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의 여름. 됐으면 하는 마음 반, 안 됐으면 하는 마음 반으로 학기 초에 접수 했던 유학이 결정됐다. 태섭이 유학 원서를 넣었던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고등학교 후배 둘의 미국 유학에 대한 갈망과 이미 유학 가 있는 고교 톱 플레이어였던 동갑내기의 활약을 전해 들으며 작게나마 자신도 유학의 꿈을 키웠을 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인터하이에서 최강 산왕을 이기고 그 다음 지학에서 지면서, 태섭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았다. 자신이 앞으로도 농구를 계속 해도 되겠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그 이후, 태섭이 주장이 되고 북산 농구부를 이끌면서 윈터컵에서 또 다시 전국 출전. 그리고 그 전보다는 더 높이 8강전에서 패배했다. 대만을 비롯해 치수와 준호까지 졸업을 해서 전력이 전력이 약해진 그 다음해도. 태웅과 백호와 달재를 비롯해 새로 들어온 1학년들과 늘 믿음직스러운 매니저 한나와 소연이와 함께 다시 전국의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북산은 더 이상 운으로 올라온 팀이 아닌 꾸준히 전국행 티켓을 쟁취하는 강호 팀이 되어 있었다.


태섭의 삶은 고등학교 3학년부터 꽤 많은 것이 바뀌었었다. 농구부 주장을 맡으면서 주장이 낙제를 받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학업에도 힘을 썼다. 욱하는 성깔을 참고 학교의 선생님들 다른 불량 학생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삐걱삐걱 불안하지만 잘 굴러가고 있는 농구부를 위해서 한나를 향한 마음도 접기로 했다. 한나도 스포츠 물리치료사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 들어왔는데, 괜히 자신의 마음을 앞세워 한나와의 관계도 농구부의 분위기도 망칠 수는 없었다.



태섭은 자신의 마음을 덜어내려고 힘썼다. 자신의 농구 실력을 갈고닦는 데 더 집중했고, 농구부 후배들을 가르치고 훈련 시키는 데 더 집중했다. 농구부 녀석들은 키가 큰 녀석들이 많았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작은 자신은 깔봐지기 쉬웠다. 그때쯤 태섭은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려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을 찾아봤다. 그래봤자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에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에, 농구부로 유명한 도쿄의 한 대학에 들어간 대만이 의외의 사람들을 데리고 북산에 찾아왔다.


같은 대학 농구 팀에서 뛰고 있다는 그들은 머리가 꽤 자라 있었다. 바로 알아본 자신과 달리 백호와 태웅은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있는 그들을 바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농구공을 들고 슛을 쏘자 알아봤다. 이러나저러나 농구에 미친 놈들이었다. 작년 고교 최강 포인트 가드와 2학년 에이스가 유학 간 이후 산왕의 에이스가 됐던 3학년의 가드의 실물을 처음 본 1학년생들도 난리가 났다. 그 때의 인연으로 명헌과는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었다.


태섭 그 이후로 종종 명헌에게 연락했다. 농구부에 관한 고민, 주장으로서의 고민, 선배로서의 고민, 학업에 관한 고민으로 시작했던 상담이 어느 순간부터 변질됐다. 조금씩 서로의 사소한 일상들이 섞이더니 점점 대화는 고민 상담이 아닌 일상의 교류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대화가 이어지다가 태섭과 명헌이 서로의 지역으로 몇 번 발을 옮길 때쯤엔 핑계를 대지도 않았다. 그렇게 서로의 연락이 기다려지고 존재가 익숙해졌을 때, 그들은 조용히 첫 연애를 시작했다. 일부러 덜어내려고 했던 마음들이 있던 곳에 또 다른 마음들이 쌓여갔다.


괜히 명헌에게 물어볼 수 없는 것들은 같은 포지션이라 궁금하다는 핑계를 대며 대만에게 물었다. 대만은 명헌과 동오와 꽤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인지 TMI를 뿌리기도 했는데, 태섭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듣는 그의 모습들이 꽤나 기꺼웠고 또 불안했다. 명헌의 무심한 다정은 태섭만이 알아본 것이 아니었다. 이미 고교 농구 잡지에도 실린 적이 있는 사람이고, 대학에서도 최고의 포인트 가드로 손꼽히는 사람인데 자신만 알아봤을 리가 없는 것은 알고 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 사살을 받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남성 팬들을 몰고 다니는 대만과 여성 팬들을 몰고 다니는 동오를 옆에 두고 보면 별거 아니라고 느낄 수 있겠지만 명헌도 만만찮게 팬들이 많았다. 대만과 동오가 연예인 같은 느낌으로 인기가 있었다면, 명헌은 훈련 시작 전후나 학과 수업이 끝나고 종종 누군가에게 불려가곤 했다. 대만은 이명헌 저거 또 고백 받는다며, 어째서 저런 이상한 뿅쟁이 자식이 그런 쪽으로 인기가 많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며 태섭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대학 들어오면 애인 생긴다는 거~ 다 거짓말이다 태섭아. 될놈될이야, 될놈될.


태섭은 이런 불안들을 명헌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아 꼭꼭 눌러 담았다. 강한 척을 하는 것은 태섭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였으니까. 카나가와와 도쿄가 가깝다고는 하나, 오가기엔 시간을 따로 내야할 정도의 거리임을 태섭은 다행스럽게 여겼다. 오히려 너무 가까웠다가는 태섭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의 결점을 같은 것들도 명헌의 눈에는 크게 보일지도 몰랐다.



태섭은 고등학교 3학년의 윈터컵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농구부에서 은퇴했다. 다행히 태섭의 가능성을 스카우터도 알아봐 주어, 대만과 명헌이 다니는 학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농구부로 이름이 있는 학교에 들어가기로 확정됐다. 명헌에게는 불행히도, 태섭에게는 다행히도 같은 도쿄도 내지만 각 대학의 거리가 좀 멀었다. 그나마도 카나가와 보다는 가까워 조금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명헌과의 연애는 뜨뜻미지근하게 흘러갔다. 태섭은 자신의 모든 모습을 명헌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보여줄 용기가 없어, 매번 한 발짝씩 물러나기에 바빴다. 명헌은 태섭이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놓기 힘들어하는 타입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늘 기다려줬다. 태섭이 한 발짝 내디딜 때면 같이 발을 맞추어 내디뎠다. 자신의 울퉁불퉁 모난 모습을 감싸주고 배려해주는 명헌의 모습에 태섭은 갑갑함을 느끼기도 했고,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때에, 대학 농구부에서 자신에게 제안했던 것들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1학년 때는 벤치 멤버로 시작해서 2학년 때부터는 주전으로 뛰게 해주겠다고 했으나, 아직 프로 제안을 받지 못한 3학년 포인트 가드를 주전으로 세우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처음 입학 당시 농구부에 후원금을 꽤 주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태섭은 그게 진짜였다는 것을 그때 눈치챘다. 태섭은 대학 코치에게 항의했으나, 뾰족한 수는 없었다. 코치는 위기가 곧 기회라며 그 대신 유학 프로그램을 하나 소개해줬었는데, 원서를 접수하고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 붙었던 것이다.


태섭은 자신이 주전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것을 명헌에게 말할 수 없었고, 명헌의 귀에 들어갈까 봐 대만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실력으로만 승부를 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렸었다. 조급함이 태섭을 좀먹었다. 그래서 유학이 확정이 났을 때, 태섭은 미국으로 도피했다.



뜨뜻미지근하게 연애를 했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헤어질 때는 불 같았다.


헤어지자는 일방적인 통보에 명헌은 화가 나 보였다. 태섭이 불안해하는 것도 알고 확신을 주기 위해서 노력했었다. 명헌은 서로 발을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는 연애를 하고 싶었다고. 태섭이 느리면 당연히 명헌이 기다려 줄 것이고, 명헌이 느리면 태섭도 기다려줄 수 있는 그런 연애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기꺼이 잡힐테니 너도 나에게 잡혀달라고 하는데도, 다른 궤도를 생각하고 있는 태섭을 명헌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태섭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이명헌을 묶어 둘 수 없다고 생각했고, 확신을 줄 수 없었던 자신과 다르게 명헌은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속마음을 꽁꽁 숨기고 도망만 치는 자신에게 벗어나,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한다고. 늘 배려만 받고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이명헌이라는 사람을 고작 송태섭이 갖고 있기엔 아깝지 않느냐고. 게다가 지금 미국 유학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태섭, 넌 가끔 생각이 과하게 많아. 그래서 내가 내리는 판단, 의지를 무시해. 들어주질 않아.”

“넌 왜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거야?”

“송태섭 나는 기다릴 수 있다고 했어.”


“아뇨, 형. 제가 잡아둘 수는 없어요. 형도 저 말고 좋은 사람 만나야죠.”

“…제가 확신을 주지 못한 거예요.”

“누군갈 기다리는 거, 제가 해봤는데 할만한 게 못 돼더라구요.”


서로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카페에 앉아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그때의 인터하이 같다고 태섭은 생각했다.


“명헌이 형. 우리 헤어지는 거예요. 저 기다리지 마요.”



어찌보면 구질구질하게 마무리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태섭은 그렇게 명헌과의 연애도, 도쿄의 자취방도 다 정리하고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약 2년간의 비밀 연애가 끝이 났다. 또 여름의 이별이었다. 태섭에게 여름이란 이별하는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선택지가 없던 이전의 이별들에 비하면, 이번엔 태섭의 의지로 이별을 선택했다는 것이 달랐다. 이렇게 우리 빼고 아무도 모르던 연애가 끝이 났다. 송태섭과 이명헌의 사이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깔끔한 거야, 태섭이 중얼거렸다. 잠깐 교차하는 듯했던 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평행선의 상태로 돌아갔다. 같은 코트 위에 존재할 수는 있으나, 절대 같은 팀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자신을 붙잡는 이명헌에게 이별을 고했으면서도, 송태섭은 여전히 이명헌을 그리워했다. 자신의 속내를 비추지 않아도 알아주던 이명헌이 주던 안정감과 단단한 바위처럼 존재하고 있던 이명헌에게 약한 척 의지하고 싶었다. 어디에서든 쉬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던 태섭은 아마 이곳, 미국에서도 이방인으로 존재할 터였다. …명헌도 태섭과 사귈 때, 이렇게 늘 이방인이라고 느꼈을까?


미국 유학 1년 차, 송태섭은 아주 자그마한 이명헌의 흔적을 만났다. 이역만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렇게 당신의 흔적을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최대한 농구에 집중하려고 했던 태섭을 이명헌은 일본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흔든다. 모교를 사랑하고 자부심이 있던 명헌은 졸업도 하지 못한 채 유학길에 오른 후배의 소식을 종종 전했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후배를 예뻐하고 기특해하는 모습이 태섭의 눈에도 보였다. 자신도 북산에는 꽤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어두운 구석 없이 성장하는 모습이 어찌 눈이 가지 않겠는가. 자신만 해도 농구 초짜였던 백호가 골 밑을 맡길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파워포워드로 성장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했던 태웅이 적절히 공을 패스하며 훌륭한 팀 플레이어로 성장할 때 뿌듯함과 기특함을 느꼈다. 그저 깰 수 없는 그들의 유대감에 부러움과 작은 질투를 느꼈던 태섭이 치졸한 것이다. 우성과 달리 태섭은 헤어지면 남남인 존재였으니까.



강호 대학 팀에서 포인트 가드로 뛰고 있는 정우성은, 오랜만의 동향인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어왔다. 태섭은 그런 우성을 적당히 대했다. 타지에서 안면이 있는 상대를 만나면 반갑겠지. 태섭도 우성이 반갑긴 했다. 간만에 모국어를 하는 감각이 그리웠고, 우성은 또 만만찮게 농구에 미친 놈이었으니까. 우성은 종종 원오원을 제안하곤 했는데, 그럴 땐 태섭이 우성에게 배워가는 점도 많았다. 문제는 인원수를 늘려서 하는 경우였다. 정우성은 국내 고교 최강의 팀에 속해있었다. 약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는 산왕에서 팀으로 플레이하는 농구를 배웠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포인트 가드도 그 때의 포인트 가드였다. 정우성의 포인트 가드 플레이에서, 이명헌이 묻어나왔다. 그게 느껴질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며 속이 울렁거렸다.


명헌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태섭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우성에게 산왕에 대해 물어봤다. 비밀 연애를 하길 잘했지. 우성인 태섭이 그저 자신이 한번 꺽은 적 있는 고교 최강 팀에 대해 궁금해하는 줄 알았다. 우성이도 산왕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강한 편이었으므로 말의 물꼬를 틀면 우다다다 산왕 농구부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태섭은 몰래 우성의 추억을 훔쳐 먹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명헌의 모습을 엿보기 때문일까 아니면 헤어져놓고 구질하게 굴고 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일까 작은 죄책감이 태섭의 마음속에서 움텄다.



우성인 종종 산왕과 고향이 그립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신현철 씨의 자비 없는 암바가 그립다고도 했다가, 어릴 적 했던 광철이와의 원오원에 대해서도 그립다고 했다가, 이제는 들어맞지도 않는 산왕고교 농구부 티셔츠를 입기도 했다. 키도 몸도 더 커져 놓곤 지금 고등학교 2학년 때의 티셔츠가 몸에 맞길 바라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그 티셔츠도 수명을 다했다. ‘SANNOH BASKETBALL’ 이라고 적힌 글자가 납작하게 늘어나 버렸다. 우성인 그 늘어나 버린 티셔츠를 버리지 못했고, 산왕 소속도 아니면서 태섭이도 그 티셔츠가 아까웠다.


“안 되겠어!”


몇 달을 그 늘어나 버린 티셔츠를 끼고 있던 우성이 불현듯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어엉? 뭐가, 태섭의 고개가 우성일 따라 올라갔다. 저거 옷 더 꽉 쥐면 더 상하는 거 아닌가. 가뜩이나 정우성 손아귀 힘 좋던데… 자린고비마냥 우성이의 농구부 티셔츠를 보며 같은 티셔츠를 입었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못하게 생겼다. 굿바이-, 티셔츠야. 넌 좋은 단체 티셔츠였어.


“티셔츠를 추가 구매할 수 있는지 산왕에 문의해봐야겠어!”

“…그게 학교에 문의한다고 살 수 있는 거였냐?”

“태섭아 바보야? 안 되면 티셔츠 공동 구매할 때 나도 끼면 되지. 광철이한테 부탁해봐야겠다. 몇 장 사달라 하지?”


티셔츠… OB가 아니어도 살 수 있나? 태섭은 편지지를 꺼내 들며 신나게 펜을 찾고 있는 우성을 바라봤다. 우성이는 금세 펜을 찾더니 자리에 앉지도 않고 벽에 편지지를 대곤 혼잣말을 해대며 편지를 썼다. 내가 입을 거 5장이랑~ 혹시 모를 예비용 또 5장이랑~. 헉! 져지 세트도 살까? 바지는 아직 멀쩡하긴 한데. 음, 요즘 허벅지가 낑기는 느낌이었으니까 한 사이즈 더 큰 걸로 2세트 정도만 사야겠다. 음… 반팔 잠바도 사…? 그건 현철이 형이 산왕 농구부 창설 이래 최고 미남인 나도 못 살리는 거랬는데… 응, 그건 빼자! 그거 넣을 자리에 꽝철이한테 간식 넣어달라고 해야지~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인 우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를 다 썼고 우표를 꺼내서 붙였다. 태서바, 오늘 자고 갈래? 낼 편지 부치게 우체국 같이 가주라. 나간 김에 오랜만에 피자도 먹자.


우성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은 한 달 반 뒤에 아주 묵직한 국제 택배로 돌아왔다. 광철 씨는 우성의 경기를 보러 다녔기 때문에 산왕 농구부의 도 감독과 OB들과 아는 사이긴 했으나 따로 옷을 구매하는 데에 애를 먹은 듯했다. 보통 봄에 단체 티셔츠와 져지 세트를 공장에 주문하다 보니 시기상 구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한창 성장기인 운동부 녀석들의 옷 사이즈가 하루아침에 달라지다 보니 올봄에 수량을 넉넉하게 주문한 게 남아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우성이 요구한 XXL는 6장이나 있었다. 운동부 녀석들이 크기는 해도 대부분 아직 몸이 채 완성되지 않은 고등학생들이므로 XXL는 주문 수량 자체가 적었지만 그만큼 남기도 했다는 것이다. 부족한 수량은 대신 주문량이 많았던 XL 사이즈를 3장 보내줬다. 물론 우성이가 기존에 입던 사이즈도 XL 사이즈였으므로 있어 봤자 말짱도루묵인 사이즈긴 했다. 져지 세트 같은 경우는 다행히도 원하는 사이즈와 수량을 얻어냈다. 그 과정에서 산왕 OB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듯해 우성이는 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허엉… 명허니 형, 현처리 형… 훌쩍… 고마운데 XL 보내줄 바엔 과자 더 넣어주지… 어차피 나 못 입는데…


“근데 이 사이즈 어떡하지.”

“XL? 안 입게?”

“저번에 옷 늘어난 거 봤잖아 태섭아. 내가 이걸 어떻게 입어… 그냥 액자 사서 보관해둘까. 전시용처럼?”

“…안 입을 거면 나 줘.”

“엑, 너 산왕 농구부에 들어오고 싶었어?”

“겠냐? 그, 뭐냐. …멀쩡한 옷 안 입는 거 아깝잖아. 안 입을거면 나 줘.”

“음…”


제 고집에 맞춰주기 위해서 이러저리 바쁘게 다녔을 광철 씨와 선배들의 고생을 떠올린듯 우성이 고민에 빠졌다. 우성은 입지도 못할 사이즈의 티셔츠와 긴장한 듯 삐쭉 눈썹을 올리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태섭을 번갈아 봤다. 이명헌이 입었던 사이즈의 산왕 농구부 티셔츠! 그건 귀하다. 태섭은 몰랐었지만 인터하이 본선의 첫 경기, 풍전과의 시합에 산왕공고에서 관객으로 참관했다는 것을 들었었다. 그 때는 다 같은 이상한 반팔 잠바에 농구부 티셔츠를 입은 빡빡이 군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사이에 이명헌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명헌과의 추억을 하나 가지고 싶었다. 이게 헤어진 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 혼자 계속 좋아하는 건 해도 되잖아? 아니면 우성이한테서 향수병이 옮아버린 걸지도 모르겠지. XL 사이즈의 산왕 단체티를 간절히 바라는 태섭의 상태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우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갈 가늠하는건가, 알아챈건가. 태섭이 한 번 더 우성일 설득해보려고 입을 연 순간 우성이 말했다.


“그러면 뭐 해줄건데, 태섭아?”


결국 태섭은 단신 포인트 가드로서의 큰 놈들과 맞붙는 자신의 팁과, 무제한 원오원 제공, 곧 미국으로 유학 올 태웅과 백호의 무제한 원오원도 약속하고 나서야 티셔츠 3개를 받아낼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정우성. 서태웅이랑 강백호는 원래도 무제한 원오원을 요구하는 쪽이었다. 오히려 해주느라 네가 지칠걸. 태섭은 소중히 티셔츠 3개를 받아들고 자신의 대학 기숙사로 돌아갔다. 금전적인 지원이 나름 빵빵한 우성과는 다르게 태섭은 기숙사가 제일 괜찮은 옵션이었으니까.


태섭은 결국 티셔츠 하나를 포장된 상태 그대로 냅둘 수밖에 없었다. 옷은 입다 보면 헤지고 빵꾸가 나기 마련인데, 온전한 상태의 티셔츠가 하나는 있었으면 했다. 그럼에도 태섭은 나머지 2개의 티셔츠도 아껴 입었다. 가끔 고향이 그리울 때, 명헌이 보고 싶을 때 정도만 꺼내 입었다. 그런데 그게 가끔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산왕공고가 단체 티셔츠를 주문한 공장이 싸구려 옷감을 사용한 것이었는지. 티셔츠는 생각보다 빨리 헤졌다. 별로 안 입었던 거 같은데. 그래도 이제는 ‘SANNOH BASKETBALL’이라 적힌 글씨가 점점 희미해져서 원래의 글씨가 뭐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이제 백호가 보더라도 더 이상 배신자라고 놀릴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그 티셔츠가 원래 산왕 농구부 단체 티셔츠라는 것을 눈치챈 우성이 산왕을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며 놀려댔을 뿐이었다.



백호와 태웅이와 우성이와는 달에 한두 번씩은 만나곤 했다. 가끔 바쁜 일정이 있으면 약속이 취소되거나 시간이 되는 사람끼리만 만나곤 했는데, 주로 우성이 애인과의 약속이 있다며 가끔 빠지곤 했다. 약속에 빠지는 사유를 들을 때마다, 백호는 어떻게 까까중 주제에 연애를?! 하며 늘 절망했다. 빈말로도 우성의 사교성이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성은 운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지라 키도 크고 몸도 좋아 인기가 많았다. 얼굴도 올망똘망하니 귀엽다고 주변에서 난리였다. 종종 태섭의 학교에 연습 경기를 하러 오는 우성이를 보고 별로 말을 붙여본 적 없는 애들이 말을 걸어오는 걸 보면, 우성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오히려 대시 받는 것 치고는 우성인 연애를 하지 않는 편이다.


우성은 그 다음 모임에 얼굴을 비췄다. 백호는 우성을 붙잡고 어떻게 사귀게 된 것인지 바른대로 고하라며 짤짤 털었다. 태웅이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보였고 그저 원오원을 하고 피곤했는지 밥을 먹다 말고 졸고 있었다. 태섭은 일련의 행사로 자리 잡은 청문회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대충 맞장구만 쳐주고 말았다. 우성이는 연인과 만나게 된 경위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다가, 태섭의 관심 없는 표정을 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근데 태섭아. 너는 왜 연애 안 해?”


응-? 달갑지 않은 화제 전환에 태섭이 콜라를 마시다 말고 되물었다. 강백호는 국내에 여친 있다며, 뭐더라 소영 씨였던가. 소연 씨거든, 까까중?! 멋대로 이름 부르지마! 닳아! 아무튼, 쟤는 임자 있고. 서태웅은 농구 바보고. 그러는 너는 왜 안 해? 다시 한번 물어오는 우성이에게 태섭은 빨대 끝을 조금 짓씹고는 대충 대답했다.


“뭐… 연애는 뭐 혼자서 하냐? 상대가 있어야 하지?”

“뭣이~! 너 좋다는 사람 꽤 있는데! 소개 시켜줘?”

“뭐라고! 송꼬마가 인기가 있다고! 거짓말 하지 마 까까중! 그럼 나는? 나는??”

“너는 소연 씨뿐이라며.”

“물론 이 강백호한테는 소연 씨밖에 없지. ”


그래서 이 몸이 인기가 있냐니깐! 음… 아무래도 인기는 서태웅이 더 많지? 뭐라고~! 태섭은 이대로 백호랑 우성이 투닥거리고 이 화제를 잊어줬으면 했다. 그냥 아예 태웅이를 깨워서 또 원오원이나 하자고 할까? 이 농구 바보들은 농구공 하나만 던져주면 모든 걸 까먹고 농구공에만 집중하니까,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긴 하다. 태섭이 태웅이를 깨우기 위해 태웅의 어깨를 잡고 작게 흔들었다. 태웅아-, 일어나라.


“걘 좀 냅둬. 졸린가보지. 그래서, 태섭아. 소개팅 해줄까?”

“아니 됐다고. 나 주제에 무슨 연애야, 임마.”

“뭐야, 송꼬마? 자신 없는 남잔 인기 없어. 아니면 어디 신체적인 문제라도 있어? 다른 데도 꼬마처럼 작다던가…”

“헉…! 태섭아 그랬던 거였어? 하긴 이쪽 애들이 작은 건 안 좋아하긴 해.”


아니, 이 미친 새끼들이! 작긴 뭐가 작아!


“안 작아, 미친놈들아!”

“아냐, 태섭아. 이해해. 그런 거면 연애 생각이 없을 수도 있지.”

“그래 송꼬마. 연애 못 한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기운 내.”

“…… 주장, 작아요?”


시끄러운 소리에 깬 태웅이 말을 얹었다. 원래 선배를 놀리고 막 그런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강백호한테 물들어버린 건지 서태웅도 합세해서 놀려댔다.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하필이면 태웅이 바깥에 앉아있어서 나가지도 못하고 갇힌 채였다. 태섭은 이들이 자신이 왜 연애를 하지 않는지 말하기 전까진 놓아주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다.


“아니, 태웅아. 내가 알기론 너도 연애한 적이 없는데 나한테 이러기냐?”

“해봤어요.”

“뭐?! 진짜?! 언제?!”


연애를 해봤다는 태웅이의 말에 놀란 것은 태섭 하나뿐이었다. 뭐야, 너네 다 알았어? 작은 배신감이 생겨났다. 아니. 정우성도 알았는데 나한텐 안 알려준 거냐, 태웅아. 형 마음 아프다… 태섭이 우는 소리를 하자 태웅이 후배한테 타학교 출신보다 관심이 없다니 제가 더 섭섭해요, 주장. 하며 조용히 맞받아쳤다. 그래서요? 주장은 왜 연애 안 하시는데요? 태웅이까지 이렇게 나오니 태섭은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 태웅아… 저도 궁금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소개해달라는 말도 들었어서요. 농구 해야 하는데 말 걸면 귀찮아요.


“난… 난 그냥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 그래. ”


그러니까 왜! 할 생각이 없냐고! 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들을 보며 태섭이 말을 고르다가 덧붙였다.


“그냥… 난 아직 전 애인 못 잊었어…”


송태섭의 폭탄 발언 이후, 우성과 백호는 제대로 말하라며 태섭을 들들 볶았다. 태섭을 소개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거절할 멘트가 생긴 태웅만 평온했다. 우성이와 백호는 언제 사귀었는지, 미국인인지 아닌지, 우리가 아는 사람인지, 어디서 사귀었는지 등에 대해 물어댔다. 눈을 피하는 태섭을 보고 백호가 송꼬마! 설마 한나 선배야? 고백하자마자 차인 거 아니었어? 사귀었어? 라고 질문 폭탄을 날렸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가 괜히 백호가 한나를 곤란하게 만들까 봐 태섭은 한나랑은 농구부 주장 역할을 맡으면서 친구로 남기로 약속한 사이라고 해명했다. 그럼 도대체 누구냐며 툴툴대는 백호를 보면서 태섭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이 이상은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국내 농구판은 꽤 좁은 편이었으므로 건너 건너 서로 다 아는 사이였고, 이명헌은 이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정우성은 산왕공고의 선후배 사이였고, 서태웅은 주니어 국가대표로 만난 적 있는 사이였고, 강백호와는 비교적 관계가 멀었지만 북산 선배인 정대만과 이명헌이 같은 대학 동기였다. 작은 단서라도 흘리면 알아챌 가능성이 있었다. 비록 서태웅은 관심이 없어 보였고, 강백호는 눈치가 없었지만, 정우성은 송태섭보다 이명헌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이상 말해주지 않을 거란 것을 눈치챈 정우성이 한발 물러나서 겨우 상황이 종식됐다.


이후, 정우성과 송태섭은 NBA G리그에서 각각 스타팅과 벤치 멤버로 뛰느라 바빠졌다. 강백호와 서태웅도 마지막 NCAA에서의 해를 마무리 짓느라 정기적으로 만나던 모임도 흐지부지해졌다. 이다음 해에 백호와 태웅도 NBA G리그에 데뷔했지만, 애초에 각각이 소속된 팀도 거리가 멀어졌고 시즌 중의 살인적인 경기 스케쥴 때문에 구단 체육관과 숙소만을 오가는 것만 해도 지쳤다. 그들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시즌 중 서로의 팀끼리 경기를 하거나 비시즌 중에 휴가를 맞출 때 정도가 다였다. 그마저도 백호는 소연이를 보겠다고 열심히 국내로 들어갔고, 우성과 태웅도 종종 국가대표 선발전을 위해 국내에 들어갔다. 그들은 태섭에게도 같이 가자며 제안을 하곤 했지만, 벤치 멤버로 시작해 겨우 스타팅으로 설 수 있게 된 태섭은 그 제안을 거절하곤 했다. 일단 자신이 소속된 팀에서 고정 스타팅을 할 수 있어야 국가대표라던가 해볼만 할 것 아닌가. 애초에 국가대표를 할 만한 포인트 가드는 저 말고 국내에 널려있기도 했고 말이다. 해남의 이정환이라던가, 능남의 윤대협이라던가, …산왕의 이명헌이라던가.


태섭은 자신이 소속된 팀에서 고정 스타팅이 됐어도, 국내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우성과 태웅, 백호가 미국에서 그 정도면 잔뼈가 굵으니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봐도 무리 없을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도 또 거절했다. 국가대표라는 명예로운 자리가 탐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운동선수의 궁극적인 목표란 결국 국가대표로서 세계 무대에 뛰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차피 태섭은 국내 리그에서 뛸 생각이었으므로 그렇게 급하진 않았다. 올림픽 경기는 다 챙겨보는 편이지만, 국내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플레이 스타일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기도 하고. 국가대표는 국내에 들어가서 뛰어본 후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이다. 그전에 국가에서 태섭을 불러주지 않으면 또 말짱 도루묵이지만. 아무튼 태섭은 국내는 최대한 늦게 들어가고 싶었다.


태섭은 NCAA 리그에서 2년, NBA B리그에서 또 4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국내로 들어갔다. 다행히 몇 개의 구단이 컨텍이 들어와서 팀 분위기를 보고 계약을 진행하겠다고 말해둔 참이었다. 백호와 태웅이에게는 먼저 들어간다고, 국내에 들어오면 또 보자며 인사를 해뒀었다. 우성인 국내의 어느 스포츠 브랜드와 광고 계약을 맺었다며 태섭의 비행편에 시간을 맞춰, 좀 더 이르게 같이 국내로 들어가게 됐다. 13시간의 비행시간으로 심심했던 차에 피차 잘된 일이었다. 태섭은 우성이와 그동안의 미국 생활의 힘들었던 점을 이야기하고 덕분에 잘 지냈었다는 둥 훈훈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차피 국내에 들어가면 정우성은 광고 촬영으로 바쁠 것이고 자신은 오랜만에 가족도 보고 북산의 선후배 친구들을 봐야 했기 때문에 바빴다. 태섭은 입국 수속까지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가며 우성이에게 앞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잘하자고 종종 연락하라고 안부 인사를 건넸다.


“뭣…! 태섭아! 너 이대로 가게?”

“나도 집 가야지…? 너 출국하기 전에 연락해. 이대로 가면 또 오래 못 볼 테니까, 한 번 더 보자.”

“안 돼…! 너 일정 없으면 나랑 어디 좀 같이 가! 아냐, 일정 있어도 가야 해!”


우성은 곧바로 돌아서려고 하는 태섭을 붙잡았다.


“아니! 얘 왜 이래! 나 좀 집에 좀 가자!”

“어차피 당장 갈 거 아니잖아! 하루 정도는 양보해! 양보해!”


이미 미국에서부터 여기까지 총 16시간 정도는 같이 있던 우성이 땡깡을 피웠다. 미친놈아! 우리 비행만 13시간 했어! 좀 쉬자 좀! 태섭아! 너는 농구 선수면서 체력이 그렇게 거지야?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누가 누굴 키워, 임마! 그렇게 따지자면 오히려 내가 널 키웠지!


도로의 바로 옆에서 옥신각신하고 있던 차에, 그들의 옆으로 큰 승용차가 멈춰 섰다. 우성은 그 차를 보고 태섭의 캐리어를 잡아채 트렁크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미친! 니 캐리어나 챙겨! 이 캐리어 도둑아! 태섭이 아연실색해서 우성을 잡으려고 했을 때, 운전자석 쪽의 창문이 내려가며 낯익은 얼굴이 그를 반겼다.


“송태섭 선수! 오랜만입니다?”

“예? 아… 네… 안녕하세요?”


우성이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태섭이 그제야 운전자석에 앉아있는 사람을 살폈다. 여전히 짧은 빡빡머리를 고수하고 있는 신현철이었다. 아…! 익숙한 얼굴을 알아본 태섭이 탄성을 질렀다.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한 태섭이 현철이 자신을 불렀던 호칭을 그대로 돌려줬다.


“신현철 선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예. 저야 잘 지냈죠. 우성이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비행도 피곤하셨을 텐데 타세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택시 타면 됩…”

“우성아! 트렁크 열었다, 짐 실어!”

“이미 실었죠, 형 문 열어줘요. 뒷자리에 탈게여.”


거절하려고 했던 태섭의 말이 현철의 말에 묻혔다. 잠깐 고장 난 태섭이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에 우성이 짐을 모두 트렁크에 싣고는 뒷자리에 태섭이를 꾸겨 넣었다. 어, 어, 어…?


“형 가요! 가는 데 몇 분 걸려요?”

“엉. 한 30분? 태섭 선수, 좀 쉬고 계세요. 금방 도착합니다.”

“예? 아니 저 어디 가는데요?”

“형! 말 편하게 해요! 태섭아, 너도 말 편하게 해!”


차를 운전하면서도 신현철은 가볍게 대화 주제를 계속 던졌다. 종종 우성이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다며 말을 편하게 해달라고 한 그는 국내 리그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환영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태섭이 궁금해하는 국내 리그의 소식과 눈여겨보고 있는 구단의 선수들에 대해 말해주기도 했다. 처음 동의를 얻지 않고 차에 태운 것과는 다르게 현철은 배려도 해주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어느 고기집에 도착하기 직전쯤에는 그들은 이미 현철이 형, 태섭아 하며 호형호제하고 있었다.


현철이 주차를 하고 들어가겠다며 우성이와 태섭을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태섭은 우성의 귀를 잡아 내리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우성은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곤 그대로 태섭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우성의 손이 어깨를 꽉 잡은 게 느껴졌다. 손아귀 힘도 쎄면서 미친놈… 아파 죽겠다. 내 어깨 부러지면 고소해야지.


“어! 우성아, 여기!”

“헉 동오 형! 오랜만이에요.”

“얼른 앉아. 비행 힘들었지? 태섭 씨, 태섭 씨도 앉아요.”


아… 네… 태섭은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아무 의자에 앉았다. 동오 혼자서 이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있는 게 아무래도 불안했다. 최소 8명은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가드와 포워드 두 개의 포지션을 다 구사할 수 있는 장신의 에이스 하나, 그보다는 조금 작은 국내 가드 포지션 중에서도 탑급인 사람 하나, 그리고 더 작은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들어온 포인트 가드 하나, 지금 주차하고 있을 2미터가 넘는 거구의 센터 하나의 몸집 사이즈를 생각하더라도 4명분의 자리만 있으면 된다. 자릿수는 인원수의 2배, 심지어 산왕 셋에 북산 하나. 설마… 아니지…? 정우성?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응? 정우성 와 있네?”

“우성이 형!”

“현필아! 낙수 형! 오랜만이에요. 낙수 형은 현필이 옆에 있으니까 잘 보이지도 않네요.”

“신현철. 암바.”

“오냐.”


으아아아악! 항복, 항복! 씨이… 현철이 형, 농구 선수 맞아요? 사실 레슬링 선수 아니야? ……끄아아아악! 타, 타임! 타임! 잘못했어요! 우성의 비명 소리를 배경음으로 하고 낙수와 현필이 자리에 앉았다. 먼저 앉아있던 동오와 인사를 나누고, 그들은 맞은 편에 앉아있던 태섭과도 인사를 나눴다. 추가된 인원에 현필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하고 낙수가 물컵을 분배했다. 다른 애들은? 좀 늦는대. 먼저 먹으라던데. 아, 그래? 현철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럼 일단 10인분 시킬까? 소주는 몇 병?


태섭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건 산왕 동창회 모임이었다. 우성이도 최근에 바빠 작년부터 국내에 잘 들어오지 못해서인지 다들 벼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얼굴들은 다 익숙한 얼굴들 뿐이었다. 그래, 정우성이 미국으로 유학 가기 직전의 마지막 공식전… 인터하이 32강 시합 때의 산왕 주전 멤버였다. 자리는 8개, 앉아있는 인원은 6명. 그리고 하필이면 좌석 제일 끝 쪽에 앉은 낙수와 현철의 맞은편 자리가 공석이었다. 그 당시 주전 멤버 중에 없는 건… 부주장 정성구와, 주장 이명헌 뿐이었다. 아마 늦는다고 했으니 둘 다 참석할 확률이 높았다. 속이 다시 울렁거려왔다. 비밀 연애하질 말걸. 차라리 정우성한테는 넌지시 알릴걸. 그랬다면 자신이 우성에게 잡혀서 이곳에 올 일도 없었을 텐데.


이미 후회해봤자 늦은 일이다. 자신은 이곳에 있고, 이명헌은 이곳으로 오고 있을 테니까. 태섭은 그저 최대한 웃는 낯으로 적당히 이들의 대화에 섞여들 뿐이었다. 차라리 술을 빨리 마셔서 많이 취한 것 같다고 집으로 들어갈까? 그렇게 판단한 태섭을 술잔을 빠르게 돌렸다. 우성이는 신이 나서 다른 형 동생과 건배를 해댔고 태섭의 옆에 앉았던 현철이 태섭의 페이스가 빠르다며 걱정을 해줬다. 하하, 오늘따라 술이 다네요….



태섭의 등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낙수, 현필, 동오가 아는 척을 해왔고 태섭의 옆에 앉아있던 우성이 벌떡 일어났다.


“성구 형!”

“어, 우성아 오랜만. 잘 지냈냐?”


그들은 태섭의 옆쪽에서 서로 얼싸안았다. 유학 생활 내도록 산왕 얘기를 해대며 애틋하게 여기더니, 그쪽 선배들도 졸업도 못한 채 유학간 후배가 애틋하긴 한가 보다. 태섭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성구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흠칫, 놀란 태섭과 우뚝 서 있는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뿅.”


비록 이렇게 마주치고 싶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기도 한 어미였다. 옆에서 성구와 인사를 나누던 우성이 명헌 쪽으로 몸을 틀었다.


“명헌이 형! 형도 늦었네요.”

“차가 막혀서.”


명헌이 반갑다는 듯 우성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치더니, 현철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우성의 옆을 힐끗 보니 이미 성구가 자리를 잡고 낙수와 현필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 태섭의 빨리 취해서 빨리 자리 파하기 작전은 실패했다. 그 대신 태섭은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산왕의 모든 주전 멤버들이 모였으니, 북산 출신은 자리를 빠져준다고 나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응? 태섭아? 집 가게? 짐은 왜 챙겨?”

“아… 인사도 다 나눴고, 산왕 동창횐데 외부인이 껴서 되겠냐.”


핑계를 대며 최대한 조용히 빠지려고 했던 태섭에게 우성이 말을 걸어왔다. 관심 어린 산왕 멤버들이 시선이 태섭을 따라왔다. 뭐지? 이 불편한 공기?


“괜찮아! 형들도 다 너 보고 싶다고 했어.”

“맞아. 앉아, 앉아. 우성이가 미국에서 그렇게 신세를 졌는데, 우리가 밥이라도 사야지.”

“아, 아뇨. 이미 충분히 얻어먹기도 했고… 괜찮습니다, 현철이 형.”

“편히 앉아요. 정우성 혼자 미국 갔을 때 걱정했는데, 친구 생겨서 얼굴 폈더라구요.”

“그래. 낙수 말이 맞아. 밥 사게 해주라. 대만이가 진짜 맛있는 걸로 사주라고 그랬어.”

“여기 맛집 뿅.”

“그래 너 명예 산왕인이잖아! 앉아, 앉아.”


차례차례로 자리를 뜨려고 하는 태섭을 말려왔다. 정우성 이 도움 안 되는 새끼… 앞으로 내가 네 연락 받나 봐라… 태섭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결국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캐리어는 지금 신현철의 차 트렁크 안에 있다. 현철이 트렁크를 열어주지 않는 이상, 이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도 틈도 보이지 않아서 결국 태섭은 이 답답함을 풀기 위해 미국에서의 정우성의 만행들을 술 안줏거리로 내놓았다. 우성은 그래도 선배들 앞에서 의젓한 척했던 것인지, 다들 관심이 있게 들었다. 오히려 여러 명에게 말을 건네니 자신의 대각선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신경을 덜 쓸 수 있었다.


명헌은 태섭이 말하는 우성의 일화들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지,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이야기 도중 도중 살짝씩 명헌의 동태를 살피던 태섭은, 이내 긴장이 탁 풀렸다. 의식되는 것은 자신뿐만인 듯했다. 그래, 헤어진 지가 몇 년인데 신경이 쓰이겠냐? 속이 타던 태섭은 연거푸 몇 잔이나 술을 식도로 쏟아부었다.


“고기 먹으면서 먹어용.”

“아… 네, 감사…”


갑자기 대각선에 앉아있던 명헌이 고기 더미를 불쑥 내밀었다. 다시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태섭이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고개를 들면서 눈이 마주치는가 싶었더니 명헌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 동오, 이것 봐. 고기에 고기 싸 먹기 뿅. 야! 이명헌, 야채도 먹으면서 먹어! 신현철은 잔소리쟁이다 뾰홍….


잠시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던 태섭을 다시 현실로 데려온 것은 옆 테이블에 앉은 정우성이 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아니, 태섭이 진짜 산왕 좋아한다니까요! 얘 애착 티셔츠가 산왕 단체티였어요!”


또다시 관심 어린 시선이 태섭에게 쏟아졌다.


“아마 지금도 입고 있을걸요? 얘가 편하다고 자주 입었어서.”


태섭이 황급히 우성의 입을 막았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것을 너무 과하게 반응해버렸다. 아까와는 달리 당황한 태섭의 시선과 명헌의 시선이 얽혔다. 태섭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치부를 들킨 것 같았다. 수치스러움으로 떨리는 태섭의 눈과 다르게 명헌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있었다.


“우리 티셔츠 섞이지 말라고 택에 이름 적었었잖아요. 태섭이도 산왕티에 그거 적었을텐뎅.”


태섭의 손가락 사이로 우성의 말이 비죽 튀어나갔다. 전의를 상실한 태섭은 자신의 티셔츠 택을 확인하는 우성을 막지 않았다. 택 바깥쪽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어서 한 눈에 확인이 가능했다. 택을 뒤집으면 안쪽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있긴 했지만. 하…. 택 바깥쪽만 봐라… 제에에에발 안쪽은 확인하지 말고….


“아, 이 티셔츠 맞네! 여기 태섭이 가슴팍에 보여요? 글자 다 떨어지고 ‘SANNOH’의 H 부분 자국만 남은 거! 옷 3개나 줬는데 다 이꼬라지에요!”


허, 하나는 멀쩡하거든. 속으로 반박한 태섭이 모든 게 다 까발려진 것 같은 기분에 헛웃음을 지었다. 명헌과 눈까지 마주쳤으니, 아마 그는 다 알았을 것이다. 태섭이 왜 정우성에게 산왕 단체 티셔츠를 얻어냈는지.


“고교 농구 톱이었잖아요. 기운 좀 받으려고 그랬지.”


태섭은 되지도 않는 자신의 변명이 먹힐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아무렇게나 입 밖으로 뱉어냈다. 물론, 저희 북산이 이겼었지만요? 이 압도적 승리감? 하고 장난스레 웃어 보이자, 옆에 있던 현철이 가볍게 헤드락을 거는 척을 해왔다. 아악, 타임! 타임! 아까 우성이 피우던 엄살을 따라 피우자 현철이 씩 웃으며 헤드락을 풀곤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어우, 헤드락은 제가 아니라 정우성이 받아야하는데…. 뭣이~?! 내가 왜! 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현철이 형! 쟤가 산왕공고 농구부 창설 이래 최고 미남이라면서요? 미국에서도 얼굴값 했어요. 그때 형들이 와서 봤어야 했는데… 커플 둘이서 정우성 하나 가지고 싸웠다니까요. 산왕공고 농구부 창설 이래 최고 미남은 최동온데… 엄한 놈이 얼굴값을 했네. 아악~! 낙수 형까지 왜 그래요! 저 진짜 억울해요! 하하, 그래도 그때 팬레터는 우성이가 많이 받았었지. 야, 최동오. 고백받은 걸로 쳐야지. 팬레터는 나도 받았다.


관심이 정우성에게 몰리자 태섭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그들은 미국에서의 정우성의 일화들에 대해 궁금한 것이지, 태섭의 얘기가 궁금한 것이 아니다. 그으렇게 미국에서도 산왕, 산왕 하더니 아닌 척 저렇게 예뻐하는 걸 보면 그럴 만하구나 싶다. 태섭은 바람도 쐴 겸, 술도 깰 겸,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응? 태섭아 너 가게? 아뇨. 잠깐 요 앞에 편의점 좀 갔다 올게요.


태섭은 가게 밖으로 나왔다. 으… 밤이 되니까 더 쌀쌀해지는 거 같아. 추위에 살짝 몸을 떤 태섭이 골목길 밖에 있는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에 들어간 태섭은 곧바로 냉장고 코너로 향했다. 밥은 저쪽이서 산다고 했으니까, 숙취 해소제 8병에… 정우성이 먹는 초코 우유 하나랑. …바나나 우유도 하나 사가자. 안 먹으면 내가 먹으면 되니까.


결제까지 마치고 태섭은 다시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길까지는 봉지를 흔들거리며 잘도 들어가 놓고서는, 차마 식당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볼 장 안 볼 장 다 봤으면서도 괜히 머뭇거리게 된다. 결국 술이 아직 덜 깼다는 아무도 묻지 않은 핑계를 대며 태섭은 식당 앞에 쭈그려 앉았다. 길바닥에 봉지를 대충 내버려 두곤 태섭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박아넣었다. 아, 이거 전형적인 술 취한 사람 자센데. 태섭은 그 상태로 숨을 깊게 들이쉬곤 내뱉었다. 쓰읍, 후우-. 이건 전형적인 술 취한 사람의 술 깨는 호흡이군.


식당 안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사이사이 우성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들리기도 했다. 쟤는 목소리도 크다, 대체 뭘 말하고 있는 거야. 태섭은 궁시렁대면서 몇 번이고 다시 깊게 호흡했다. 술기운아, 물렀거라~ 물렀거라~. 그 순간 드르륵, 하고 식당 문이 열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던 태섭과 식당 문을 열고 나온 명헌의 눈이 마주쳤다. 눈… 그 놈의 눈.


“…왔으면 들어오지.”

“…술 좀 깨느라구요. 집 드가세요?”

“아니. 잠깐 바람 쐬러 뿅.”


아하, 편히 쐬세요. 태섭은 자신을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는 명헌의 시선을 피하곤 봉지를 들고 일어섰다. 생각보다 오래 쭈그려 앉아있었는지 다리가 저려서 살짝 휘청이고 말았다. 운동선수답게 태섭은 금세 다시 균형을 잡았지만, 팔을 받쳐오는 손길이 있었다.


“술 아직 덜 깼나 봐용.”

“아뇨. 다 깼어요.”

“좀 더 깨고 가.”


명헌은 태섭한테서 봉지를 빼앗아 들었다. 인원수별로 숙취해소제도 샀네용. 명헌이 봉지를 뒤적거리며 그렇게 말하더니,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서 태섭에게 건넸다. 태섭은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얼떨결에 바나나 우유를 받아들었다. 명헌은 봉지에서 초코 우유를 꺼내더니 빨대를 꽂아 마셨다. …그거 정우성 껀데요. 알아용. 내가 마시면 내 꺼 뿅.


달텐데… 태섭은 속으로 생각하곤 이내 바나나 우유를 빨아 마셨다. 입맛, 바뀌었나. 떠오른 생각을 날려버리려는 듯 태섭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냥 빨리 마시고 들어가야겠다. 정우성은 지가 알아서 우유 사먹겠지 뭐. 태섭은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봤다. 태섭의 빨대에서 다 마신 소리가 나자, 한동안 조용히 우유를 마시던 명헌이 말을 걸어왔다.


“소개팅 할래용?”


명헌이 말을 걸어올 줄 몰랐던 태섭이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사실은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때 이후로 거진 6년만의 만남이니까. 나 없이 잘 살았느냐라는 원망의 말이라던가,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느냐라는 불만의 말이라던가. 하지만 이명헌은 늘 예상을 뛰어넘는 남자였다.


태섭은 할 말을 잃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명헌을 마주 봤다. 눈동자 너머로 명헌의 생각을 가늠해보려고 했다. 6년 전에도 명헌의 생각을 읽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읽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됐어요. 그럴 때도 아니고.”

“왜? 전애인 못 잊어서?”

“정우성이 그런 그것도 말했어요?”


지금 이걸 모른 척 떠보는 건지, 모르는 건지. 태섭은 지금 이 대화가 불편했다. 정우성에게 이명헌에 대한 단서를 흘리지 않으려고만 조심해왔지. 딱히 정우성의 입을 단속할 생각은 못 했었다. 아무리 태섭이 막장 드라마의 시즌 3 같은 일상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미국에서 열심히 굴렀다고 한들, 아직 마음 정리도 못 한 전남친한테서 소개팅 제의가 들어올 줄은 몰랐다.


“예에-, 전 아직 제 전남친 못 잊었어요.”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래.”

“됐네요. 뭐, 굳이 잊고 살아야 하나. 난 원래 누구 잊는 거 잘 못 해요.”


경험담인가. 태섭의 눈썹이 불만스러운 듯 삐쭉 올라갔다. 지금 본인은 다른 사람 만나서 잘 살았다는 거야 뭐야. 태섭은 명헌에게서 봉지를 빼앗아 들었다. 저는 이제 들어갈 거거든요? 알아서 술 깨면 들어오든지 하세요. 연락할게용. 뭣…! 아니 필요 없다고요! 그딴 걸로 연락하지 마요! 뿅.


태섭은 그 이후 자신이 어떻게 호텔에 들어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소개팅을 해주겠다는 둥 말하는 명헌의 말을 무시하면서 가게에 다시 들어간 것은 기억나는데. 거기서 술을 더 마셨던가? 술자리가 2차, 3차로 넘어가기 전에 태섭은 오랜 비행을 핑계로 빠져나오려고 했었다. 명예 산왕인이니 뭐니 했지만, 산왕 동창회에 계속 있는 것도 뭣했기 때문이다. 이명헌이랑 계속 있기도 불편하기도 했고. 본인의 캐리어는 현철이 형의 차에 있기도 했고. 그 형이 데려다준 건가. 아으... 정우성 이 웬수새끼. 숙취로 인해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태섭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바닥에 방치되어 있던 휴대폰을 켰다.


[토요일 2시, ○○ 카페 뿅]


…아직 번호 안 바꿨구나. 내 번호는 어디서 얻었지. 설마 내가 알려줬나. …그나저나 진짜 소개팅 시켜주려는 건가 이 사람? 진짜로? 날? 난 그쪽 전남친인데? 우리 사이에 이제는 진짜 감정도 뭣도 없는 거야? 태섭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올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이명헌과 송태섭 사이에 뭐가 있겠어. 정우성이랑 정대만 정도지.


고민하던 태섭은 결국 그 일방적인 약속 당일까지도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다. 못했다, 가 더 맞는 말일지도. 태섭은 다시 휴대폰을 켰다. 현재 시간, 토요일 1시 18분. 월요일에 귀국한 후, 카나가와의 본가에 들려 가족들과 며칠간 시간을 보내고 오키나와까지 갔다 왔다. 지금은 구단과의 계약 문제 때문에 도쿄에 살고 있는 대만 선배의 집에서 잠깐 신세 지는 중이었다. 원래는 호텔을 잡으려고 했는데, 간만에 본다고 대만 선배가 고집을 피웠다. 덕분에 따로 북산 농구부 동창회를 잡을 필요도 없이, 어제 치수 선배, 준호 선배, 달재, 소연이, 한나까지 대만 선배의 집으로 퇴근해 밤새 술파티를 벌였다. 늦은 오전에 일어나 다 같이 해장을 하고 각자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니 이 시간이었다. 대만 선배는 잠을 더 자겠다고 방으로 들어갔고. 자신은 거실에 앉아 이명헌의 문자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약속한 카페까지의 거리는 20분. 지금 씻고 나가면 아슬아슬하다. 가? 말아? 뚫어질 듯 한참이나 휴대폰을 노려보던 태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밀 의지도 없지만 이미 시간상 꾸미고 가기엔 글렀다. 더 꾸물거렸다간 늦을 거다. 괜히 늦어서 소개팅 상대를 기다리게 만들 필요는 없다. 어차피 가서 거절할 거긴 한데, 굳이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누구 씨가 소개팅 상대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아서 연락할 방도도 없고. 태섭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옷을 챙겨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태섭은 집을 나서며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1시 43분. 원래는 그냥 아무 옷이나 입고 나오려고 했으나, 소개팅 주선자의 체면을 생각해 대충 챙겨 입느라 조금 늦어졌다. 청바지에 무지 티, 대만 선배의 자켓을 빌려 입으니 오버핏으로 적당히 괜찮아 보였다. 머리는 시간이 없어 올리진 못했지만 지금도 충분히 늦었다. 태섭은 더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카페 앞에 도착해 택시비를 내고 시간을 확인하니, 딱 2시 정각이었다. 진짜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잖아. 태섭은 종종걸음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를 둘러보니 음료 두 잔을 앞에 두고 명헌이 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눈인사를 보내는 명헌을 무시하고 그대로 맞은 편에 앉았다.


“소개팅 필요 없다고 했죠.”

“뿅.”


뭐만 하면 뿅으로만 대답해. 태섭이 입을 비쭉이며 작게 불만을 중얼거렸다.


“그래서요? 상대는 늦는대요?”

“나다 뿅.”


태섭은 너무 놀라서 허리가 곧추세워졌다. 이명헌이 드디어 미쳤나? 아니면 내가 미쳤나? 내가 미쳐서 이명헌이랑 사귀기라도 했다고 망상이라도 한 건가? 아니다, 소개팅 상대의 이름이 ‘나다’라는 이름의 사람일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뭐, 뭐라구요? 볼품없이 흔들리는 태섭의 목소리를 가르고 차분한 명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섭의 소개팅 상대 나다 뿅.


“공교롭게도 나도 전남친을 아직 못 잊어서.”


태섭은 말문이 막혀서 그 상태로 굳고 말았다. 설마 명헌이 말하는 전남친이 나인가?


“못 잊은 사람끼리 한번 만나봐용.”


명헌은 태연하게 자신의 앞에 있던 음료 한 잔을 태섭 쪽으로 밀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거, 태섭이 저번에 마셨던 레몬에이드. 여기 꺼 맛있어 뿅. 아직 좋아하지?







산왕 동창회&태섭 환영회 자리 위치 헷갈릴까봐…


공석 공석 동오 공석
공석 우성 태섭 공석


낙수 현필 동오 공석
공석 우성 태섭 현철


낙수 현필 동오 명헌
성구 우성 태섭 현철





태섭이가 우성이한테서 산왕 티셔츠 뺐는 거랑 태섭이 명헌이한테 전남친(이명헌) 아직 못 잊었다고 말하는 게 보고 싶었을 뿐인데... 암튼 글케 됐다... 알아서 잘 재결합하겠죠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