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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8 13:46
이자식은 농구선수야 낚시꾼이야.

첫인상은 저처럼 더러웠지만 막상 알고 보니 윤대협이란 인간은 선수로서도 인간적으로서도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영수야, 나 네가 좋은 것 같아. 아니, 너 좋다.'

그러니 저런 개떡같은 고백도 쉽게 받아들인 거겠지.
그리고 지금 이런 거지같은 데이트 자리도.

"넌 진짜아.. 농구선수란 자각은 있니?"

털털대는 버스로 비포장도로를 한참 지나 들어온 저수지 앞에 선 영수가 한숨을 팍 쉬자, 대협이 소리내 웃으며 영수의 등을 쳤다.

"나 평소에 가는 데 보면 기절하겠네. 그래도 나름 오늘은 신경써서 럭셔리한 데로 준비한 건데."
"여기의 어디가 럭셔리냐..."
"저거. 잘 데."

대협이 턱짓으로 가리킨 캠핑카를 본 영수가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웃으며 물었다.

"저게 럭셔리면 평소엔 어떻게 사냐."
"거의 비박이지 뭐. 대충 침낭에나 구겨져 들어가 자거나, 그냥 밤샘낚시 하거나."
"낚시가 그렇게 좋니...?"
"너랑 농구 다음으로 좋아."
"부모님은 순위에도 없지. 너희 부모님이 이 말 못 들으신 게 다행이다."

투덜대면서도 자신을 도와 낚시 의자를 펴고 준비를 돕는 영수의 모습에 대협도 웃으며 재빨리 채비를 시작했다.

"언젠가는 다른 나라에 가서도 낚시 해 보고 싶어."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은 대협의 말에 영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농구가 아니라?"
"응. 농구 말고 낚시. 뭐, 덤으로 농구도 하면 좋고."

물 위를 떠다니는 찌를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협이 작게 미소지었다.

"그거 알아? 노르웨이에서는 바다낚시 미끼로 조개를 쓴대. 갯지렁이 말고."
"먹기도 아까운 걸."
"그런데 쓴다더라고. 재미있지 않아?"
"별 게 다 재미있다."

시큰둥한 영수의 답변에도 대협은 여전히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훌쩍 떠나는 상상은 정말 많이 했는데, 누구랑 같이 가는 미래를 그려 본 건 이번이 처음 같아."
"누구."
"너."
"난 싫다."
"아 왜애~ 같이 가자아~"
"싫다고."

딱 잘라 거절하는 영수의 어깨 위로 두툼한 담요가 덮인다.
영수에게 담요를 덮어 준 대협은 언제 챙겨온 건지 모를 윈드브레이커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 날씨에 유난이다."
"물가는 생각보다 추워. 우습게 생각하면 감기로 고생한다."

슬슬 해가 져 가는 저수지 위로 분홍빛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안 잡히냐?"
"운이지. 잘 잡힐 때도 있고, 손맛도 못 보는 날도 있고."
"그런데도 잘도 끈기있게 오네."
"그 기다림이 짜릿하니까."

시원하게 웃는 표정이 마치 자신과는 다른 차원을 사는 사람 같다.
그래서 농구도 저렇게 잘 하는 건가.
마음을 비우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어느 새 영수의 눈은 찌가 아니라 대협의 옆모습에 줄곧 꽂혀 있었다,

결국 해가 다 질 때까지 단 한번도 입질은 없었다.

"그냥 챙겨온 걸로 대충 밥 먹을까."

하지만 대충이라고 한 대협의 말과 달리 저녁상은 제법 제대로였다.
냄비밥에 찌개, 밑반찬들까지.
캠핑카의 침대에 걸터앉아 좁은 주방을 이리저리 오가며 하나씩 음식을 만들어 내는 대협의 모습에 영수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 진짜 잘 한다?"
"집이었으면 더 잘 했어. 여긴 밖이라 뭐가 없으니 이것밖에 못 하는 거고. 나 낚싯대 걷고 올게, 네가 이거 좀 거기 식탁에 놔 줄래?"
"그래. 다녀와라."

종일 수확이 없던 낚싯대를 거두러 대협이 나간 사이 영수가 식탁에 방금 대협이 만든 것들을 하나씩 차리기 시작했다.
밥에 된장찌개, 장아찌, 고기까지.

"..결혼하면 사랑받겠네..."

정갈한 한상차림에 영수마저 웃고 말았다.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시작된 야간 낚시.
야간 낚시용 야광찌를 신기해하는 영수를 보고 웃음이 터진 대협이 찌 몇 개를 꺾어 영수에게 달아 주었다.
귓가에, 허리춤에, 손목에.

"이 정도면 너 어디 가도 바로 찾겠다. 그렇지?"

킬킬 웃는 대협의 말에 영수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찌가 달린 낚싯대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엔 아까 전엔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소담하게 쌓인 나뭇조각들.

"뭐야 이건."
"응? 아, 캠프파이어 같은 거. 불멍 할 수 있게."

익숙하게 불을 붙인 대협이 갑자기 영수를 돌아보며 크게 웃었다.

"자아, 이제부터 잘 봐라."

오렌지색으로 활활 타던 불이 대협의 손길에 갑자기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다음엔 푸른 색.
이번엔 보라색.
대협이 무언가 불 속에 넣을 때마다 바뀌는 불꽃 색에 홀린 것처럼 영수가 일어나자, 대협이 영수를 잡아 앉혔다.

"위험해. 여기서 봐."
"저거 뭐야."
"그냥, 불 쇼?"

그 뒤로도 영수는 대협의 손끝에 따라 분홍색, 하얀색으로 한참 변하는 불꽃의 그림을 한참 동안 즐기고 있었다.

"고기는 안 잡힌다."
"보통 이런 날이 대부분이야. 아, 오늘은 그만 접을까?"

입질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낚싯대를 거둔 대협이 거의 다 꺼져 가는 모닥불을 정리하는 영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영수야."

등 뒤에서부터 폭 감싸안기는 안정감.
자기도 모르게 등을 비비며 안기자, 대협이 낮게 웃었다.

"고개 들어 봐."

대협의 말대로 고개를 들어 보니 새카만 하늘 위로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잔뜩 박혀 있었다.

"우와아.."
"예쁘지?"

보석을 수놓은 듯한 밤하늘에 잠시 넋을 놓은 영수를 바라보던 대협이 등 뒤에서 영수를 꼭 끌어안았다.

"이거 보여 주고 싶었어."

등에 맞붙은 가슴의 심장 소리가 머리를 두드리는 기분이다.

"내가 줄 수 있는 제일 예쁜 보석이야. 받아 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 예쁜 거 너랑 같이 보게 해 줘. 너하고만 보게 해 줘."

사랑해.
이 짧은 고백에 감정이 북받쳐오른다.

"야, 윤대협."
"응, 왜?"
"너 이제 낚시 갈 거면 나 불러."
"응?"
"나랑 같이 가자고!"

이 예쁜 거, 우리 둘이 쭉 같이 보게, 둘이 같이 다니자고.

영수의 입에서 처음으로 들은 프로포즈에 대한 긍정적 답에 대협은 크게 소리내 웃으며 영수를 안아올려 빙글빙글 돌았고, 그 소란에 다른 낚시꾼들의 성화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뭐 어떨까.



슬램덩크 대협영수 센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