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42372945
view 2769
2023.05.12 11:42
.




대협이랑 사귀면서도 남친이 잘생기고 키크고 능력 미쳤고 성격도 모난데 없고 거기다 심지어 돈도 많아보여서 속으로 마음 고생 많이 하던 태산이
함께 있는 매초가 바위에 짓눌린 듯 불편하고 답답한데도 놓지 못해서 대협이가 이리 끌면 끄는대로 저리 밀면 미는대로 심장 전체를 저당잡힌 채 동거까지 감
대협이는 나 같은 거 왜 만날까 생각하면서 땅굴파는 게 일상인데 태산이가 그런 생각하는 거 아는지 모르는지 대협이는 콕 집어서 이게 좋다 말해준 적도 없을 거야

그냥 서로 일상 보내다 집에 돌아온 저녁
대협이가 가끔 밥 안먹고 들어오는 날에야 그제서야 한 번 식사 같이 하면서 제법 한 지붕 식구처럼 굴겠지
그 외에는 태산이 혼자 끼니 떼우고 잘 때 쯤 돼서야 밤바람 냄새 가득 몰고 들어온 대협이 씻고 옆에 눕는다
몸이라도 자주 섞었으면 또 모를까 대협이가 진짜 남자 좋아하는 건 맞는지 의문인 태산이
곤히 잠든 조각같은 남자 얼굴 새벽달에 좀 훤해지면 그거 빤히 바라보다 날 새는 일도 많겠지

그러다 대협이 귀가하는 길에 신호위반하는 차에 치여 접촉사고 나서 부분적으로 기억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겨우 정신차린 대협이가 태산이만 쏙 빼놓고 모든 걸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거야
심지어 고등학교때 농구한 것도 다 기억하는데
능남 애들 얼굴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이름 불러주면서 웃어주고서는 맨구석에서 혹시 눈에 띨라 커다란 몸 엉거주춤 접어놓고 불편하게 선 태산이만 누군지 몰라...
얘들 다 당황해서 대협이가 태산이를 각별하게 생각했어서 태산이만 잊었나보다 하고 어색하게 달래주려고 애쓴다

근데 태산이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한 것 같은 기분이야
대협이가 자기를 못 알아보는데. 자기만 콕 집어 잊어버렸는데
가슴 속에 항상 응어리져있던 체기가 왠지 모르게 사라졌지
그러면 태산이 그제야 깨달아
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던 것 같아 그래서 그렇게 불안했던거야 하고
자기만 쏙 빼놓은 대협이 일상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평안해서 이제야 뭔가 아귀가 맞는 느낌
태산이는 대협이 삶에 고장나 불필요한 부품같은 거야
그것만 제외하고 나니까 톱니바퀴 톱니 맞물리듯 잘 돌아가기 시작하는 대협이 인생에 태산이는 그냥 알고 마는거지
저기는 내 자리가 아니구나 억지로 붙잡고 있느라 그동안 대협이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구나 하고

태산이 조용히 집으로 가서 대협이랑 함께 살던 모든 흔적을 지워나가
어차피 집 명의는 대협이로 되어있고 주변에서도 둘 사이가 친구보다 깊은 관계인 건 몰랐기 때문에 태산이만 짐 빼면 감쪽같을 거야
원래 대협이 혼자 살던 집인 거 처럼
밤중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태산이랑 관련된 기억 정도만 사라지고 나머지는 차차 회복단계에 접어들고 있을 정도로 부상은 사고의 스케일치고 경미했겠지
하늘이 대협이에게 준 기회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태산이 그렇게 찬찬히 대협이 옆에서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워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퇴원 앞둔 대협이 병실 찾아가

안녕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면 대협이도 싱그럽게 웃으면서 맞아줘

태식이라고 했었나?

하고 아는체 해오는데 태산이 기가 막힌다 저 죽일 놈의 작명센스까지 신이 손해보는 셈 치고 같이 가져가버렸으면 얼마나 좋아

태산이야ㅡㅡ

뚱한 얼굴로 정정해주고 대협이 침대 옆에 의자 끌어 앉는 태산이

아 맞다 태산이 태산이구나
... 몸은 좀 어때
다 나았어 이제 진짜 좀 움직이게 해줬으면 좋겠을 정도라니까
다행이네

대협이 좀이 쑤시는지 어깨도 뱅뱅 돌려보고 팔도 크게 휘젓는 거 보여준다
음 멀쩡하네 끄덕끄덕한 태산이 한시름 놓겠지
그런 태산이 얼굴 빤히 쳐다보다가 대협이 문득 그런다

아 농구하고 싶다 태산이 너도 농구부였댔지? 아직도 농구해?
... 이제 안해
아쉽네 퇴원하면 요 앞 공원에서 한 판 하자고 할랬는데

태산이 대협이의 저 미친 자신감이 놀랍다 방금까지 병상에서 골골대던 환자 상대로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나? 아무리 윤대협이라도? 아무리 내가 은퇴했어도?
뭐 저런 오만방자한 점 때문에 대협이가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원망 안해?

이건 또 뭔 소리야. 태산이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뜬금없는 말을 걸어오는 대협이 멀뚱멀뚱 본다

나 잘 때도 자주 찾아왔었다며. 우리 꽤 친했던 거 같은데 내가 너 기억 못해도 안놀라길래
아... 별로 그런 걸로 너 안 미워해
그럼 어떤 걸로 미워지는데?

대협의 말이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찔러와
글쎄 너가 내 고백 거절 안한거? 그래서 어영부영 사귀게 됐는데도 나는 아직까지 너가 왜 나랑 사겨주는지 모르게끔 구는거? 무슨 변덕인지 가끔 입맞춰오는거? 그런데 끝까지는 잘 안해주는거?
그래도 찬찬히 되짚어보면 미워한 적은 없어
그냥 그 정도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그냥 그 만큼만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만족하지 못하고 잔잔한 온기에도 데일 듯이 아파한 나
내가 젤 미워

너를 어떻게 미워해...
하하 진짜? 태산이 되게 좋은 친구네

태산이 그 말엔 또 끄덕끄덕 동의한다
그러게 친구로만 남았으면 좋았을 걸 우리 관계에 맞는 이름표는 그거였는데
그리고 빈말로도 자기가 안좋은 친구라고는 할 수 없음
고딩 때도 윤대협 주장달고 땡땡이치러 다니는거
펄쩍 뛰는 유감독님 커버쳐주고 그런거 다 태산이 몫이었단 말임
저 새끼 때문에 고생 뒤지게 했지
갑자기 좀 짜식은 눈 되는 태산이
이 자식 뭔 연인일 때만 개떡같은 줄 알았더니 생각해보니 친구일때도 썩 괜찮은 놈은 아니었음

너랑 같이 지내는 거 재밌었을 것 같은데. 다 잊어버려서 그건 좀 슬프긴 하네
...딱히 재미는 없었어
하하하 거짓말 태산이는 이 잠깐도 재밌는데?

유들유들 사람 심장 쥐어 터뜨리는 말하면서 미소 짓는 얼굴이 또 죽여준다
그러나 작살미남의 꽃미소 앞에서도 곧 죽어도 날조는 할 수 없는 태산이
감동도 재미도 없던 그 시절에 대한 감상 좀 정정해주고
편안하게 웃음터뜨리는 얼굴 멍하니 바라본다
내 곁에서 이렇게 웃는 윤대협 보는 게 얼마만인지 헤아릴 수도 없겠지

서로가 서로를 잃고서야 편안해지는 사이라니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참지 못하고 눌러왔던 마음의 조각조각들을
졸업을 앞둔 어느 시점의 학교 뒷편에서
끝내는 폭탄 터뜨리듯 펑하고 쏟아내고 말았을 때부터
태산의 모든 결정권은 윤대협 손아귀로 넘어간 셈이었어
태산이는 그냥 애먼 사람에게 고백을 한 죄로
처분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되어 처형일을 기다렸지
1초만에 돌아올 줄 알았던 그 날이 어쩐 일인지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삼 년이 넘도록 오지 않았던 건 예상밖의 일이었지만
그 또한 태산이가 어쩔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어
이미 태산의 통제 밖에 있던 마음인 걸

그럼 윤대협은 왜 그랬을까
말 한마디 아니 눈짓 한 번이면 끊어낼 수 있을 관계를
감히 매달려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감당 못할 사랑 앞에 매분매초 벌벌 떨던 황태산에게
그 쉬운 이별 통보조차 하지 않고 왜 서로를 힘겹게 하는 세월 속에 파묻힌걸까
아무렇지 않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휙 치우거나 망가질 때까지 짓밟는 것보다 간단했던 건지도 모르지
태산이는 생각해
윤대협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지만
결국 이렇게 돌아 돌아 평안해졌으니 다행이라고

그만 갈게
그래 와줘서 고마워 태산아 다음 주에 퇴원하는데 그때도 와줄거지?

태산이 하염없이 그 얼굴을 내려다봐
윤대협을 안보고도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
그러다가 문득 윤대협이 부러워
잊어버리는 쪽이 자신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피차 깔끔한 헤어짐을 원했다면 태산이는 윤대협의 전부를 잃고 윤대협은 황태산의 마음을 잃고
딱 그 정도가 공평했을텐데 싶어서
그래도 너무 욕심부리면 안돼
태산이는 용기조차 못낸 일을 마무리하라고
대협이가 이렇게 크게 다칠 뻔할 만큼 사고를 당하기까지 했잖아
태산이는 마침내 소리내서 말해

아니 이제 안 올거야
왜? 무슨 일 있어?
나 이사가 멀리 그래서 앞으로는 못와 그것 때문에 그동안 자주 왔었어
그래? 그렇구나

대협이는 순순히 납득하지

우리 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텐데

별 다른 미련도 아쉬움도 없는 작별인사야
듣기에는 참 좋지
태산이도 대협이에게 듣기 좋은 겉치레를 해

꼭 그랬을거야 아마

마지막으로 남긴 거짓말이야
그래도 한 때는 진심이길 바랐어
대협이가 고백을 거절하고 우리 좋은 연인은 못돼도 좋은 친구로 남자고, 그렇게 말해줄 때만을 기다려왔지
이제라도 듣게 돼서 그것도 참 다행이야

태산이는 손을 들어 인사을 하고 대협이는 작게 고개를 까딱해
그렇게 병실 문을 탁 닫고 나오면
완전히 끝
안녕이네






대협이 망가진 휴대폰에 태산이 번호
어떻게 저장되어 있었을까
아마 진중하고 담백한 대협이같은 그런 단어였을텐데
애인
하고

언제쯤 주소록을 복구하고 또 언제쯤 그 사람을 궁금해하게 될까
대협이한테 이제 연인도 황태산도 없는데






대협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