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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02:20
쌀국 머학리그 알못ㅈㅇ..






미국 유학 중 첫 대학리그 결승이 있던 밤, 약속했던 것 마냥 선수들이 묵는 호텔에 파티가 열렸어 호화롭기로 유명한 호텔이라 한 구석에서는 초청된 클럽 디제이가 기깔나는 비트를 뽑아댔고 반대편에선 근육질의 농구선수들이 한 뼘 남짓한 수영복을 입고 평생에 걸친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겠지 지금이 밤인지 새벽인지도 모르겠고 이게 수영장 물인지 술인지 온 사방에서 알콜냄새가 진동했어 귓 속 깊숙히 때려박는 비트와 레이저 조명은 무슨 마약이라도 한 것 마냥 홀리게 만들었음

정신없는 파티 한 가운데서 우성은 커다란 플라밍고 튜브에 누워 동료가 건내준 진토닉을 마시고 있었어 이미 가슴까지 벌게진 우성은 너무 취해서 솔직히 이게 진토닉인지 물인지도 구분이 안갔음 그냥 마시면 늘어지고 드러누우면 사방에 좋아하는 사람들 뿐이니까 헤실헤실 웃으면서 뭐든 건내준걸 삼킬 뿐이었겠지

그런 와중에도 포가가 된 에이스의 시선은 왜이리 날카로운지 몰라 찬 수영장 물에 발 끝이 식고 있는건 전혀 모르면서 익숙한 움직임이 주변시야로 들어오자마자 눈동자가 그걸 따라다니잖아 빠르게 예민해진 동체시력은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듯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우성은 옆에 선 누군가를 툭툭 쳐 Hey, Hold it 하고 제 플라스틱 술잔을 들려주며 튜브에서 일어났음

청록색으로 빛나는 물살을 가르고 우성은 젖은 몸을 훔치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 아까부터 보이던 누군가를 확 잡아챘음 알고 지낸지가 언젠데 아직도 조그맣고 예민한 녀석, 송태섭이었음 태섭은 술김에 강하게 잡힌 손목이 불쾌한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뭐야? 하고 쏘아붙였어 뭐..그럴 만도 하지



우성이 미국으로 온지 얼마가 지났을까, 낯익지만 반가워할 정도로 가깝지만은 않은 태섭이 유학을 왔다는 소식이 들렸어 꽤 가까운 주의 명문대에 입학한 태섭을 머지않아 친선경기에서 볼 수 있었고 그때 정식으로 안면을 텄겠지 의외로 첫 인사는 송태섭의 몫이었어 존프레스 실력은 안죽었구나, 정우성? 하는, 이름까지 기억하며 건냈던 한 마디가 그거였겠지

둘은 자주 만나긴 어려웠지만 꾸준히 연락을 했어 주로 어느 도시의 어떤 동양식이 맛있다 누구누구가 우리 선배 팀의 팬이라서 할인을 해주니 그 선배 이름을 대고 한끼 얻어먹어라 하는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나눴겠지 처음엔 드문드문 이메일을 주고 받다가 뒤늦게 핸드폰을 장만한 송태섭이 깜짝 문자를 보냈고 연락은 더 빨라졌어 처음엔 정말 스팸 문자인줄 알았겠지

이야기는 빠르게 개인사를 주고받는 단계에까지 돌입했어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눠서일까 우성도 태섭도 사적인 배경을 나누는 데에 거리낌이 덜했음 차분하게 털어놓는 가족의 영원한 부재와 누군가의 멸시, 괴롭힘 그리고 그것을 업고 타지역으로 온 부담감은 마치 다른 갈래에서 시작돼 한 곳으로 모이는 물줄기처럼 자연스럽게 섞였어 종종 몇시간이고 이야기만 하느라 휴대폰 비용이 천정부지로 높게 나온 적도 있었음



그렇게 몇개월이 흐르고 주고 받은 문자의 수가 코트에서 맞붙었던 횟수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은 어느 날, 송태섭이 전화를 걸었어 통화로 얘기해본 적이 얼마 없어서 괜히 우성도 긴장했겠지 그런데 태섭이 그런 말을 하는거야


- 야, 대학리그 대진표 봤어?


거짓말처럼 태섭의 학교와 우성의 학교가 8강 쯤에 맞붙을 운명이었어 그 전까지 붙을 대학은 둘의 학교에 비하면 그다지 강팀이 아닌지라 우성과 태섭의 만남은 무조건 예정되어있는 수순이었겠지 우성이 내심 반가워서 우리 드디어 만나는거야? 하면 태섭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어


- 그럼, 꼭 만나야지. 무조건 이겨줄게.


두어달간 몰아붙인 훈련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어 단지 미국에서 처음 뛰는 대학리그 탓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겠지 국내 최고인 우성이 산왕의 주장과 펼쳤던 프레스를 찢어발기고 돌파했던 유일무이한 사람이 송태섭이었어 울보 정우성의 타이틀을 견고히 해준 선수를 다시 만난다는건 호승심 강한 우성에게도 분명 설레는 일이었음 그와 별개인지 아닌지 아랫배가 살살 간질거리는게, 설레는 이유가 꼭 그뿐만인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얼마 뒤 마주한 둘은 전처럼 팔을 맞대고 인사를 했어 기대감에 가득 찬 우성은 입꼬리로 가파른 호를 그리며 미소를 지어보였겠지 그런데 태섭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어 분명히 우성의 눈을 피하고 있었고 애써 괜찮은 척 웃음기를 지어내고 있었겠지

아무리 겁나도 강한 척 하는게 송태섭의 특기 아니었나? 의아한 우성은 긴장해서 그렇겠거니 하고 약속한 대로 전력을 다해 태섭과 승부했어 결과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우성 팀의 승리였음

그토록 싸워보길 고대하던 우성과 태섭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니, 정우성은 승패를 떠나서 실망스러워지기 직전이었겠지 하지만 경기 전의 그 표정과 전력을 다하지 않던, 아니 못하던 태섭의 태도는 분명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였어 당장 그게 뭔지 알아내지 않으면 우성은 참지 못할 것 같아 상대팀 대기실로 곧장 달려갔겠지



당연하게도 안쪽 분위기는 살벌하리만치 가라앉았어 그 앞에 우승한 팀 유니폼을 입고 선 우성은 째려보는 눈빛을 견디며 구석에 앉은 태섭에게 다가갔어 수건을 덮어쓰고 있어서 우성이 온 것을 모르는 눈치라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이내 위를 올려다 봤겠지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 마자 태섭은 아, 하고 다시 눈을 내려 깔았어 그리곤 무거운 모을 일으켜 복도 끝 구석진 어딘가로 우성을 데리고 갔겠지


- 너 무슨 일 있어? 요즘 연락도 안되고 오늘 경기도…아니다, 아무튼 뭔데?


우성은 마치 자기가 태섭을 몰아세운 것처럼 질문을 쏟아냈어 자국어라 알아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잔뜩 깐 목소리는 어투와는 다르게 상냥했음 정작 우성을 끌고 온 태섭이 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겠지


- 그냥..내가 사적인 일이 좀 있었어.


뭐? 우성이 미간을 미푸리고 되물었지만 태섭은 더 길게 설명을 붙이지 않았어 그 송태섭이 경기력에 지장이 갈 정도로 심한 일을 겪었다 생각하니 온갖 해외 토픽급 뉴스들이 우성이 머리를 스쳤겠지 곧장 우성은 태섭이 유니폼을 늘여보며 몸 곳곳을 살폈어


- 무슨 일? 누가 너 괴롭혀? 동양인이라고 린치했어? 가만히 있어봐, 좀 보게. 코치나 감독은? 설마 보기만 해?

- ..! 그런 일 아니야. 정우성 그만 만져! 팀원 다들 친절하고 누구한테 맞은 적 없어. 아 씨, 좀 놓으라고!


결국 강하게 뿌리치는 태섭의 손에 우성은 아연실색해서 허공에서 손을 거두지도 못했어 구겨진 앞섶을 문지르던 태섭이 작게 욕을 짓씹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겠지


- 네 선배…이명헌이 헤어지자고 하더라.


생각지도 못했던 아는 이름이 태섭의 입에서 터져나오자 우성은 더 되물을 정신도 없이 놀라서 입술만 벌렸어 아니 지금 누가 누구랑 헤어지자고..?


- …너 명헌이 형이랑 사귀는 사이였어?

- …그래.

- 언제부터..?

- 2학년 인터하이 이후로…아니, 남자끼리 만나는 거 동네방네 얘기하기도 그렇고..정우성 나보다 먼저 미국 왔으면 무슨 말인지 대충 알잖아.


되려 따지듯이 말하는 태섭의 말에 우성은 적잖이 충격받아서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어 태섭이가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는 그 상대가 명헌이 형이었던거, 그리고 그걸 자신이 까맣게 몰랐던 게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감히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음 그런 반응을 태섭은 동성 연애에 대한 반감으로 읽었는지 더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어 뒤늦게 잠깐, 하고 태섭이를 불렀을 때는 한참 멀어진 후였겠지

그렇게 송태섭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우성의 머릿속엔 질문이 꼬리를 물고 연달아 튀어나왔어 태섭도 명헌도 왜 자신에게는 말할 수 없었는지, 얼마나 절절한 연애를 했길래 경기 하나를 통으로 망칠 정도로 타격이 심했는지, 설마 산왕고 출신인 나를 보고 명헌이 형이 떠올라서 패스를 버벅거렸는지, 애쓰지 않아도 완성되는 문장들이 우성을 괴롭게 했겠지 그나마 그것들을 물릴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우성은 태섭에게 문자를 보냈을거야


[ 남자끼리 연애하는거, 이상하다고 생각 안해. ]


변명으로 느껴져서 였을까, 태섭은 당연한듯 답장이 없었어 우성이 후회에 괴로워하는 동안 처음으로 둘의 대화에 기나긴 마가 떴겠지



그래서 우성은 괴로운 만큼 농구에 전념했어 모 대학 첫 아시안 선수가 칼을 갈고 나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무섭고 싸늘하게 경기를 운영해 갔겠지 쉽지만은 않았지만 우성의 팀은 결승까지 진출했고 얼마 뒤 우승컵을 손에 쥐게 되었어

그동안 우성은 관중석을 메운 타팀 선수들 사이에 태섭을 찾아 헤맸어 산등성이같이 거대한 선수들 사이에서 그 덩치를 찾지 못하는게 더 어려웠을 텐데, 태섭은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았겠지 젠장..실망했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이려나, 우성은 뒤늦게나마 솔직한 자기 사정을 말했던 태섭의 부담감을 모르지 않았어 하지만 동시에 문자에 답장 하나 없는 태섭에 화가 나기도 했겠지 대화는 피하더라도 그렇게 기대하던 경기인데, 적어도 직관을 해줄 수 있는 거잖아 우성은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어


그런데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송태섭이 파티에 등장한거야 모교 근처에 잡아둔 좁은 플랫에도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 있을 잠시간의 휴가에 국내로 돌아가지도 않고 그렇게나 좋아하던 힙한 비트에 몸을 흔들지도 않으면서 그냥 그곳에 그렇게 있는거임


- 아파, 놔줘.


우성이 다급히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음 술김에 과하게 힘이 들어간 태섭의 손목이 금방 울긋불긋해졌어 아, 미안..하고 중얼거리자 태섭은 고의가 아니었단걸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음 우선 잡아채긴 했다만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우성이 눈을 도로록 굴렸음 긴장감에 꼭 술이 깬 것만 같았겠지


- ..여기 있을줄 몰랐어.

- 어, 비행기를 단체로 예매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묶여 있었지, 뭐.


태섭은 예의 그 나른한듯 여유로운 태도로 돌아가 있었어 그치만 오랫동안 태섭이와 지내본 사람이라면 다 알았겠지 그게 괜찮다는 신호는 아니란 걸

우성은 뭐라 말할지 몰라 세워둔 태섭을 두고 어물거렸어 그동안 멀뚱히 선 태섭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고 말을 걸었음 너 귀엽다, 어느 학교야? 태섭의 능력치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 목소리에 송태섭이 적당히 응해주려 하자 우성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둘 사이를 막아섰음


- Sorry, 우리 대화중이라.


그대로 손목을 쥔 우성은 구석진 어딘가를 찾고 또 찾다가 결국 자기가 묵는 호텔 방에 태섭을 데리고 갔겠지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으려니 우성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뜨거워졌어 운동선수만 모인 술자리에다 약물 관리를 철저히 한대서 맘놓고 마셔댔는데 설마 약이라도 섞여있던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온 몸이 홧홧했음 짝눈썹을 치켜올리고 우성을 올려다보는 태섭의 표정만이 선명했겠지


- 나 좀 당황스럽다.

- 있어봐..나 진짜 할 말 있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힌 우성은 한숨을 푹 내쉬며 들뜬 가슴을 가라앉혔어 감은 눈을 뜨면 저와 달리 취기 하나 없는 태섭과 시선이 마주칠까봐 질끈 눈꺼풀에 힘을 주고 저보다 한참 작은 손목을 그러쥐었겠지


- ..미안해. 그 때, 용기내서 말해주었을 텐데 놀라서 아무 반응 못했던거. 나같아도 실망했을거야. 아마 화도 났겠지.그동안 우리가 본 세월..길진 않지만..아니 그래도 우리가 얘기한 시간..도 많진 않지만, 하여간! 서로 사연 다 아는 사이에 내가 너한테 그렇게 대하면 안됐어.

- 아이고….

- 문자 봤을지 모르겠어. 그치만 진심이야. 나 너 남자 만나는거 하나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해. 나는 그냥, 그 상대가 명헌이 형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아니, 그니까 누굴 만나던지 너의 자유인데 그냥 그런거 있잖아. 나한텐 선배일 뿐인데 너한텐 애인이라는게 그냥..! 아니아니 내가 눈치가 없어서 그래. 아 씨, 왜 자꾸 횡설수설하지.

- 야, 진정 좀….

- 그니까 태섭아 나는 너 이상하다고 생각 안해. 너랑 멀어지기도 싫어! 나 미국 와서 이렇게 대화하는 사람이라곤 너뿐인데, 아니 내가 말 하려고 널 이용하는 그런게 아니라, 그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야!!!


무슨 소설마냥 길게 이어지는 우성의 변명에 태섭이 입술을 콱 잡아채서 닥치게 했음 우브븝..하며 점점 잦아드는 우성의 목소리에 태섭이 한숨을 푹 쉬었음


- 나도 알아, 네가 나 이상하게 안보는거. 그거랑 별개로 그냥..너 방해하기 싫어서 연락 안했던 거였어. 나때문에 경기 망친 것 같아서 동료들한테 미안하기도 했고.

- ……!!!

- 알았어? 다 네 탓은 아니라고. 미친 정우성..


입술을 잡힌 우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섭이 서서히 손가락에 힘을 풀었어 가슴이 뭉클했어 그동안 걱정했던게 다 거짓말인 것처럼 근육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어 그런데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문장이 입 안을 감도는 것 같아 우성이 튀어나온 입술을 달싹였어 하지만 태섭아, 내가 말하고 싶었던건 그게 아니라….


- 태섭아….

- 아직도 설명이 더 필요해? 나 괜찮다고.

- 그게, 그게 아니라. 태섭아, 나….


아, 젠장 우성은 이 기분의 기시감을 금방 찾아냈어 태섭이랑 나누던 통화에서 간질거리던 아랫배와 둘만 있는 공간에서 발갛게 달아오르던 뺨은 분명 한 가지를 말하고 있었어 모르겠다, 정우성은 한참 전부터 술에 취했고 지금은 그토록 기대하던 송태섭의 모습에 취해 있었어 그러니까 술먹고 취한척, 마치 실수인 척, 너의 전남친이 내 선배가 아닌 척….


- 너랑 키스하고 싶어.




그 시각, 방 안에 홀로 놓여진 태섭의 휴대폰이 오늘 밤새 그랬던 것처럼 어김없이 울렸어 아무도 없는 빈 방에 낮게 울리는 진동음 끝에 반짝 켜지는 화면 위로 짧은 메시지가 떠올랐어



[부재중 통화 47건]
[문자 메시지 158건]

[명헌이형 : 태섭아, 제발 전화 좀 받….]





우성태섭 명헌태섭
우태 명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