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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7 20:11

인터하이 끝나고 치수랑 준호 입시준비로 부활동 그만두게 되면서 북산고 농구부 분위기도 좀 변하겠지. 특히 태섭이가. 태섭이는 치수한테 주장 물려 받으면서 전보다 좀 엄해짐. 본래 천성이 다정한 편이라 크게 꾸중하거나 윽박 지르지는 않아도 전처럼 뒤에서 후배들 다독거리는 것보단 앞에서 강하게 이끌어주는 역할이겠지. 그럼 대만이가 자연스럽게 후배들 부둥부둥하는 역할 맡을 거 같음. 태섭이가 치수한테 북산의 아빠 역할을 물려 받았다면 대만이는 준호한테 북산의 엄마 역할을 넘겨 받음.

누가 그러라고 시키거나 태섭이랑 둘이서 이렇게 하자고 얘기한 건 아니고. 워낙 비큐 높아서 경기 중에 알아서 제 자리 찾아가는 것처럼, 묘하게 변한 농구부 분위기에 맞춰서 자기가 할 역할 찾아간 거였음. 

그래서 윈터컵 준비하는 기간 동안 1, 2학년들 잘 할 때마다 대만이가 가장 먼저 달려가서 아유 요 이쁜놈! 하고 엉덩이 한 번 차주고, 머리 벅벅 문질러주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겠지. 서태웅 세상 혼자 살 것처럼 생겨 가지고 은근히 한 자리씩 끼어 있는 거. 

맨날 그렇게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다가도 백호가 골 넣으면 달려와서 멀찍이 나마 서 있고, 연습경기 하다가 달재의 마지막 골로 이기면 헹가레 하는 사람들 틈에 팔 하나 보태고 있음. 그리고 무엇보다

"야, 서태웅!"

몇 번 이쁘다고 머리 끌어안고 벅벅 문질러 버릇했더니 이제는 알아서 기다리고 있음. 딱히 나 쓰다듬어주세요, 하고 허리를 숙이거나 이쪽을 쳐다보진 않는데 제가 올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이뻐죽겠다고 머리 마구 흐트러뜨리면 길쭉한 손가락으로 툭툭 정리하곤 저만치 뛰어감. 그런 태웅이 보면서 저놈 은근히 귀여운 구석 있네, 하고 생각하는 정대만.

근데 한 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서태웅 지켜보는 재미가 있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애가 조용히 한 마디씩 하고 있어. 

"돈까스 먹으러 가자 돈까스!"
"그저께도 돈까스 먹었잖아. 햄버거 먹어, 햄버거."
"말이 많다 송섭섭! 돈까스, 고!"
"아 오늘은 햄버거 먹자니까."

연습 끝나고 강백호랑 송태섭이랑 저녁 메뉴로 티격태격 하고 있으면 뒤에서 가방 어깨에 매고 따라가던 서태웅 조용히 중얼거림.

"돈까스..."

한 걸음 앞에서 걷던 정대만 그 소리에 돌아보지.

"돈까스 먹고 싶어?"

그럼 대답 없이 눈만 한번 깜빡했다가 끄덕여지는 고개에 어린 남동생 보듯이 웃고는 앞에가는 송태섭 보고 소리 침.

"야, 태섭아! 돈까스 먹자! 나도 돈까스!"

결국 다같이 돈까스 먹으러 가는데 송태섭이랑 그날 연습한 거 애기하다가 우연히 볼 불룩해지도록 돈까스 먹는 서태웅하고 눈 마주치고 슥, 한 번 웃는 정대만이지.

그렇게 정대만 안에 은근히 귀여운 놈으로 자리 잡은 서태웅. 그래서인지 며칠 뒤 연습 게임에서 한 팀으로 뛰게 되는데 서태웅 비호처럼 달려나가서 덩크슛 꽂아넣는 거 보고 멀리서부터 "서태웅~~!" 하고 달려와 한 팔로 머리통 끌어안은 정대만. 자기도 모르게 요 후배놈 너무 이쁘고 기특해서 오른쪽 볼하고 관자놀이 중간의 어중간한 곳에 꾹 입술도장 찍어버림.

"......!"

제 팔에 안겨 있다가 흠칫 하는 서태웅 때문에 정대만도 순간 제가 한 짓 깨닫고, 놀라서는 손바닥으로 서태웅 뺨 마구잡이로 문질러줌.

"어, 야 미안. 미안하다. 기분 나빴지."

그래도 다 큰 사내놈인데 내가 너무했지 싶어서 태웅이 흰 뺨 빨개지도록 벅벅 문지르다 못해 유니폼으로까지 닦아주고 저만치 멀어지는 정대만. 그리고 멀어지는 등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금 늦게 뒤돌아 뛰는 서태웅.

그날 연습 경기 끝나고 청소 당번 걸린 정대만 혼자 남아서 농구공 정리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남. 마지막 남은 농구공 바구니 안으로 던져 넣다가 놀아보면 연습장 문 옆에 기대 서 있는 거 서태웅임.

"태웅이?"
"네."
"왜? 뭐 두고 갔냐?"

서태웅 묻는 말에 대답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대뜸

"기분 안 나빴어요."
"엉?"

뭔 소리지? 정대만 얼굴에 그렇게 써 있는데 서태웅 이번에도 대답 않고 정대만 오른쪽 뺨에 제 입술 꾹 눌러 찍음.

"!!!"

"뭐, 너, 뭐, 뭐!" 정대만 뒤늦게 뺨 감싸 쥐면서 화등잔만하게 커진 눈으로 서태웅 올려다보는데 얘는 뭔 생각인지 알 수 없게 평소같이 뚱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말해줌.

"기분 안 나빴다고요."

그러더니 볼 일 다 끝났다는 듯이 가 버림.

그리고 그날 밤 잠 못 이루는 정대만. 생각이 많은 편이긴 해도 대부분 결론을 빠르게 내는 편이라 밤잠 설치는 일 잘 없었는데 그 날은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게 됨. "기분 안 나빴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다음날 토끼마냥 새빨개진 눈으로 습관처럼 연습장 들어서는데 코트 정 중앙에 삐죽 솟아 있는 서태웅 뒤통수밖에 안 봤는데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얼굴에 열이 오름. 전날까지 아무 생각 없이 때리고 부둥켜 안고 별짓 다 하던 후배놈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서태웅의 존재가 너무 생생하게 다가옴. 대체 그 뽀, 뽀, 뽀뽀가 뭐라고. 

정대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 해보지만. 

"아. 대만선배 왔어요?"

송태섭이 하는 인사에 연습하다 말고 이쪽으로 고개 돌리는 서태웅하고 눈 마주치자마자 저도 모르게 홱! 고개 돌려버림.

그날 연습은 가관이었음. 서태웅도, 정대만도, 공만 잡았다하면 날아다니는 건 똑같은데 정대만 패스할 때 빼고는 죽어도 서태웅 근처로 안 감. 서태웅이 골을 넣든 덩크를 하든 팀원들 다 달려가도 정대만만 허공 쳐다보면서 "어우, 날이 덥네." 딴청피고 있음. 연습이 워낙 빠르게 돌아가니까 다른 사람들은 정대만 그러는 거 모르지만 서태웅은 똑똑히 알지. 매번 제일 먼저 뛰어와서 제 머리 쓰다듬어 주던 선배가 오늘은 눈도 안 마주치는 거. 서태웅 뛰어다니느라 거칠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가슴으로 색색 숨 내어쉬면서 정대만 쳐다보지만 굳이 뭐라고 말하진 않음. 그치만 그게 하루이틀이어야지.

일주일 째. 서태웅이랑 눈도 안 마주치고, 서태웅 앉아 있으면 멀찍히 돌아서 가장 떨어진 곳에 잠깐 엉덩이 붙였다가 서태웅 일어나기가 무섭게 헐레벌떡 도망가는 정대만 때문에 서태웅 심기 말도 못하게 불편해짐. 가뜩이나 서늘한 인상인데 내내 찌푸려진 미간 때문에 서태웅 분위기 말도 못하게 살벌해져서, 세상 해맑은 강백호마저도 "섭섭이, 여우자식 왜 저래?" 할만큼 불안불안하더니.

"선배."

결국 오늘 가족모임 있어서 먼저 가 본다고 락커룸 들어가는 정대만 뒤따라가는 서태웅.

근데 제가 뭘 했다고, "선배." 하고 부른 것 밖에 없은데 정대만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더니

"어, 어. 태웅아. 왜? 할 말 있어? 근데 내가 지금 바빠가지고. 집에 바로 가봐야 돼서. 나중에 하자."

줄행랑 칠 기세인 정대만 때문에 가뜩이나 새침하게 솟은 서태웅 눈초리 잔뜩 올라감.

"선배. 왜 저 피해요."
"어? 내가? 내가 널 피해? 내가 왜?"

말은 그렇게 하는데 정대만 지금도 서태웅한테 멀어지려고 한발짝 더 뒤로 가는 중임. 그 몸짓에 참았던 뭔가가 터지는 기분이라 서태웅 거의 먹잇감 물어채는 맹수처럼 순식간에 정대만한테 다가가더니 양팔로 꼼짝 못하게 가둬버림.

"야, 야, 야, 야. 태웅아."

갑자기 코앞에 들이밀어진 서태웅 얼굴에 정대만 고장나서 이리저리 눈만 굴리는데 서태웅 그 시선조차 빼앗고 싶어서 조그만 얼굴 붙잡아놓음.

"얌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선배가 자꾸 저 피하잖아요."
"피한 적 없어."
"지금도 피하는데요."
"그, 그거야! 그거야......"

커다란 손에 붙잡혀서 눈도 못 돌리고, 밤마다 머리 빠개지게 떠오르던 서태웅 얼굴 눈앞에 둔 정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왜 피하냐고 묻는 질문에 왠지 좀 억울한 생각까지 들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빽 소리지름.

"니가 나한테 뽀뽀했잖아!"
"선배도 했잖아요."
"야, 그게 무슨 뽀뽀야! 나는 그냥 귀여워서 한 거지!"
"저도 선배 귀여워요."

환장하겠네. 정대만 복장도 터지고 얼굴도 터질 것 같음. 얘는 왜 자꾸 이런 얘길 하냐. 나 일주일째 잠도 못 자고 있는데. 그런 생각하는데, 고작 한 뼘 앞에 있는 서태웅이 눈이 빨갛지. 그것도 새빨갛지. 가만 보니 눈이 조금 부은 것도 같음. 하도 살벌하게 잘생겨서 티가 잘 안나서 그렇지.

"......너 잠 못 잤냐?"
"네."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도 자는 놈이 잠을 못 잤다니. 이게 뭔 소린가 싶어서 정대만 눈만 꿈뻑꿈뻑함.

"선배가 저 피했잖아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못 잤다는 소리... 맞나? 정대만 설마 싶어서 아무 대꾸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툭. 어깨 위로 서태웅이 이마를 기대오지.

"피하지 마요."
"......피한 적 없다니까."
"피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진짜 피곤한 사람처럼 평소보다 더 낮고 가라앉아 있어서 정대만 묘하게 죄책감 드는 바람에 서태웅 밀어낼 생각도 못하고 그냥 어깨만 내주고 있는데,

"뽀뽀하고 싶어요."

갑자기 훅 들어오는 서태웅 때문에 "왁!!!" 소리 지름.

"뭐, 뭔소리야!"
"선배도 했잖아요."
"그래서 너도 했잖아!"
"선배도 또 해요."

어느 틈에 서태웅 양팔에 꽁꽁 감겨 안겨서는 코앞에 들이밀어진 번쩍번쩍한 얼굴로부터 필사적으로 고개 돌려가면서 피해보지만.

"......싫어요?"

하고 묻는 새카만 눈동자랑 시선이 마주치면 차마 싫다는 소리가 안 나감.

얘는... 뭘 먹고 이렇게 이쁘냐.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이 예쁘다 못해 박력까지 느껴지는 폭력적인 미모에 이러면 안된다는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대답함.  

"그... 싫지는 않은데..."

그러면 슬며시 웃는 서태웅 얼굴이 조금 전 미모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빛이 나서는, 서태웅 입술이 제 입꼬리 옆에 꾹 닿았다 떨어질 때까지 정신 못차리는 정대만과 

"아니 잠깐만! 야, 좋지도 않은데! 야! 내 말 좀!" 

버둥거리는 몸 꽉 끌어안고 배부른 사자처럼 웃는 서태웅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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