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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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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넌트 레이스가 중반부를 향해 달려가는 시기가 왔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기 내용과 순위 싸움에 천하의 마성지도 신경이 곤두섰다. 1위 팀이긴 하지만 2위 팀과 한 게임 밖에 차이나지 않는데다 자고 일어나면 순위가 바뀌기도 하는 때였다. 하루 하루 살얼음 같은 시기에 개인적인 악재까지 겹쳐 알고 있는 팀 동료들 사이에서 은근히 걱정이 돌기도 했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마성지는 하이텐션을 유지했다. 컨디션도 평소보다 좋았다. 그 이유가 요즘 부쩍 자주 출석 도장을 찍는 변호사 친구 때문이란 걸 구단의 모두가 암암리에 알았다.


로펌에서 매일 같이 갈려나가도 권준호는 VIP 약속이나 출장, 영장 심사를 제외하고는 홈 경기마다 직관을 갔다. 직관 후에는 늘 자신이 운전대를 잡고 마성지를 실어왔다. 옆좌석에서 편안히 실려가며 마성지는 이런 게 하고 싶을까-하고 의문을 가졌다. 돌아온 대답은 이걸 정말 해보고 싶었다-였다.


가끔씩 경기가 이어지다 2-3일 휴식기가 오는 때가 있었다. 자신의 휴일과 겹치는 때면 권준호는 마성지의 집을 찾아 이것저것 음식을 차려 같이 들었다. 바쁜데다 시즌 중이라 외식을 하기 어려운 걸 충분히 아는 권준호는 질리지 않게 이것저것 재료와 방법을 바꾸어가며 식단을 챙겨 먹였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들었다. 이렇게 먹으면 식단도 먹을만 하다고 마성지는 생각했다.


"야, 큰일났다. 이를 어쩌냐."

"뭐가? 혹시 내가 이러는 거 불편해?"

"권준호가 내 눈을 너무 높여놔서 나 큰일이다. 나 연애 못하면 이게 다 권준호 때문이다."

"정환이가 알면 제일 좋아하겠네. 기왕이면 재계약까지 현상 유지 해봐."



매번 챙겨만 주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받기만 하는게 성미에 맞지 않기도 하여 마성지는 권준호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을 물었다. 대답은 반나절의 원온원 이었다. 그것조차도 쉬는 날 뛰게 해 미안하다며 권준호가 스포츠 마사지로 되돌려 주었다. 형에게서 배웠다는 손놀림과 압점이 정확하여 마성지는 간만에 침대에서 비명을 질렀다.







"준호야 나 다른건 진짜 하나도 불만 없거든? 정말 좋거든? 근데 이건 정말 도저히 수용이 안된다."

"왜? 잘 어울리는데?"

"이거 입고 출근했다간 패션 테러로 한동안 박제될 거 같은데."


프테라노돈이 입에서 농구공을 줄줄이 토해내는 하얀 티셔츠를 보며 마성지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권준호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사오는걸까. 아니, 그전에 이런 극악무도한 티셔츠를 돈 받고 팔게 놔두어도 되는건가. 농구계의 패피, 남친룩의 정석으로 항상 순위권에 이름 올리는 마성지의 얼굴에 짙은 시름이 내려 앉았다.


"안 돼?"


그래, 권준호 소원이라는데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입어준다.


마성지의 출근길 사진은 그 날 저녁 스포츠면 기사 최대 조회수를 기록했다.







"뭐 또 해보고 싶은 거 없어?"

"해보고 싶은 거 있는데 싫으면 거절해도 괜찮아"

"티셔츠 말고는 다 들어줄게, 뭔데?"

"나 자고 가도 돼?"

"야, 야, 준호야 저기...켁...쿨럭쿨럭쿨럭..."



갑작스런 외박 발언에 사레가 얹힌 마성지가 한참 만에 숨을 골랐다. 휴일 전날, 경기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귀가한 마성지는 본 경기보다 더 철저한 자세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한동안 사들이지 않았던 콘돔과 젤까지 새로 사들이며 머리 속으로 온갖 시뮬을 돌리며 권준호를 기다렸다.

바로 퇴근하고 집으로 오겠다던 권준호는 일이 늦게 끝났다며 저녁이 한참 넘어서야 벨을 눌렀다. 다소 흐트러진 풀정장 차림의 권준호가 피로함에 평소보다 나른한 태로 마성지의 집에 들어섰다. 한 손에 든 더플백에 현실감이 확 오른 마성지가 짐짓 여유롭게 가방을 건네 받았다.


"나 일단 좀 씻고 나올게."


원온원 하고 나서 잘만 하던 말인데 평소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성지가 소파에서 답지 않게 눈치를 살폈다. 물소리가 멎고 머리를 말린 권준호가 거실로 걸어 나왔다. 편안한 홈웨어 차림으로 거실로 온 준호가 시계를 흘끔 살피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의문으로 자신을 보는 마성지를 지나친 권준호가 냉장고에 가서 차가운 제로 코크를 꺼내 얼음잔 두 개에 채웠다. 잔을 건네며 소파에 자리 잡은 권준호가 TV를 켰다.



"이거 꼭 해보고 싶었거든. 둘이서 NBA 경기 밤늦게까지 보다가 잠드는 거. 그거 해보고 싶었어."


...자고 간다는 게 그거였어?



그렇게 마성지는 술 대신에 사이좋게 제로 코크를 손에 하나씩 들고 권준호와 나란히 앉아 바다 너머 밤 농구를 관전하였다. 처음엔 어이가 없어 헛웃음 짓던 마성지는 경기가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권준호와 열띤 의견을 주고 받으며 경기 시청에 열을 올렸다. 둘 다 어디 내놔도 모자라지 않을 농구 광인이라 알콜 한 방울 안 들어갔는데 술자리 보다 열기가 더 올랐다.


새벽녘에야 경기가 끝났다.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을 경기 관전에 다 쏟아부은 권준호가 4쿼터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결 부드러운 머리칼이 턱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낀 마성지가 TV를 끄고 어깨에 기댄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조심스레 안경을 벗겨주니 일할 때는 볼 수 없는 순한 눈매가 곱게 감겨 있었다.


솔직히 이거 내 위시리스트인데.


마성지의 전 애인들은 이제껏 어느 누구도 이런 시간은 같이 해주지 않았다. 혹여나 슬쩍 의견을 떠봐도 둘이 있는 시간까지 농구 봐야겠냐며 핀잔만 돌아올 뿐이었다.

업무의 피로에 깊이 잠든 권준호의 등과 무릎 밑으로 마성지가 긴 팔을 집어넣어 안아 올렸다. 깊이 잠든 몸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불을 덮어준 마성지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웃었다.



"너 어제 경기 보다가 잠든 거 알아?"

"미안, 깨우지 그랬어."

"온종일 일하고 온 거 뻔히 아는데 뭘 깨워 깨우길."

"무거웠을텐데. 팔 아껴야지."

"너 내가 벤치 프레스 얼마 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브런치로 주문한 스크램블을 입에 떠 넣으며 마성지가 장난스레 권준호를 놀렸다. 잠기운이 남은 권준호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들였다. 찬 기운에 머리가 아릿해진 권준호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준호야, 상대방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는 것도 받는 연애에 들어가겠지?"

"물론이지. 네 마음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는 것도 당연히 포함 되지. 왜, 혹시 뭐 원하는 거 있어?"

"듣고 싫으면 거절해도 좋다고 쿨해지고 싶은데 그게 안된다."

"말해봐."

"사실 다음주에 우리 아버지 회사 창립 기념일 파티 있거든."

"그런데?"

"거기 같이 좀 가주면 안되냐?"

"나야 상관없지만 나중에 뭐라고 둘러댈려고 그래. 그런 자리에 같이 가는게 어떤 의미인지 네가 더 잘 알면서."

"사실 요즘 집에서 자꾸 선자리 떠밀어서 내가 좀 힘들어서 그래. 그래서 너 데리고 가면 당분간은 아무 소리 안하실 거 같아서."

"가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너 뒷수습 할 수 있어? 나중에 뭐라 둘러댈려고?"

"나중에 너랑은 뭐 그냥 둘 다 바빠서 진도 더 나갈 것도 없이 친구 사이로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지."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걱정 마. 나 만나고 헤어지는 거 우리집에서 하도 봐서 익숙해. 내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까 부탁 좀 하자 준호야."







결국 마성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권준호는 마성지와 함께 창립 기념일 행사가 열리는 호텔을 찾았다. 이미 스타로 유명세가 높은 마성지가 권준호와 함께 들어서자 주변의 시선이 순식간에 몰렸다. 하는 짓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둘 사이는 사적으로 말하면 친구, 공적으로는 프로 선수와 소속팀 자문 변호사여서 굳이 따로 손을 잡거나 그런 제스쳐도 없었다. 그럼에도 시선이 온통 몰리는 걸 느낀 권준호가 벌써부터 지치는 것을 느꼈다.


주변의 웅성임에 고개를 돌린 마성지의 어머니 눈에 아들과 함께 걸어오는 권준호가 들어왔다. 이미 여러 차례 아들의 전 애인들로 인해 불쾌한 경험이 많았던 마성지의 어머니가 날카로운 눈매로 권준호를 유심히 살폈다.


위아래로 대놓고 훑지는 않지만 뜯어보는 듯 바라보는 느낌에 권준호는 벌써부터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 의문과 못마땅함이 뒤섞인 교양 있는 얼굴. 그 모습을 보던 권준호가 속으로 한숨을 한 번 쉬더니 태세를 정비했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권준호의 전매특허인 어른들 상대로, 어머님들 상대로 잘 먹히는 순한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의 예의를 온 몸에 둘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지 친구 권준호라고 합니다."

영업용 스마일을 최대한 지어보이며 순하게 굴면 어지간한 어른들도 일단 기본 점수를 주고 시작했다. 헌데도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권준호를 매섭게 보는 모습에 상류층 사모님도 참 힘들다며 사회 생활 참 뭐같다며 권준호가 속으로 위로를 건넸다.


고생 많으십니다, 성지 어머니. 재벌집 사모님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네요. 걱정마세요, 얼마 뒤에 저는 흔적도 없을테니까.



"성지가 발이 넓어 워낙 여기저기 아는 사람이 많다보니 내가 금방 알아보기 힘드네요. 운동하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이 자식이 어지간히도 사람 바꿔가며 만났나 보네. 교양 있는 사모님이 이 정도로 말할 정도면. 너 도대체 어떻게 논 거니, 성지야.


권준호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양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한 손으로 명함을 받아든 고운 사모님이 깐깐한 눈으로 명함을 읽어 나갔다.


"운동하는 사람은 아니고 구단 법률 자문 맡고 있는 변호사입니다."


잘 그려낸 한 쪽 눈썹이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내려왔다. 명함을 손에 든 마성지의 어머니가 천천히 놀다 가라며 인사를 건넨 후,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 그룹의 안주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성지와 권준호가 동시에 깊은 숨을 토해냈다.




집안 행사에서 얼굴 보기 힘든 그룹의 셋째 아들이자 농구계 스타인 마성지가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인사들과 술 권유가 들어왔다. 중요한 자리이고 인맥들이라 차마 냉정하게 거절하기 힘들어하는 기색을 읽은 권준호가 어른들 앞에서 살가운 얼굴과 듣기 좋은 말로 잔을 대신 받거나 정중히 물렸다.

그 와중에도 도저히 거절하기 힘든 잔은 받아든 채, 마성지가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즌 중이라 잔을 빨리 못 비우는 모습을 본 권준호가 티나지 않게 잔을 무알콜 칵테일로 바꾸어 쥐어주었다. 경영에 발 담그지 않아 VIP를 금방 못 알아보는 마성지의 옆에서 권준호는 귀엣말로 가만히 이름과 소속을 알려주었다. 정말 중요한 손님은 먼저 가서 인사하고 오라며 등을 떠밀기도 했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은 마성지가 가족들과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나란히 인사하고 홀을 벗어나는 아들과 아들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성지의 어머니가 손짓으로 수행 비서를 불러 들였다. 아들 친구에게서 건네 받은 명함이 비서의 손에 쥐어졌다.


"알아봐요."







-네, 권준호입니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요. 나 성지 엄마에요.

-괜찮습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권 변호사하고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요?


창립 기념일 행사 며칠 후, 서면 작성 중 걸려온 낯선 전화 한통이 권준호의 온 신경을 세웠다. 길지 않은 답변에서 실수가 묻어나지 않게 단어를 고르느라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올라왔다. 전화를 끊고 나서 숨을 깊게 토해내는 얼굴에 벌써부터 피로가 쌓였다.


마성지 이 녀석은 자기가 알아서 할거라고 큰 소리 쳐놓고 이게 뭐야. 이게 알아서 수습한 거니 성지야.



통화를 마치고 이틀 후, 오후 시간에 반차를 쓴 권준호는 차를 몰아 시내의 어느 티룸으로 향했다. VIP들이 종종 밖에서 이야기 할 때 부르는 곳으로, 권준호의 집안에서도 종종 이용하는 티룸이었다. 프라이빗 룸이 있고 직원들 입단속이 철저해서 긴밀히 이야기 나누기 좋은 곳이었다. 어른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는데도 마성지의 어머니는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하는 젊은 변호사에게 곱게 나이 든 우아한 부인이 자리를 권했다.





"차, 괜찮아요?"

"네, 좋습니다."


마성지의 어머니는 손을 뻗어 티 테이블 위에 놓인 차들을 가리켰다. 


"뭐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해봤어요. 골라봐요."

"먼저 고르시죠."

"어려도 내가 부른 손님인데 그럴 수 있나. 먼저 골라요."


차를 훑어보던 권준호의 시선이 본 적 있는 이름에 꽂혔다. 



'왠 홍차? 커피파 아냐?'

'아, 그거? 내 취향 아니고 우리 여사님 취향.'

'착한 아들이네.'

'뭐가 착해. 한번씩 불시점검 오실 때 쓰는 뇌물이구만. 한 잔 내려줘?'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우연치곤 재밌네. 나도 이걸로 줘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나간 직원이 잠시 뒤 티팟과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차를 따르려는 직원을 마성지의 어머니가 손으로 물렸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올리겠습니다."

"그래요."


의도를 기민하게 읽은 권준호가 티팟을 들어 차를 따랐다. 두 사람만 자리한 공간에 찻물 따르는 소리만이 채워졌다.  




"성지가 최근에 신세를 많이 졌던데."

"신세랄게 있습니까, 본디 제 일이 그런 것을요."

"큰 소리 없이 잘 마무리 해줘서 고마워요, 이건 내 인사."


인사와 함께 봉투 하나가 앞으로 밀어졌다. 권준호는 봉투를 한 번 흘끔 보고서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마성지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이미 수임료 받았습니다. 괜찮습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내 성의니 넣어둬요."

"이정환 본부장이 넉넉하게 넣었습니다. 더 이상은 과합니다." 


어지간히도 걱정 되시나 보네. 정환이가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요. 댁네 아드님 관련해서 말 새어나갈 일은 없을테니 그만 안심하시죠, 어머니.



"주니어 농구 클럽 법률 자문도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그럼 거기 후원금으로 넣어요. 후원금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러시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서류는 본사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걸 내가 받아야 안심하시겠군. 


감사의 뜻을 표하고 봉투를 정리한 권준호가 찻잔을 기울여 타들어 가는 목을 축였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차분히 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던 마성지의 어머니가 잔을 내려 놓으며 질문을 던졌다.


"부친이 연수원 계시는 권 원장이시던데."

"맞습니다. 법원장 임기 끝나고 지금은 연수원에 출강하십니다."

"대학이 성지랑 같은 학교던데. 학교에서 만났어요?"

"아뇨, 대학 다닐 때 따로 만난적은 없습니다. 고등학교 인터하이 때 한 번 저희 학교랑 맞붙은 적은 있지만 그게 다입니다."

"성지가 그런 자리까지 누굴 데려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서 좀 궁금해지네요. 둘이 어떻게 만났어요?"


아, 연애는 주구장창 해도 집에는 잘 안 보였구나. 하긴 그 동안 만난 사람중에 어머니 눈에 찰 만한 사람이 없었겠지. 어지간히도 의심이 많으시네. 뭐 아들이 사기결혼 당하기 직전에 파혼했으니 이해는 합니다만.


"성지 파혼 조정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정환 본부장이 저한테 부탁했거든요."

"정환이가 직접 부탁했어요?"

"네. 한번씩 이런 일 부탁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마성지 바닥까지 다 본 사람이니까 적당히 하고 보내주시죠. 잡음 나는 거 싫어하는 이정환이 저한테 왜 이걸 맡겼겠어요, 그것도 한 두번도 아니고.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히 잔을 기울이며 최소한으로 목만 축이며 권준호는 대답을 이어나갔다. 조금이라도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최대한 허리를 바로 세우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태도로 공손히 웃으며 답하는 VIP 접대 모드를 가동하며. 사회 생활 스킬을 총동원 하느라 실시간으로 체력과 심력이 깎여나가는 중이었지만 지금 그걸 따질 여유 조차 없었다.


아 피곤하다. 그냥 댁네 아드님이랑 몇 개월 지나면 이렇게 붙어 다닐 일도 없으니까 그만 좀 물어보세요-하고 때려치고 싶다. 근데 그렇게 했다가는 이 집도 우리집도 뒤집어지겠지.



"얼마 전에 권 원장님 며느리 보셨던데."

"네, 저희 형이 얼마 전에 레지던트 수련을 마쳤습니다."

"원장님 자식들 잘 키우셨네요. 권 변호사도 혼처 알아볼 때 되지 않았나요?"

"부모님께서 선 자리 자꾸 들고 오시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못 나가고 있습니다."


잘난 전문직 아들의 현실 피로가 느껴지는 대답에 마성지의 어머니가 살짝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농구 보러 다닐 시간은 있고?"

"아직 일머리가 부족해서 누굴 만나고 그럴 처지가 못 됩니다."



저도 들어오는 선 자리 쳐내느라 바쁜 사람입니다. 그 댁 아드님한테 수작 걸 여유도 이유도 없어요. 일하느라 갈려나가서 연애할 시간도 사치니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보니까 성지랑 종종 보는 것 같던데."

"제가 고등학교때까지 농구부여서 농구를 좋아합니다." 

"로펌 생활 만만치 않을텐데, 경기장까지 직관도 가고."

"저희 구단 유니폼 마킹 1위가 성지에요. 제가 이 팀 시즌권 끊어 다닌지 5년이 넘었지만 성지만한 스타는 보기 힘들죠."

"바쁘다는 사람이 운전까지 해서 데려다 주고."

"제가 직관 가는 날 운전대 잡는 것 뿐입니다. 가뜩이나 코트에서 관절 갈아가며 뛰는데."


별 뜻 없습니다, 그냥 제가 농구광인이라 응원팀 에이스 보는게 좋아 그러는거니 그냥 넘어가주시죠 제발. 댁네 아드님 아니더라도 농구 처돌이라서 제 돈 주고 경기장 출근 도장 찍는 사람이라구요.


"내 아들이지만 빈말로라도 쉬운 애라고는 못해요. 보기보다 까다로워서 어울려 다니기 쉽지 않을텐데. 고집도 있고."

"승패가 매번 걸려있는 세계에서 그 정도 추진력과 예리함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죠."

"맞춰주기 어렵지 않아요?"
 
"의외로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는 수월해서 어렵지 않습니다. 경기 관련한 곳에서 양보 안되는 부분이 많으니까 대신에 다른 부분은 가급적이면 내려놓는 편이죠."

"그거 때문에 이 사단이 났지."

"같은 실수 또 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들이니까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몰라 그런 것이 아니라 못해준 죄책감 때문에 매번 휘둘린다는 거."



그 난리를 겪고도 똑같은 실수를 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은 아니에요. 당분간은 연애 못할거니 애먼 저는 그냥 좀 보내주시죠. 챙겨주는데 맛들여서 한동안은 퍼주는 연애 못할거니까.




"권변, 차는 입에 맞아요?"

"네, 잘 마셨습니다."

"나는 이 차 참 좋아하는데, 이 집 식구들 중에 차 즐기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마셔요."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은 마성지의 어머니가 창 밖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눈 앞의 젊은 변호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여기 봄 되면 정원에 꽃이 참 예뻐요. 다음엔 테라스에서 마시는 것도 좋겠네요."




슬램덩크 성지준호




가정의 달에 친구 어머니까지 뵙고 온 아들 친구 권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