩드레스는 상당 부분 바람 상대의 취향이 반영되었다는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까지 얻었다)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들을 내밀어 파혼을 요구했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부정하고 당황해하다가 나중에는 벌컥 화를 내던 그녀는 결국에는 양가 부모님까지 얽혀서 더러운 싸움을 하느니 여기서 조용히 마무리 짓자는 이명헌의 요구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 지난 몇 달간 그를 괴롭혔던 문제의 결말은 허무하게도 문자 그대로 없던 일이 되어서 그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지지부진한 이혼 과정 중에도 그렇게 취한 적 없었건만 헤어지고 돌아온 날 그는 태어나서 제일 많이, 빠르게 술을 마시고 만취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여전히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뜬 이명헌은 왜 다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지 않는지 의문에 잠겼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까지는 힘들게 인정을 했지만 왜 돌아오게 된건지, 어떻게 하면 다시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었다. 막연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결혼을 없던 일로 만들면 다시 돌아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그런 일은 없었다.

겉으로는 평소대로 출근해서 진료를 보는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했지만 이명헌은 조금씩 자신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농구부를 은퇴한 이후에도 가벼운 조깅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건 지난 십년간 거의 거른 적이 없는 습관이었으나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 자체도 힘이 들었다. 파혼 소식에 계속된 연민과 위로도 지겨워 주변인들의 연락을 받지 않다보니 점점 고립되어 갔다. 원래부터 의사라는 직업에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유달리 뛰어난 책임감만 아니였으면 진료든 수련의든 다 때려치고 잠적하고 싶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아침에 눈을 뜨는지 의미를 잃어갔다.

전화를 몇 번 받지 않으니 신현철이 집으로 찾아왔다. 날짜 개념이 희미해져서 몰랐지만 파혼한지 두 달이 훌쩍 넘었다고 했다. 평소 이명헌 답지 않게 정돈되지 않은 집안을 둘러보던 신현철은 억지로 그를 집밖으로 끌어내었다. 단골 맛집이라고, 실망하지 않을거라고 한 것치고는 소박한 메뉴인 라멘집으로 이명헌을 밀어넣었다. 배고프다는 감각을 느낀지 오래되어 입맛이 없었지만 친구의 성의를 생각해서 억지로 젓가락으로 라멘을 휘적거렸다. 단골이라는 게 허튼 소리는 아니었는지 주방장이 신현철을 보고 반가워하며 주문하지도 않은 교자 등을 서비스로 계속 내왔다. 머쓱해하며 신현철은 주방장이 농구를 좋아하는 팬이라고 했다. 다시 서비스와 함께 나타난 주방장은 이명헌에게도 농구선수냐고 물었고, 아니라고 답하자 신현철과 함께 온데다 체격을 보고 선수라고 생각했다며 실례했다고 사과했다. “누구랑 같이 왔었어?” 기계적인 대답이 아닌 질문은 간만이라 신현철은 기뻐하며 지난 번에 우성이가 귀국했었을 때 같이 왔었다며 묻지도 않은 뒷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양인 최초로 NBA에 진출했을 때 꽤 화제가 되었던 터라 정우성의 인터뷰가 방송에 나오기도 했고 신문이나 잡지에도 여러번 실리기도 해서 농구팬이 아닌 사람에게도 제법 인지도가 있었다. 농구팬이라면 정우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신현철이 정우성과 함께 라멘집을 방문했을 때 주방장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얘기를 적당히 흘려 들으면서 이명헌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나 했다.


“괜찮냐?”

오늘은 안 듣나 했는데 과거로 돌아와서도 빠지지 않는 질문이 지겨웠다. 걱정해서 하는 질문이라는 건 알았지만 대답하기 곤란해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물어보는 저의를 몰라서, 지금은 정말 괜찮지 않아서. 현철도 딱히 대답을 들으려던건 아니어서 그는 그냥 계산하는 현철에게서 시선을 돌려 유명인들의 사인과 사진이 빼곡히 붙어있는 벽을 쳐다봤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모셔진 사진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작은 사진 속에서도 신현철의 덩치는 눈에 띄었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잘생긴 얼굴은 정우성이었다. 미국에서 본게 벌써 3년? 4년 전이었나, 아니 과거로 돌아왔으니 2년이 지난 시점일테다. NBA에서 뛰면서 벌크업을 더 했는지 더 다부진 모습이었지만 시선을 잡아 끄는 건 고등학교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옆에 덩치가 작은 사람은-

“가자.”
“송태섭이 왜 여깄어?”

저도 모르게 이명헌은 사진이 붙어있는 벽면으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물었다. 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입술에서 울려퍼진 이름이 자연스러워서 어색했다. 그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었는지 확인한 현철이 뒤늦게 대답했다.

“아아, 태섭이? 그 때 우성이 귀국 환영회 이후에 친해져서 출국 전에 몇 번 만났었어. 좋은 애더라.”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아 송태섭의 얼굴이 흐릿한게 안타깝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명헌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사진 속 송태섭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송태섭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저 발끝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얀 정우성과 대비되어 더 까무잡잡하게 느껴지는 피부색이나 기억보다는 살짝 자란, 구불거리는 곱슬 머리, 삐딱한 눈썹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서 느껴지는 귀여운 인상. 지난 시간 동안 송태섭은 이명헌의 기억 속에 유달리 생생했던 눈동자로만 남아있었지만, 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본 송태섭의 얼굴 위로 여태까지 그가 만났던 여자친구의 얼굴들이 겹쳐졌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비슷한 인상의 사람들만 만났다는 것도 방금 전까지 인지하지도 못했었다. 그랬었는데 무의식 속 그의 이상형의 원형이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조여들던 심장이 갑자기 미친듯이 펄떡거리며 온 몸의 혈관에 과도하게 많은 피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손끝이 저릿한 감각과 함께 그는 모든 상황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이명헌이 돌아온 과거의 이 시간대는 결혼을 취소할 수 있는 기회이긴 하지만 동시에 송태섭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예정대로 정우성 귀국 기념 모임에 나갔더라면 그 시합 이후 약 십년만에 처음으로 송태섭을 만났을 거였다.

“왜 그래?”

말없이 사진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현철이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너무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어지러운 순간에도 너무 많은 깨달음이 동시다발적으로 그의 머릿속에서 솟아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이명헌이 그저 베일을 벗기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이제서야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가 객관적일 수 없게 만들어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이 그저 복사본에 불과했다는 것을. 진정으로 후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그 순간 처음 느낀 후회보다도 더욱 강렬하고 끔찍한 감정이 이명헌을 덮쳤고 이내 빛 한점 없는 암흑 속으로 그는 고꾸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버스 안이었다. 안내 방송이 곧 신도쿄 국제 공항에 도착함을 알려주었다. 첫번째로 시간 여행을 했을 때 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는 국시를 통과하고 잠깐의 자유 시간에 우성을 보러 미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송태섭은 이명헌의 인생에서 애매하게 멀면서도, 닿고자 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단 한번도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우성을 보러 미국에 갔을 때 심지어 우성의 룸메이트가 송태섭이었는데 송태섭의 갑작스런 컨디션 난조로 보지 못했고, 송태섭이 NBA에 진출한 두번째 동양인이 되었을 때는 이명헌이 결혼 준비 등으로 바빠서 소식을 찾아보지 못했고 (또한 첫번째 NBA 선수인 정우성 만큼 언론이 대서특필 하지도 않아서 원하지 않아도 가판대에서 정우성 얼굴을 마주쳤던 예전과는 달랐다) 우성의 귀국 기념 모임에는 이명헌이 불참했었다. 십여년간 주위를 맴돌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어긋나서 결국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송태섭을 만나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 것일까.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그의 직감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예전엔 길고 지루하기만 했던 비행 시간이 이번에는 너무 짧게 느껴졌다.

국제선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다시 공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두시간 쯤 달려 우성이 다니는 대학교에 도착했을 땐 집에서 출발한지 24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대학교 앞 적당한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시며 흐릿해진 정신을 깨우는데 약속 시간에 맞춰 픽업 나온 우성이 신난 표정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오느라 진짜 수고 많았어요. 형, 피곤하죠? 원래는 태섭이랑, 그러고보니 제 룸메이트라고 얘기했었죠? 태섭이가 작년에 우리 학교로 편입한 이후에는 같이 산다고 얘기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셋이서 저녁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태섭이가 아프대요. 우리 둘이 예약한 레스토랑 가도 되고 아니면 형 피곤하면 간단히 먹어도 돼요.”

한달 여행할 사람의 짐이라기엔 단촐한 그의 배낭을 들어주겠다고 고집을 부린 우성이 가볍게 둘러멨다. 우성은 현관문을 열고 집을 안내하면서도 쉴새 없이 떠들었다. 변함없는 집을 둘러보다 마지막으로는 송태섭이 잠들어 있을 방을, 정확히는 굳게 닫힌 방문을 응시했다. 여기까진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과거에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간단한 식사를 하기 위해 외출을 했고 원래라면 우성의 집에 머물기로 했지만 룸메이트인 송태섭이 아프다는 핑계로 근처 호텔을 잡았었다. 우성은 아쉬워 했지만 이명헌의 뜻을 존중했고 그 이후로는 송태섭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는 여기서 과거와 다른 선택을 내리기로 했다.

“어디가 아픈데?”

“체했대요. 요새 들어 자주 그러는데 편입 후 첫학기라 좀 힘든 것 같아요. 저도 뭔지 알아요. 디비전 1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거든요.”

우성은 송태섭이 없는 자리에서 그의 얘기를 하는게 조심스러운지 목소리를 한껏 낮췄지만 그러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진 않았다.

“이럴 땐 오타이산이 즉효던데 지난 학기에 하도 많이 먹어서 다 떨어진거 있죠. 집에 더 부쳐달라고 하라니까 가족 걱정시키기 싫은가봐요. 이해는 되지만 이렇게 아파할 거면 좀 그래요.”
“오타이산? 나 있는데?”

단촐한 짐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오타이산 캔을 우성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길 바랐다. 다행히 송태섭이 찾던 약을 생각치도 못하게 구하게 된 기쁨에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우성은 지체하지 않고 가루를 물에 개어 송태섭의 방문을 노크한 후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해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자니 이내 방 안에서 우성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심장은 미친듯이 뛰었다. 송태섭이 자주 체한다는 거나 그때마다 오타이산을 먹는다는 얘기는 이미 과거 우성에게 들었었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서 나눈 대화였었다. 슬쩍 던진 유도 질문에 변함 없이 많은 정보를 털어놓아 다행이었다. 닫힌 문 너머에서 들리는, 분별도 안되는 대화 하나로 공항을 샅샅이 뒤져 구할 수 있는 모든 오타이산 캔을 다 산 보람이 있었다.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우성은 시차 적응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게 아님을 알면서도 그런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를 양보하려는 우성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고 거실 소파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송태섭이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간신히 잠든 희뿌연 새벽, 우성이 아침 운동을 나가기 위해 조용히 집을 나서는 소리에 이명헌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5시반. 산왕에서 아침 운동을 시작하던 시간이었다. 이상한 그리움을 느끼며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화장실에서 씻는 물소리에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이미 환해져있었다. 아침 7시가 조금 안된 시간을 가르키는 시계바늘을 바라보며 우성이 돌아와서 씻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소파 위 이불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 약간 멍한 기분으로 상념에 빠졌다. 이제부터 무얼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지난번 미국에 왔을 때는 우성을 한 일주일 정도 보고 나머지 한 달은 라스베이거스, LA, 샌프란시스코 등을 돌았었다. 지금은 남은 모든 시간을 이 곳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24시간이 넘는 이동 시간 동안 송태섭을 보겠다는 생각 하나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걸 깨닫자 약간 부끄러운 기분이 되었다. 이처럼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적은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일평생 그에겐 반의어와 같던 무계획이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나치게 큰 샤워 가운을 헐렁하게 걸친 채 화장실에서 나서는 송태섭과 눈이 마주쳤다(미국은 모든 게 그에게 큰 것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후에 샤워를 마친 정우성이 반나체 쇼를 벌이면서 소리친 내용에 따르면 태섭이 입은 가운은 우성의 것이었다). 송태섭의 존재를 자각한 이래 어떤 모습으로 재회할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수없이 많이 상상했으나 전혀 예상에 없던 모습으로 송태섭이 그 앞에 서있었다. 빛바랜 기억을 찢고 나온 듯한 다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곱슬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동그란 턱선을 타고 떨어져 보기좋게 태닝한, 탄탄한 가슴을 지나 하얀 샤워 가운 안으로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였겠으나 그 짧은 시간이 이명헌에게 던진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 오랜만이네요.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송태섭이라고 합니다. 우성이에게 오신다고 얘기는 들었어요.”

영원할 것 같던 침묵을 송태섭의 입술이 깨트렸지만 불과 몇 미터 거리에 떨어진 이명헌의 뇌로 송태섭의 목소리가 수신이 되기까지는 몇 초의 지연이 있었다.

“지금 모습이 좀 그래서 잠시 후에 다시 인사 드릴게요. 실례합니다.”

정중하면서도 명확하게 대화를 마친 송태섭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송태섭이 사라진 이후에도 몇 분 동안이나 이명헌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네 목소리, 듣고 싶었어.”

들어줄 이 없는 거실에서 이명헌만 홀로 떠돌았다.






약 이십분 뒤 머리를 말리고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 입은 태섭이 방에서 나와 주방에 섰다.

“저, 이명헌..씨? 아침 식사는 하시나요?”
“말 편하게 해.”

익숙하게 버터와 식빵 등을 꺼내던 태섭이 잠시 멈칫하면서 뒤를 돌았다.

“제가 이게 편합니다.”
“씨라는 호칭은 너무 불편한데.”
“편해지면 놓을게요. 아침 식사로 토스트 괜찮으세요?”
“속은 좀 괜찮아?”
“안그래도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어요. 오타이산,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니였어. 도움이 됐다면 다행.”
“근데 오타이산을 엄청 많이 들고 다니시네요?”
“...미국 음식이 안 맞을까봐.”
“아아.. 그렇구나.”

표면적으로는 매끄럽게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태섭이 그를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태섭 입장에서는 과거에 자신이 꺾은 상대팀 주장일 뿐인 사람을 6년 만에 만나는 것일 테니, 느끼는 감정의 온도차를 이해했다. 가급적 몰아붙이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다 넘어가줄 생각도 없었다. 등을 돌리고 아침 준비를 하는 태섭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환자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시키면 나쁜 사람.”
“괜찮아요. 저도 먹을 거라.”
“배고프면 죽이라도 해줄게. 쌀 있어?”
“진짜 괜찮습니다. 사실 거의 심리적인 거라서 어제 약 먹고 다 나았어요.”
“심리적? 언제부터?”

한발짝 뒤로 물러난 태섭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경기 내내 보았던 익숙한 표정. 그는 양 손을 들어올리면서 뒤로 물러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다는 걸 피력했다. 태섭의 어깨를 잡았던 손바닥에 유달리 열이 올랐다. 내려 앉은 침묵 사이 토스트기에서 다 익은 식빵이 톡하고 튀어 올랐다.

“의대 갔다고 듣긴 했는데 의사 선생님 다 됐네요.”
“왜. 재수 없었어?”
“그런 뜻은 아니고요. 차린 건 없지만 드세요. 제가 원래 아침은 간단히 먹습니다.”

태섭이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잼, 버터를 내밀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자 정말 오랜만에 식욕이 돌았다.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고마워.”

접시를 건네 받는 손 끝으로 손가락이 스쳐지나갔다. 지나치게 빠르게 거둬진 손길이 아쉬웠다.

“많이 변하셨네요. 예전엔 말투도 특이했는데-”
“말투?”
“말 끝마다 뿅, 이런 말 하지 않았어요?”

오무린 태섭의 통통한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는 분홍빛 혀와, 뿅이라고 말하면서 무의식 중에 깜빡거리는 속눈썹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다시 해줄까?”
“네? 어떤거요?”
“뿅.”

버터를 바르던 태섭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신기한 걸 봤다는 표정이었는데 부정적인 반응 같진 않아 일단은 만족스러웠다.

“아직도 그 말투 쓰세요?”
“아니 뿅.”
“근데 왜요?”

방금 전까지도 딱딱하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태섭은 명헌이 뿅이라고 말 할 때마다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번도 쓴 적 없지만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그는 버터 바른 빵을 베어 물고 대답했다.

“그냥 뿅.”

다시 한번 태섭의 얼굴에서 작게 핀 미소로 완벽한 아침이었다.





셋의 기간제 동거는 예상과 달리 순조롭게 흘러갔다. 어색하던 태섭과의 사이는 태섭이 수강하는 기초생물학 수업의 파이널 페이퍼 작성을 도와주면서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필 남는 학점을 채우기 위해 영문학을 수강하던 우성은 셰익스피어를 주제로 페이퍼를 써야했고, 그건 이명헌도 도와줄 수 없는 주제라 우성은 불공평하다며, 명헌은 본인의 선배라며 투덜댔다. 우성이 페이퍼 작성으로 끙끙거릴 때마다 앞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장면을 재연하면서 둘은 더 친해졌다 (오 로미오, 당신의 이름은 왜 로미오인가요.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대로 장미 뿅. 이별은 감미로운 슬픔이어서 아침이 올 때까지 안녕 뿅). 태섭은 여행까지 와서 공부를 도와주는 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껴 학기가 끝난 이후 꼭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약속했다. 드디어 기말 시험이 끝나고 태섭은 약속했던 대로 저녁을 대접했다. 예상과는 달리 계속 미국 음식만 먹어서 질릴 것 같다며 집에서 직접 요리해서 가정식을 차려주었다. 세심하게도 첫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게 틀림 없었다. 정작 오타이산은 그 후 태섭도 명헌도 손도 대지 않아 그 상태 그대로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식사 내내 이상하게 떨려서 평온을 가장하기 힘들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 첫 날, 셋은 동그랗게 모여서 지난 3-4월에 치른 디비전1 토너먼트 녹화 경기를 보았다. 우성과 태섭이 다니는 학교는 이번에 16강에 진출했고 우성은 큰 대회에서도 침착하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디비전 1 대학에 편입한 태섭은 같은 포지션인 우성과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직접 경기에 뛰진 못했다. 선수로서 승부욕이 끓을 텐데도 태섭은 짐짓 태연한 태도로 경기를 보면서 우성의 플레이에 계속 감상을 남겼다. (“너 이거 그렇게 연습하던 트라이앵글 패스 왜 안했어. 큰 대회라 긴장했냐?” “아니거든. AJ에 더블팀 붙어서 내가 돌파하는게 훨씬 나은 선택이라 그랬어.”) 피드백 시간을 빙자한 툭탁거림이 익숙해 보이는 둘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티비 속 우성의 플레이로 시선을 돌렸다. 과거에도 지금도 우성의 플레이는 특별했다. 농구의 본토인 미국에서, 게다가 디비전 1 대학팀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오히려 블랙홀같이 주변 모든 빛을 흡수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감히 현재를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천재. 장애물을 마주할수록 더욱더 노력하는, 방심조차 하지 않는 플레이어. 명헌은 어떤 표정으로 태섭이 비디오를 보고 있을까 궁금하면서도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어느날부터 명헌도 둘을 따라서 아침 운동을 나섰다. 나름 꾸준히 체력 관리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역 운동 선수와 비할 수는 없었다. 그를 배려해 속도를 맞춰주는 것에 오기가 생겨 매일같이 뛰다보니 금방 둘의 아침 조깅 루트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었다. 쉬지 않고, 둘과 동일한 속도로 조깅을 끝내자 둘은 기다렸다는 듯 야외 농구 코트로 향했다. 마치 여태 그를 배려해서 추가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명헌에게도 오랜만에 한 판 하겠냐고 물었지만 이미 농구공을 놓은지 10년이었다. 손 안에 들어오는 익숙한 감촉을 잠시 느끼다가 그냥 둘을 구경하기로 했다. (“형, 편히 앉아서 제가 이기는 거 구경하세요.” “누가 네가 이긴대?” “역대 전적이 말해주잖아. 8:2의 승률. 질 준비나 해.” “누가 지려고 경기하냐?”) 재수 없긴 해도 우성의 말이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명헌은 원온원이 시작되자 마자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기준을 내던져야 했다.

분명 우성에게 밀릴 거라고 생각했던 태섭이 코트 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성의 말처럼 10번 중에 8번 우성이 득점을 하더라도 태섭의 존재는 바래지 않았다. 태섭 역시도 우성과 마찬가지였다. 농구공을 쥘 때면 과거도, 미래에도 없이 현재에만 존재했다. 오로지 여기, 이순간 우성처럼 승자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그런 빛나는 모습으로.

우성도, 명헌도 모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경기라도 태섭은 질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는 지기 위해 경기하지 않았다. 이 순간 명헌이 북산전을 떠올린 건 필연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송태섭은 이명헌이 틀렸다는 걸 온 몸으로 증명해내고 있으니까. 이명헌의 세상이 거세게 흔들렸다. 송태섭의 손 안에서 농구공이 지면을 박차고 튀어 오르며 만들어내는 진동 하나하나가 그의 모든 세상을 송두리채 뒤엎고, 부수고, 깨뜨렸다. 각도가 안나오는 상황에서 기어코 득점에 성공한 태섭이 환하게 웃으며 명헌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어쩌면 송태섭의 눈에서 그 날의 이명헌도 그렇게 빛났었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 앞에 송태섭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동일한 존재 앞에서 그는 두번째 굴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페허가 된 그의 세상에 농구공 하나가 굴러들어왔다. 그 무엇보다도 큰 존재감으로.






명헌의 귀국일이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셋은 그랜드 캐니언에 놀러가기로 했다. 태섭이 운전을 하고 조수석에 앉은 우성이 지도를 보았으나 우성이 지도를 세번 쯤 잘 못 보았을 때 결국 명헌과 자리를 바꿔 앉았다. 명헌은 지도를 잘 봤고 태섭은 운전을 잘했으니 궁합이 잘 맞았다. 로드트립은 즐거웠고 약 5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거리였으나 명헌은 운전하는 태섭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의미하게 지나가던 시간을 이제는 느리게 흘러가게 하기 위해 붙잡고 싶어졌다. 누구 앞에선 후회가 잦아졌다.

아직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이라고 했지만 6월의 사막 날씨를 얕봤던 죄로 명헌과 우성은 열사병에 걸리기 직전까지 갔다. 태섭은 오키나와 출신이라 자기는 더위에 강하다고 했지만 그 역시 내심 힘들어 보였다. 이미 텅 빈 물병만 기울이던 태섭을 본 명헌이 근처 상점에서 마실 걸 사오기로 했다.

전 세계 관광객의 눈과 지갑을 사로 잡기 위해서인지 상점 안은 이국적인 문양의 기념품들로 가득차 있었다. 더운 와중에도 피워둔 향초의 냄새가 더욱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슬하게 쌓여있는 장식품들을 건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명헌은 음료 3개를 꺼내 카운터로 보이는 그나마 깨끗한 데스크로 다가갔다. 데스크 아래에서 덩치 큰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명헌은 음료를 보여주며 넉넉한 액수의 지폐를 내밀었지만 남자는 명헌이 내민 지폐를 받을 생각을 않고 그의 얼굴만 노려봤다. 원래도 위협적인 인상인데 눈을 치켜뜨니 더욱 위압적이었다. 혹시 잘못된 금액을 지불한건가 의아함을 느낄 때 갑작스럽게 남자가 물었다.

“Is it your second time?”
“...No. It’s the first time I’ve been here.”

관광객에게 두 번째 방문이냐는 질문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명헌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채 명헌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이채가 도는 남자의 눈을 마주하자 잘못된 질문이 아니며, 다른 의미를 묻고 있는 것 같다는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You only have one last chance.”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명헌의 직감에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Be wise.”
“....”
“Be careful not to get lost while traveling.”
“Keep the change.”

제법 큰 액수의 지폐를 내려놓고 명헌은 수상쩍은 가게에서 미련없이 돌아 나왔다.





낮에는 그렇게 더웠던 걸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믿기지 않을만큼 사막의 밤은 추웠다. 우성은 이미 잠에 곯아 떨어졌고 명헌은 작은 모닥불 앞에 앉아 도시에선 볼 수 없는 수많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꽤 늦은 시간이라 잠든 줄 알았던 태섭이 담요를 칭칭 두른 채 곁에 다가와 앉았다. 혹여나 추울까 명헌은 마른 나뭇가지를 몇 개 더 넣었다.

“뭐해요 형.”
“별 봐 뿅.”
“이제 이틀 뒤면 귀국하는 의사 선생님이 아직도 뿅뿅 거리면 어떡해요.”
“나 잘리면 태섭 책임 뿅.”

한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태섭은 처음과 같이 웃었다. 이제 며칠 뒤면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뻐근하게 아렸다. 명헌을 따라 태섭 역시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정작 명헌은 태섭이 나온 뒤엔 그만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둘은 한참 말이 없었다.

“고마웠어요.”
“뭐가?”
“그냥.. 다 ..”

해준게 없어 아쉬운 명헌에게 무엇이 고마운 건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태섭은 어려운 사람이었다. 지난 한달 정도 함께 지내면서 많은 걸 알게 됐다. 가리는 음식은 딱히 없지만 아보카도는 도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는 거나 명헌은 나가지 않았던 윈터컵부터 주장으로 경기를 뛰었다는 것, 프렙스쿨 시절 아르바이트를 3개씩 뛰며 무작정 부딪히며 영어를 익혔고, 아주 어릴 때부터 길거리 농구를 하며 자랐으며, 지금도 경기 전 긴장할 때마다 헛구역질을 한다는 것도. 이 외에도 많은 걸 알았지만 여전히 그에게 태섭은 물음표였다.

“미국에 와서 이렇게 즐거운 방학은 처음이에요.”
“나도 놀기만 하는 방학은 처음 뿅.”
“의대생은 방학때도 바빠요?”

명헌은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시간을 내려면 낼 수 있었겠지만 바빴던 건 반쯤은 그의 선택이었다. 이제와서는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이제 정식으로 의사 선생님 되면 더 많이 바쁘겠죠?”

베시시 웃던 태섭이 쑥쓰러운지 괜히 손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시합 중에 본 적이 있어 긴장되었을 때 하던 버릇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무엇이 태섭을 긴장하게 하고 있을까. 명헌과 같은 이유이길 바랐다. 태섭은 조심스레 명헌이 생물학 과제를 도와주던 때의 얘기를 꺼냈다. 친절하게 잘 가르쳐줘서 고마웠다고, 명헌이 좋은 선배이자 주장이었을 것 같다고 했다.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들을 일이 없었을 조곤한 말투로 그의 칭찬을 하는 태섭을 바라보고 있자니 참을 수 없이 뱃속이 간질거렸다.

“아쉽다. 미리 알고 지냈으면 좋았겠어요. 그럼 나도 더 배울 게 많았을텐데.”

모닥불 빛을 반사해 어둠 속에서 더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친 그는 송태섭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음을, 그리고 그가 불과 한발자국만 더 내딛었으면 잡을 수 있었을 모든 기회를 다 놓친 결과가 지금의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 순간 밤하늘보다도 더 새카만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이번이 마지막임을 알았다. 어둠에 삼켜지기 전 태섭에게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눈 앞에 모든 걸 담아두려고 애를 썼다. 포기해선 안되는 것들, 타협해선 안되는 것들, 다시 찾아야 하는 것들. 이명헌을 이명헌이게 하는 모든 것. 그리고는 다시 암흑이었다.











기회는 단 세 번. 여행 중엔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길.

시간 여행자를 위한 불친절한 주의사항을 떠올렸다. 멀리 돌아온 건 맞지만 길을 잃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나온 모든 순간 하나 빠짐없이 현재의 이명헌을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오기 위한 여정이었다. 세어보니 4개월하고 또 7일. 10년과 맞바꾸기엔 터무니 없이 짧지만 그의 세상이 뒤집어지기엔 충분한 시간. 시간 여행을 통해 배운 것들을 잊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무엇이 그를 기다려도 괜찮을 것이었다.

이번엔 도착하기도 전에 어디를 향해 가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원점이 있다면 그곳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를 9점 만점의 9점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향해 이명헌은 나아갔다. 어둠이 옅어지면서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발목을 조여오는 농구화나, 피부에 달라붙는 유니폼의 감촉, 습한 여름 공기의 냄새 등이 점점 선명해졌다. 마지막 눈을 뜨기 전 이명헌의 귓가에는 그 날의 함성이 맴돌았다.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명헌태섭
명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