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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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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열이 잠깐 잠들었다 깼을 때 창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등을 켜지 않은 거실은 조금 어두웠지만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적당히 포근했다. 양호열은 누운 채 멍하니 눈 앞의 벽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이 머리를 대고 누운 쿠션이 좀 딱딱한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칠 즈음 깨달았다.

그건 소파에 앉은 정대만의 허벅지였다.



양호열은 눈을 다시 감고 정대만의 허벅지와 배 사이에 머리를 고쳐 기댔다. 정대만의 한쪽 손이 어깨에서 팔까지 가볍게 쓸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양호열의 움직임이 멎고 다시 잠든 듯하자 정대만은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 뭔가를 집어들었다. 사락이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흔들리고 옅은 섬유유연제 향이 코 끝을 스쳤다. 아까 건조기에서 꺼낸 다음 소파에 던져 둔 빨래를 개는 모양이다.

집안일이라곤 영 서툰 정대만이지만 합숙 생활과 이동에 이골이 난 만큼 세탁물을 정리하고 짐을 싸는 일만큼은 제법 깔끔하게 해내는 걸 보고 양호열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꼭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집에선 그냥 쉬어도 괜찮다고 했을 때 정대만은 이런 말을 했었다.



"뭐든지 다 네가 해주다간 나를 귀찮다고 생각할지 모르잖아? 난 지금도 네가 없어지면 뭘 어떻게 해야..."



아니, 말하다 말고 멈추더니 눈동자만 데굴, 굴렸다. 괜한 소리를 해버렸다는 듯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양호열은 뭐라고 했냐면... 아무 말도 안 했다.

당신은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귀찮지 않다는 말도, 계속 당신 곁에 있고 싶다는 말도 그 때는 할 수 없었다.





양호열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머리 속에 느릿느릿 불이 켜진다. 손발은 나른하지만 정신은 또렷하다. 규칙적인 빗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대만 군..."

"어, 깼냐? 밖에 비 오는데 저녁에 전골이나-"

"혹시, 사람들 앞에서 예식을 올리고 싶다고 했던 말...아직도 유효한가요?"





툭-

양호열의 뺨 위로 정대만이 들고 있던 양말 한 짝이 떨어졌다.










x x x







결혼식 장소는 널찍한 정원이 딸린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양쪽 모두 부르고 싶은 사람을 모두 합쳐도 서른 명 안팎에 불과했다. 정대만의 부모님과 이모, 안 감독 내외, 강백호를 비롯한 농구부원들, 이한나와 채소연, 백호 군단, 이영걸 무리, 정대만의 대학 친구들(과 그 애인), 양호열에게 요리를 가르쳐줬던 이자카야 사장님, 양호열의 가게 인테리어 공사를 담당한 사장님, 그리고 양호열과 정대만의 결혼 기사를 처음 썼던 <월간 농구> 기자 이송희가 비보도를 전제로 초대받았다.





"그런데 결혼식...이라는 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벙싯벙싯 벌어지는 입가를 숨기지도 못하고 정대만이 중얼거렸을 때, 일생의 용기를 한 순간에 다 짜내어 써버린 양호열도 아차 싶긴 마찬가지였다.



"나나 대만 군이나...알 리가 있나요."



결국 정대만의 구단 직원에게 상의해 플래너를 소개받았다. 남성 두 분, 인원은 30~40명 사이, 식사와 주류 포함, 장소가 넓을 필요는 없지만 야외 공간이 있으면 좋으시겠다고요. 예산은 어느 정도로 잡고 계시죠?



"어...돈은 그냥 아끼지 말고 해주세요."

행복에 눈이 먼 정대만이 헤실거리며 내뱉는 소리에 양호열이 옆구리를 쿡 찌르려는 찰나 플래너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기준을 정해 주셔야 해요. 아니면 혹시, 섬을 빌려서 전용기로 이동하는 이벤트 같은 것도 괜찮으신가요?"

와...그런 거 좋아할 것 같은 사람 하나 있긴 하지. 양호열의 머릿속에 굵은 금목걸이를 건 남자가 스쳐갔다.



"아, 그건 아니고 저희는..."

예식과 관련한 선택은 뭐든 정대만에게 맡기려 했던 게 본래 양호열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대만의 입에서 나오는 '저희'라는 말이 어쩐지 양호열을 들뜨게 만들었다.

"저희는 그냥, 가까운 분들 앞에서 같이 인사드리는 게 목적이라서요. 너무 화려하지 않은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럼 장소 리스트부터 뽑아보고 청첩장 디자인이랑 예복, 꽃 장식 같은 건 다시 상의드리도록 할게요.



플래너가 돌아간 뒤, 둘은 마주보고 조금 쑥스럽게 웃었다.





x x x





"야아, 넌 이마가 잘 생겨서 그런지 리젠트가 아니어도 다 잘 어울리는구나?"

아침 일찍 헤어샵에 와서 메이크업을 받은 뒤 포마드 스타일로 이마를 드러낸 양호열을 보고 정대만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맘에 들면 앞으론 이렇게 하고 다닐게요."

부드러운 크림색 수트를 입은 정대만을 보며 양호열이 말했다. 같은 색, 거의 비슷한 디자인의 예복을 고르고 치수를 재고 가봉하는 과정은 즐거웠다. 유니폼이나 스포츠웨어를 입은 모습에 익숙해졌지만 이렇게 차려입으니 새삼 미남이란 걸 알겠다.



예식 시간이 가까워지며 하객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고령에 먼 거리임에도 기꺼이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와 준 안 감독은 문 앞으로 달려나가 인사하는 정대만의 손을 붙잡고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만 군은 오래 전에 훌륭한 선수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하세요."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양호열을 향해 덧붙였다.

"그 때도, 지금도 우리 선수들 곁에 호열 군이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



결혼식 참석을 위해 출국도 미루었다는 송태섭과 마주쳤을 때 양호열은 조금 긴장했다. 곁눈질로 정대만을 찾았지만 정대만은 좀 아까 도착한 채치수에게 붙들린 채 무언가 결혼생활에 관한 잔소리를 듣고 있는 듯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양호열을 향해 송태섭도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악력이 센 손, 똑바로 부딪혀오는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본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입술을 끌어올려 웃은 송태섭이 손을 놓아주며 말한다.



"네가 신경쓸만한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

"대신, 잘 해주도록 해. 너나 나 같은 사람이랑은 좀 다르다는 걸...네가 제일 잘 알겠지."



넌 잘 할 거다. 또 그 때와 같이 등을 툭, 치는 손길.

양호열이 고개를 돌렸을 때 송태섭은 이미 연회장 안쪽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내 입구가 소란스러워져 내다보러 갔더니 100미터 밖에서 봐도 눈에 띌 것처럼 광택 나는 블랙 수트를 차려입은 장신의 남자가 행인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다. 그보다 무난한 수트를 입은 남자는 마치 남인 것처럼 두어 걸음 떨어져 등을 돌린 채고.



"우성아, 여기가 시상식장이냐?"

"됐으니까 먼저 들어가자."

넥타이와 행커치프의 컬러와 패턴을 비슷하게 맞춰 입은 김낙수와 최동오가 양호열을 보자 반갑다는 듯 웃었다.



모든 하객이 도착하고 자리에 앉자 음식이 서빙되는 동시에 예식이 시작되었다. 사회는 권준호의 추천으로 다년간의 결혼식 사회 경험이 있다는 이달재가 맡아주었다.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은 했지만, 양호열과 정대만은 결혼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좀처럼 결정하지 못했다.



"주례는 지루해서 싫어."

"나도 그건 별로에요."

"치수는 자기 결혼식 때 노래를 부르더라고."

"아, 그거 꽤 훌륭했죠. 그런데 대만 군은 노래 못 부르지 않나?"

"이게-!"

"하하하하, 농담이에요."

"네가 할 수도 있잖아. 가끔 샤워할 때 들어보면 잘 부르는 것 같던데."

"...그걸 듣고 있었어요?"

"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들린 거다!"

"음...사람들 앞에서는 좀 그래요."

"그럼, 나중에 나한테만 들려줘."

"알았어요."



결국 모든 순서를 생략하고 생략한 끝에 남은 건 친구들의 축사와 반지 교환 정도였다.



정대만을 위한 축사는 권준호가 맡았다.





"하객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결혼하는 정대만 군의 친구 권준호라고 합니다.

바쁘신 가운데 이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중 대부분은 아시겠지만, 저와 대만이는 고등학교 때 농구부 활동을 같이 했던 사이입니다. 대만이를 처음 봤을 때, 그건 저희가 친구가 되기 전이었는데요. 저는 세상에 어떤 신의 가호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저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코트 위에서 대만이가 보여주었던 재능은 정말로 그렇게밖에는 설명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빛나는 재능만으로 살아가기에 인생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죠. 대만이가 길을 잃고 힘들어하던 시간 동안 친구로서 곁에 있어주지 못한 걸 저도 많이 후회했습니다. 신이 있다면 왜 한 사람에게 그런 재능과 상처를 함께 주는 걸까, 그렇다면 역시 신은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구요.

그런데 결국 대만이가 코트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던 건 사람들이었어요. 오늘 이 자리에 그 사람들 대부분이 와 있다는 것도 참 고마운 일이죠. 그리고 저는 언제나 그 중 한 사람에게 특별히 고마웠습니다. 바로 대만이의 배우자가 된 양호열 군에게요.

아시다시피 호열이는 우리 북산 농구부의 자랑, 몇 번째 자랑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최소 네 명 정도는 자기가 첫 번째라고 싸워댈 것 같거든요. (웃음) 아무튼, 우리의 자랑인 강백호 선수의 친구로 농구부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었어요. 그리고 대만이의 복귀도 도와주었는데, 그 때는 물론 제가 이런 자리에 오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실, 작년 이맘 때조차도 몰랐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언제부터 서로를 보고 있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대만이는 그런 얘길 꺼내면 부끄러워서 화를 내는 성격이거든요. 하하.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 축하를 위해 왔으니 오래된 비밀 얘기를 하나 들려주고 싶습니다. 대만이는 아마 모를 테고, 호열이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인터하이가 끝나고 농구부에서 은퇴했을 때도 대만이는 겨울까지 남기로 결정했었어요. 그 해 가을 어느 날로 기억하는데, 모처럼 생각이 나서 체육관에 들렀더니 다른 부원들은 모두 체력 훈련을 위해 나가고 대만이만 남아 슛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오랫동안 혼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호열이였어요.

호열이는 자리를 떠나면서 자기가 보고 있었다는 걸 대만이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고, 오늘 이 순간까지도 비밀로 해주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기사로 접한 순간 생각했습니다. 농구에 몰두한 대만이를 계속 바라보던 그 눈에 담긴 감정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 비밀을 지켜주지 않는 게 더 좋았던 걸까.

하지만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고, 사랑할 사람들은 사랑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제 대만이의 행복을 지켜줄 존재가 신이 아니라 한 사람이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축하한다, 대만아. 고맙다, 호열아."







잔잔하게 물결치는 듯한 박수와 웃음소리 속에 권준호가 자리에 앉았다. 정대만은 옆에 앉아 있던 양호열을 향해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비밀을 들킨 양호열은 급하게 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다음 순서를 소개하는 이달재의 멘트와 함께 김대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랑, 아니 신부...아니, 어쨌든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 양호열의 친구 김대남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안경 군, 아니 권준호 선배님이 한 것처럼 저도 좀 멋지게 말해보고 싶은데 이거 쉽지 않네요. 다들 좀 이해해주면 고맙겠습니다.

호열이가 결혼식을 올린다면서 친구 대표로 뭔가 말을 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저는 솔직히 꽤 놀랐습니다. 사실, 대만 군...아, 저희끼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불러왔는데 말이죠. 호열이가 대만 군이랑 결혼했다고 얘기해줬을 때는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거든요.

어쨌든, 호열이가 이걸 부탁했을 때, 아, 지금 표정을 보니까 저에게 부탁한 걸 후회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하하. 어차피 백호나 구식이나 용팔이가 했어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중학교 때 저 녀석과 친구가 되고 나서 평생 처음으로 받는 부탁이었거든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호열이는 정말 괜찮은 친구입니다. 의리 있고 머리도 좋고 남을 잘 도와주고 무슨 일이든 깔끔하게 해내죠. 그런데 가끔은 좀 서운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 녀석은 왜 남에게 바라는 게 아무 것도 없을까. 우리는 친구인데 왜 아주 작은 거라도 부탁하거나 기대하지 않을까. 호열이는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걸 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건 입에도 담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언제나 잡지에 실린 슈퍼카나 비싼 바이크 같은 걸 탐내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저희는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백호가 농구를 시작했습니다. 농구부를 구경하는 건 무척 재미있었어요. 스포츠맨이라니, 우리하곤 너무 다른 사람들인데? 하지만 백호가 점점 스포츠맨이 되어가는 걸 보는 것도 즐거웠어요. 그리고 어느 날 대만 군을 만나게 됐죠.

첫 인상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네요. 하하.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두 사람이 지금 어떻게 합의를 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한데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호열이가 처음부터 대만 군을 좀 다르게 대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요. 하지만 이건 중요한 얘긴 아닌 것 같으니까 나중에 제가 따로 대만 군에게 귀띔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호열아, 그만 노려봐라. 아직 안 끝났으니까.

어쨌든 시작이 좋지 않았던 것과 달리 대만 군은 백호와 저희 무리에게 꽤 잘 해줬습니다. 시원시원하고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가끔 바보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경기를 응원하러 갈 때마다 엄청난 사람이란 걸 느끼곤 했죠. 그리고 저 대단한 사람을...내 친구가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땐 이거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이 녀석은 원하는 걸 얻으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는 타입이 아니라 그 반대였으니까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호열이가 먼저 대만 군 얘기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그게 더 신경이 쓰였어요.호열이가 혼자 일하고 사는 걸 보면서, 세상에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원하는 사람도 없는 저 녀석이 언제 훌쩍 우리 곁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한 적도 많았어요. 친구인 저라도 저 녀석을 어딘가에 뿌리내리게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거든요.

그런데 호열이가 대만 군이랑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려줬을 때, 저는 마음 한 구석에서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대만 군은 뭐랄까, 하늘에 있는 별 같은 사람이니까 이 녀석이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고서야 손에 넣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지만요. 아마도 호열이는 일생의 운을 이번에 몰아서 쓴 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러니 앞으로 평생 파친코에서 뭔가를 따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 지금 표정을 보니 그런 것 따윈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 같네요. 저 녀석이 저렇게 즐겁게 웃는 걸 얼마만에 보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축하한다, 호열아. 대만 군, 호열이를 붙잡아줘서 고마워요. 두 사람 모두 행복하길 바래요."







아까보다 좀 더 큰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사회자석에 있던 이달재가 웃으며 다음은 두 사람의 반지 교환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x x x





결혼식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저녁, 양호열은 정대만을 가게로 데려갔다. 공사가 거의 끝나서 보여주고 싶다는 말에 정대만도 신나서 따라나섰다.



"음, 뭐가 많이 바뀌었네?"

조명, 가구, 벽지 등 전반적인 인테리어가 모두 밝은 톤으로 바뀐 걸 보고 정대만이 신기한 듯 말했다.



"일단 여기 좀 앉을래요?"

기역 자로 꺾인 모양으로 생긴 바의 짧은 쪽 좌석에 양호열은 정대만을 앉혔다.



"기억하고 있었냐?"

"혼자 올 때마다 항상 거기에 앉았잖아요."

"여기 앉으면 네가 일하는 걸 한 눈에 볼 수 있었거든."



저런 말을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자신은 여간해선 이 사람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양호열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케이스를 꺼냈다.





"대만 군, 나랑 결혼해줘요."



"......"



"지난 번엔 대만 군이 말했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제대로 말하고 싶었어요. 반지, 별로 좋은 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운동하는 사람이라 거의 끼고 다닐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그래도 이것만은 내가 대만 군에게 주고 싶었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지만, 앞으로는 더 잘 해 줄게요."



"...너는, 생각보다 바보같을 때가 많단 말이지."



"웃지 말아요."



"네가 그동안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더 잘 해준다면 무지 좋은 일이기는 해."



"아니...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노래 불러줘."



"알았어요. 오늘은 말고..."



"기쁜 일이든 힘든 일이든, 뭐든 나한테 먼저 말해줘."



"응. 그럴게요. 당신도요.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마."



"응, 그래서 지금 얘기하자면 나 술집은 그만두기로 했어요.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여긴 식당으로 개업해서 저녁에 마칠 거예요. 지난 시즌처럼 경기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갈게요."



"와......좋은데? 그러면 데리러 올 때마다 키스해 줘."



"당신 친구들 없는 데서요."



"음, 좀 아쉬운데. 뭐, 좋아. 반지 이리 줘 봐."









x x x



결혼식을 마친 뒤 정대만과 양호열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예식 날짜를 급하게 잡는 바람에 곧 정대만의 훈련이 시작되어 신혼여행은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축의금 봉투를 정리하던 양호열이 말했다.



"대만 군...이거 좀 이상한데요."

"왜?"

"정우성 씨가 내 앞으로 천만 원을 냈어요."

"미친 놈..."

"이거 받아도 되는 건가요?"

"그 자식은 부자니까 그냥 받아 둬. 다음 시즌 오프 때 걔들도 결혼할 것 같던데, 너한테 뭔가 고마웠나 보지."







x x x





메이크업을 닦아내고 샤워를 하며 단단하게 세팅한 머리카락을 적셔 트리트먼트로 풀어내는 과정만으로도 둘 다 지쳐버렸다. 종일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자 졸음이 밀려왔다.

정대만이 잠에서 깨었을 땐 한밤중이었다. 베개 위에서 턱을 괸 양호열이 정대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깼냐?"

"방금요."

"거짓말 하지 마..."

"응, 사실 아까부터 깨어 있었는데 대만 군 자는 얼굴이 보기 좋아서."

"너도 이제 그런 말을 다 할 줄 아는구나."

"말했잖아. 더 잘 해주고 싶다고."



여전히 졸음 가득한 눈으로 웃던 정대만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나 꿈을 꿨는데 말이야..."

"그런데요?"

"꿈에 네가 나왔거든. 고등학교 때 어떤 경기 같았는데, 이거 하나만 기억이 나. 내가 골을 넣었더니 관중석에 있던 네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지금은 좋아해!' 라고 외쳤어. 이상한 얘기 같지만, 무지 진짜 같더라구..."

"아......그건요..."

"뭐야, 진짜 있었던 일이야?"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정대만 때문에 양호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진짜냐? 그 때부터 나를 좋아했어??"

"아, 이제 와서 그런 거 묻지 말라구요..."



스물 여덟 양호열의 인생에 이렇게까지 곤란하고 끈질긴 상대는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사람은 또 없겠지. 양호열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도 자꾸 끌어올려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다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거나 물어보자. 그 때 지금은 좋아한다고 했잖아. 지금은 어때? 지금도 좋아해? 나를?"



"...아니."



"뭐, 이 자식아? 나랑 오늘 결혼했으면서 이러기냐?"



"....해요."



"뭐?"



"지금은 사랑한다고..."





양호열이 시트를 머리 끝까지 확 끌어올렸다.

야,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다시 말해 봐. 한 번만 더 말해보라고! 정대만이 시트를 젖히며 양호열에게 다가왔다. 양호열은 대답 대신 정대만에게 입을 맞췄다. 정대만이 양호열의 목에 팔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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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댐 최대 명절 5/8 농최날을 기념하며 마무리.

어설픈 글인데 재밌게 읽어줘서 쓸 수 있던 것 같아.
댓글 달리는 것도 다 다시 읽어보는데 진짜진짜 고마워.
덕분에 재밌었다. 앞으로도 호댐 얘기 많이하자.
호댐붐은 왔다!!!!!



슬램덩크 호열대만 요미츠


+ 외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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