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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01:27
신현철 나오긴 했는데 로비 들어오면서부터 짜증나서 인상 팍팍 씀. 불려온 곳은 내일 정우성 결혼식 올릴 5성 호텔 vip 전용 라운지 바.
지는 술 좀 먹어도 룸 올라가서 자면 된다 이거지. 이쪽은 시발 또 다시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정장 챙겨입고 축의금 뽑아서 여기 다시 와야되는데 이 건방진 후배놈이.

“뭐하냐 너 지금, 이럴 시간 있으면 잠이나 쳐 자. 새신랑이라는 놈이.”
“왜요, 씨...나 기껏 용기낸건데.”

이 미친놈이 사람 불러놓고 혼자 벌써 한 잔 한건지 뭔지. 온더락 잔을 탕 내려놓더니 씨근덕거리면서 한다는 소리가 가관임.

“형이랑 나, 한 번 정돈 이런 자리 있었어야 하잖아요.”
“이런 자리가 뭔데 또 까부냐.”
“또 모르는 척 하는 거 봐. 형 그럴 때 진짜 짜증나요. 고개 돌려봤자 형은 명헌이형하고 달라서, 얼굴에 다 티나거든요?”

-면적도 넓잖아. 하는 동그란 뒷통수를 신현철은 기어이 한 대 후려 갈겼음.
하지만 이제 정우성은 그 정도로 금방 울지 않아. 대신 맞은 게 기쁜 사람처럼 끅끅 거리고 웃으면서 드링크 메뉴판을 요청했음.



-...고맙다고요. 그 얘기 하고 싶었어요.

새벽녘에서야 풀려나 정우성이 호텔에 요청해 불러준 모범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현철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컴컴한 택시 천장을 쳐다봄.
간만에 제대로 좆같은 대화 했네, 시발. 그딴 소리나 들을 줄 알았으면 나가지 말았어야 하는 자리였는데.
하지만 뻔히 알면서도 나간 거였음. 왜일까, 일종의 자해인가. 아니면 이렇게라도 마침표를 좀 찍고 싶었던걸까. 그도 아니면...

‘...나 알아요.’
‘뭘, 새끼야.’
‘형이 진심으로 나왔으면, 나한테 승산 없었다는 거.’
‘까불고 있네 진짜. 정우성, 더 맞고 싶냐? 내일 멍든 얼굴로 기념 촬영 좀 하게 해 줘?’
‘형이 아무리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물더니 소리 하나 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고등학교 시절의 후배는, 이제 신현철하고 거진 비슷한 덩치가 된데다 확연히 선이 굵어졌는데도 희한하게 여전히 어린애같았음.
그래서인가. 그래서, 마지막으로 어린애 마음이나 좀 편하게 해주자고 그런거였을까.

‘진짜 잘 살게요.’
‘뭐 당연한 소리긴 한데 그걸 왜 나한테 하냐.’
‘진짜, 진짜 잘 살게요. 명헌이형, 진짜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렇게까지 다짐 안 해도 걘 너하고 있으면 그 자체로 행복할 거라는 소리까진 차마 못해주겠더라, 우성아.

-진심으로 나왔으면 승산이 없었을 거라고.
하, 기가 차서 혼자 내쉰 한숨같은 웃음 끝에 술냄새가 폴폴 풍겼음.

승산이 없긴 뭐가 없어. 승산이 없는 건 처음부터 이쪽이었는데. 있었으면 뭐라도 했다. 조금의 승산이라도 보이기만 했으면.

신현철이라고 억울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음. 이쪽이 먼저 알았고, 먼저 만졌고, 먼저 만져졌는데.
이상한 말투를 쓰는데 농구는 기가 막히게 잘해서 처음부터 눈에 밟혔던 걔. 이상한데서 눈치가 빨랐던 걔.
같이 경기 뛰는 선배들도 있는데 매번 같이 스트레칭 하자고 벤치에도 못 드는 저를 무표정하게 쫓아오던 걔.
점심시간에 남의 급식 반찬 다 털어갈 땐 언제고 저녁 나절엔 무릎이 아파서 앓고 있으면 와서 무릎을 만져주던 걔.

‘빨리 커라, 현철. 기다리다 지친다베시.’

아픈 무릎을 주물러 주면서 빨리 커서 자기랑 같이 농구하자던 1학년 이명헌 얼굴엔 놀랍게도 약간의...외로움 같은 게 있었음.
그럼 얘가 지금 나한테 하는 이건 투정일까,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던 여름이 있었고 또 그새 자란 키에 감탄하는 걔를 보고 뿌듯해 했던 겨울이 있었는데.

“키는 181, 포지션은 아무거나 다 합니다.”

이듬해 봄, 시건방진 후배 하나가 들어오자마자 그게 다 의미없어지고 말았다는 걸 신현철은 본능적으로 알았음.
1년을 먼저 알았어, 그게 어떤 종류건 먼저 어떠한 교감을 했어,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이명헌이 정우성을 보는 순간 빛나던 눈빛에 신현철은 자기가 또 포지션을 변경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음.
그게 쉬운 일은 물론 아니었고 새 포지션에 익숙해지기까지 또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신현철은 그걸 해냈어.

친구, 해야지. 동료, 해야지. 걔가 여자랑 결혼해서 애라도 낳았으면 아마 삼촌, 그런것도 했을텐데. 그거는 아무래도 할 일이 없겠다.
남편이 속썩인다고 전화오면 같이 건방진 후배 새끼 욕도 해주고, 또 그 후배가 달려와서 찔찔 울면 술 좀 먹여 혼낸 다음 들여보내고.
걔가 늙어가는 걸 근처에서 보게 되겠다. 농구도, 열심히 해야지. 같이 농구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정우성이 말하는 승산이란 것의 속성을 곱씹다가 신현철은 또 웃고 말아.
그 막연한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는 모르지 않지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으니까.

아마 걔는 너한텐 절대 보여주지 않을 모습들을 앞으로도 내 앞에서만 칠렐레 팔렐레 내보이겠지만, 정우성아.
그건....그냥 이명헌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거라고, 임마.




우성명헌 현철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