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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6 10:50
ㅌㅈㅈㅇ ㄴㅈㅈㅇ ㅇㅌㅈㅇ

대협영수 정환호장 현준수겸
슬램덩크




인터하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아직 신록의 한중간에 끼인 화창한 휴일 오전.

- 야 이 멍청아아아아아!!!
"어우, 귀, 귀..."
- 어떻게 된 놈이 영화 시작 시간을 세 시간이나 틀리냐!!!
"영수야.. 나 귀가 울려서 네 말소리가 안 들려어...."
- 아, 몰라!! 거기서 기다리건 말건!! 난 시간 맞춰 갈 거니까!!!

징징대는 귀울림 때문에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쨌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것만큼은 확실한 영수의 외침에 대협은 허허 웃으며 이미 끊긴 전화기만 쳐다보았다.
세 시간이란 애매한 시간은 집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긴 모자랄 듯 하고, 혼자 앉아 멍을 때리기엔 또 너무 길 듯 하다.
하지만 딱히 취미라곤 농구 아니면 낚시 정도인 대협에겐 영화관이 위치한 복합쇼핑몰 안의 게임센터 같은 곳도 영 흥미롭지 않은 장소였다.
그렇다고 약속을 취소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인 게, 이번 인터하이 성적에 잔뜩 풀죽어 있던 영수의 비위를 맞춰 주려 거의 보름을 들여 설득해 만든 데이트 자리 아닌가.
그걸 일방적으로, 그것도 제 실수 때문에 취소했다간 이번에야말로 진짜 헤어지잔 소릴 들을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섬처럼 오도카니 떠 있던 대협은 결국 에구구, 하며 허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그냥 사람 구경이나 해야겠다."

낚시터 물 구경보다는 재미 없겠지만, 그나마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중 가장 무난한 것을 고른 대협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새어나오는 건물 안으로 쓱쓱 발을 옮겼다.

"자아, 더 혼나기 전에 일단 티켓부터 발권하고오~"

예매하며 시간 확인을 잘못한 죄로 그렇게 혼났는데, 티켓마저 미리 발권해 두지 않는다면 또 얼마나 잔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아무리 매사 무심하다 한들 학습능력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 데다, 그게 영수에 대한 거라면 대협의 머리도 제법 빠른 속도로 돌아간다.
입구 부근의 층별 안내도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지하부터 하나씩 뭐가 있나 짚어올라가고 있을 때.

"윤대협?"
"어?"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놀라 뒤를 돌아본 대협이 곧 싱긋 웃었다.

"정환이 형."

정환이 다가와 방금 전까지 대협이 보고 있던 층별안내도를 쓰윽 훑었다.

"미아보호소 찾나? 길 잃었어?"
"영화 보러 왔는데.. 여긴 처음이라서요."
"혼자? 하여간 너도 참 별종이다."
"데이트요. 그러는 형이야말로 혼자 이런 덴 무슨 일로?"

대협의 질문에 정환이 어깨를 흔들어 메고 있던 빈 가방을 보여 주었다.

"참고서 사러. 은퇴도 했겠다, 공부해야지."
"형이 공부 같은 것도 해요?"
"...고3 상대로 그게 할 말이냐?"

어이없는 말투로 대꾸하며 이미 잘 아는 길인 듯 자연스레 걷는 정환의 뒤를 따라 걷던 대협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 해남은 에스컬레이터잖아요. 거기다 운동특기생인데?"
"아무리 특기생이어도 어느 정도 성적은 나와야 진학 가능해. 명문 해남의 명성이 있는데, 운동을 잘 해도 머리가 백지 상태인 학생은 진학생 명단 탈락이다."
"빡빡하네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협의 혼잣말에 정환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 탈락 명단이 있는 것 같아 나 공부하는 김에 잡아 두고 시켜야 하는데... 하아...."
"누구요."
"......우리 애기."

인터하이 도중 경기장 뒤편 관중석에서 우연히 듣게 된, 정환이 호장을 사랑스럽단 눈으로 쳐다보며 부르던 닭살돋는 호칭에 대협은 어색하게 아, 하, 하, 하고 웃으며 억지로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바뀌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중, 갑자기 제 팔을 콱 움켜쥐는 대협의 손에 정환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 어? 아니.."

서점은 5층, 영화관은 7층.
하지만 여긴 4층이다.
영문도 모른 채 엉뚱한 층에서 에스컬레이터에서 끌려내려온 정환은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드는 대협의 시선을 확인하고 아아, 하곤 씨익 웃었다.

"김수겸!"

스포츠브랜드매장에서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있던 수겸이 고개를 들더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전했다.
그리곤 뱉은 인사말이란 건.

"이정환, 바람피우냐?"

꼴에 주제파악도 못 하고, 라는 차가운 수겸의 시선에 말문이 막힌 정환 대신 대협이 사람좋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 데이트 나왔는데요."
"그래. 임자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를 하면 그걸 세간에선 바람이라고 하더라고."
"야, 윤대협. 설명을 그렇게 앞뒤 다 잘라먹고 하면 내가 뭐가 되니..."

결국 대협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야 전말을 파악한 수겸은 금방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다시 진열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손에 든 바구니에 담긴 적지 않은 물건들의 양에 정환이 궁금증이 인 손길로 바구니 안을 휘저었다.

"가라. 거치적거린다."
"상양 체육관에 스포츠숍 런칭하게? 웬일로 대량구매야."
"애들 거. 인터하이 끝나고 보니 땀에 먼지로 죄 너절해졌길래. 다들 열심히 하긴 했나보더라. 감독 하나만 빼고."

시니컬한 자아비판에 정환이 수겸의 머리를 쓱쓱 쓸었다.
아대, 깔창, 스포츠삭스, 쿨링스프레이, 스포츠테이프 등등.
자질구레한 것들을 정말 한바구니 가득 담은 수겸이 마지막으로 농구화가 진열된 곳 앞에 섰다.

하이탑 계열의 신발을 하나 집어든 수겸의 뒤에서 정환이 나머지 한 쪽을 집어들자, 대협도 어깨 너머로 신발을 살피며 말했다.

"이거 좋던데. 편해요."
"그런데 너 하이탑 안 신잖아. 내가 너 신발 바꿀 때 하이탑 신은 거 본 적 한 번도 없는데."
"갑갑해서 별로. 그런데 얼마 전 발목 넘어갈 뻔 했거든. 잡아 주는 디자인이면 좀 덜할까 해서. 어차피 신는 거 따로 있으니 시험삼아 사 보는 거지."

디자인부터 컬러까지 이것저것 꼼꼼히 살피던 수겸이 마음을 정했는지 슈즈 한 켤레를 집어들고 직원을 불러세웠다.

"이거 310이나 315사이즈 있나요."
"어.. 차, 창고에서 찾아보고 말씀드릴게요."

당황한 직원이 허둥지둥 사라지는 걸 바라본 대협이 나머지 상품 계산을 위해 카운터 앞에 선 수겸을 이리저리 훑었다.

"나도 295나 300 정도 신는데, 315요?"
"윈터컵 대비해서 무리하게 연습하다 발목 접질릴 뻔 했나보지."
"네?"
"김수겸 말고, 성현준."
"아아..."

아무리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대협도 그동안 농구를 하며 들은 소문이 있어 저 둘의 개인사는 대충 알고 있었다.
직원이 창고에서 찾아온 신발 두 개의 사이즈를 한참 비교하다 하나를 고른 수겸이 꺼내든 지갑에 잠시 멈칫 하던 정환의 웃음이 터졌다.

"와하하핫!! 웬일로 지갑 없이 행차하셨나 했더니, 렌탈이냐?"

지갑 안에 떡하니 들어 있는 현준의 학생증.
그리고 방금 전 둘의 대화를 통해 현준의 행방을 알고 있는 대협이 고개를 갸웃 했다.

"시립도서관에 신분증 없이 출입이 가능했나?"
"성현준 존재 자체가 출입증이야. 거기 관장님이나 사서들, 경비아저씨보다 걔가 거기 더 오래 다녔다. 그러니 저렇게 태평하게 지갑 맡기고 몸만 가는 거지."

소리죽여 웃는 정환의 말에 계산을 마친 수겸이 무거운 봉투를 두 손 가득 들고 다가와선 한마디 더했다.

"그리고 저게 껍질만 성현준 거지, 저기 돈 채우는 건 나다."
"가장의 위엄이란 거네요."
"내조의 여왕이시지."

웃으며 다가와 봉투를 한 개씩 빼앗아 든 대협과 정환 덕에 손이 한참 가벼워진 수겸까지, 이번엔 세 명이서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김수겸, 남편 지금쯤 뭐 해?"
"보통 정각에 공부 시작해서 55분부터 5분 쉬니까. 몇 시지?"
"10시 52분요."

시간을 확인한 대협의 대답에 정환이 흐음 하고 전화기를 만지작대다 수겸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좀 물어봐라."
"뭐야 이게. 참고서? 뭘 물어 봐."
"호장이 건 대충 고르겠는데, 내 걸 모르겠다."

정환이 보여주는 사진들을 유심히 보던 수겸은 서점이 위치한 5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제 전화기를 정환에게 줘 버렸다.

"난 그거 설명도 못 하니까 그냥 둘이 알아서 대화해."

그렇게 얻은 전화기를 귀에 갖다댄 정환은 잠시 뒤 작게 헛구역질을 해야 했다.

- 어, 수겸아. 무슨 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소름끼친다."
- 뭐야. 너냐.

뚝.

"아, 이자식은.. 용건은 듣고 끊으라고!"

다시 한 번 통화를 시도하는 정환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있던 대협이 수겸의 얼굴을 슬쩍 내려다보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형은 공부 절대 못 할 상인데.. 친구들은 아니네..."

삽시간에 자신을 돌아본 수겸의 고라니눈을 향해 대협이 천진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잠시간의 통화로 인내심이 바닥난 듯한 정환이 수겸에게 전화기를 패스한 뒤 씩씩대며 서점으로 들어가 한 무더기의 참고서를 구매한 다음에 드디어 7층으로의 여정이 시작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해프닝.
키오스크를 처음 보는 대협이 그 앞에 10분정도 얼음이 되어 서 있고, 그 뒤로 줄이 미친 듯 서는 걸 본 정환이 두 번째 폭발을 했다.

"저리 비켜!"

순식간에 발권을 마친 정환이 티켓을 대협에게 건네주려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1시 5분 시작...? 그런데 왜 10시부터 와 있었지?"
"아아, 1시 05분을 10시 50분으로 봤어요."
"...나도 저런 멍청한 짓은 안 한다."

한심하다는 수겸의 대꾸에 대협이 싱긋 웃었다.

"그래도 형보단 일 년 덜 산 제가 나을 걸요. 머리도 쓰면 늙는다잖아요."

이건 뭐지.
순식간에 치고들어온 공격에 잠시 진공상태가 된 수겸과 정환의 어깨를 잡아 돌린 대협이 가운데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둘을 밀었다.

"배고픈데 뭐 먹고 갈까요? 저쪽에 푸드코트 있던데."

하지만 푸드코트 역시나 키오스크 주문이었다.
대협만큼이나 키오스크 이용법을 모르는 수겸이 잔뜩 인상을 쓴 채 팔짱을 끼고 메뉴와 눈싸움을 하는 사이, 뒤에서 소리없이 다가온 대협의 손이 수겸의 머리에 턱 얹혔다.

"뭐야."
"아뇨. 뒤에서 보니 되게 작아서, 신기해서요."
"뭐, 어?"
"요만큼밖에 안 오네. 영수랑 별 차이 안 나시네요. 코트에서 볼 땐 이정도로는 안 보였는데. 진짜 아담하구나."

제 콧잔등 언저리쯤 닿는 수겸의 정수리 언저리를 키재기 하듯 손으로 훑으며 비교하는 걸 본 정환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쳤다.

저것이 김수겸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감히 수겸이 부모님도 못 하시는 걸... 탁 트인 공공장소에서...
도망갈까? 말려야 하나? 경찰 불러??

온갖 생각에 손톱을 물어뜯기 직전이 된 정환은 곧 크게 숨을 들이키는 수겸의 행동에 온 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이제 분명 노호성이 터지거나, 아니면....

"....메뉴 통일해 이것들아. 플레인도그 라지 세트 3개, 피클 추가, 머스터드 추가, 음료 콜라, 얼음 빼고. 이정환 지갑 내놔라. 계산하게. 더 먹을 사람 5초안에 손 들고 이름 외쳐라. 갯수 추가한다."
"아 저요, 윤대협 1개 추가."
"총 4개. 5초 끝. 계산한다. 저기 가서 자리 잡아."

수겸의 손가락이 누를 때마다 시커멓게 디스플레이가 일그러진다.
한가득인 짐을 들고 자리를 잡는 대협과 이젠 거의 주먹으로 내리치듯 디스플레이의 주문 버튼을 누르는 수겸을 번갈아 보던 정환은 아무 말 없이 꺼낸 지갑을 부들부들 떨리는 수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뒤로도.

"정환이 형 경기는 처음 봤을 때 이벤트성 경기인 줄 알았어요. 왜, 감독님이랑 코치님이랑 졸업한 OB들 와서 뛰는 거."
"수겸이 형은 이제 더 안 클 거 같은데, 벌크업도 어렵지 않아요? 성장판 닫힐 나이 아닌가? 몸싸움 힘들겠다."

정말이지 필터링 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귀가 멍해진 채 대협과 헤어져 집으로 오는 내내 정환과 수겸의 입은 도통 열리질 않았다.

그래도 용케 그 상황에서 수겸이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싶어 신기했던 정환이 나중에 현준에게 전해들은 말.

- 윤대협이면 후배잖아. 김수겸 애들한테는 화 안 낸다. 학교에서도 부 활동 시간 아닐 동안에만, 그것도 3학년들 한정으로 친근하게 치대지 농구부 돌아가는 순간부터는 자기가 제일 어른이니까 부원들한테 막 대한 적 없어. 대신 선생님들을 막 들이받긴 했지.

그 얼마 뒤 연습 중이던 능남 농구부.

"아 윤대협 이자식은 또...!"

안절부절 못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영수의 앞에 서서 그런 영수를 바라보던 수겸이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됐다. 윤대협이 없다면 너랑 유감독님과 얘기하면 되겠지."
"아, 네에.. 감독님 금방 도착하신다고..."
"내가 뭔 싸움 걸겠다고 온 것도 아니고, 연습시합 한 번 하자고 온 건데 왜 그럴까."

아니 하지만 지금 그쪽 눈이 안 웃으시는데요...
마주잡힌 손이 으스러질 듯한 느낌에 영수가 흠칫 하는 순간.

"윤대협한테 전해라. 저날 상양과의 연습경기엔 김수겸이 전후반 풀타임 선수출장한다고."

그렇게 수겸이 돌아간 뒤, 여전히 꺼져 있는 전화기에 끊임없이 전화를 걸던 영수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아... 이.... 윤대협!!!!!! 너 무슨 짓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