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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6 00:39
전생에 호열이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백호는 그 집 하인의 아들이었어
어릴때야 동갑이니까 격없이 컸지만 10살이 되고부터는 눈에 대놓고 보이는 선이 생겼음
그러거나 말거나 작고 뽀얗고 귀엽게 생긴 도련님은 손도 부드럽고 말투도 나긋나긋하고 다정하며 가끔 챙겨주는 간식도 너무 좋아 
다들 백호보고 덩치만 큰 바보라고 쓸모없다고 하는데 호열도련님은 백호를 다정하게 두둔해줬지
그러니 천하디 천한 하인의 자식인 백호가 호열이를 좋아하게 된거야
매일 힐끔힐끔 호열이를 보고 어쩌다 손이라도 스치면 볼이 발그레 해졌지

호열은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있었어
백호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은 전혀없었지만 그렇다고 저 맹목적인 애정을 내치고 싶지도 않아
저 바보같은 녀석이 언제 고백을 하려나? 그때가 끝인가? 하고 있었을뿐
간혹가다 백호가 다른 사람을 쳐다보기라도 할라치면 살짝 울컥하긴 했는데
갖기는 싫어도 남주긴 아깝다 이건가? 하면서 혼자 쓴웃음 지었음

14살이 됐을무렵 매일 일끝나면 산이며 들로 나가서 꽃을 꺾어다가 호열이 방에 꽂아두는게 일이었던 백호가 어느날부터 호열이한테 글을 가르쳐달라고 했어
집에서 일하고 꽃뜯으러 나가기도 바쁜녀석이 글자 배워서 뭣에 쓰려나 싶으면서도 거절하면 백호가 다른이에게 부탁하며 한눈 팔거같아서 가르쳐주기로 함
어차피 집에 속해있는 하인이 글을 배워봤자 장에 나가서 사기나 덜 당하는 수준이나 되겠지 싶은 마음이 반이었어
그런 호열의 생각과는 달리 백호는 빠르게 글을 배워감
배운지 며칠만에 마당청소를 하다가 자신의 이름이나 다른 하인들의 이름을 글자로 적더니 한달 좀 지나니까 제법 그럴싸한 글귀도 적어내려가
이녀석 제대로 된 집안에서 기회를 갖고 태어났으면 과거를 보고 관직에 오를수도 있었겠다 싶을정도였어
알려주는 족족 흡수하는 백호가 신기해서 처음엔 20-30분 가르치던 글을 한시간 두시간씩 가르치기 시작했어
그렇게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이틀에 한번씩은 백호가 꽃을 꺾으러 가는 들판으로 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냈지
생각보다 영특한 백호가 글을 배우다가 가끔 마주치는 초롱초롱한 눈을 볼때면 호열도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음

다른 하인들은 그런 백호를 처음엔 신기하게 보다가 나중에는 질투하기 시작했어
저 요망한 것이 도련님을 꼬득여서 일도 빼먹고 농땡이나 피운다, 순진한 도련님을 꼬득여서 못된짓을 하려고 저렇게 방에서 몇시간씩 있는거다
이런 소문을 내기까지 함
당연히 그건 주인어른과 마님 귀에 들어갔지
호열이 한낱 천한 하인한테 휘둘릴 애는 아니지만 이상한 소문이 돌면 좋지 않을게뻔한데 
백호를 쫓아내자니 꽤 일을 잘하니 아까운거야 그래서 낸 결론은 호열을 혼인시키는거였지
혼인 상대는 옆마을의 박대감네 큰 딸이었어
나이는 호열이보다 두살 많지만 예쁘고 영특하고 인품까지 좋다는 소문이 있어 호열의 짝으로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박대감도 혼처를 찾는 중이라니 이렇게 천생연분일수가 없었지

혼인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호열과 백호의 사이도 묘하게 바뀌고 있었어
글을 배우다가 잠깐 조는 백호의 머리카락을 만진다던지 산이며 들에서 사람이 없을땐 손을 잡고 걷는다던지
호열 스스로도 이게 어떤 감정인지 자각하지 못한채 백호에 대한 연심이 커져가고 있었던거야
물론 알았다고 하더라도 호열이 백호의 마음을 받아주진 않았겠지
하인과 혼인하겠다고 하면 둘 다 나락으로 갈테니까

두어달이 지난 후 평소처럼 일이 끝난뒤 꽃을 꺾어서 들어오던 백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됨
바로 호열이 혼례를 치룬다는 소식
길게 남은것도 아니고 당장 다음주라니? 전쟁이라도 나나? 이렇게 혼례를 급하게 치룬다고? 싶을정도로 빠른 혼례였어
백호 입장에서야 빠른거였지만 몇달간 준비과정을 거쳤고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혼사였지
여인과 달리 혼례를 치룬다해도 같은집에 살게 되는거니 못보게 되는일은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는건 다른일이잖아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백호가 호열이한테 달려갔어

- 도련님 도련님
- 백호야 집 무너지겠다
- 그게 사실인가요?
- 뭐가 말이냐 
- 호..혼례요 도련님 혼례를 치루신다고.........
- 너도 들었구나 그래 다음주에 박대감집 여식과 혼례를 치룬단다

백호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
호열이야 어차피 받아줄 마음도 아니고 집을 떠나는것도 아니니 곁에 두고 가끔 글을 가르치고 손잡고 들판이나 거닐며 백호의 사랑을 받으면 된다 생각했지만 백호는 아니야
다른 사람의 곁에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곁에서 보며 살 자신이 없었음

- 도련님..
- 응 백호야
- 도련님 사실 저..제가..도련님을
- 백호야
- 네?
- 내 혼례 준비로 바쁘니 나중에 얘기하련

그렇게 말하고 문이 닫혔어
백호는 그대로 끝도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게 아닌가 싶었지

혼례식 당일 모두가 혼례준비로 바쁠때 백호는 넋을 놓고 있었음
주변에선 이제 넌 찬밥 되니까 기운 빠지냐며 비아냥 거렸고 백호는 그런 말을 듣는둥 마는둥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났지
방으로 들어가서 한참을 있다가 나오더니 갑자기 평소랑 똑같이 구는거야
웃으면서 일도 돕고 음식 준비하는데에 가서 기웃거리다 하나 주워먹고 손등을 맞고
너무 평소같아서 아무도 이상한걸 눈치채지 못했지

혼례가 시작되었고 그 모든걸 백호는 눈에 담았어
아름답다 소문났던 박대감집 여식과 살짝 눈을 마주치며 화사하게 웃는 호열은 더 눈이 부셨지 
혼례가 끝나고 첫날밤을 보낼 밤이 되자 백호는 조용히 집을 떠나 호열과 함께 글을 공부하던 들판으로 천천히 걸어갔어
낮의 들판과는 달리 고요하고 달빛만이 반겨주는 들판 품으로 백호는 쓰러지듯 누웠어

다음날 아침 호열은 묘한 기분에 평소보다 일찍 깼지
잠이 깊게 든 부인을 옆에 두고 방을 나섰는데 지금 시간이면 빗질을 하고 있어야 할 백호가 보이질 않아
혼례를 치룬 다음날이라 다들 늦게 일을 하나? 했는데 다른 하인들은 이미 나와서 일을 하고 있어

- 자네, 백호 못보았나?
- 아이고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백호 그녀석 아직 안일어났나 봅니다요 

왠일로 늦잠을 자나 싶어서 슬쩍 백호의 방 문을 열어봤어
낡아빠진 문이 끼익 하며 열리는데 방은 냉기만 돌고 이부자리 조차 펴지 않은 텅 빈 방이었지
둘러보니 바닥 구석에 고이 접은 종이가 있는거야 
한달 전 백호 생일때 무엇이 갖고싶냐 물었더니 지필묵이 갖고 싶다하여 사준거였는데 글 연습을 한건지 뭔가가 가득 적혀있어
자세히 보니 "호열 도련님께" 라고 적혀있어서 종이를 펼쳐보았고 그 종이에 적힌 글을 보자마자 호열은 미친듯이 달려나갔음

호열이 달려서 도착한 곳은 백호가 향한 들판이었어
붉은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판 한가운데에 백호가 누워있었지
얼굴은 생일에 사준 종이처럼 하얗고 창백한데 옷과 몸은 주변에 핀 붉은꽃과 똑같이 붉은색을 띄고있었어
이 꽃밭에서 밝게 웃던 백호가 어제까지 있었는데 이제 차갑게 식어서 눈도 마주치지 않는거야
살포시 잡으면 따뜻했던 손이 보드라운 머릿결이 도련님 도련님 하며 조잘거리던 목소리가 이제 없다는걸 깨닫자마자
자신도 백호를 사랑했다는걸 알게 되었어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행복하다는게 그런거였구나 
같이 가만히 바람부는 들판만 봐도 간질거리던게 사랑이었구나

- 안돼 백호야 안돼 눈 떠봐 응? 백호야 내가 잘못했다 떠나지 말아 

이미 차갑게 식은 백호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어도 백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았고 호열은 몇시간을 울다가 백호 얼굴을 쓰다듬으며

- 백호야 네 편지에 적힌대로 우리 다음생에는 동등한 존재로 만나자 그때는 내가 널 먼저 찾아서 사랑할게 

하고 백호가 자결할때 쓴 칼로 같은 곳을 찌르고 세상을 떠났어




그리고 현재
호열은 죽기전에 말한대로 백호를 먼저 알아봤고 먼저 다가갔고 먼저 사랑에 빠졌지
백호는 이번생에도 취향이 작고 청순하고 귀여운 타입이었지만 호열에게만은 눈길을 주지 않았고 
전생에 제대로 마주하고 고백을 못하고 죽어서인지 마음이 가면 일단 고백부터 했지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하는건 여전해서 또박또박 쓴 편지를 들고 고백하는 모습을 볼때마다 호열은 마음이 쓰렸어
이번 생도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진 못했지만 전생과 달리 기회를 잡아 농구로 꽃을 피우는 백호를 지지해주며 곁을 지키는 호열
백호의 뜻대로 사랑을 해도 죄가 아닌 동등한 존재로 태어났으나 호열이 백호를 사랑하는건 죄가 되어버려서 속앓이 하는 호열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