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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6 21:47
그게 그렇게 큰 일이 될 거라곤, 정우성은 정말로 생각치 못했음.




“유니폼을 잃어버렸는데요.”

2학년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받았던 산왕공고 9번 유니폼은 우성이 퍽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였음.
벤치에도 들지 못하는 3학년이 수두룩한 이 팀에서, 2학년이 한 자리수에 들었다는 것도 물론 그 이유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다른 이유는- 아무래도 그렇지. 바로 “그” 번호 이니까.

“어쩌다가뿅.”

문제의 9번을 바로 전년도에 달고 뛰었던 남자가 예의 그 무심한 얼굴로 우성을 들여다 보았음.
언뜻 보기엔 무감해 보이는 이 얼굴 근육의 미묘한 움직임을 파악할 줄 아는 스스로가 낯뜨거워. 우성은 불현듯 부끄러운 기분에 뒷머리를 벅벅 긁었음.
제대로 해석한 게 맞다면 이명헌은 유니폼을 잃어버리고 온 칠칠치 못한 후배를 나무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있었기에.

“모르겠어요. 누가 가져간건지 뭔지.”

그 말에 명헌의 단정한 얼굴에 미미하게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어딘가 모르게 짙어졌음.

“...일단 새 유니폼 신청은 넣어놓을게용. 우성 사이즈 여기 적고 가. 그리고 감독님하고 상담 한 번 잡는 게 좋겠다뿅.”

상담..? 웬 상담? 의아한 얼굴로 반박하려던 순간 손이 붙잡혔고, 우성은 문득- 그 아득한 체온에 할 말을 잃고 말았음.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얼굴을 한 주제에, 놀라울 정도로 따뜻한 손.

“혹시나 해서 말인데...누구 짐작가는 사람, 있어?”





같은 걸로...

명헌이형이 2학년 때 입었던 9번 유니폼을 가볍게 빌리고 싶었을 뿐인데, 이명헌이 생각 외로 너무 날카롭게 반응해서 어리둥절해지는 우성이가 보고싶음...
명헌이형한테 작년에 입었던 9번 유니폼 그거 자기 좀 줄 수 있냐고 물어보러 갔던 다음날 부터 갑자기 현철이형 성구형이 양 옆에 붙어, 뭐하냐니까 이명헌이 너 옆에 붙어 다니면서 이상한 사람 없는지 지키라고 시켰대.
그냥 유니폼 하나 잃어버린 건데 왜..? 그냥 명헌이 형이 작년에 입던 옷 그거 하나 받고 싶었을 뿐인데..? 이게 그렇게까지 반응할 일이야?
이거 혹시 그 중학생 때 불리 당했던 그거 때문인가 싶어 미리 변명도 해 봄. -아니, 그냥 누가 장난친거 같기도 하고요...아니면 제가 집에 두고 왔을 수도. 아무튼, 별 일 아니니까 부 전체에 걱정 끼치고 싶진 않은데요.
그랬는데도 이명헌 표정은 계속 유령 본 사람마냥 창백해. “장난...뿅...” “네, 그냥 장난..”
정색하는 얼굴이 거의 울 것 같아서 우성은 뭐라 더 반박을 못 함. “누가 이런 걸 장난으로 쳐, 우성. 이딴 걸 장난이랍시고 치는 놈은 가만두지 말아야 해.”
목표했던 이명헌의 9번 셔츠는 받지도 못하고 2주 후 새로 자수가 놓아진 반딱반딱한 새 9번 유니폼이 도착함.
우성에게 그걸 건네 준 명헌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얼굴로, “라커 위치를 바꿔볼래용? 라커룸 자물쇠는 바꿨지만, 혹시 모르니까뿅..” 하곤 답을 듣기도 전에 4번 바로 옆자리 5번 정성구 선배 라커를 비우려고 들어...





“야, 정우성. 너 그거 뻥이지.”
“네, 네???”
“구라쳤잖아. 너, 유니폼 잃어버렸다는거.”


하고 묻는 건 건너건너편 아랫칸 라커를 쓰는 8번 김낙수.
문득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은 정우성이 버벅대는데, 낙수 형은 돌아보지도 않고 훌훌 유니폼을 갈아입으면서 말을 이어.


“애새끼 관심 받고 싶어 환장한 거 다 어지간히 그러려니 했는데, 도저히 못 봐주겠다. 뭐 그딴 걸로 뻥을 치냐, 넌. 이명헌 그거 예민한 거 몰라?”
“뭐, 뭐가요? 갑자기 무슨 소린데요, 형은.”


증거 있어요? 얼굴에 철판 깔고 밀고 나가려던 게 김낙수 다음 말에 뭉개지고 말아.


“걔 1학년 때 라커룸 자물쇠 끊고 유니폼 훔쳐간 변태 새끼 있었던 거, 너 진짜 들은 적 없냐. 유명한 얘긴데.”


이명헌 한동안 트라우마로 부활동도 쉬었었어. 아니 설령 들은 적 없어도 그래. 애가 저 정도로 경기하면 적당히 죄송합니다- 제가 형한테 구씹쳤여요 대가리 박고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 후배라는 새끼가.
귓가에 웅웅 울리는 소리. 정우성이 모르는 시간대의 이야기. 여름 전국 대회가 끝나고 부쩍 이명헌 주위를 맴돌았던 이상한 그림자. 헤집어진 라커, 사라진 유니폼. 수상한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돌아온 소포의 내용물.

- 이명헌이 너 옆에 붙어다니면서 이상한 사람 없는지 지키란다.

현철이형 성구형이 툴툴 거리면서도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던 이유.

파악하고 나니까 새삼 이명헌에게 그딴 짓거리를 한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머리 끝까지 열이 오르는데, 동시에 겨우 이런 거짓말을 한 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해서 울고 싶어짐.





“거짓말이었다고용?”
“네.....”

변명을 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뚝뚝 떨어졌음. 쪽팔린다...우는 걸로 무마하려 드는 새끼로 보이겠지. 형이 얼마나 세심하게 날 걱정해준 줄도 모르고 하잘 것 없는 이유로 최악의 거짓말을 한 주제에.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 우성.”
“그냥....모르겠어요...그냥요. 죄송해요, 형....”

명헌이 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무언가의 판결 같아서 우성은 더 고개를 숙였음.

“부주의한 건 혼날 일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에이스를 기합주진 않아. 새 유니폼 신청 정돈 내 선에서 해줄 수 있었다고, 왜 쓸데없는...걱정을 시켜.”
“저는...그냥....그냥.....”

어떻게 얘기하지, 새 유니폼이 갖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제 9번 유니폼은 여전히 매트리스 아래 잘 개어진 채 숨겨져 있다고, 잃어버린 비품을 거짓말로 무마해서 새로 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형이...입었던 옷을 갖고 싶었어요.....”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형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끝나기 전에 무언가를 손에 쥐고 싶었음.
아무런 사심이 없었으면 차라리 솔직히 말할 수 있었을까. 명헌이형! 저, 형 셔츠 주세요! 미국 가서도 형의 자랑스런 후배가 될게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음. 이명헌이 입었던 셔츠를 품에 안고 싶었던 욕구의 근간은 그런 상큼한 게 아니었으니까.
이 사람의 체취를 들이키고 싶다. 폐 가득 이명헌을 담은 채 바다를 건너고 싶다. 질척한 욕구로 가득 메워진 가슴은, 서스럼없이 그런 부탁 하나 할 수 없게 했음.
그래서 그랬어.


“그냥 형 셔츠가 갖고 싶었어요....”


거짓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형을 상처주고 싶었던 것도. 이런 방식으로 관심을 받고 싶었던 것도.


“근데 어떻게 말해야 할 지, 잘 몰라서....”


받고 싶었던 관심은 이런 게 아니라, 좀 더...


“우성아.”
“네...”
“울지 말고.”


어떻게 안 울어.
나는, 당신을....


“...그럴 땐, 그냥...날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됐잖아.”


좋아.....

어...?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