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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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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주말, 마성지는 원정 경기를 갔고 재판 스케줄도 비교적 한가하여 권준호는 집에서 혼자 밀린 집안일을 마무리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다음주 마성지의 휴일에 뭘 해줄까 하며 고민하던 여유는 한 통의 전화로 없던 일이 되었다. 고등법원장을 지냈던 조부가 준호와 준호의 아버지를 주말에 들러 점심 먹고 가라며 호출을 했다. 




"권 원장이랑 준호는 서재에서 나 좀 보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따로 부르지 않는다는 걸 아는 권준호가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봐도 딱히 걸릴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있었던 재판도 잘 치뤄냈고, 자문 일도 무난했다. 짚이는 것이 없어 더 답답한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권준호는 부친과 함께 조부의 서재로 들었다. 3대가 다탁 하나를 마주하고 차를 들었다. 첫 잔을 비울 때까지 말이 없던 조부의 입에서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며칠 전에 오찬 모임 갔다가 별 희안한 소리를 들어서 말이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들으셨길래-"

"준호야."

"네."

"누구 만나는 사람 있냐?"

"네? 그게 무슨?"

"마 회장네 창립 기념일 행사에  그 집 셋째가 너 데리고 왔다던데."

"할아버지, 그건-"

"아버지, 준호가 그 집 아들 소속팀 법률 자문 합니다. 아마 그래서 같이 간 걸거에요. 둘이 친분도 있고."

"거기까지면 나도 애들끼리 친구니 그러려니 했겠지. 그런데 마 회장 안 사람이 너 따로 불러 보았다 해서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말을 안했어?"

"할아버지, 제가 설명드릴게요. 뭐 때문에 오해하시는지 알겠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애비도 모르게 그런 자리 가질 이유가 뭐냐? 왜 너를 따로 불러 보아? 할애비야 그렇다 쳐도 애비가 모르는 게 말이 돼?"

"사실은 제가..."


전직 고등법원장 경력이 어디 안가시네요 할아버지. 피고인 신문하는 것도, 영장실질심사 하는 것도 아닌데. 손자 연애, 아니 연애는 아니지 그러니까...유사 연애 청취는 그냥 적당히 마무리 해주시면 안될까요.


권준호는 조부와 아버지의 오해를 풀기 위해 결국 파혼 소송 때문에 마성지를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마성지의 어머니가 자신을 따로 불러 보았다고 설명했다. 물론 중간의 모든 사정을 설명할 순 없어 민감한 내용은 쳐내고 전달하기 무방한 내용만 추려냈다.

파혼 건으로 시끄러워 지는 걸 싫어했던 의뢰인의 사정을 덧붙이니 법조계에 잔뼈가 굵은 부자는 일단은 더 캐묻지 않았다. 겨우 나가봐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권준호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수습하며 문을 닫고 나왔다.



"권 원장 듣기엔 어떠냐."

"준호가 여기서까지 거짓말 할 애는 아닙니다, 아버지."

"거짓말은 아니지. 근데 저 녀석 말을 다 하진 않았어. 몸통은 남겨두고 줄기만 솎아내서 내놓더구나."






원정 경기를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마성지는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 너머 목소리가 어째 익숙하다 싶더니 곧 나오는 이름에 마성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 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권준호의 아버지였다.




"한창 바쁜 시기에 이리 불러내어 미안합니다, 마성지 프로."

"아닙니다, 원장님. 저야말로 여기까지 걸음 하시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마성지의 팀 훈련장 근처에 자리한 카페로 권준호의 아버지가 마성지를 찾아왔다. 먼저 온 권준호의 아버지가 다기에 손을 뻗어 차를 내리려 하자 마성지가 자신이 하겠다며 다기를 들었다. 적당한 타이밍에 우려낸 우전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중요한 시기에 이리 불러내어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저 준호 친구인데."

"얼마 전 본가에 갔다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죠. 준호 할아버지께서 오찬 모임 갔다가 들으셨다던데 우리 준호가 마성지 프로 어머니를 만났다고 그러더군요. 내 아들 얘기를 거기서 들을 줄은 몰라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다 저 때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 준호가 맡아 해줬고, 그것 때문에 저희 어머니가 인사차 불러 보신겁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준호가 그러더군요. 맡은 건이 워낙 민감한 사항이라 말을 아꼈다고. 하긴 이해합니다, 파혼 건이라니 얼마나 댁에서 조심스러웠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쉽게 걸음 안하시는 분이 그렇게까지 따로 불러내서 이야기 했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께서 저 때문에 주변을 예민하게 살피느라 한 번씩 행동이 먼저 나가십니다. 준호에게 다른 의도가 있어 그러신 건 아니니 부디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준호가 밖에 말 새어나갈까봐 이야기를 안했다고는 하더군요. 원 녀석, 애비한테도 말을 안 하고 그런 자리를 나가고. 혹시나 우리 애가 무슨 실수라도 해서 부른건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요."


와, 권준호 아버지 장난 아니네. 권준호 변호사 말빨 어디서 다 나왔나 했더니 다 여기서 나왔네. 죄송합니다, 아버님. 다 제 탓입니다. 우리 어머니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애 따로 불러 내서 보실 줄은 정말 몰랐네요. 저도 준호가 얘기 안해서 우리 어머니 전화 받기 전까진 몰랐어요. 권준호 입은 왜 그리 무거워가지고. 



"아닙니다, 준호가 일 처리를 아주 잘해줘서 일이 잘 끝났습니다. 제 실수 수습하느라 준호가 애 많이 썼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정말 고마워 하십니다. 그래서 준호 한 번 불러서 보신 겁니다."

"나도 자식 키우는 입장이라 그 심정 이해 못하는 거 아닙니다. 마성지 프로 정도면 집안에서 기대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 댁에서도 좋은 자리 많이 알아보고 계실텐데 걱정이 많으시겠지요. 워낙 유명인이라 보는 눈이 많질 않습니까. 농구 잘 모르는 나도 마성지 프로 얼굴을 아는데."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원장님. 준호한테 피해가는 일 없도록 잘 살피겠습니다. 전과 같은 일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우리 준호가 워낙 농구를 좋아해서 저 녀석 부모 뜻도 거스르고 저 하고픈대로 하는 걸 6년이나 그냥 뒀어요. 법 공부 하면서 철 좀 든 줄 알았더니 아직도 이 녀석 마음은 고등학생인 가 봅니다, 하하."



할 말이 다 끝나자 권준호의 아버지는 시간을 뺏어 미안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준호의 아버지를 정중히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성지는 훈련장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포카리 병 하나를 집어들어 쉬지 않고 절반을 들이켰다. 말은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목이 바짝 타들어가 견딜 수 없었다.








"설마 우리 아버지가 정말 너 만나러 가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네가 미안할 게 아니라 내가 사과해야겠네."

"뭐가 미안해, 괜찮아. 애초에 우리 여사님이 너 불러 내는 바람에 생긴 일인데."

"아버지가 뭐라 하신 건 아니지? 내가 파혼 이야기는 정말 안할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 그걸 말 안하면 제대로 해명이 되질 않아서 할 수 없이 이야기 했어. 미안해. 너희 어머니께도 면목이 없네. 그래도 예민한 부분은 이야기 안 했어."

"권준호 정말 대단하다."

"...뭐가?"

"아무리 그래도 그걸 집에도 얘기 안하고, 우리 여사님 만난 것도 나한테까지 이야기를 안하고. 파혼 건도 사실 이미 알 사람은 아는거라 말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는데. 너 그걸 여태 입 다물고 있었어?"

"그러라고 그 비싼 수임료 이정환이 낸 거지, 너희 어머님도."

"아, 그건 진짜 미안하다. 설마 거기서 우리 여사님이 봉투 내미실 줄은 몰랐다. 사람을 뭘로 보고."

"하하, 나야 후원금 많이 받았으니 좋은 거지 괜찮아. 어머님도 다른 의도로 주신 게 아니라 너 걱정되서 그러신건데 뭘."

 

원정 경기가 끝나자마자 얻은 휴식일에 권준호의 집으로 달려온 마성지는 문 열자마자 권준호에게 미안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간만에 보는 쩔쩔매는 모습에 권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얼마 전 조부의 집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마성지의 어머니가 어렵기는 했지만 인사 드리고 나오는 길에 비친 표정이 나쁘지 않아 권준호는 굳이 이야기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게 이런 식으로 도화선이 될 줄이야.



"좀 있으면 정규 리그 우승 결정 짓잖아. 큰 일 앞두고 너 신경쓰게 하기 싫어서 내가 말 안했어. 그게 더 신경쓰이게 만들었네, 미안."

"...그것도 네가 해주고 싶었던 일에 들어가는거야?"

"버킷리스트는 아니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하하."

"하, 진짜 대단하다. 권준호."


이걸 누가 데려가려나, 정말.




긴장이 풀린 마성지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른 세수를 했다. 눈을 뜨고 내려다 본 시야에 가득찬 평온한 얼굴을 보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저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마성지가 표정을 풀었다.

마성지가 손을 뻗어 권준호의 얼굴에서 안경을 치웠다. 선명하게 보이는 맑은 눈 앞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작스레 좁혀진 거리 덕에 시야 가득 잘생긴 얼굴이 들어왔다. 정대만과 더불어 리그 최고 미남 자리를 늘 다투는 얼굴을 코 앞에 마주한 권준호가 당황하여 손을 뻗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당황한 얼굴에 마성지가 생글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오랜 연애 경험으로 마성지는 대답을 얻어내고 싶을 땐 얼굴 공격이 유효하게 먹힌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애인이 우승하면 해보고 싶었던 거 없어?"

"아직 플옵도 시작 안했는데."

"이대로라면 우리 정규리그 1위인데. 설마 나 못 믿는거?"

"음...우승 메달 한 번 걸어 보고 싶긴 하다. 근데 그건 내가 해주는 게 아니라 네가 해주는 건데."

"어떻게 늘 해주기만 해. 받아가며 해야지."

"그거 내가 한 말 아냐?"

"권준호 변호사가 아주 잘 가르쳐서 이제 다 배웠지."

"그만 하산해도 되겠네. 조기만료할까?"

"어허, 아직 기간 남았어. 어디서 계약 파기야."

"우승하고 오면 축하해 주는 것도 있긴 했지."

"말로만?"

                                 
안그래도 거리감이 없어진 상황에서 거리가 더 좁혀지자 권준호가 반사적으로 등을 뒤로 물렸다. 벽에 막혀 피할 곳이 사라진 권준호가 잠깐 당황한 듯 두리번 거렸다. 꿀꺽, 목 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권준호가 일부러 큰 소리로 웃으며 장난 그만하라며 마성지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냈다. 움직임만 크지 크게 힘이 실리지 않은 손에 순순히 밀려나는 듯 한발짝 물러선 마성지가 다시 양 손을 움켜 잡았다. 손이 다 묶여버린 권준호가 꼼짝도 못하고 시선을 다 받아냈다.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선 넘으면 파울이야."

"난 축하 파티 얘기한 건데, 뭘 생각한거야? 권변 보기보다 엉큼하네. 우승하면 뭐 해줄려고 그럴까. 나 기대해도 돼?"



민망해진 권준호가 소리나게 마성지의 가슴팍을 한 대 때렸다. 소리만 크고 힘이 실리지 않은 터치에  앓는 소리를 내며 장신의 미남이 허리를 숙여가며 웃었다. 아 진짜 뭐야, 괜히 분위기 잡고 그래. 아, 더워. 덥다 너 저리 가라. 덥지도 않은 계절에 권준호가 덥다며 마성지를 밀어내며 욕실로 들어갔다.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성지의 입매가 올라갔다.  
 

근데 그것도 괜찮을 거 같단 말이지. 권준호라면 말이야.  






호언장담한 것 처럼 마성지는 정규리그 1위를 여유있게 지켜냈다. 정규리그 우승을 축하하는 자리가 팀 내에서 간단히 마련되었다. 페넌트 레이스 우승은 이루어냈지만 리그컵을 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우승 축하 인사와 최종전 우승을 당부하는 말이 함께 오갔다. 쏟아지는 연락 속에서 권준호와 마성지 모두에게 익숙한 이름의 연락이 왔다. 미국에서 뛰고 있는 송태섭과 국내 리그 뛰면서도 굳건히 롱디중인 정대만이었다.

먼저 시즌을 종료한 송태섭이 플옵 관전 겸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귀국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는 시즌 종료 후 오랜 연인과 결실을 맺으려고 오는 자리이기도 했다. 농구계 지인들과 북산고 선후배들은 이미 아는 내용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정대만의 팀은 준플옵에서 탈락하여 시즌이 끝난 상태였다.

챔피언 결정전 까지 시간이 있어 그 사이에 송태섭의 환영회와 함께 청첩장이 돌려질 예정이었다. 롱디 중에 유난 떨며 지내온데다 중간에 헤어지니 마느니 한 것도 아는 지인들이어서 오늘 너네 둘다 날 잡고 탈탈 털어준다며 다들 벼르고 있었다.

오늘 자리할 지인들 중 유일한 변호사 권준호에게 예비 부부 청문회 단단히 해달라 부탁하니 권준호의 대답은 그 녀석들 이미 식 올렸는데-였다. 바다 건너에서 식 올리고 신고한 건 알바 아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어디 양놈 방식을 들이미느냐. 그놈들 남색 여권 쓰는데 어디 혼인신고도 안하고 부부냐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안된다 라며 동료들과 친우들이 야유를 보냈다. 


함께 연락을 받은 마성지에게 권준호가 여상스레 같이 가자 권했다. 잠깐의 생각을 마친 마성지가 흔쾌히 승낙했다. 자신이 데리러 가겠다는 말에 권준호가 엄격한 표정으로 운전은 절대 못시킨다며 선을 그었다.



준호야, 너 나 운전 아예 안 시킬거니.

내가 옆에 있을 때는 안 시켜.




정규 리그 우승을 달성한 마성지에게도 축하 인사와 농담처럼 잔이 권해졌다. 결승 앞두고 술은 안된다며 마성지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했고, 권준호는 웃으며 자기가 대신 받겠다 했다.

네가 뭔데 잔을 받아? 하는 얼굴들에 권준호가 웃으며 우리 클라이언트사 VIP라서 몸 상하면 안된다고 프로의식 넘치게 대답했다. 왁자지껄하게 큰 소리로 웃은 스포츠맨들이 그래 변호사 양반 우리가 깜박했다, 권변도 프로지. 권 프로 잔 받아라, 권 프로 클라이언트는 우리가 지켜드린다 라며 잔을 채웠다. 


시끄러운 와중에 밀려드는 손을 제치고 송태섭이 병을 들어 권준호의 잔을 채웠다. 딴 사람은 몰라도 준호 선배는 우리 잔 받아야 한다며 와인잔이 규범보다 더하게 차 올라갔다. 와인을 누가 이렇게 따르냐며 핀잔하면서도 권준호는 활짝 웃으며 잔을 받았다. 바로 기울어지는 잔을 보며 송태섭이 어어- 선배 천천히 들어요 라며 말렸다. 정대만이 탄산수 한 병을 새로 따 얼음잔에 채워 밀어줬다. 그래, 준호야 천천히 마셔. 아무리 변호사 주량이 세도 맨날 운동하는 놈들하고 같이 마시면 안 돼-라며 말했다. 버릇처럼 베푸는 다정함에 권준호가 눈을 휘며 웃었다.

송태섭과 정대만을 바라보며 마치 친정 엄마처럼 빙그레 웃는 권준호를 앞에 두고 둘은 권준호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줄줄이 쏟아내었다. 유학 초기 낯선 언어와 쏟아지는 행정적인 문제들로 힘들어하는 송태섭에게 미국에서 일하는 한인 변호사 지인을 소개해준 것이 권준호였다. 리그 입성 이후 쏟아지는 국내 기업의 각종 스폰서십과 국내 에이전시 계약서도 권준호가 봐주었다.



"축하해, 대만아 태섭아.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거긴 거기고 여긴 또 다르니까. 잘 살아, 둘 다."

"네네, 잘 살겠습니다. 우리 북산의 부주장, 북산 농구부의 어머니."

정 서방, 우리 태섭이한테 잘 해. 내가 지켜볼거야. 안 그러면 임플란트 추가야. 권준호가 농담을 하자 와하핫 하는 웃음 소리가 테이블 마다 가득찼다.

다정스레 송태섭의 손을 쓸어주고, 정대만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태가 남달랐다. 축하를 건네는 말의 깊이와 눈빛에서 모든 퍼즐이 맞아 들어갔다.


학생 때부터 좋아해온 사람
자신과 달리 프로길로 간 운동 선수
북산에서 권준호와 유달리 친분 있었던 사람


정대만이었구나.


마성지가 얼음을 가득 채운 유리잔을 기울여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송태섭과 정대만이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뜨자 마성지가 술기운에 기울어진 권준호의 고개를 제 어깨로 받쳐주었다. 알콜향과 함께 은은히 새어나오는 웃음 사이로 머리가 차게 식어갔다.


권준호 나한테 뭐라 할 입장이 아니네? 나한테 그렇게 호구잡힌 연애 하면 어떡하냐고 말로 쥐어패더니, 아주 눈물나는 짝사랑을 심지어 퍼주면서까지 했어? 그래놓고 나한테 그렇게 말해?


프로 선수들과 스포츠 종사자들 사이의 술자리는 홀로 변호사인 권준호가 감내하기에 너무 강도가 높았다. 술기운에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본 마성지가 권준호의 어깨를 감싸며 일어났다.


"준호야, 그만 가자. 너 많이 취했어. 우리 먼저 갈게."

"기다려요 선배, 대리 부를게요."

"나 안 마셨어. 내가 몰고 가면 돼. 준호 옷이랑 가방 줘."



마성지가 권준호를 반쯤 안다시피 부축해 차에 태웠다. 술기운에 잠깐 멍하니 창밖을 보던 권준호가 눈을 붙였다. 차에서 잠이 든 준호를 바라보는 마성지의 눈빛은 생각이 많았다. 술이 어느 정도 깨고 일어난 권준호가 혼자 갈 수 있다며 마성지를 보내려 했다. 무시하고 집까지 같이 올라가준 마성지에게 권준호가 미안하다며 빙긋이 웃었다. 저 얼굴을 깨고 싶지는 않은데 물으려면 지금 뿐이었다.


"정대만이야?"

"응?"

"그 짝사랑, 정대만이었냐고."


아아, 난 또 뭐라고 하하. 그래 대만이었어. 대만이가 참 여러 사람한테 죄 많이 지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알고보니 정대만이 첫사랑이었다 그거 수두룩하다. 당장 지금 송태섭도 그런 걸, 하하. 마치 지나가는 사람 얘기하듯 권준호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권준호는 아무렇지 않은데 그걸 듣는 마성지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쟤는 저리 태평한데 내가 왜 이러지.

 

"권준호 변호사님, 나한테 그랬죠. 마성지 프로, 멍 들어가고 무릎 갈아가며 번 돈 그렇게 퍼줄거에요? 내가 묻고 싶네요, 권준호 변호사님. 남들 놀 때 책상 앉아서 좋아하는 농구도 접어가며 딴 변호사 자격으로 짝사랑 애인 수발 했어요? 나는 쌍방이기라도 했지."


그래, 첫사랑 짝사랑 할 수 있지. 그 나이에 그것도 안 해보면 그게 드문거지. 그거까진 좋은데 네가 왜 그런 걸 해. 왜 그 수고를 해. 내가 다 아까워 네가 왜 그러는데 내가 다 속상해 네가 왜 그러는데. 내가 너 너무 아까워서 못 견디겠다 왜 그랬어 권준호.



"나보고 뭐라 하더니 나보다 더했네? 그래서 그렇게 잘 알았어?"

"이미 다 지난 일이야. 나는 이제 대만이한테 아무런 감정 없어. 그냥 지나간 일이지."

"첫사랑 잘되라고 보내준 것도 모자라서 첫사랑 애인 뒷수발까지 해줘? 너 바보야? 그걸 네가 왜 해줘?"

"수발이 아니라 사건 수임이지. 주니어 변호사가 일 하나 따내는게 그냥 되는 줄 알아? 내 커리어 좋으라고 하는 일이야."

"말은 똑바로 하자. 그럼 유학 초반 일은 뭐라 설명할 건데?"

"태섭이가 걱정 되니까 그런거지. 나는 대만이도 소중하지만 태섭이도 나한테 정말 중요해. 태섭이 내가 정말 아끼는 후배야, 그건 진심이야. 내가 북산 다닐 적 태섭이 아꼈던 거 모르는 사람 없어. 그건 태섭이도 대만이도 알아."

"넌 속도 없어? 미국에서 혼인 서류 제출하는 것도 도와주고 증인도 네가 섰다며?"

"정말 감정 남았으면 그런 일 못하는 거 너도 알잖아. 이제 그런 감정은 없으니까 그런 일도 해줬지. 내가 좋아하는 친구고 후배니까."

"준호야."

"내가 아끼는 사람 둘이 행복한건데, 내가 못할 이유가 뭐 있어."

"내가 안 괜찮아."

"성지야."

"내가 안 괜찮다고, 권준호."




슬램덩크 성지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