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업






정우성은 미국 가서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막 대학리그에서 뛰기 시작한 상태임. 이명헌도 작년부터 자기 대학 주전으로 발탁되어 뛰고 있음. 우성이 잠시 귀국해서 형 자취방에 짐을 풀고 지냄. 그런데 하루는 비시즌인데도 다른 대학이랑 연습경기가 잡혀서 명헌의 귀가가 평소보다 늦어지게 됨. 우성은 개의치 않고 혼자 밥을 챙겨먹고 주변 산책하면서 기다릴테니 조심히 다녀오라고 인사했음.

우성이 유학하면서 익힌 자취 짬으로 형네 집에서 혼자 점심 차려먹고 설거지까지 뽀득뽀득 해놓음. 명헌이 우성이를 기숙사에 처음 입사해서 생활력이 없던 아기 에이스 시절로 생각하고 대하고 우성이도 명헌 앞에서 모른척 어리광을 부려서 그렇지 충분히 생활을 잘 챙겼음. 우성은 잠깐 뒹굴거리면서 소화시키다가 이명헌이 자주 쓰는 검정색 캡모자를 몰래 빌려서 눌러쓰고 집을 나섰음.

그 근처 대학가를 쏘다니고 캠퍼스를 한바퀴 크게 돌다가 결국 농구공 튀기는 소리가 탕탕 울리는 체육관 앞까지 다다랐음. 우성이가 와주길 원했다면 이명헌이 오라고 진작 말했을텐데 오늘은 그런 말이 없었으니, 들어갈지 말지 잠깐 망설임. 들어가려면 형이 싫어하려나? 머뭇거리다가 퍼슬덩에서 태섭이네 엄마가 살짝 보고 왔듯이 자기도 관중석 멀리서 살짝 구경만 할 생각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이명헌은 대번에 눈에 띄었음. 어젯밤에 근처 야외 농구코트에서 원온원할 때는 야속하게도 ‘이제 우성은 못 당하겠다 삐뇽’ 하며 일찍 그만뒀으면서. 우성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실력이었음. 남은 시간을 보니 한 쿼터 안에 경기가 끝날 거였음. 명헌은 경기가 끝나면 다른 일정 없이 우성에게로 돌아올 예정이었음. 우성은 당연하게 그 사실을 알았기에 끝까지 기다릴 마음을 먹었음.

명헌은 버저가 울리기 전에 우성이 온 사실을 깨달았음. 떡 벌어진 어깨에 지난 2년간 쑥쑥 커서 마지막으로 쟀을 때 이미 195cm를 넘긴 키, 긴 다리를 꾸깃하게 접고 조명 꺼진 관중석에 두둥하니 앉아있는 남자는 쉽게 명헌의 시야에 포착됐음. 경기가 끝나고 상대 선수들이랑 악수하고 감독의 부름에 헤쳐모이는데 명헌 살짝 손을 흔들어라. 우성은 명헌에게서 미세한 반가움을 알아보고 오길 잘했다 생각했음.

피드백은 짧았음. 명헌이 주전으로 풀타임을 뛴 이후 근래의 연습경기는 거의 대부분 무난하게 승리했음. 감독 인생에 만난 참으로 괜찮은 포인트가드. 이 선수의 백업은 이 선수로, 이 선수는 체력이 약하니 이렇게, 이 선수는 저 선수를 마크하도록... 그리고 이 선수는 사인을 잘 읽으니 이렇게, 이 선수는 경험이 많으니 이렇게, 이 선수는 이렇게 패스해도 받더라고요 삐뇽. 입단한지 겨우 만으로 1년을 넘겼을 뿐이면서 코트 내외에서 선수들을 톡톡 건드리는 것으로 평소라면 100을 발휘할 팀의 전력을 130으로 끌어올리는, 포지션 이상을 하는 선수가 명헌이었음.

락커룸으로 들어가지 않고 벤치에서 간단하게 피드백을 마침. 해산 전에 선수들 다같이 식사를 들겠냐고 감독이 물어봤지만 명헌은 관중석을 눈짓하며 일행이 와서 오늘은 빠지겠다고 말함. 우성이 긴 다리로 계단을 두셋씩 성큼성큼 내려오던 참이었음. 감독 뿐만 아니라 주변 선수들도 우성의 피지컬을 보고 오, 하고 제각기 짧은 감탄사를 흘렸음.

“친구도 농구해?” 옆에 서 있던 선수가 물었음.
“...고등학교 후배, 삐뇽.”

아, 산왕. 다들 빠르게 납득함. 자신을 보는 시선들을 깨달은 우성이 명헌의 감독과 동료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음. 승리로 기분이 좋았던 감독이 “농구공 한번 잡아보라고 하지.”하고 말을 건넸음. 명헌이 황급하게 “졸업생입니다. 저 친구는 이미 소속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감독에게 다른 의도는 없었기에 명헌의 친한 후배라니까 궁금할 뿐이라고 허헛 웃었음. 명헌은 뒷짐지고 있던 손을 꽉 쥐었음.

다들 호기심을 가진 눈치였음. 명헌은 우성을 불러들였음. 감독이 후반의 첫 5분까지만 뛰고 휴식한 주전 파워포워드를 붙여주었음. 30점 선취. 감독의 제안에 우성은 약간 긴장했지만 익숙하게 몸을 풀었음. 명헌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알기 어려웠으나 우성은 자신을 향한 믿음, 희미한 당혹, 그리고 우려를 읽어냈음. 우려? 왜? 우성은 어깨에 힘을 주어 뻐드득 뼈 소리를 냈고, 코트를 날았음.

첫 덩크를 하자마자 우성의 머리통에 약간 헐렁하던 캡모자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음. 우성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모자를 주워 코트 밖으로 던졌음. 누군가 어, 하고 짧게 내뱉었음. 산왕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빡빡이 머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사람이 한둘이었고, 동세대에 고교 농구를 했던 우성을 알아본 사람이 두셋 있었음. 감독도 명헌을 툭 치며 정우성?하고 물었음. 고1 첫 인터하이부터 단 1년간만 강렬하게 활동하고 미국으로 날아간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감독은 기억한 모양이었음.

더 성장하는구만.
명헌이 고개를 끄덕였음.

원온원은 금방 끝남. 우성은 대련해준 선배 선수와 악수했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명헌에게 돌아와 달라붙으며 상체를 숙이고 귓가에 쉴새없이 속살거림. “땀 흘렸네 삐뇽.”
“괜찮아요. 집 가서 형이랑 씻을래요. 우리 바로 집으로 가요. 아, 물론 형이 찝찝해서 씻고 싶으면 제가 여기서 좀 더 기다리고요. 근데 형도 딱히 땀냄새는 안 나요. 저는 어때요?”

우성아 잠시만. 감독이 우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라 명헌이 옆에서 비켜주었음. 그동안 명헌은 해산하는 동료들에게 인사하고 티셔츠를 주워 유니폼 위로 바로 입었음. 우성과 감독의 대화는 별거 없는 덕담으로 끝났음. 오히려 명헌이 포워드와 조금 길게 이야기하느라 우성이 명헌을 기다리게 됨. 명헌이 분명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포워드의 어깨를 잡고 가까이서 뭐라뭐라 이야기하는 모습을 우성은 묘한 기분으로 지켜봤음.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감독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둘은 마침내 체육관을 나섰음.

“감독님이 뭐라 하셨어?”
“그냥, 잘한다고요. 마지막에 시범 좋았다고...”
“시범?”
“마지막 스쿱샷이요. 선수들 앞에서 시범 보여준 거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사실 수비가 나보다 키가 작으니까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거 그냥,”
“나 보라고 한 거였지. 알아.”
“저 잘했죠?”

눈이 반짝반짝. 사람 없는 골목으로 접어들어 명헌이 우성의 손을 슬쩍 잡았음. 우성의 따뜻하고 큰 손이 깍지를 끼어 왔음. 그리고 명헌이 먼저 포워드 이야기를 꺼냈음. “우리 포워드 기죽이지 마라 삐뇽.” 대련 전에 형의 눈빛에서 보였던 우려가 자신이 아닌 팀 동료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우성이 고개를 푹 숙여 명헌의 뒤통수에 코를 부볐음. 약간 섭섭... “그 형이 요즘 좀 부진해서.”

“그걸 형이 왜 신경써요. 아직 형이 주장도 아니구... 친해요?”
명헌은 적당히 친하다고 대답하곤 덧붙였음. “우성이는 큰물에 가더니 자기가 얼마나 큰 고기가 됐는지 모른다 삐뇽.”

“형을 곤란하게 한 건 아니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라는 태도에 명헌은 결국 피식 웃었음. 오히려 명헌의 기를 살려준 셈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형도 명헌이 경험했던 에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직접 겪어보자 명헌의 조언에 좀 더 귀기울일 의지가 생긴 모양이었음. 대학리그의 상당히 강한 선수도 마음을 다잡고 돌아볼 목표가 되어줄 수 있는 게 지금의 정우성. 명헌은 이걸 굳이 말로 하진 않음.

“오늘 냉장고에 푸딩 먹을까 삐뇽. 우성이는 두 개 먹어라.”

헐 형, 사실 그거 제가 점심에 먹었어요.
몇 개?
있는 거 다...
점심으로 그것만 먹었니.
그건 아닌데요, 너무 조그맣잖아요. 맛있긴 하더라고요. 형이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가는 길에 사가요.
편의점에서 안 판다 삐뇽.
어디서 파는데요?

그렇게 도란도란 명헌의 투룸으로 향하는 그런 어떤 저녁이 보고싶다. 집 가면 저녁먹고 서로 다리나 팔 베고 누워서 각자 지켜본 시합 피드백 성실하게 해줌. 그러다 불타올라서 저녁먹은 거 소화시키자고 또 농구공 들고 원온원하러 감. 다음에는 우성이가 형이 미국 오라고 자기네 팀 동료들한테 형 보여주고 싶다고 조르기도 하겠지. 이 세계관 능력자 커플의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