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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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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붕주의 얼렁뚱땅개연성상실주의



대만이는 드넓은 초원에 혼자 서 있었어.

아니,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뭔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어. 그러다 이내 기억도 나지 않는 걸 찾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지. 고민하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던 탓이었어.
하늘은 맑았고,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거쎄지도 않고 대만이를 간지럽히듯 살람거리며 스쳐지나갔어.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이고 있었던터라 춥지도 않았고. 모든 게 딱 적당한 기분이었지.
짧고 긴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던 대만이는, 저멀리 한 아이가 서 있는 걸 보았어. 주위에 어른도 없고 혼자서 놀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였어.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지. 그런 아이를 보던 대만이는 아이에게 다가갔어.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이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 키는 꽤 큰데 얼굴은 앳되보였고, 몸도 아직 다 자라지 않아 말랐어. 아직 어린 아이 같아 보였지. 대만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아이는 대만이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더니 이내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어.
그때 바람이 둘을 스쳐지나갔고, 이번에는 꽤나 강한 바람이었던 탓에 아이의 몸은 휘청거렸어. 깜짝 놀란 대만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달려가 손을 뻗어 아이를 잡았어. 얼덜결에 아이를 자신의 품에 안은 모습이 되버렸지. 가만히 대만이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아이는 고개를 살짝 들어 대만이를 올려다 보았어.

이상하게 눈이 부셔서 아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그 흐릿한 얼굴 너머로도 아이가 짓는 미소는 선명했지. 문득 대만이는 내가 찾고 있던 게 얘였구나 싶었어. 처음 보는 아이인데도.


잘 부탁드려요. 그 말을 끝으로 대만이는 꿈에서 깼어.


뭔 꿈이야 이게. 번쩍 눈을 뜬 대만이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이 그거였어. 그 다음으로 한 생각은 참 진짜 같은 꿈이었다는 것이었지. 현실에선 무언갈 잡기 위해 달려가기는 커녕, 지팡이나 태섭이의 부축없이는 오래 서 있기도 힘든데 말이야.
그래도 나쁘진 않은 꿈이었어. 바람도 기분 좋았고... 깬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졸음이 밀려왔어. 꾸물거리며 옆으로 돌아누운 대만이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태섭이의 얼굴을 바라보았어. 거 누구 남편인지 귀엽고 잘생기고 귀엽고 귀엽고 귀엽고 아주 귀엽구만. 몰아붙일 땐 안 귀엽지만.
실 없는 웃음만 짓던 대만이는 가물거리는 눈을 막지 않고, 몸에 잠겨오는 졸음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어. 그러다 정말로 눈이 감기기 직전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어.


꿈 속에서 봤던 그 애, 우리 신랑 하고 닮았었어. 걔는 생머리에 머리도 한쪽만 밀었지만....


자꾸 애 생각해서 그런가. 기왕이면 우리 애는 곱슬머리면 좋겠는데. 그리고 대만이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지.

태섭이는 일을 하러 나가고 대만이만 홀로 천막에 있는 낮에, 태섭이의 어머니가 찾아왔어. 마침 심심했던 터라 대만이는 반갑게 맞이했지. 구석에 놓여진 지팡이를 가져와 바닥을 짚으며 움직이던 대만이는, 태섭이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혼자 지팡이를 짚고 움직였다는 건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어.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걔는 제가 혼자서 걸으면 싫어해요. 지팡이한테 질투도 한다니까요?

아직도 그날 태섭이가 심통이 난 이유를 모르겠는 대만이었어. 막연히 그냥 싫은가보다, 하고 말 뿐이었지. 그 말을 들은 태섭이의 어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마냥 웃었어.
그 반응에 대만이는 태섭이가 이해가 안가는 사소한 것들에 질투하고 삐졌던 일들을 죄다 말하기 시작했지. 그 끝은 항상 태섭이의 밑에서 엉망으로 신음하게 된다는 사실은 빼놓고. 그건 말하기 좀 그렇잖아.
태섭이의 어머니는 흥미로운 기색을 하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이야기들을 들었어. 그리곤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료타가 그렇게 구는 건 어릴 때 이후로 아주 오랜만이라고.

-그 애는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하려고만 하니까. 가족들한테까지도 의지를 하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렇게 제 신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니, 어쩐지 조금 안심이 된다며 태섭이의 어머니는 대만이에게 고맙다고 말했어.
태섭이의 어머니가 돌아가고 나서도 대만이는 그 대화를 떠올렸지. 태섭이가 자신에게만 그런 식으로 군다는 상상은 사실 해본 적 없었어. 애초에 다른 사람 앞에 있는 태섭이의 모습은 본 적도 없었으니까.


나한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던거야... 료타가... 나한테만... 가슴께가 간지러워진 대만이는 이불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어. 입에선 얼빠진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지. 일을 마치고 돌아온 태섭이를 꽉 끌어안은건 당연한 일이었어.


그렇게 별 일 없는 일상은 계속 됐어. 걷는 연습을 하고, 태섭이가 대만이의 무릎을 주물러주고, 제법 상태가 괜찮다 싶으면 종종 밖으로 나가기도 했지. 전과는 달라진게 있다면 밤에 상대를 툭툭 건들이는 건 태섭이가 됐고, 애써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건 대만이가 됐다는 것이었어. 그리고 변하지 않은 건 항상 넘어가려는 시도는 물거품이 되어 둘이 진득하게 엉겨붙는다는 것이었고.
부부가 사이좋은게 뭐 어때서... 열에 취해 몽롱한 머리로 둘은 생각했어. 태섭이는 안을 거칠게 들쑤시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아냈다가, 가끔은 또 정신을 놓고 대만이를 몰아붙이기도 했어. 줄곧 참아왔던 욕구을 한번 해소하자, 계속해서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반복되며 스스로를 부추겼던 탓이었지.
아니, 그치만, 이래도 되는 괜찮은거 아니야? 매일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지레 겁먹으며 도망가려는 대만이를 품 안에 잡아누르며 태섭이는 생각했어. 반사적으로 다리로 허리를 휘감는 대만이의 행동에 태섭이는 더, 더 안으로 깊이 들어갔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무척이나 뻘쭘한 얼굴을 하곤 쭈뼛거렸어. 어딘가 황당하고, 어딘가 화가 났고, 어이가 없어보이는 치료사의 앞에서 말이야.


사이좋은 부부가 한쪽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아이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 그런데 이 부부는 아주 보란듯이 그 말을 그대로 따랐어. 다치기 전에 가졌다고 하기엔 누가봐도 증상은 최근에 시작된게 분명했지.
치료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어. 태섭이와 대만이는 마치 죄를 지은 아이처럼 몸을 움찔거렸지.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는 건 경사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때가 있는 법이란다.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꺼내려했지만, 피로가 덕지덕지 붙은 눈은 어쩔 수 없었어. 둘은 치료사가 돌아갈 때까지 얼굴도 못들었지.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세 기운이 쪽 빠진 둘은 바닥에 드러누웠어. 요즘따라 묘하게 변한 대만이의 태도에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그렇게나 아이를 갖고 싶어했던 대만이마저도 얼떨떨해하고 있었지.

아무 말 없이 대만이만 힐끔 보고 있던 태섭이는 몸을 일으켜, 멍하니 누워있는 대만이 쪽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어.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만이의 배 위에 손을 얹었어. 아직 판판하기만 한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지.
배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생각에 잠긴 태섭이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대만이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아, 하고 소리를 냈어. 혹시 어디 불편하기라도 한 건가 싶어 태섭이는 대만이를 살폈어. 그러거나 말거나 대만이는 잠시 전에 꾼 꿈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지. 그리고 몸을 일으켜 태섭이에게 꿈 얘기를 들려주었어. 그게 태몽이었나봐, 하고 말이야.

말을 마친 대만이는 조용한 태섭이를 의아하게 쳐다보았어. 뭔가 생각하는 것 같이 보였어. 울적해보이기도 했고,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기뻐보이기도 했어.
이게 여기선 무슨 안좋은 꿈인건가..? 한참동안이나 반응이 없는 태섭이를 앞에 둔 대만이는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어. 그때 태섭이가 대만이를 끌어안았지. 대만이는 얼른 태섭이를 마주 안아줬어. 품에 안긴 태섭이는 잠시 아무말도 없이 가만히 있다가, 불쑥 말을 꺼냈어.

-사실 우리 가족은 다섯명이었어요.

태섭이는 어디서부터 말해줘야할지 고민했어. 초원에 나갔다가 사라진 아버지부터? 아니면 그 뒤를 따라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형부터?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태섭이의 말은 말하고 있는 자신이 듣기에도 횡설수설한 이야기였어. 쓸데없는 것은 덧붙이고 중요한 것은 빼먹은 이야기.
더군다나 청자가 아직도 이따끔씩 말을 서툴러하는 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형편없었어. 그러나 대만이는 그보다 더 깊고 구체적인 것들을 다 알아들은 얼굴을 하고선 태섭이를 바라보았어.

-결국엔 다시 다섯명이네. 어머니랑 아라랑 너랑 나랑 우리 애.

그 말에 태섭이는 말도 못하고 눈만 크게 떴어. 그러다 웃음 터트리면서 대만이의 품에 그대로 고개 박았지. 한참 웃다보니까 눈에 고인 눈물이 웃어서 나는 건지 울컥해서 나는 것인지 모르겠어.
대만이는 들썩거리기 시작하는 태섭이의 등허리께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어.

그리고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어. 밤이 다 지나 아침이 되도록.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