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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8 01:25
코드네임 넘버9 정우성. 정보부 내에 코드네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1~9까지 딱 9개 밖에 없는 숫자로 된 코드명은 업무상 살인이 허용되는 무소불위의 현장직 요원들 가리킴. 정우성은 현재 공석인 넘버4를 제외하고 단 여덟명 뿐인 현장 요원 중 가장 최근에 들어 온 막내임. 기간 뿐 아니라 나이도 제일 어림. 사실 너무 어린 나이에 발탁돼서 이래저래 말도 많았겠지. 그만큼 실력도 대단하지만 일 처리하는 방식이 아직 거칠고 날 것이라 데스크랑 상성 최악임. 그중에서도 이명헌이랑은 최, 최, 최악이지.

-넘버9. 방금 집어던진 거 우리쪽에서 준 시계인가요?
"네. 맞는데요."
-내가-. 제가 그거 회수해 와야 한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래요? 들은 거 같기도 하고. 근데 급한 걸 어떡해요. 저거 어차피 소형 폭탄이라면서. 터뜨려서 대가리 깨나, 맞춰서 대가리 깨나, 어쨌든 대가리만 깼으면 됐지."
-아. 그래요?
"네. 근데 이거 비밀번호 언제 나와요? 아직도 못 풀었어요? 나 여기 갇힌지 5분은 더 된 거 같은데. 빨리 좀 해봐요. 곧 있음 쟤네 따라 올 거 같다고요."
-문이야 열고 나오나, 부수고 나오나, 나오기만 하면 되죠.
"에?"
-잘해봐요. 넘버9. 뿅.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이명헌! 야!!"

시발, 내가 나가면 저 뿅쟁이 가만 안둬. 이 악물고 진짜 문 부수고 나온 정우성.

"이명헌!!!!" 하고 개발부 문마저 부술 기세로 처들어 오는 것도 이제 일상임.

"넘버9?"
"나 진짜 뒤질 뻔 한 거 알죠?!"
"알죠. 안 뒤진 것도 알고."

안경 추켜 올리면서 손가락으로 사지 멀쩡히 서 있는 정우성 가리키는 꼴에 정우성 머리꼭지까지 돌아서 오늘 진짜 담판을 지을 기세로 팔 걷어부치고 한 걸음 다가가는데.

안경 벗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슥,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명헌 박력에 잠깐 움칠함. 분명 키도 저보다 작고, 싸움이야 단연 현장 요원인 제 발끝에도 못 올텐데. 양손으로 골반 집고 서서 후, 하고 입 바람으로 앞머리 불어 넘기는 이명헌에 이상하게 내지러려던 주먹 조용히 내려놓게 되는 정우성.

"내가 분명히 말했죠. 이번에도 개발품 박살 내 오면 넘버9 머리통도 박살내준다고."

그러면서 아직 복사도 못 뜬 미완성 품이라 안 된다는 거 넘버9이 우겨서 가져 가더니 냅다 꼬라박은 그 시계가 얼마고, 그거 만들자고 우리 애들이 날밤 샌 시간이 얼만지 아냐, 잘근잘근 말로 밟는데. 좀전의 그 기세는 어디 가고 이명헌한테 탈탈 털리고 "이제 나가요 뿅." 하는 말에 쫓겨 나는 정우성. "그, 그래도 통신 끊은 건 너무 했어요!" 문 닫기 전에 한 마디 해보지만 "나가라고." 이명헌 정색하고 하는 소리에 진짜 나감.

"내가 명헌이 말 잘 들으라고 했짐, 마."

이명헌한테 깨지고 분해서 정보부 근처 바에서 '보드카 마티니. 젓지말고 흔들어서.' 마시고 있으면 정우성보다 한참 먼저 들어온 선배, 넘버7 신현철이 밤톨같은 머리통 쥐어 박으면서 옆에 앉음. 근데 이 선배는 같은 현장 요원인데도 볼 때마다 제 편은 안 들고 명헌이 말 잘 들으라는 소리뿐이지.

"씨. 형은 왜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요."
"뭐라 그럴만 하니까 그러지. 너 또 개발팀 애들 물건 부쉈다며."
"이명헌이 일렀어요?"
"이게. 선배라고 안 부르냐?"
"아, 데스크가 왜 내 선배예요!"

정우성 분해서 소리치는데 신현철 갑자기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 

"너 언제 들어왔지?"
"예?"
"1년 됐나?"
"2년이요."
"그럼 모를만 하네."

그리곤 고개까지 주억거리더니 위스키 한 모금 마시곤 말하겠지.

"명헌이 현장직이었어. 너도 봤을 걸? 훈련소 애들 대부분 명헌이 영상으로 트레이닝하잖아. 넘버4."

넘버4? '그' 넘버4? 정우성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눈만 둥그렇게 뜨고 신현철 쳐다보는데 쐐기 박 듯 고개 끄덕끄덕 해줌. 그치만 정우성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 그도 그럴 게 신현철 말대로 훈련소 시절 트레이닝 영상에서 보던 넘버4는 감정이라곤 없는 사이보그처럼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완벽한, 살인 면허의 요원 그 자체라. 도저히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통신 종료 때마다 뿅뿅거리는 이상한 말투의 저 데스크하고는 매치가 안 됐으니까. 

그게 이명헌이었다고?

정우성은 가만히 훈련소 시절 봤던 넘버4 얼굴을 떠올려보지만 임무를 수행하는 넘버4는 너무나 인간 같지 않아서 얼굴이나 표정 같은 건 기억나지 않음. 얼핏 기억 나는 거라곤 빡빡 깎은 동그란 머리통하고 감정 없는 눈동자뿐. 

그게 이명헌이었다니. 그 자체도 충격적인데 그러다 보니 비죽 솟는 궁금증 하나.

"근데 왜 데스크에 있어요? 어디 다치지도 않았는데."

보통 숫자로 된 코드명을 쓰는 현장요원들이 직을 그만 두는 건 팔할이 사망이고, 나머지 이할은 부상 탓이었음. 그것도 도저히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정도의 치명적인 부상. 정우성도 훈련소에 있다가 선임 넘버9이 사망하면서 그 코드명을 물려받은 케이스였지. 근데 이명헌은 너무나 멀쩡했음. 팔다리는 물론 우리나라 제일의 브레인들만 모아놨다는 저 개발부를 이끌만큼 머리도 아무 이상이 없잖아. 

그동안은 넘버4 자리가 오랜 공석인 게 부상 때문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데스크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음. 대체 '그' 넘버4가 왜? 영상으로 본 게 다지만 그 사람은 현장직이 천성인 것 같았는데.

이해가 안 가서 얼굴 찌푸리고 있는 정우성인데 신현철 그런 정우성에게서 비스듬히 시선 피하면서 위스키만 마시지.

"사정이 있다."
"무슨 사정이요?"
"니가 몰라도 되는 사정."

"아, 그게 뭔데요!" 아무리 졸라도 신현철 끝끝내 입 열지 않지.

정우성은 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하고 잠깐 궁금해 했지만, 곧 다시 투입된 임무에 궁금증도 사라짐. 다만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이명헌 목소릴 들을 때마다 이 사람이 '그' 넘버4구나, 하고 새삼 의식되겠지. 사실 정우성이 현장요원의 꿈을 꾸게 된 건 넘버4의 영상을 본 탓이었거든.

본래 정우성은 개발팀을 지원할 생각이었음. 원체 무기류에 관심이 많았어서 훈련소 입소할 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개발팀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입소 첫 해, 모든 예비요원들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체술 수업에서 단숨에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상대방을 제압하는 넘버4 영상에 홀려서는. 훈련소에서 볼 수 있는 넘버4 영상이란 영상은 다 구해서 돌려보고는 꼭 이 사람 같은 요원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처음 정보부에 입성했을 때에도 넘버4를 만날 생각에 두근두근 했었는데. 정작 자기를 이 길에 오게 한 넘버4가 당분간 공석이라는 얘기에 얼마나 실망했던지. 

근데 이렇게 매일 제 귓속에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내가-. 후... 넘버9은 좌우 구분 못합니까? 앞뒤는 알아 들어요?" 빈정거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 그러고보니 새삼 이명헌하고 합을 맞추면서 이상하다고 느꼈던 게 이해가 가. 정우성은 거의 이 일 시작했을 때부터 이명헌이랑 합을 맞춰와서 다른 데스크 요원들하고는 통신할 일이 잘 없었는데. 어쩌다 이명헌이 바빠서 다른 데스크 요원하고 교신하게 되면 속이 터질 때가 많았거든. 그도 그럴게 하는 업무가 너무 다르다 보니 현장이라곤 눈꼽만큼도 모르고 하는 소리에 열 받아서 정우성 쪽에서 먼저 통신 끊어버린 적도 몇 번 있었는데. 이명헌은 가끔 사람 돌아버리게 해서 그렇지, 늘 급박한 현장에 꼭 맞는 지시를 해줬거든. 그게 이제야 이해가 됨. 본인이 직접 뛰어봤으니 당연한 거였겠지만.

"엇!"

정우성 잠깐 그런저런 딴 생각 하느라 사전에 살피는 걸 잊고 바로 복도 끝 갈림길에 들어서는데 슉! 하고 탄환이 코앞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식겁하고 물러남. 

-넘버9?
"아. 저 쪽에 5명도 넘는 것 같은데. 여기 말고 다른 길 없어요?"
-잠깐만.

없다고, 무조건 뚫고 가라는 말 대신에 무언가 분주히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더 뒤로 물러서면 머리 위에 환풍구 뚜껑이 있을 거에요.

이명헌이 시키는 대로 무사히 탈출하게 되고. 맨날 그렇게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넘버4라는 얘기 듣고 나니 정우성은 묘하게 이명헌에게 호감을 느끼게 됨.

그러다 어느 날 정우성에게 떨어지는 해외 파견 임무. 이명헌 역시 정우성 전담이라 같이 출국하게 됨. 물론 정우성은 위장 신분이라 같이는 아니고 따로 감. 

14시간의 비행 끝에 낯선 타국에서 임무 시작하는데, 시작 전 개인 휴대폰으로 신현철에게 전화가 옴.

-우성이냐?
"형.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너 지금 ㅇㅇ에 있지?

정우성 순간 대답 않겠지. 같은 현장 요원이라지만 임무 관련된 건 절대로 누설하면 안 됐으니까.

"대답 못하는 거 알잖아요. 왜 그래요?"
-너 그거 할 수 있겠냐?
"네?"
-명헌이가 어제 연락이 왔어. 이번 임무 영 느낌이 안 좋다고. 지원 올 수 있냐고. 넌 뭐 이상한 거 없었어? 

"아뇨. 별로... 없었어요." 정우성 그렇게 대답하는데 기분이 이상함. 임무를 누설하면 안된다는 제1원칙까지 어기고 신현철한테 도와달라고 했다는 게 좀 마음이 간지럽기도 하고 아무튼 이상함. 정작 나한텐 아무 말도 없었으면서. 심지어 정우성 어저께 이명헌이랑 만나기까지 했단 말이야. 그땐 걱정하는 얼굴은커녕 세상 살벌한 표정으로 "이거 잃어버리면 그냥 돌아오지 마요. 뿅." 하고 넥타이핀만 채워줬는데. 

정우성 괜히 이명헌이 채워준 넥타이핀 만지작거리면서 "아무튼 나 지금 출발하니까 너도 뭐 이상한 거 있으면 바로 발 빼. 무리하게 진행하지 말고." 하는 신현철한테 "네, 네." 건성으로 대답함.

-전방에 11시 방향. 노란 원피스.
"타겟 확인 했습니다."

이번 현장은 카지노로 유명한 호텔이었고 신현철이 우려했던 것과 달리 꽤 수월하게 진행됨. 통신을 타고 흘러나오는 이명헌 목소리는 평소랑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서 오히려 신현철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지. 정우성은 걱정이 무색할 만큼 순조롭게 타겟한테 접근해서 필요한 정보를 모두 빼내는데 성공함. 그대로 호텔방으로 올라와서 노트북으로 탈취한 정보를 모두 넘긴 뒤, 이대로 철수하려고 하는데.

똑똑.

움직이기 수월하도록 점프수트로 갈아입고 막 지퍼를 채우던 정우성 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멈칫함. 올 사람이 없었거든.

-넘버9?  

귓전에 있는 이어폰을 톡톡 두번 두드려서 통신을 재연결하면 바로 이명헌 목소리가 들려옴.

"지금 룸 바깥에 있는 사람 누군지 확인 가능해요?"
-잠깐만요.

바로 아래층에서 대기중이던 이명헌. 좀전의 임무 완수를 끝으로 정리중이던 장비들 급하게 다시 연결하면서 대답함.

-복도 씨씨티비 지금 확인했어요. 아무도 없는데. 바깥에 누구 있는 거 확실해요?

그말에 정우성 발소리 죽이고 문가로 다가감. 숨소리도 내지 않고 바깥 쪽 살피는데 아래 문틈 사이로 설핏 움직이는 그림자. 어림잡아도 셋 이상임.

"확실해요. 셋. 더 많을수도 있고."
-......화면에 안 나와요. 비어있어.

그 얘긴 화면을 바꿔치기 했단 소리겠지. 

함정이구나. 정우성 바로 직감하곤 허리 뒤춤에서 총을 빼드는 것과 동시에 밀려드는 총탄들.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에 곧바로 바닥을 굴러 옆으로 피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대충 한쪽만 끼워놨던 이어폰이 빠짐. 

-넘버9? 넘버9?!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소리 때문에 위치가 발각될까봐 정우성 총탄 세례에 묻혀서 제 손으로 이어폰부터 쏴갈김. 그리곤 테이블 뒤에 숨어서 색색거리는 숨부터 고르는데. 매번 임무 때마다 귓속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이명헌 때문에 열받아 미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그게 사라지고 나니까 정작 왜 이렇게 막막한지. 

이제 총알 세례는 끝났는지 사방이 조용해지고. 너덜너덜 해진 문짝 걷어차면서 들어오는 발소리는 정우성이 추측한 대로 셋이었음. 혼자 상대할 수 있으려나.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예삿 놈들은 아닐테고. 고립된 호텔방 안.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치면서 훅, 숨 한 번 들이킨 정우성, 상대가 방심하고 있는 동안 먼저 선제 공격으로 치고 나감.

빠르게 한놈 처리한 건 좋았지만 역시나 예상한 대로 실력이 보통은 아닌 놈들인지 곧바로 쏟아지는 총탄이 정우성 발치를 스치고 감. 허공에 대고 마구잡이로 총질하는 게 아니라 빠르게 움직이는 정우성 동선 그대로 캐치해서 쏴대는 통에 점점 룸 안 쪽으로 몰리는 정우성이지.

그대로 사방에 총탄이 날아다니고 정우성도 간신히 대응해보지만 애당초 밖에서 밀고 들어온 애들을 상대하느라 위치부터 불리한 탓에 더 이상 숨을 곳도 없이 내몰려지고. 등 뒤는 60층 호텔 발코니고 벽 하나 뒤에는 총부리 들이민 적군이지. 정우성 하, 하고 어이없이 한 번 웃었다가 곧 이 악 물고 벽 밖으로 튀어 나가는데,

탕! 탕!

나가자마자 마주친 건 소음기도 안 꽂은 총에 나란히 머리통 터지는 놈들 둘. 이게 무슨...... 황당해서 쳐다보면 교본 같은 자세로 총구 들이밀고 있는 이명헌.

"이명헌?"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이 어찌나 험난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칠갑을 한 이명헌이 그제야 정우성을 발견함. 

"넘버9?"

무사한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입밖으로 그렇게 불러보는 이명헌 얼굴이 어찌나 백짓장처럼 창백한지. 온통 흐트러진 차림에 매번 쓰고 다니던 안경도 잃어버리고. 무엇보다 이명헌 온몸을 벌벌 떨고 있음. 꼭 잃어버릴까 겁먹은 사람처럼.

그런 이명헌을 보는데, 정우성 조금 전 적군 세명 맞딱뜨린 것보다 더 세게 심장이 쿵쿵 뜀.

"나 괜찮아요. 여긴 어떻게-"

왔어요? 다 묻기도 전에 스르르 쓰러지는 이명헌. 

놀라서 뛰어가 받아 안고 보니 이명헌 어깨 한 쪽이 흥건함. 죄 다른 놈들 피를 뒤집어 쓰고 온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젖어들고 있는 어깨죽지는 이명헌 상처에서 나오는 피였음. 

정우성은 그대로 이명헌 들쳐 업고 마침 도착한 신현철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함. 워낙 출혈이 커서 예사 상처는 아니겠구나, 짐작은 했지만 아지트에서부터 긴급 치료 시작해서 본국으로 이송된 뒤에도 이명헌 의식이 없음. 정우성은 애가 타 미칠 것 같아. 근데 이게 제 목숨 빚 진 사람에 대한 은혜 때문인지 아니면 그날 느낀 이상한 쿵쾅거림 때문인지 모르겠음. 그걸 모르겠어서 매일 개발팀에 출근 도장 찍고 있음. 이명헌 복귀했나 보려고.

그렇게 한 달. 그 사이 간단한 임무도 2개나 수행했지만 여전히 이명헌 자리는 비어 있지. 그날도 빈 자리 확인하곤 영 가슴이 울렁거려서 제 가슴에 대고 주먹으로 쿵, 쿵, 그러지 말라고 꾸짖는 사람처럼 두드리고 돌아서는데 "정우성!" 복도 끝에서 부르는 신현철.

"또 명헌이 보러 갔다 오냐?"
"네."
"이제 그만해라. 안 해도 되니까."
"네?"
"명헌이 모레 복귀야. 오늘 연락 받았어."
"정말요? 모레 언제요? 몇시에 오는데요?"
"그거까진 모르지 나도."

정우성 모른다는 말에도 신나서 고개 끄덕거리고 있음. 꼬리가 있다면 붕붕 흔들 기세지. 

"이명헌 죽여버린다고 할 땐 언제고. 지 목숨 구해줬다고 바로 충성이냐? 이게 그래도 의리는 있네." 

신현철은 별 생각없이 한 말인데 그날 이후로 이명헌만 생각하면 토할 것처럼 심장이 뛰는 정우성은 괜히 지레 들킨 기분이라 손까지 저어가면서 그런 거 아니라고 변명함.

"그런 게 아니라! 나 때문에 다쳤잖아요.... 미안해서 그러죠."

아직도 제 품에서 차갑게 식어가던 이명헌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해서, 정우성 저도 모르게 시무룩해짐. 그게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신현철이 옆에서 정우성 어깨에 툭 제 어깨 부딪히면서 말을 꺼내지.

"너 때문 아니니까 너무 풀 죽지 마라."
"왜 나 때문이 아니에요. 나 때문에 다친 거지."
"뭐. 그렇긴 한데. 그게 누구든 명헌인 그렇게 했을거야. 넘버9 생각 났을 테니까."

넘버9? 넘버9은 난데? 정우성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쳐다보면 씁쓸한 얼굴로 이야기 하던 신현철이 한숨 한 번 푹 쉬곤 마저 말을 이음.

"아니. 너 말고. 그 전 넘버9. 최동오라고, 명헌이 애인."
"......애인이요?"
"어. 죽었거든. 비슷하게. 빠리에서 임무 마치고 복귀하다가."

그 순간 "넘버9?" 하고 부르던 목소리와 겁에 질린 사람처럼 창백하던 이명헌 얼굴이 머릿속을 스침. 

"......아. 그래요?"

그렇구나. 정우성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하면서 고개 두어번 끄덕거리는데. 분명 미안한 감정이 덜어져야 맞는데. 나 때문 아니라니 조금 홀가분해져야 맞는데.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좆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