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45975687
view 2677
2023.06.01 12:23
소설체 ㅈㅇ
타싸 올린적 잇음





"크아악 여우놈!~!! 분하다!!"

"멍청이."



웃통을 벗어 젖힌 채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백호가 벌러덩 코트 위로 누웠다. 태웅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는 미끼로 얻어낸 원온원 기회였건만 오늘도 여지없이 박살났다. 한 번만 더 하자며 매달리고 또 지고 또 매달리는 바람에 하루만에 10패를 추가로 기록한 백호가 분하다는 듯 발을 쾅 굴렀다.



"일어나. 코트에 땀 묻잖아."

"에잇! 어차피 내가 청소할거 아냐. 땀 좀 묻히든 말든."



백호가 주먹을 들어서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그런 백호를 보며 태웅이 한숨을 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일어나면 같이 정리해주려고 했는데."

"아싸! 그 말 물리지 마라?!"



청소를 도와준다는 말에 백호가 잽싸게 일어났다. 언제봐도 유연한 몸이다.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난 몸으로 붕붕 뛰며 대걸레를 가지러 사라지는 백호를 보던 태웅이 팔에 차고 있던 아대로 턱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백호를 좋아한다.

지금까지 농구와 잠 외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태웅에게 사랑이라는 건 생소한 감각이었음에도 태웅은 확신했다. 사실 윤대협이나, 정성-아니 정우성처럼 농구 때문에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은 몇 번 있었던 터라 처음엔 강백호도 그런 류의 관심인 줄 알았다.

드리블도 모르는 생초짜 주제에 멋대로 자신을 라이벌로 여기고 덤벼드는 꼴이 우스웠다. 며칠, 몇 주가 지나 가르쳐 주는 대로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성장하는 녀석에게 시선이 가는 건 성장이 빠른 학생을 보는 뿌듯함인 줄 알았다.

산왕과의 시합에서 등 부상을 입었을 때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던 이유는 애써 키운 라이벌의 새싹이 꺾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인 줄 알았다.



시합이 끝나고 면회간 병원에서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백호를 처음 눈에 담았을 때, 그리고 그 녀석이 고개를 돌려 저와 눈을 맞췄을 때, 태웅은 비로소 깨달았다.

단순히 농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은, 이 빨간 머리 놈 그 자체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마음은 깨달았으나 태웅은 연애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하던 대로 자신의 입장에서 백호에게 최대한 잘해줬을 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바닷가에 앉아 있는 놈 앞으로 굳이 러닝하러 가고, 가는 김에 부탁받은 매니저의 편지를 전해 줬다.

이 녀석이 채소연 매니저를 좋아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편지를 가로채거나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편지를 전해주면, 제 앞임에도 백호가 환하게 웃었으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면 이 자식은 제 앞에선 인상만 쓰니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께가 조금 따끔거렸다.



강백호는 다행히 무사히 복귀했다. 음하하핫! 하는 웃음과 함께 돌아온 농구부에 활기가 더해졌다. 어딘가 묘하게 처져있던 농구부의 분위기가 확 변하는 걸 보며 태웅은 잠깐 미소를 지었다가, 곧 입꼬리를 내렸다.

그 뒤로는 뭐, 농구만 했다. 재활 때문에 두 달 가까이 쉬었던 백호는 가끔 수업도 째고 농구 연습을 하다가 주장에게 혼났다. 어느 날부터인가 채소연과 어색하게 굴더라니, 주장에게 듣자하니 고백하고 차였다고 한다.

강백호의 짝사랑이 끝난 건 태웅에게 반길만한 일이었으나 위로받는답시고 선배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주장과 정대만 사이에 주저 앉아서 쫑알거리던 녀석은 태웅과 눈만 마주치면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태웅이 시비를 걸어도 무시했다.

무시당한 태웅이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강백호의 뒤통수를 노려 보고 있노라면, 태섭이 다가와 등을 두드려주며 고백을 거절당한 슬픔 때문에 그런거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위로해줬다.



과연 이 주 정도 지나니, 강백호가 다시 태웅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다른 선배나 동기들이 왜 또 태웅이만 못 잡아 먹어 안달이냐며 말리려 했지만 태웅은 내심 좋았다.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강백호가 원온원을 하자고 덤비길래 몇 번 상대해줬더니 자기가 진 건 전부 무효라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다시 하자고 고집을 부리길래 태웅은 녀석의 등에 무리가 갈까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냥 하기 싫어서라고 생각했는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부상이 막 나은 녀석을 무리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동시에 백호에게 소원권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국 후자의 마음이 이긴 태웅은 강백호의 도전에 응했고, 소원권 10개가 생겼다.







"얌마 그래서, 뭘 원하냐?"



정리를 끝내고 공까지 말끔하게 닦은 둘은 달이 뜬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강백호와 걸음을 맞추느라 자전거를 양 손으로 끌면서 가던 태웅이 힐끔 백호를 쳐다봤다.



"아, 내가 원온원 해주면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했잖아. 뭘 원하냐고."

"하나 아닌데."

"앙?"

"10개지. 원온원. 열 번 했잖아."

"하아? 그게 왜 그렇게 돼??! '오늘' 한 번 해준거거든?"

"그럼 다음부턴 딱 한 번만 한다."

"누우웃...!"



분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 백호가 태웅을 있는 힘껏 노려봤다. 그런 백호를 태웅이 고저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백호가 양 손으로 제 머리를 헤집으며 끙끙거렸다.



"크윽...좋아, 그럼 10개해. 대체 뭘 시켜먹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만! 뭘 원하냐 여우 자식!"

"......먹어."

"뭐?"

"내일 나랑 점심 먹어. 둘이서만."

"엉...? 너랑? 나랑? 둘이서만?"



의아하게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태웅을, 자신을, 다시 태웅을 가리킨 백호에게 태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학교 반 별로 급식 먹는 거 알지?"

"내가 내일 도시락 싸올게."

"..."



백호의 표정에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태웅은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어쨌든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건 맞으니 백호는 떨떠름하게 알겠다고 대답하곤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골목 안으로 들어간 백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 보던 태웅은, 조금 빠른 발놀림으로 페달을 밟았다.





평소라면 점심시간 종이 울리기 전까지 대충 퍼질러 자는 게 일상이던 백호는 멍하니 턱을 괴고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어젯밤 여우놈이 지껄인 소리에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잠도 안 왔다. 오전부터 한숨도 자지 않는 백호를 이상하게 여긴 호열이 걱정하는 말을 붙였지만 백호는 어물어물 대답을 넘겼다.

점심시간 종이 쳤다. 평소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호열이 옆옆 줄의 백호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 뒷문이 드르륵, 열렸다.



"강백호. 나와."

"진짜냐...?"



문을 연 채로 가만히 서서 백호를 쳐다보는 태웅의 기백에, 반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어물쩍거리다가 앞문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호열은 그런 태웅과 백호를 번갈아 보며 서 있다가 겨우 백호에게 물었다.



"백호야, 무슨 일이야?"

"어어, 그으게...내가 쟤한테 소원을 들어준다 했더니 같이 밥을 먹자 그르네..."

"소원으로...같이 밥을? 그런거면 그냥 옥상에서 다같이-"

"나랑 멍청이랑 둘이서만 먹을거야."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태웅이 꼿꼿하게 서서 눈만 굴려 호열을 내려봤다. 배려가 전혀 없이 시비 거는 듯한 태도에 호열이 하? 하는 소리를 내며 마찬가지로 눈동자만 움직여 태웅을 노려봤다. 그런 둘을 휙휙 쳐다보던 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호열의 어깨를 돌려 세웠다.



"미안, 호열아. 나 오늘은 여우놈이랑 먹을게."

"...뭐 백호 네가 미안할 게 있나."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 백호에게 양호열이 뭐라고 할 수 있겠나. 호열은 백호가 안심할 수 있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교실을 나섰다.

호열을 보낸 백호가 바로 입술을 삐죽이며 태웅에게 돌아섰다. 투덜거리며 걸음을 재촉하는 백호에게 어깨를 잡힌 태웅은 괜히 잡힌 어깨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부실로 향했다.

교내에 둘이 있을만한 한적한 곳은 이미 다 뒤져봤지만 학생들은 구석구석 자리를 잘도 찾아내 놀고 있었기에, 태웅은 점심시간엔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농구부실을 골랐다. 백호는 투덜거리면서도 태웅을 따라 들어와 부실 문을 닫았다.



"뭐, 그래서 진짜 목적이 뭐야."



부실 문을 닫자마자 백호가 태웅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바닥에 보자기를 풀고 있던 태웅이 어리둥절하게 올려보자 백호가 삿대질을 한다.



"니가 정말 나랑 단둘이, 단란하게, 밥을 먹고 싶어서 부른 건 아닐-뭐냐 이거?"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험악하게 말하던 백호는 태웅의 손가락 끝에서 풀려난 보자기 매듭 밑에서 4단 찬합이 나오는 걸 보고 말을 잃었다. 그런 백호를 내버려둔 채 태웅이 한 단, 한 단 내려 도시락통을 나열했다.



"아니 뭐냐고 이거??"

"자. 네 밥."



4단 찬합과는 별개로 태웅이 커다란 보온 도시락을 통째로 건네는 것을 받아든 백호가 당혹스러워 하며 물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전부 고슬고슬하니 침 나오게 생긴 밥이었다.



"진짜 밥 먹자는 거였어?"

"? 얼른 먹기나 해, 멍청아."



태웅이 젓가락으로 백호를 가리키자 백호가 윽, 하는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집었다. 찬합 중 한 칸은 꽤나 아기자기하게 귀여운 반찬이었으나 다른 통들은 구운 베이컨과 문어 모양으로 삶은 소세지와 계란 묻혀서 구운 햄과 수육이었다. 한 마디로 고기 반찬만 세 통이었다.



"이거 너 어머니가 해주신 거야?"

"한 칸만."

"이 세 칸은 그럼 너가 했어?"

"응."

"와..."



고기 밖에 없는 건 둘째치고, 어쨌든 자기랑 점심 먹겠다고 여러 종류로 준비해 온 정성이 꽤 갸륵했다. 백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도시락을 먹는 걸 보며 태웅은 가져온 양의 두 배 정도를 잘못 태우는 바람에 다 버렸다는 건 굳이 고백하지 않았다.

어제 충동적으로 강백호에게서 점심 약속을 얻어낸 태웅은 아직 닫지 않은 마트에서 고기와 야채를 쓸어 담아 집에 갔다. 이게 다 뭐냐는 어머니의 황당해하는 질문에 태웅이 이만큼으로 도시락을 싸달라고 했다가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굳이 하지 않았다.

어쨌든 강백호랑 단 둘이서 밥을 먹고 있지 않나. 태웅은 그걸로 충분했다.




태웅백호태웅 탱백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