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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8 22:01




결국엔 이렇게 되는구나. 

할 이야기가 있다는 이야기에 근처 공원으로 나간 정대만은 자신의 손에 들린 바리깡을 뚫어지게 봤음. 우성은 자신의 양손으로 바리깡을 쥔 정대만의 손을 꼬옥 감싸 쥐었어. 누가 보면 소중한 물건이라도 맡기는 모양새였지만 내용은 끔직했지. 

"형 진짜. 저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그러면 안 그래야 하는거 아닌가. 정대만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심연의 정우성을 바라봤음.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정우성의 얼굴은 울상지어 두 눈썹이 추욱 내려와있었어. 불쌍해 보여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지만 그래도 아닌건 아닌거잖아. 

"너 이러다가 진짜 차인다?"

"워...원래 명헌이 형 여름이면 머리 깨끗이 밀었어요! 근데 이번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이번에는 정대만이  뜨끔했다. 우성이가 걱정하는 그 바람은 정대만이 일으킨 태풍이었으니까. 



-



짧은 머리카락이 빽빽히 머리를 뒤덮은 동글동글한 밤톨 시절에도 이명헌은 인기가 많았음. 서태웅이나 정우성처럼 팬클럽이 만들어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항상 주변에 멤도는 사람들이 많았지. 어린 소녀부터 노년의 아저씨까지. 말 그대로 남녀노소였음. 

누구하나 먼저 "이명헌 선배 멋있지 않아?" 라던가 "명헌이에게 고백해보려고 하는데..."라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이건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명헌이 모두의 공공재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음. 먼저 고백을 꺼내는 순간 이명헌은 얻지 못하고 수많은 적이 생길 것이 뻔히 보이는 그런 거. 

게다가 이명헌은 연인이 있는 것을 공공연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암암리에 알고 있는 그 정우성이잖아. 뭐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있나 이명헌이 직접적으로 공인하지 않았다 뿐이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지나가던 비둘기도 아 둘이 사귄지 940일쯤 됐나보네 할 지경이니었으니까. 

아무튼. 이런 뒷배경을 떠나서 대학생이 된 이명헌은 빠박이들사이에서 자신의 미적감각을 의심해 본적 없이 살다가 최근들어 심란해졌어. 특히 그 가장 큰 원인은 룸메이트가 된 정대만이 제공한바 있었음. 

"패션의 완성은 머리다. 명헌아"

아침마다 머리에 왁스며 스프레이며 온갖것을 동원해서 헤어스타일링에 공을 들이는 정대만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이명헌은 그 말에 크게 감흥이 되어버림. 그래. 지금껏 정우성과 최동오에게 밀린다 생각했던 자신의 패션은 머리 스타일에 변화를 줌으로써 완성을 할 수 있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거지. 그렇게 이명헌은 머리를 길렀음. 거지존이 될때마다 정대만의 적절한 코치로 깔끔하고 댄디한 인상을 유지하며 어느새 머리카락은 귀를 덮을만큼 길어졌지. 

미국에서 휴가로 돌아올때마다 쑥쑥 늘어나는 이명헌의 머리를 보는 정우성은 점차 불안해졌어. 처음에는 더더더더 청초해진 이명헌의 모습에 감격하여 입에서 침나오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쳐다봤는데 그렇게 보는게 자신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거야. 식당에서 서빙하던 직원, 영화관에서 표를 검표하던 직원, 톨게이트 직원, 지나가던 아저씨, 할아버지, 아주머니, 아기.... 강아지....삼라만상이 정우성과 함께 이명헌을 보고 있다고 생각되니까 불안해서 돌아버리는거지. 거기다 말투는 최근에 다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푱"으로 바뀌었는데 그게 또 귀여워서 접객하던 직원이 피식 웃음이라도 흘리면 정우성은 이를 악물었음. 이 형 이러다가 진짜 누가 보쌈해가겠다. 인생의 리즈시절이 매번 갱신되는 형이다. 

정작 이명헌은 그런 정우성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음. 물론 정우성이 생각하는것 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명헌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없는건 아니었어. 그런걸 이명헌은 전혀 모르긴 했지만. 이명헌이 눈치가 없는게 아니고 이명헌이 항상 붙어 다니는 사람이 정대만, 정우성, 최동오다보니까 그렇게 된거였음. 자낮 이런거 아님. 그냥 아 얘랑 붙어다니니까 역시 사람들이 쳐다보는구나 이 정도. 본인 또한 자신이 붙어다니는 사람들과 동류의 인간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지 않았음. 

그렇게 이명헌의 앞머리가 콧잔등을 스칠만큼 자라고 그 머리카락을 반정도 포마드로 부드럽게 넘긴 헤어 스타일이 되었을 때 정우성은 정대만을 따로 불러내고 말았어. 

"그냥 실수로 정수리를 쫘악 밀어버리면 나머지도 그 길이로 정리되겠죠"
"....니가 하지 그러냐"
"그러다 저 싫어하면요"
"명헌이가 내 이빨 안날릴거란 보장은 있니"
"아 몰라 이미 가짜인데 또 가짜로 바뀐다고 뭐가 달라요?"

정우성의 막무가내에 정대만은 한숨을 쉬었어. 징징거림이 억지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건 최근들어 이명헌에게 접근할 기회가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부쩍늘었기 때문이지. 당연히 모든 플러팅을 전부 쳐내는 이명헌이지만 정우성이 불안해 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일이라 정대만은 바리깡을 땅바닥에 던져버리지 못했어. 정대만도 미국에 있는 송태섭이 나날이 섹시다이너마이트가 되어가는게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송태섭 가드 잘하고 있지?"
"네 미국애들한테 13살인데 조숙하다고 말해놓고 있어요"
"그게...먹히냐?"
"먹혀요. 가끔 어리다고 했는데도 들러붙는 애들이 있긴한데.."
"변태새끼 아냐. 그런애들은?"
"태섭이가 병원보냈어요"
"...."



-



수락은 했지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음. 이명헌은 찰랑거리게 자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음에 들어했고 방에는 나날이 헤어 용품들이 늘어나고 있었음. 그렇게 좋아하는데, 아니 좋아하지 않더라도 남의 머리를 함부로 바리깡으로 밀어버리는 건 양심이 용납하지 못할 짓이었음. 

"명헌아 머리 길어지니까 불편하지 않아?"

그래서 정대만은 은근슬쩍 이명헌을 떠봤어. 안경을 끼고 소파에 앉아 농구 잡지를 읽던 이명헌은 잡지에 눈을 고정한채 "아니 푱"이라고 건조하게 답했음. 

"난 너 머리 짧았을 때가 섹시해서 좋더라."
"....날 그런 눈으로 봄 푱? 평생 머리 길러야겠다."
"아 아니 말 잘못했네. 내가 아니고 우성이가 그러던데?"

잡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이명헌은 정대만에게 시선을 옮겼음. 

"우성이가 내 머리 밀어버리래?"
"뭐? 뭐래!? 걔가 왜!!!"

소파에 가로로 누워있던 정대만이 상반신을 튕기듯이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자 이명헌은 피식 웃었음. 정대만만큼 투명한 인간이 또 있겠나 싶어서. 

"과대가 머리 긴거 잘 어울린다고 했어 푱"

그런게 문제가 아닐까... 정대만은 작게 혀를 찼음. 

"도서관 사서도 요즘 잘생겨졌다고 했어 푱"
"그...그거 인사치레인거 몰라? 그냥 할머니가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왜이렇게 말랐어. 이런거랑 비슷한거야. 실제로는 아니라니까"
"...."

이명헌은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소파 앞 테이블에 올리고 정대만 쪽으로 아예 몸을 돌렸어. 

"...진짜 푱?"
"진짜."
"피용..."

눈썹이 팔자로 퓌어져서 잔뜩 상처받은 얼굴이 된 이명헌을 보니 정대만은 양심이 쿡쿡 찔렸음. 항상 주변 사람들이 잘생기다는 소리 듣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이명헌은 최근 들어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어. 사실상 단지 인상이 유해져서 사람들이 말걸기 쉬워진 것뿐이긴 하지만 이명헌은 달라진 헤어스타일 덕분이라고 생각했음.  

정대만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정우성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겠지. 이명헌은 끊임없이 자신의 머리를 견제하는 정우성이 이해가 안되었어. 이명헌이 여기서 머리를 지지고 볶고 뭔짓을 하던 정우성에 비할까. 저도 안내는 조바심을 왜 정우성이 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음. 전직 산왕의 주장이 그렇게 못 미더운가. 이명헌은 괜히 서운해짐. 

그리고 이명헌은 살짝 도라이 기질이 있었음. 

"바리깡 줘봐"

바리깡을 받아 든 이명헌은 무심히 화장실로 가 거울을 바라봤어. 그렇게까지 정우성이 자신을 못 믿는다면 어느 정도 신뢰감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음. 그게 선배이자 애인이 역할이니까. 그게 다소 충격요법을 동반한다고 해도 말이야. 



-




다시 이명헌을 만난 정우성은 변하지 않은 이명헌의 머리 길이에 이를 악물었어. 정대만에게 분명 미션을 수행했다는 떨떠름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는데 모자를 쓰고 있는 이명헌의 머리 길이는 전혀 변함이 없었지.  정대만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닌건 확실한데, 그 떨떠름한 목소리가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다시 빠박이로 돌아온 이명헌을 마주할 줄 알았던 정우성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어. 

"맛이 없어 푱?"
"아뇨?! 아뇨 맛있어요!!"

식당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은 이명헌은 정우성의 접시를 툭툭 치며 물었어. 정우성은 황급히 답하며 그릇에 코를 박고 열심히 리조토를 흡입했음. 체한다며 물을 건내주는 이명헌의 다정함에 정우성은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어버리려했던 자신의 악랄함이 생각나 사레가 들렸지. 

뭐 그 후는 평상시와 같았어. 밥 먹고 영화 보고 빈 공원에서 공 몇번 튀기고. 다른 게 있다면 모자를 단 한번도 벗지 않는 이명헌이라는거. 정우성은 혹시 자신이 정대만에게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어달라고 사주했던 일을 이명헌이 알고서 상처를 받아 저렇게 모자를 고수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음. 마음은 더 불편해졌어. 

괜히 마음에 상처 입은거 아니겠지. 

정우성은 이명헌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봤고, 골대에 공을 던져 넣은 이명헌은 쌍따봉을 날리며 그 눈빛에 회답했음. 괜찮은거야 안 괜찮은거야. 정우성은 혼란해졌음. 

그리고 뭐 저녁이 되어서 정우성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들어간 둘은 자연스럽게 엉겨 붙었어. 이명헌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던 정우성은 천천히 팔로 등줄기를 쓸어 내렸고 이명헌은 그때마다 정직하게 반응했지. 

"하...씻기 전에 한번 해도 되죠?"

이명헌의 목덜미에서 천천히 입술을 위로 옮긴 정우성은 입술을 탐했어. 두 다리가 얽혀 비틀거리며 간신히 침대까지 가서 털부덕 엎어지며 이명헌의 모자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음. 정신 없이 입술과 혀를 빨아대던 정우성은 이명헌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신음에 흥분해 상체를 벌떡 일으켜 겉옷을 던졌어. 그리고 다시 이명헌을 내려 봤는데. 

그런데. 

"형 미쳤어요?!!"

이명헌의 정수리는 동그랗게 바리깡으로 밀려져 빠박이가 되어있었고 그 주변으로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음. 그래 어릴때 이런 모습을 동화책에서 본적이 있었어. 갓파라고....

갓파....

천년의 발정이 한번에 식어버린 정우성은 이명헌의 하반신 밑에 자리 한채로 눈물을 그렁거렸어. 뻘쭘해진 이명헌이 팔꿈치에 힘을 주어 상체를 들어 정우성을 마주했음.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이 정직하게 동그랗게 손바닥만큼 쥐파먹은 정수리를 부각시켜서 정우성은 결국 눈물을 터트림. 

"...마음에 안들어 푱?"
"마음에 들리가 있어요? 이 상태에서 뭘 어떻게 해요 흐어어엉"

콧물까지 훌쩍이며 정우성은 이명헌의 머리에 손을 얹었고 까슬한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끼더니 더 크게 울었음. 

"이 머리하니까 싫어 푱?"
"흑 안 싫어요. 안 싫은데...흐엉"

그 모습을 보니까 이명헌은 괜히 웃음이 나와 입술을 꾹 깨물었어. 울다가 다시 한번 이명헌을 보고 다시 울고 잠시 멈췄다 싶다가 흘끗 머리로 시선을 옮기더니 다시 눈물을 터트리는 모습이 귀여웠지. 

큼큼 목소리를 몇번 다듬은 이명헌은 진지한 얼굴로 정우성을 마주했어. 

"이 머리하니까 아무도 번호 안 물어보던데"
"흑...물어볼리가 있어요? 흐윽"
"난 너만 좋으면 이러고 다녀도 괜찮아 푱"

그 말에 정우성이 눈물을 뚝 그쳤어. 그제야 이명헌 머리 갓파 사건의 전말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 했지. 그나저나

"아니 근데 그 머리 하고 돌아다녔어요?"
"푱"
"사람들이 뭐라 안해요?"
"다른 사람이 뭐가 중요해. 너가 불안해하는데 푱"

그 말에 정우성은 무릎을 꿇고 이명헌 앞에 엎어졌어. 그리고 히끅거리는 울음 속에 미안하다는 말을 담았지.

미안해요. 의심해서 미안해요. 나 미워하지마요. 형이 진짜 좋아서 그런거예요. 아무한테도 보여주기 싫어요. 저도 형 머리 긴거 좋았어요...

이명헌은 아무말 없이 정우성의 말을 끝까지 들어줬어.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넋두리와 같이 긴 말이 끝났을 무렵. 정우성은 발갛게 부어 오른 눈으로 고개를 들었어. 이명헌의 머리는 그럼에도 적응이 되지 않아 정우성은 황급히 시선을 내려 이명헌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음. 

"그래도 기뻐 푱"
"..흑...뭐가요?"
"너도 불안해하는구나 해서"

나만 매일 불안한 줄 알았는데.  이명헌은 살짝 미소 지으며 정우성의 밤톨같은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어. 



-




이명헌의 머리는 다시 짧아졌어. 아쉽지 않냐는 정대만의 질문에 나중에라도 다시 기르면 되니까 괜찮다고 이명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모자를 썼어. 

<정우성 남친>

노란 글씨로 대문짝만하게 박힌 검은 모자를 쓰는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있었지. 

"정우성이 쓰라고 줬어?"

정대만은 노란 글씨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명헌에게 물었어. 옷을 다 챙겨 입은 이명헌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음.

"아니. 내가 푱"
"너 진짜 대단하다. 난 절대 못쓴다"
"송태섭이 너도 쓰라고 했다는데 푱?"
"아 진짜 봐줘....근데 진짜야? 거짓말이지? 야!?"

다급하게 외치는 정대만 뒤로 하고 이명헌은 다음에 정우성에게 그 모자 보여줄 날만 기다리겠지. 뭐. 







우성명헌 약 태섭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