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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7 16:57
도쿄에서 나름 잘 사는 집이었는데 누명을 썼든지 강도 들었든지 해서 완전 망하고 대협이 혼자 살아남아서 방황하다가 유곽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덕규한테 주워져서 유곽에서 일하게 됐으면 좋겠음.

처음에는 주방 허드렛일 돕는 걸로 시작했지만, 대협이 키가 좀 크고 얼굴에 살도 좀 오르고 하면서는 자꾸 눈독들이는 사람들이 생길거임. 결국 유곽 주인이 대협이한테 손님 받을 준비 하라고 그러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몸에 밴 예의범절이 있는데다가 가르치면 바로바로 하니까 이렇게 교육이 쉬운 애도 없다고 생각할듯. 덕규는 자기가 괜히 애 주워와서 몸 팔게 만들었다고 자책하는데 대협이는 웃으면서 신경쓰지 말라고 할듯. 형 못 만났으면 길거리 돌아다니다가 객사했거나 비슷한 꼴 당했을 거라고. 적어도 여기는 먹을 것도 있고 깨끗하고 손님 가려 받을수도 있지 않냐고 농담처럼 말하는거지.

아무튼 시간 좀 지나서 대협이 이제 교육도 마쳤겠다 첫 손님 받을 날이 온 거임. 그리고 그날 영주 아들인 정환이 유곽에 침구들이랑 같이 왔으면 좋겠다. 정환이 아직 여자 손도 못잡아봤다니까 남자가 그러면 안된다고... 생일축하도 할겸 가자고 질질 끌고 온거겠지. 정환은 똥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친구들끼리 쑥덕거리면서 고민함. 저자식 처음인데 노련한 사람을 붙여줘야하나 아니면 처녀를 붙여줘야하나 그런 고민이겠지.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주인이 오늘 처음 손님 맞는 애가 있는데 어쩐지 정환의 취향일거 같다고 하면서 대협을 추천한거임.

그리고 주인의 안목은 틀리지 않아서...내내 떨떠름하던 정환의 표정이 대협을 보고 좀 풀리는거임. 물론 처음엔 남자애인거 알고 동생 보는 느낌으로 풀린거였을거임. 그랬는데 대화 나누다보니까 은근히 호감이 가기 시작하겠지. 결국 헤어질 때는 정환이 아쉬워서 대협이 손 잡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겨우 발걸음 뗄듯. 마지막까지 스친 손가락 끝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대협이 마음에 들기는 했는데, 어쩐지 혼자 유곽을 자주 찾아가기는 부끄럽기도 하고 아버지도 별로 안 좋아하시고 하니까 다시 찾아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을 거임.

그래도 한번 다시 찾으니까 두번째는 더 쉽고 세번째는 그보다도 쉽고. 정환이 아예 대협이한테 예약금을 걸어둔 바람에 대협이는 훨씬 생활이 편해졌을 거임. 다른 사람들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정환이 직접 오지 못하더라도 예약금은 걸려있으니까, 대협은 그때는 주방에도 놀러가고 하면서 또래 어린애들이랑 비슷하게 지냈을듯.

정환이 1년 넘게 단골이 되고 나자 이제 주변에서는 대협이 언제가 됐든 정환에게 낙적 받아서 떠날 거라고 예상하겠지.. 대협은 딱히 그런 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음. 적어도 본인은 그렇다고 생각했음. 정환의 정혼자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것도 정환이한테서 들은게 아니라 유곽의 다른 소식통을 통해 전해진 거겠지. 엄청난 가문 아가씨라는데 그런 아가씨가 유곽 출신의 남첩을 받아들이겠냐고. 그런 얘기가 뒤에서 도는데, 정혼자 얘기가 나온 후로 정환의 발걸음도 점점 뜸해지는거임. 조만간 예약금도 안 걸지 않을까 하고 쑥덕대는 소리에 대협은 좀 씁쓸하게 웃음. 이제 주방에 자주 못 놀러가겠네, 하고 생각하면서.

오랜만에 정환이 찾아왔을 때, 정환은 의도적으로 정혼자 얘기를 피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 얘기가 나오고 말았음. 정환이 정혼자에 대해 묘사하는 걸 들으면서 대협은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오는걸 느낌. 자기가 이정환을 이렇게까지 신경쓰고 있었나 싶어서 조용히 고개만 숙이고 있을거임.

아무튼 이제 전처럼 자주 오기는 힘들거라는 말에 대협은 알겠다고 대답함. 정환은 그 때까지만 해도 이게 맞는 길이라고 생각할거임. 대협이랑은 그냥 여름밤의 꿈 같은 거였다고 하나, 젊은 시절의 치기 같은 거겠지. 대협이도 반응을 보니 딱히 그들의 관계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 않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유곽에 미리 기별을 넣지 않고 정환이 찾아왔는데 대협이 없었으면 좋겠다. 정확히는 정환이랑 늘 만나던 지정된 방에 없었던 거. 주인이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거에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니, 어르신이 오시는 줄 모르고 대협이 다른 방에 갔다는 거임. 지금이라도 불러오라고 하니까 그것도 안된대. 지금 상대하고 있는 분도 높으신 분이라서.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정환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을 느낌. 이미 돈을 내고 시간을 산 상태인데, 그가 오든 오지 않든 항상 나만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오지 않을 때면 항상 이렇게 뒤로 돌았나? 하는 생각이 들자 슬슬 화가 올라옴.

물론 대협은 지금까지 항상 정환이만을 기다렸음. 그렇지만 결혼하고 안 찾아올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나니 이제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겠구나 싶은 거임. 언제 발길을 끊을지도 모르는데, 이정환이 걸어두는 예약금에만 기대고 있으면 안될거 같은거임. 벌이가 없는 유녀들이 어떤 신세가 되는지 봤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음. 다행히 대협은 정환이 독점하기 전까지는 인기가 많았고, 독점 후에도 중간에 얼굴만이라도 한번 볼 수 없나 기웃거리는 손님들이 있었음.

수겸은 딱히 기웃거리던 손님들은 아니었지만 정환이 다시 찾아오기 전까지는 꾸준하게 방문하던 단골 중 하나였음. 그는 주로 가벼운 도수의 술 한병이랑 안주상을 부탁하고는 장기나 바둑을 두자고 하는 특이한 사람이었음. 처음에는 종이에 몇개 수를 적어와서 이게 어떤 판인거 같냐고 물어보더니 대협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후엔 아예 장기판이나 바둑판을 들고옴.

정환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날, 대협은 수겸이랑 바둑을 두고 있었을 거임. 정환이 독점하고 나서는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우편으로만 바둑을 뒀을거임.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그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음. 그리고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서 우편으로 두던 판을 이어가고 있었음.

몇수를 놓고 난 뒤에 수겸은 대협이 집중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바둑판을 옆으로 밀어둠. 어, 아직 안 끝났는데. 대협의 말에 수겸은 전혀 집중 못하는 상태로 진행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서 말함. 대협은 미안하다며 머쓱하게 웃고는 술상을 끌어와서 수겸의 잔을 채워줬음.

문제가 뭐냐고 굳이 소리내서 묻지 않아도 뻔했음. 이정환 때문이겠지. 수겸은 어릴적에 정환과 잠깐 같은 공부방을 다닌 적이 있었고 아버지들끼리 아는 사이라 안면이 있었음. 그래서 정환이 대협의 단골이고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 윤대협 이녀석이 그런 걸 신경쓸 줄은 몰랐는데.

수겸은 오늘은 그른 것 같으니 시킨 술만 비우고는 가겠다고 함. 병을 흔들어보니 두어잔 정도면 끝날 거 같음.

- 나 가고 나면 뭐 할거야? 또 다른 손님이랑 만날 생각인가?
- 하루에 한명으로 영업 끝이에요. 피곤하다고요.

손님한테 대놓고 피곤하다고 하는 건 너밖에 없을거다. 수겸은 그렇게 말하고는 술잔을 비웠음. 다 마셨네. 그는 술병이 빈걸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남. 갈게, 쉬어라. 그렇게 말하고 수겸이 방을 나섬.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복도에서 수겸님- 하고 간드러지게 부르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음. 인기 참 많다니까. 대협은 남은 술상을 가볍게 정리하고 그걸 치울 시종을 부르려고 자리에서 일어남. 그때 방문이 열렸고, 대협은 아직 부르지도 않았는데 빨리도 왔다 생각하며 몸을 돌렸음. 거기엔 그다지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는 유곽 주인이 서 있었음. 그리고 대협이 그 표정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주인이 먼저 말할거임. 지금 이정환이 유곽에 와 있다고. 그리고 엄청나게 화가 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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