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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5 01:58
너무 빨리 잃어버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위해서라도 아이만큼은 자기가 못 다 받은 사랑을 다 주고 싶어서 아주 애지중지 키웠을거같다. 비록 피 반 절 준 아빠는 아이의 존재도 모르고 아마 아이는 다른 아빠의 얼굴도 모르고 자랄테지만 백호도 엄마 돌아가시고 아빠만 있을 때도 충분히 사랑받고 자라서 아이 또한 모자람없이 사랑으로 키울 수 있을거라 생각했음.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음. 뱃속에서 아이를 키워내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는 더 고역이었음. 그나마 조금씩 모아두었던 장학금이라든가 알바비는 출산 비용이며 아이 검진비로 다 나간지 오래였고 그나마 나라에서 주는 수당 조금이 백호가 몸조리를 마칠 때까지의 목숨줄이나 다름없었음. 아이가 하고싶은거 입고 싶은거 먹고싶은거 갖고 싶은거 모두 사주기는 커녕 당장 먹고 살기 급급한 현실에 잠시 꿈에 빠져있던 백호는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기분이었음.



이렇다 할 커리어도 없고 유학도 도중에 그만두고 돌아온 백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의지할 만한 연고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음. 혈육의 정은 십년 전부터 애진작에 포기한 지 오래였고 농구를 그만둔 지금 북산 멤버들을 찾아가는 건 너무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음. 유일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호열이를 제외하면 백호는 정말 고립상태였음.



백호는 아이를 먹여살리기 위해 닥치는대로 일자리를 구했음. 자아실현 따위가 아니라 생계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일을 가릴 처지가 되지않았음. 그나마 다행인 건 백호의 사지가 멀쩡하다 못해 아주 튼튼하다는 점이었음. 백호를 찾는 일자리는 꽤 있었고 다행히 굶는 일은 없었음.



그러나 일이 고되지않다는 말은 아니었음. 백호는 매일매일 녹초가 되어 해가 지다 못해 달이 뜬 뒤에야 집에 도착했음. 오래된 연립 주택의 낡은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에는 불도 켜져 있지 않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가 부엌 간접등 불빛에 의지해 낙서를 하고 있었음. 백호를 보자마자 아빠! 하고 허둥지둥 달려올 때면 백호는 목이 꽉 잠겼음. 아랫집 할머니가 고맙게도 아이를 봐주긴 했지만 그 집 할머니도 저녁이면 돌아가야해서 아이는 백호가 오기까지 짧으면 30분, 길면 2시간을 혼자 기다려야했음. 이만하면 양반인거고 백호가 조금 늦는다 싶으면 차가운 현관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을 때도 있었고 그대로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자고 있을 때도 있었음. 그럴 때면 백호는 신발도 벗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동안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곤 했음.



아이는 백호의 상황을 아는지 너무 일찍 철이 들었음.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백호는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절대 아이 앞에서 울지 않으려 노력했음. 의지할 데라곤 저 하나 밖에 없는데 그런 아이 앞에서 제가 무너지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않았음. 생긴 것에 비해 눈물이 꽤 많아서 옛날부터 놀림을 많이 받은 백호였지만 백호는 아이 앞에서는 눈물을 꿋꿋하게 참아냈음. 하지만 그런 백호도 눈물을 참지 못한 적이 있었음.
아이에게 생일 선물을 골라보라고 했을 때 아이가 장난감 가게를 한참 서성이다 여기엔 마음에 드는게 없다며 나가더니 슈퍼마켓에 가서 작은 초콜릿 하나를 골랐던 때에도, 산타클로스는 없다며 그러니 선물은 필요 없다고 의연한듯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을 때에도, 넘어져 찢어진 무릎 상처에 혼자 밴드를 붙이고 있는 걸 봤을 때도 눈물을 참았던 백호였지만 야근 때문에 늦게 귀가했던 어느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엎어진 라면 냄비와 그 옆에서 데인 상처을 단 팔로 내용물을 주워담고 있던 아이를 봤을 때, 그 때만큼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음. 물집이 잡힐 정도로 데인 팔로도 괜찮다고 하는 애를 업고 응급실로 달려간 백호는 그제야 훌쩍훌쩍 우는 아이와 함께 엉엉 울었음.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업고 백호는 일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휴가라는 걸 써봤음.



아이의 팔에 남은 주먹만한 화상 흉터를 본 백호는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했음. 뭐든 다 해주고싶었는데 다 해주기는 커녕 모자람만 늘어났음. 특히나 화상자국을 달고 잠든 아이의 얼굴에, 어린 백호의 뼈에 사무첬던 외로움이 보이자 백호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음.



백호는 돈을 조금 덜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저녁 일거리를 줄여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었음. 저녁 일거리를 줄이자 가계 사정이 쪼들리긴 했으나 죽을만큼 어려운 건 아니었고 또 백호에겐 낯선 일이 아닌지라 생활은 큰 무리없이 굴러갔음. 갑자기 늘어난 저녁시간에 아이는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으나 곧 백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 급속도로 안정되어갔음. 백호는 아이와 저녁을 먹고 놀아주다가 아이가 자면 자격증 공부를 했음. 아이를 위해 농구도 그 녀석도 버리고 왔지만 그래도 역시 농구가 좋은 걸, 백호는 스포츠 지도사 자격증을 준비했음. 쉽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팔에 커다란 화상 자국은 안중에도 없이 엎어진 냄비만 걱정하던 아이가 떠올라 백호는 1년만에 자격증을 땄음.



유소년 스포츠지도사 자격증을 딴 백호는 근처 초등학교의 방과후 활동 프로그램에 자리를 얻었음. 초등학생 인지라 시간도 적당했고 계약직이긴 하지만 월급도 이전에 몸쓰는 일을 했을 때보다 훨씬 좋았음. 이제 백호는 아이와 함께 아침, 저녁을 다소 여유롭게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소풍 도시락을 사서 보내는 대신 직접 도시락을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었음. 또 운동회에 참가해 학부모상을 타다 아이의 어깨를 으쓱이게 만들어주었고 어린이날에 아이와 손을 잡고 북적이는 유원지에 다녀올 수도 있었음.


백호는 꿈꾸던 만큼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음. 30년된 방 한 칸짜리 연립 주택에서 투룸 빌라로 이사를 했고 어느 사립초등학교에서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 자리를 제안해와 벌이도 안정적으로 변했고 내후년이면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 할 예정이었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음. 백호는 제 허벅지를 베고 누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음.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 고 생각했음.



백호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음. 금요일 아침부터 미열이 있던 아이를 데리고 방문한 북적이는 토요일 오전의 병원에서 백호는 안경선배, 준호와 만났음.

백호야!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몸을 흠칫 굳힌 백호가 고개를 돌리자 놀란 표정의 준호가 달려오고 있었음. 준호는 몇 년동안 자취를 감췄던 옛 후배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음. 백호는 알던 사람을 만나자 소싯적 버릇이 나와 입이 툭 튀어나왔음. 준호는 그동안 어떻게 된거냐고 물으려다 백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꼬마를 발견했음. 설마 하는 눈으로 백호를 보자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음.

응, 내 아들.

백호가 아이에게 다정히 말했음.

인사해. 아빠의 선배야.

백호의 말에 아이가 어정쩡하게 인사를 했음.

안녕하세요...

허리를 찔끔 숙인 아이가 백호의 다리 뒤로 쑥 숨었음. 준호는 아이에게 하하 웃어보이다 물었음.

우리 친구는 몇 살이니?

아이가 머뭇거리며 백호를 올려다보자 백호가 괜찮다는듯 고개를 끄덕였음. 그러자 아이가 손바닥을 쭉 내밀고 반대편 손의 검지를 들어올렸음.

우와, 똑똑한 친구네.

준호가 아이를 다정하게 보다 백호로 시선을 돌렸음.

백호야, 너 혹시 그럼 그 때...

안경 선배, 옛날일이야.

백호가 준호의 말을 잘라냈음.

이미 지난 일을 들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백호야...

준호가 말끝을 흐리자 백호가 씩 웃었음.

난 괜찮아. 이렇게 예쁜 아들이 있거든.

행복해보이는 백호의 웃음에 준호도 스르륵 웃고 말았음.

그래도 좀 섭섭하네. 어떻게 말 한 마디도 없이...

우리가 그렇게 의지가 안되는 선배였니... 시무룩해보이는 준호의 모습에 백호가 당황해 눗..! 하고 허둥거렸음. 준호는 그 틈을 놓치지않았고 며칠 뒤에 있을 북산 농구부 동창회에 꼭 참석해달라고 말했음. 백호는 썩 내키진 않았지만 안경 선배에게 들킨 이상 아마 북산 멤버들이 다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음. 아이도 어느 정도 자랐고 좀 살만해졌으니 더 북산 멤버들을 피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음. 이제 실망스럽긴 해도 부끄럽진않은 후배로 당당히 나갈 수 있으니까. 준호는 꼼꼼하게 백호의 전화번호를 받은 뒤에야 자리를 떴음.

오랜만에 만난 옛 지인이 사라지고 나서야 백호는 참아왔던 숨을 길게 내쉬었음. 언젠가 이런 날이 올거라곤 생각하긴 했던터라 기겁하진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었음.
......괜찮겠지. 어차피 그 녀석은 미국에 있으니까. 준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보던 백호는 제 손을 잡아 흔드는 아이에 퍼뜩 정신을 차렸음.

아빠, 괜찮아? 피곤하면 빨리 집에 가자.

걱정스러눈 아이의 표정에 백호가 아무렇지않게 웃었음.

너 주사 안 맞으려고 그러는거지?

백호가 아이의 번쩍 들어올려 옆구리를 간질였음 깔깔 웃는 아이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백호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음. 그래, 별 일 없을거야.




하지만 딱 일주일 후, 백호는 오래된 인연 하나를 낡은 술집애서 맞딱트렸음.




태웅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