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제 약탈의 대상이 또 다른 평행세계의 자기 자신인...

<A 세계의 송태섭 x B 세계의 정대만 x B 세계의 송태섭>으로 지옥의 삼각형 보고싶다

송태섭으로부터 정대만을 약탈하는 송태섭 어떤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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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e A

 


 

 

송태섭은 미쳐가고 있었다. 아니, 진작부터 이미 미쳐있던 건지도 모르지. 

따라서 송태섭이 이 모양 이 꼴로 망가지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선 그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때' 아시안 최초 NBA MVP까지 달았던 스타 선수 송태섭이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0.4%. NBA 정규 리그에 소속된 동양인 선수들의 비중은 고작 0.4%이다. 전 세계 인구의 약 60%를 아시안이 차지하고 있음에도, 동양인에게 NBA의 벽이란 그런 거였다. 그곳엔 함부로 넘지 못할 거대한 산이 있었고, 아시안으로서 그 곳을 넘기 위하여 송태섭은 기어이 초인이 되어 산맥을 박살내야만 했다. 이로써 그는 코카시안 핏줄이라고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순수 동양인임에도 지브롤터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누차 강조하는 바와 같이,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정대만. 

14살 어린 풋내기 시절 처음 만나, 그가 살아온 평생토록 가슴에 자리하는 이름.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송태섭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일 사람. 모든 것을 바쳐 그저 사랑만 하리라 다짐했던 송태섭의 정인.

태생이 사랑스러워 일평생 타인의 관심이 끊긴 적 없던 정대만을, 그런 제 연인의 눈부신 20대를 홀로 내버려두고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송태섭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농구를 목숨처럼 사랑했던 정대만이 그 농구만큼 사랑하는 연인의 성장을 응원해주었기에. 그 존귀한 응원 하나만을 짊어지고 송태섭은 기어이 미국 땅을 밟았던 것이다. 

 

 

 

그렇다 하여 홀로 남은 정대만에게 쏟아지는 관심까지 참을만 했던 것은 아니다. 시시때때로 치밀어오르는 질투를 씹어 삼키기 위하여 어찌나 악전고투했는지.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을 독수공방 시키는 주제에 함께 할 수 없는 일상마저 간섭하기에는 미안해서, 최소한으로만 분노하기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인내했는지. 나의 정대만은 그 깊이를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매력적인 연인을 둘러싼 인간 관계에 대한 불안감을 애써 잠재우며 송태섭은 커리어에 집중했다. 그가 가진 불안함의 크기만큼. 딱 그 만큼- 송태섭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구도 정대만의 곁에 설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 돌아가리라 다짐했다. 그러니 그 결심이 얼마나 절박했겠는가.

 

 

애당초 송태섭은 NCAA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커뮤니티 칼리지에 들어가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을 입증해내야만 했다. 2년은 순식간이니까. 태산같은 덩치를 지닌 미국 선수들 사이에서 작고 재빠른 민첩성과 판단력 하나로 투웨이, 익시비트 10 계약 등을 전전하다 마침내 코트 위에 제 존재를 드러냈을 때. 결국 로스터에 들어갔던 그 날. 정대만은 한달음에 날아와 기어이 산을 부수고 해협을 뚫어낸 영웅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역시 너를 이 곳으로 보낸 건 잘 한 일이었어. 고작 나라는 사람 한 명 분의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붙들어 놓기엔 네가 너무 눈부셔. 

 

 

 

그래. 그러니까 송태섭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저를 사랑해주는 정대만의 신뢰를 믿고, 가장 치열한 투쟁을 버텨낼 수 있었다. 정대만의 애정을 믿고. 그 사랑에 보답하려고.

 

 

 

 

― 그 녀석이랑 거리 두면 안돼요?

― 야, 걔 나이가 몇인 줄 알아? 열 여덟이야. 열 여덟.

 

 

 

믿지 말았어야 했을까? 당신의 친절을.

 

 

 

― ... 해서 지금, 이송ㅈ― ..사 받고 있어. 너무 걱정 말―

 

 

 

꽁꽁 숨겼어야 했을까. 당신의 다정을. 감히 내가 없는 땅에서 손 쓸 새도 없이 스러질 초로가 될 것이었다면.

 

 

 

 

*

 

 

 

 

“태섭아! 송태섭!!”

여기야 여기!

 

 

“형, 제가 이런 거 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16시간의 긴 비행 끝에 입국장을 빠져나온 송태섭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정대만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원래도 보통 사람들보다 최소 머리 한 개쯤은 더 키가 큰 정대만이기에 군중 속에서도 눈에 띄곤 했지만, 지금 저 모습이라면 정대만을 모르고 그보다 더 키 큰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한 번쯤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화려한 꽃다발과 플래카드를 흔들며 환히 웃고 있는 제 연인의 전후좌우에는 언제나 그랬듯 한 무더기의 기자들과… 그리고 그 기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머릿수의 팬클럽 회원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배고프지? 뭐 먹으러 갈까?”

 

“비행 내내 앉아서 먹고 자기만 했는데 뭘. 배 안고파요.”

대신 다른 건 먹고 싶어.

 

“야! 지금 주위에 기자들도 있는데 넌...!”

 

“그 쫙 깔린 기자들 누가 다 몰고 오셨더라.”

 

 

 

피식 웃으며 정대만의 허리에 손을 감는다. 아니, 정정한다. 잠깐 감았다가 다시 뗐다. 이곳저곳에서 들이밀어지는 유니폼과 유성매직의 향연에 어쩔 수 없었다. 아―. 해치울 거 빨리 해치우고 집 가서 정대만이나 끌어안고 뒹굴고 싶다.

 

 

 

 

“오빠, 저 진짜 오늘 하루 종일 공항에서 오빠 귀국하는 거 대기탔어요! 아, 사인은 요기 화보집 표지에다 해주세요.”

 

“그래요? 피곤했겠네. 뭐라도 먹긴 했어요?”

 

“아까 전에 정대만 감독님이 저희한테 커피랑 샌드위치 쫙 돌렸어가지구, 그거 먹으면서 버텼어요!”

 

“그랬구나. 저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근데, 앞으로는 이렇게 고생하지 말아요.”

 

에이― 오빠 기다리는 게 뭐가 고생이에요. 시간 완전 잘 갔어요! 정 감독님이랑 같이 노느라. 그쵸, 감독님?

 

 

 

매 귀국마다 펼쳐지는 이 진풍경은 이제 낯설 것도 없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송태섭은 NBA의 스타 선수이고, 그의 연인은 전 국가대표 선수 출신 감독이니까. 그것도 현역 시절 높은 인기를 구사했던. 아, 그래도 선수 시절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째 이 형은 날이 갈수록 사람을 몰고 다녀? 자기가 무슨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돼?

 

 

 

 

송태섭이 NBA의 철문을 두드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동안, 정대만은 국내 리그에서 프로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십 대 시절 잠깐 공백기는 있었으나, 그 후 대학 농구에서 꾸준히 안정적이고 지략 높은 플레이를 선보였던 정대만을 원하는 구단은 많았다. 그에게 들어온 수많은 오퍼 중에서 강팀으로만 골라잡아,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에 입단할 수도 있었을 것이란 뜻이다.

 

 

 

― 왜 하필 거기예요? 다른 구단들도 다 컨택 왔다면서요.

― 글쎄, 나도 몰라. 내 삶이 그래서 그런가? 매번 이상하게 언더독에 끌리네.

 

 

 

그러나 정대만은 빈말로라도 강팀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곳에서 제 프로 생활의 효시를 당겼다. 물론 국내에 프로 농구리그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쩌면 절대적인 비교우위를 논하기에는 아직 데이터가 부족할 수도 있지만, 정대만의 소속인 골든 파이터스는 구단 재정 상태도 그다지 튼튼하지 않고 외인 선수층도 얇은 전형적인 약팀이었다. 모기업 회장님이 농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 정도가 장점인, 딱 그런 팀.

 

 

― 그렇다고 우리 팀이 그렇게까지 약체란 건 아니고~ 하하. 기대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나랑 팀원들이랑 다 같이 힘내서 반드시 정상에 올라갈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다하겠다는 양, 정대만은 기어이 그 약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정대만이 자리를 지키는 동안의 골든 파이터스는 약팀이 아니라 업셋 그 자체를 상징하는 카타르시스로 군림했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많은 팬들의 응원과 사랑을 받는 선수였겠는가. 재계약 시즌 때 그가 다른 팀으로 이적 할까봐 구단 회장님이 전전긍긍하느라 수척해졌다던 일화가 아직도 생생하다. 

 

 

 

시원시원하고 헌신적인 경기로 매 시즌 눈부신 기량을 보여줬던 농구 선수 정대만은, 그러나 서른이 되기 전 제법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딱히 눈에 띄는 이슈나 부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지라 수많은 팬들과 구단 관계자들이 눈물바람으로 붙잡았으나 또 다른 방식으로 농구를 사랑하려고 준비중이라는 정대만의 입장은 단호했다. 송태섭은 제 연인이 미국 땅에서 학업을 닦았으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했었으나, 개인적 바람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선수 시절보다는 더 자주 미국으로 와서 저와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는 연인의 마음을 잘 알았으니까. 그 씀씀이가 예뻐서.

 

 

 

하여튼 선수 시절엔 리그 경기 보러 가면 만날 수 있었던 정대만은, 현재는 모 공립 고등학교 농구부에서 감독직을 맡고 있어 이제는 함부로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귀한 몸이 되어버렸다. 팬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맘 편히 정대만과 함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시간 중 하나가 바로 이렇게 송태섭을 맞이하러 공항에 온 정대만 곁에 알짱거리는 것이었기에, 태섭이 귀국할 때마다 공항에는 송태섭을 보러 온 사람들과, 송태섭을 기다리는 정대만과, 그리고 그런 정대만을 보러 온 사람들이 한데 섞여 매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바로 집으로 갈 껀데, 괜찮―”

 

 

“야.. 차 썬팅을 너무 믿는 거 아니냐 너?”

 

“뭐 어때요. 나 진짜 많이 참았는데. 빨리 출발해요.”

얼른 집 가서 편하게 만지고 싶어, 형.

 

 

하여튼―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시동 거는 대만의 오른쪽 볼에 한 번 더 짧게 입맞춤한 태섭은, 이내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오랜 비행으로 피곤했을 연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대만은 말 없이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제는 대화 없는 침묵의 시간마저 귀중하고 편안한 사이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현재 송태섭의 속마음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이번 귀국 일정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온 머릿속이 그 미션으로 가득 차 상당히 복잡한 심정이었다.

 

 

 

 

― 이런 말 하기 조심스럽지만... 걔 좀 위험한 것 같다.

 

― 너라도 주의를 줘야 할 것 같은데 뿅.

 

― ... 좀 이상했어요.

 

 

 

그래. 그 밤톨 만한 고딩 새끼가 대체 얼마나 위험한 녀석이길래 그 최동오가, 이명헌이, 그리고 무려 서태웅이 나한테 경고를 해주는지 내 눈으로 기어이 확인 좀 해봐야겠다. 

 

 

 

 

처음 대만이 교육자의 길을 걷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을 당시, 태섭은 그가 너무 이른 나이에 현역 생활을 접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품었으나 지도자로서의 정대만에게는 한 치의 의심도, 두려움도 없었다. 태섭이 대만과 같은 코트에 선 것은 북산에서의 나날과 한 번씩 있었던 올림픽 국대 경기 정도 뿐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정대만이 얼마나 동료들의 역량을 잘 끌어내주는 전략가인지 느낄 수 있었으니까. 이 형이 언젠가 감독이 된다면, 제법 좋은 스승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런 선생의 아래에서 살뜰히 배워 나갈 어린 유망주들에게 약간의 질투도 가졌고. 근데 씨발 이건 아니지. 이 정도까지면 이건 내 예상 밖인데.

 

 

 

정대만이 키운다는 꿈나무… 하.. 그 새끼.

 

 

 

대만이 감독직을 맡은 고등학교의 농구부는 수도권에서 제법 농구로 정평이 자자한 강호교였다. 다만 공립인 만큼 가용 예산에 한계가 있어서 프로 선수 시절에 비하면 계약 연봉은 그야말로 1/n 토막이 났는데, 그럼에도 정대만은 그 연봉조차 일부 떼어내어 자신에게 지급되는 급여 대신 농구부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요청했댄다. 

 

 

병아리 감독으로서의 첫걸음이었던 만큼 대만은 제 학생들에게 온 정성을 다했다. 새끼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어미 마냥, 아주 그냥 싹 다 갖다 퍼주면서도 어찌나 행복감에 젖어있던지. 그리고 그렇게 제자들을 예뻐하는 정 감독에게 조금 더 두터운 사랑―과 장학금―을 받아 농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집안 사정 복잡한 열 여덟 살 꼬맹이. 그 녀석이 바로 요즘 송태섭의 심기에 가장 거슬리는 이물질이었다. 

 

 

 

 

태섭은 어느 날의 대화를 회상한다. 처음 최동오에게 기묘한 전화를 받았던 날 나누었던.

 

 

 

 

“형. 그 녀석이랑 거리 두면 안돼요?”

 

“야, 걔 나이가 몇인 줄 알아? 열 여덟이야, 열 여덟. 완전 애기라니까?”

 

“열 여덟이 뭐가 어린 나이야. 충분히 다 컸는데. 열 여덟 살의 나한테 신명 나게 얻어 터지고 이빨 새로 해 넣은 거 기억 안 나, 당신?”

 

“와 얘가 갑자기 막 뼈를 때리고 그러네. 야 살살 패 살살. 형 이제 나이 들어서 뼈 시리다.”

 

“그리고 내가 형을 가슴에 품었던 나이가 몇 살인줄 알아요? 그때 나 열 넷이었어. 고작 그 정도 나이여도 알 거 다 알고,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욕정할 줄도 안다고. 요즘 애들은 심지어 더 빠를 걸?”

 

“뭐? 네가 그때 나를 어떻게 알고?!”

 

“아니 지금 중요한 게 그 부분이에요?”

 

 

 

 

그 때 기분이 어땠더라. 진짜 개 좆같았다는 것만 기억나는데.

 

송태섭이 ‘정대만의 입으로’ 직접 전달받는 감독 정대만의 하루엔 이런 내용 같은 거, 전혀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정대만이 아끼는 에이스 선수가 정대만에게 (깜찍하게도) 독점욕을 품고 있다는 식의 보고 말이다.

제가 맡은 아이들은 하나같이 다 예쁘지만 그 중에서도 가정 형편이 약간 어려워 유독 백호를 떠오르게 하는 애가 있어서, 그 아이에게는 조금 더 마음이 쓰인다고 했던 정대만의 가벼운 설명과

정대만이 감독하는 고교 팀에 소속된 18살 짜리 남자애 한 명이 감독을 바라보는 눈빛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최동오의 걱정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이내 줄줄이 드러나는 전말에 대해 알면 알수록, 태섭은 밀려오는 분노를 참기 힘들어졌다. 그 발칙한 녀석은 원래는 더 이상 농구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고 한다. 중학 리그까지는 제법 실력 있는 선수로 이름 좀 날렸다는데,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더 이상 부 활동에 지출을 늘리기 힘들어졌다고. 따라서 고등학교도 원래는 산업고에 가서 빨리 취직이나 하려다가,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 차마 농구를 놓지 못해 마지막 남은 미련으로 강호교에 진학이라도 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현재 정대만이 자리한 학교로 오게 됐다는 것. (이건 이명헌이 직접 알아봐 준 사정이다.) 이 정도 배경 만으로도 솔직히 정대만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아픈 손가락처럼 여길 만한 서사였다.

 

원인은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겠지. 사실은 계속 농구하고 싶은데, 타의적 요인과 상황적 압박 때문에 원하는 걸 지속할 수 없는 게 얼마나 사람 피 말리게 만드는 감각인지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실력 있는 제자가 농구를 계속할 수 없게 만드는 유일한 문제가 경제적 이유라면, 그걸 제 사비로 메꿔서라도 장애물을 없애주고 싶어할 타입의 사람이 바로 송태섭이 아는 정대만이었다. 심지어 지금의 정대만은 충분히 그럴 능력과 조건도 갖췄다.

그래. 그러니 백 번 양보해서 거기까진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런데 그 새끼가 감히 은혜도 모르고 제 은사에게 그딴 마음을 품어? 

 

 

정대만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후원 받는 장학금 덕분에 간신히 고교 농구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그 소년은, 당연하게도 고교 생활 초입부터 정대만을 무지하게 잘 따랐다고 한다. 따름이 과해서 집착이 될 정도로. 처음에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은하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농구에 집중하던 아이는 날이 갈수록 농구보다는 정대만이라는 인물 그 자체에게 애착을 품었다. 단순히 제자가 스승을 동경하는 정도의 귀여운 사랑이 아니라 진실로 성애에 가까운 그런 질척한 마음을.

 

 

 

현 NBA 선수 송태섭과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정대만이 미국에서 혼인식을 올린 부부 관계라는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아이는, 아니 그 새끼는. 어느 순간부터 꾸준히 정대만에게 송태섭과의 사이는 어떠냐는 둥,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살면 외롭거나 서로 소홀하지는 않냐는 둥 선 넘는 발언을 하며 살살 긁더니 마침내 이혼하고 자기랑 살자는 식의 망언까지 서슴없이 내뱉고 지낸다고 했다.

동 대학에서 정대만과 함께 4년을 구르면서 친해진 최동오와 이명헌이 가끔씩 대만이 몸 담은 고등학교에 들러 프로 선수로서 학생들을 코칭해준다는 명목 하에 농구부를 관찰했는데, 어찌 된 게 방문할 때마다 갈수록 질척임이 심해지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좌시할 수가 없었다고.

 

 

정대만 본인에게는 아무리 애가 좀 이상한 것 같으니 조심하고 단도리 잘 하라고 언질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만 한다고, 송태섭 너라도 상황을 알아야 할 것 같다며 두 사람이 번갈아 태섭에게 걱정 어린 전화를 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때마침 그 때 정대만은 중간고사 기간을 틈타 잠시 연차 내고 미국에 와있었기 때문에, 태섭은 전화를 받은 날 저녁에 대만을 앉혀두고 진지하게 걱정된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그 아이의 집안 사정때문에 개인적으로 마음이 쓰이는 거라면, 그 녀석은 차라리 내가 국내에 장학 재단을 하나 설립하든 어쩌든 해서 경제적으로 도와줄테니, 형은 제발 손 떼고 다른 학교로 가면 안되겠냐고.

 

 

그 날 정대만의 반응? 뻔하지 않은가. 그렇게 어린 애가 집안 어른들 반대 무릅쓰고 농구 계속 해 보겠다고 발버둥치는데 자기가 어떻게 걜 두고 다른 곳으로 가냐며. 최소 그 녀석 대입 끝날 때 까지는 현재 있는 고등학교에 계속 재직할 거라고 고집을 피워댔지. 오히려 어린 애 하나 두고 어른스럽지 못하게 뭐 하는 거냐며 날 나무라기까지.

 

 

그 날은 하도 정대만이 노발대발 날뛰어서 어쩔 수 없이 우선 한 발 물러났었다. 그러나 저번 주에 잠시 귀국한 태웅이 대만의 농구부를 둘러본 뒤 태섭에게 걸었던 전화로 인해... 더 이상은 상황을 방조할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농구가 아닌 영역에는 둔하기 짝이 없는 그 서태웅의 눈에마저 뭔가 이상해 보인다는 거잖아. 지금 장난해? 그 새파랗게 어린 게 대체 얼마나 대놓고 질척거리고 있길래 이딴 소식이 다 들리게 만들어. 

 

 

냉정히 생각하면 그래. 고작 18살 고등학생. 조금 잘생기고 아주 약간만 다정하게 대해줘도 선생에게 충분히 설렐 수 있는 그런 나이. 그렇지만 정대만은 조금 잘생긴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잘생겼고, 약간만 다정한 게 아니라 온 사방 데에 뚝뚝 정을 흩뿌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런 사람과 하루종일 함께 뒹굴며 밀착 코치 받으면, 어린 십 대 소년의 심장에 첫사랑? 뭐 그런 귀여운 불씨 정도는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일일이 그런 설익은 마음에까지 신경 곤두세울 만큼 송태섭에게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송태섭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세간에서 말하는 그런 귀여운 짝사랑이 아니라고. 저 새끼가 품은 건 이미 충분히 선 넘은 감정이라고. 제 연인에게 아주 불순하고 음습한 마음을 품고 있는 어린 맹수가, 주제도 모르고 연인의 곁을 맴돌고 있는 중이라고. 

 

 

더 빡도는 지점은, 정대만은 진심으로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그러니 아무 위기의식 없이 이렇게 무방비하게 귀여워만 하고 있었던 거지. 감히 당신의 애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새낀지 아닌 새낀지 가늠조차 하지 않고. 그러니 어떤 놈인지 직접 내 눈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형.

 

 



 

 

슬램덩크
태섭대만
료미츠



아니 근데 아직 약탈의 ㅇ도 시작 안한거 실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