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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0 23:26
명헌은 눈을 뜬다. 이제는 익숙해진 천장에 우성이 신경써서 붙여놓은 야광스티커의 개수가 하나 더 늘어있다. 가끔 우성은 명헌이 잠든 사이에 야광스티커를 붙여 놓는다. 형이 고등학교 때 좋아했잖아요. 2층 침대 중 1층의 침대를 사용했던 명헌은 침대에 야광스티커를 붙여두었었다. 이제는 잘 빛이 나지 않는 것은 해가 잘 들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냥 오래되어 먼지가 달라붙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면 우성은 귀신같이 새로운 스티커로 바꾸어놓는다. 우성은 훈련을 하러 갔을까. 명헌은 차분하게 정리된 우성의 자리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성과 명헌의 방은 2층에 있어 창문밖을 보면 제법 아찔했다. 집엔 코트가 있어야 한다던 우성의 말에 설치된 골대도 침실에서 가장 잘 보인다. 명헌은 가끔 혼자서 연습을 하는 우성을 보기도 했다.

명헌이 우성과 같은 침대에서 잠들기 시작한 것은 이제 네 달이 지났다. 이 즈음 명헌은 조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노력하면 되겠죠. 우성의 말을 들어도 공감이라곤 되지 않는다. 정우성은 평생가도 모를 불안감일테니까.

반 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몸이 무뎌진 것을 느낀다. 꾸준히 운동은 하고 있지만 이전같을 수는 없었다. 매일 농구만 생각하고, 농구를 공부하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고등학교 시절 농구 명문의 학교에서 주장을 맡았던 명헌은 가끔 그 때를 추억했다. 아마 그 때엔 힘들었을 모든 것들은 이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건 미화가 아니었다. 무조건 그 때의 하루하루는 최고의 시절이었다.

과거는 떠올릴 수록 닳는 것 같았다. 명헌은 새로운 기억에 추억이 덮여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보듬어 아꼈다. 어제는 훈련이 힘들어 학교 밖으로 도망쳤던 날을 떠올렸다. 같은 학교의 학생을 보기 어려운 거리에서 혼자 걸었던 날의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제엔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던 날을 떠올렸다. 차기 주장이라며 가운데에 얼떨떨하게 서서 사진을 찍었던 때의 거친 숨소리와 땀냄새같은 것들을 생각한다. 3년은 모두 명헌의 몸 곳곳에 남아있지만, 명헌의 머리속에 남은 기억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명헌은 그래서 매일 날짜를 세는 버릇이 생겼다.

명헌이 눈을 뜬 후 낮동안에 하는 일은 대체로 농구에 관한 책이나 잡지를 읽는 것이고 그 외엔 농구 경기를 봤다. 농구공을 만지며 혼자 가볍게 연습을 해보는 동안엔 항상 명헌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명헌의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지 감시하는 것이라 명헌은 곧 혼자 농구를 하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 우성은 자신의 경기 말고도 명헌의 친구들의 경기 영상들도 구해다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명헌도 찾아서 볼 수 있겠지만 명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성이 구해다준 경기 영상들도 보지 않았으니까. 명헌으로서는 처음으로 느끼는 뒤쳐지는 기분이었다.

형 데려오려고 진짜 노력 많이 했거든요. 우성의 웃음은 명헌에게 조금의 안도감도 주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겪는 과정이었고, 명헌은 그것에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물론 솔직히 말하자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선택과 의무는 서로를 반대로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헌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신나하는 우성은 절대로 느끼지 못할 명헌의 감정은 정의되지 못한채로 마음 한 구석에 남았다. 명헌에게 주어진 의무때문에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애써야만 했지만 애쓰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차려진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거나 우성의 경기를 보러갔다. 따로 마련된 좌석에 앉아야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견딜만은 했다. 다른 곳이라면 더 귀찮은 일이 생겼을 테니까. 명헌을 발견하면 신나하는 우성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준다. 여전히 명헌을 형이라고 부르고, 명헌의 미소에 어쩔줄을 모르는 우성. 가끔 명헌은 그런 우성을 섬짓하다고 생각했다.

명헌이 경기를 보러오면 우성의 경기력은 더욱 좋았다. 그걸로 우성에 대해 근거없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을 알지만 우성에겐 티끌만큼의 생채기도 나지 않을 것이다. 우성은 해야할 일을 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건 명헌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알파와 오메가는 엄격하게 통제된 페로몬을 자의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성적인 욕구를 가진 상태로 자극없이 살던 혈기왕성한 이들은 그 순간부터 꼬삐가 풀린듯 쉽게 달아오르고 또 본능을 분출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오메가와 알파가 배정되었다. 오메가가 아이를 낳으면 다시 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다. 명헌의 졸업에 맞추어 유학길에 올랐던 우성이 어렵게 시간을 내어 어떻게든 명헌을 배정받은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었다. 우성이 명헌을 줄곧 좋아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명헌이는 내년이면 복귀하겠네. 누군가가 했던 말에 수치심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명헌은 우성과 함께 비행기를 탔다.

명헌도 우성과 함께라면 복귀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끼던 후배와는 조금 껄끄러운 관계에 놓이게 되긴 했지만, 명헌의 관심은 온통 다시 농구를 하는 것에 있었다. 다른 알파 혹은 베타 선수들만큼 따라가는 것은 한동안 힘들 수는 있어도 어떻게든 따라잡을 자신은 있었다.

알고 있던 오메가들의 임신 소식을 명헌은 듣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해서 그런거 아니야? 질낮은 농담을 들었을 때에도 명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메가로서 임신이 힘든 것은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명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성과 같은 침대에 누웠던 지난 네 달동안 우성과 명헌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으므로.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