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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8 00:56
대만이는 고3 때부터 송태섭 짝사랑 중임. 오랫동안 지고지순하게 짝사랑 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중간중간 연애를 하기는 했는데 태섭이가 미국에서 잠깐씩 들어올 때 맞춰서 헤어지고 그럼. 기껏해야 1년에 2번 보는데 그 2번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정대만이었음.

사실 태섭이한테 고백하려고 했었어. 대만이 졸업식 때 두번째 단추를 주면서 얘기하려고 불렀는데 태섭이가 먼저 그러겠지.

“선배, 우리 그냥 이렇게 지내요. 이렇게 좋은 선배 후배 사이로요.”

고백도 하기 전에 날아온 완곡한 거절이었음.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제 마음까지 알아차릴 줄이야. 대만이 딴에는 나름 숨긴 건데도 말이지. 하지만 대만이는 이대로 포기하지 않았어.

“이 정도는 괜찮지?”

태섭이 손에 쥐어준 두번째 단추는 다행히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 그게 어디야. 대만이는 그렇게 생각했어.

대학생이 되고서도 자주 북산을 방문했지. 송태섭이 이끄는 농구부가 궁금해서, 강백호의 부상 후 복귀가 무사한 지 보고싶어서, 다른 애들은 잘하고 있는지 봐주고 싶어서, 인터하이를 위해 도움이 되고 싶어서 등 명목은 충분히 많았음. 태섭이가 가끔 눈치를 주기는 했지만 그런 것 쯤이야 얼마든지 모르는 척 할 수 있었어. 너 보러 오려고 하는데 네가 날 봐주잖아. 되려 이런 생각이 들기까지 했음. 네가 그럴 때마다 난 기쁘다고 하면 태섭이는 질겁을 하겠지? 태섭이한테 할 수 없는 말을 떠올리며 혼자 작게 웃었지.

어느 날 태섭이가 대만이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했어. 송태섭이 얘기하는데 없더라도 만들어야지. 대만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들뜬 기분으로 태섭이를 만나러갔음. 그러나 그 기분은 곧 곤두박질치겠지.

“저 미국에 가게 됐어요.”

당연히 태섭이에게 잘된 일이었어. 아주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붙잡아야지. 미국에서 농구 유학이라니, 놓치면 바보잖아? 그렇지만 이제 태섭이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대만이에겐 무엇보다 크게 다가왔어. 어떻게 축하를 전했는지도 모르겠어. 표정관리를 어떻게 했는지도 몰랐지. 대만이는 딱 하나만 기억났어.

“마중 나가도 돼?”

그래서 태섭이가 뭐라고 했더라.

“저 오전 비행기에요. 선배는 학교 가야죠.”

예쁘게 웃으며 말하니 뭐라 더 우길 수도 없었지. 그 뒤로 다시 오가는 축하와 감사 인사. 안부. 시덥지 않은 일상 얘기. 하지만 대만이 머릿속엔 모두 흐릿해져버린 말들이었지.

태섭이의 출국날, 대만이는 그 날 하루종일 하늘만 쳐다봤어. 학교 가라는 태섭이 말을 어기고 공항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미움 받으면 어떡해. 그러면서 짝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다고, 대만이는 생각했어. 짝사랑 상대의 말 한 마디에 어쩔 줄을 모르잖아. 나중에 연락해보려고 해도 태섭이 미국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탈해졌지. 결국 네가 끊으면 끊어질 관계구나, 우리는.

몇 달 동안 대만이는 열심히 소개팅도 하고 과팅도 나가고, 하여간 미친 사람처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었어. 연애 못 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냐 뿅. 몇 번째인지도 모를 소개팅을 다녀온 대만이를 보고 명헌이가 한 말이었지. 그런가봐. 대충 대답한 대만이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어.

“우성이 룸메이트가 북산 7번이라는데.”

곧 명헌이 말에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나왔지만. 컥컥거리는 대만이를 한심하게 쳐다본 명헌이는 깨끗이 닦아라 뿅. 하며 단호하게 얘기했지. 하지만 대만이는 진정되자마자 명헌이한테 가서 걔네 같이 사는 거지? 하고 묻는 거임.

“룸메이트라니까 뿅.”
“그럼... 정우성 집 전화번호도 아냐?”
“송태섭한테 못 들었냐 뿅.”
“......”

대답 없이 시무룩해진 대만이를 보고 명헌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지. 정대만과 송태섭. 이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굳이 물어서 알고 싶지는 않았음. 어쩔까 뿅. 쉽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너니까 말하는데.... 사실 내가 송태섭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연락할 방법이 없거든. 좀 가르쳐주면 안 되냐?”

예상치 못 한 말에 이명헌은 동요했다...! 이 정도의 얘기까지 듣고 싶지 않았던 명헌이는 얼른 정우성과 송태섭의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말았지. 그 번호를 받은 정대만은 어찌나 환하게 웃던지. 누가 보면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이라고 봤을지도 몰랐음. 하지만 며칠 뒤, 정대만은 순식간에 세상 고민을 다 떠안은 얼굴이 되었음. 전화번호를 안다고 해서 뚝딱 전화를 하기엔 내가 송태섭한테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지. 그러나 답지 않게 망설임으로 며칠을 보내는 건 대만이의 성미엔 맞지 않는 일이었고 참다 못 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전화를 걸었지.

- Hello.

혹시 목소리가 좀 바뀌었을까? 다른 나라 언어를 쓰면 말투가 바뀔 수도 있다는데. 설마 너무 바뀌어서 못 알아들으려나. 하지만 그런 건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음. 조금의 노이즈가 끼여있었지만 이 목소리는 대만이가 그리워하던 태섭이의 목소리 그대로였으니까.

- Hello? Hello? ...뭐야. 왜 말을 안 해.

그리고 조금은 불량란 말투까지. 대만이는 참지 못하고 으하하 소리내며 웃어버렸어.

- ...선배?
“어, 나인지 바로 아네.”

감동이다? 대만이는 정말 기뻤음.

- 어떻게 몰라요.

오늘 송태섭이 날 행복하게 만들려고 작정했구나. 대만이의 웃음은 더욱 더 커졌지.

“잘 지냈냐.”
- 저야 뭐... 선배는요?
“나?”

네가 보고싶어서 요즘 미친듯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어. 그 사이에 사귀어 본 사람들도 몇 있었고. 그런데 다 오래 못 갔어. 그렇게 많이 만났는데도 그 사람들은 전부 네가 아니라서 날 채워주질 못하더라. 누구를 만나더라도 너만 생각나, 태섭아.

“난 잘 지내지.”

이런 말 하면 애 도망가겠지. 대만이의 웃음이 쓰게 변했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다가도 순식간에 바닥를 치게 하는 것도 전부 너 하나구나. 하지만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까. 대만이는 다시 입꼬리를 끌어올렸음.

“미국 생활은 어떤데? 나 궁금한데.”
- 별 거 없어요. 대학교 가서 수업 듣고 끝나면 훈련하고. 이것만 반복중이에요.
“나랑 똑같네.”
- 다르죠. 선배는 북산 온다고 땡땡이 자주 쳤잖아요. 난 땡땡이는 안 쳤어요.
“야 그건...!”

태섭이는 대만이더러 어떻게 번호를 알고 전화했는지 묻지 않았어. 대신 그간 연락하지 안 했던 몇 달은 없었던 것처럼 여상스럽게 얘기를 했지. 근데 국제전화 요금 많이 나오는 거 아니에요? 대만이는 네가 그걸 왜 신경 쓰냐고 했어. 뭐야, 저는 선배 걱정한 건데요? 저를 걱정한다는 말. 대만이는 다시 태섭이 때문에 행복해졌어. 너는 네가 이렇게 나를 마구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까. 대만이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제 마음을 내리눌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