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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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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토요일이 되었다. 마성지는 권준호가 전날 보낸 문자에 따라 운동복 차림에 농구화와 더플백을 챙겨 주차장에서 시각을 확인했다.

'이 때쯤 데리러 갈게요. 옷은 운동복이면 좋겠어요, 농구화도 챙기고.'


몸으로 갚으라더니 제법 요구사항이 세세하네? 설마 나랑 한 게임 뛰고 하려는 거? 그것도 아니면 취향이 이런쪽?


무릎까지 만지작 거리며 은근히 말하던 내용과 상반되는 차림에 마성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권준호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권준호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계속 보았던 수트 차림에 포마드로 만진 머리가 아닌, 앞머리가 내려온 차림에 위아래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도저히 줄이 그어지지 않는 요구사항과 차림에 마성지가 의문 가득한 채로 차에 올랐다.

지난번처럼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 나가 달린 차는 마성지가 주로 가는 곳과 전혀 거리가 먼 곳이었다. 낯선 동네의 풍경에 연신 눈을 돌려 구경하던 움직임이 한 곳에 멎었다. 연립 주택과 소형 아파트가 군데군데 붙어있는 시설 낡은 공원에는 농구 골대가 있었다.


차림새에서 농구를 할 거란 예상은 했었다. 그런데 굳이 이런 곳에서? 길거리 농구라도 할 건가? 그렇다면 대학가 쪽도 있고 공원도 있는데? 이런 낡고 한적한 곳에서? 아니 그리고 둘만 하자는 거? 원온원?


여러가지 의문이 가득한 채로 차가 멈추었다. 마성지가 벨트를 정리하고 가방을 챙겨드는 사이 권준호가 옆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새삼스러운 에스코트에 마성지가 괜히 볼을 긁적였다.


"저기, 변호사님 도대체 여긴 왜-"

"곧 알게 될 거에요. 아, 다들 왔어?"


두 사람의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코트 바깥에서 공을 돌리던 아이들이 권준호에게로 달려왔다. 이미 아는 사이인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익숙했다.



"준호 삼촌!!!"

"준호 삼촌, 여기 여기!!"

"어, 잠깐 마성지다 마성지!!!!!!"

"진짜? 와 미친 진짜 마성지다 미친!!!"



그리고 아이들은 권준호 옆의 마성지를 알아보고 코트가 떠나갈듯 소리를 질러댔다.




"아는 아이들이에요?"

"하하, 네. 제가 후원하는 주니어 농구 클럽 아이들이에요."

"삼촌, 삼촌 진짜 마성지야? 진짜 마성지 데리고 온 거야?"

"그래, 이 녀석들아. 진짜야, 진짜 마성지 선수."



대화가 이어지기 어려울만큼 온갖 괴성과 단어를 섞어가며 열렬히 환영하는 초등학생 아이들 덕분에 마성지는 계속 벙쪄 있을 틈도 없었다. 트레이닝복과 농구화를 준비하라 했을 때에도 내심 살색 뒤엉킨 그림을 예상했다. 그런 마성지의 난한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이들의 소리 높고 맑은 환호가 주변을 에워쌌다.


이래서야 여기선 내가 제일 질 낮은 놈이네.


놀랍기는 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반기는 이들은 늘 익숙하고 많았으나 항상 즐겁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이토록 순도 높게 자신을 기다리는 맑은 눈빛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마성지는 눈 앞의 변호사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내 시간과 몸이 필요한 게 이거였어요?"

"맞아요. 아이들이 워낙 동경하는 사람이라서 한 번은 만나게 해주고 싶었는데, 마성지 프로가 보통 스타가 아니라서. 그래서 이렇게 좀 편법을 썼어요. 내 행동이 불쾌했거나 무례하게 느껴졌다면 미안해요."


지난번 자신을 몰아붙이며 일을 추진하던 모습에서 느껴지던 냉정함이나 볼을 꼬집고 무릎을 잡으며 놀리던 능글맞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담백하고 진솔한 어투. 그리고 정중하게 숙여지는 고개. 이미 전의를 상실한 마성지는 더 이상 화를 내거나 따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이 남자의 이러한 기품이 아마도 가장 본질에 가까울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진심의 비중이 높은 사과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성지는 가볍게 목례하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지금 모처럼 기분 좋은 경험을 할 것이란 기대가 들어 더 이상 체면과 예의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른의 체면은 이 정도로 차리면 됐고, 몸 풀어요. 설마 나만 뛰게 할 생각은 아니죠?"

"못 뛰게 하면 항소할려고 했어요."


웃으며 농구화 끈을 조이는 젊은 변호사의 모습이 익숙했다. 아이들과 몸을 풀고 간단하게 원포인트 레슨을 진행했다.

저소득층이나 한부모 가정 아이들로 이루어진 농구 클럽 아이들은 옷차림이나 농구화는 수수했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은 소박하지 않았다. 눈을 빛내며 하나라도 더 듣고 싶어하는 순수한 열정이 마성지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머리 속에 잡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사치였다. 근래 복잡했던 머리 속의 여러 가지 생각이 쉽게 한 켠으로 밀려났다.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며 아이들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진행하는 동안 몸이 달아오르는 만큼 머리는 차고 맑아져갔다. 답답했던 가슴이 가볍게 정리되는 느낌에 마성지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아이들에게 시원스레 웃음을 보였다.


이어서 팀을 나누어 3대 3 미니 게임을 진행했다. 권준호와 마성지가 각각 아이들 팀 하나씩을 맡았다. 잔뜩 기대한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마성지에게 진심으로 달려들었다. 타고난 승부사이며 누구보다 농구를 사랑한다 자신하는 코트 위의 별은 이런 시간과 열정을 사랑했다. 어떠한 이득이나 계산도 없이 농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공을 튀기며 림을 향해 달리는 어린 눈빛들이 마성지는 사랑스러웠다.

숨이 턱까지 차 올라 헉헉 거리면서도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 코트 위에서 권준호도 연신 땀을 흘리며 소리내 웃었다. 로펌에서 마주한 대외용 미소나 상대를 몰아붙이며 짓던 냉소와는 아주 결이 다른 미소였다. 청량함까지 느껴지는 얼굴에서 마성지는 이 젊은 변호사가 적어도 농구에 대한 애정이 다른 이들보다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초등학생들과의 미니 게임인데도 집중도 높게 볼을 돌리며, 적당히 봐줄 구석은 봐주고 밀어 붙일 때는 붙이는 완급 조절이 물 흐르듯 했다. 아이들과의 합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이 짐작이 갔다. 볼을 잡는 몸이 라인 뒤로 반바퀴 돌아 3점 라인에 섰다. 아마추어치고 완성도 높게 깔끔한 슛폼과 높고 빠른 릴리즈. 프로 경기에서도 저 정도면 득점을 손쉽게 점친다. 높고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공이 림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갔다. 한 손을 높이 들며 성공을 확신하는 태가 무척이나 익숙하고 낯 익었다.

깨끗한 폼이다. 익숙하다. 마성지 못지 않게 3점 잘 쏘기로 유명한 정대만이 겹처졌다. 정대만이 컨디션이 좋아 소위 3점 작두를 탈 때 저런 폼이었다. 고등학교 인터하이때도 손이 안 올라가면서도 폼은 정말 깔끔했다. 저 폼을 아마추어의 손에서 또 볼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익숙한데 저 폼...정대만?
아니 그런데 잠깐 정대만 느낌도 나는데, 정대만은 아니고. 나 저거 봤는데 그러니까 그게...인터하이...


"...북산?!!!! 시발 그러니까 권준호가 그 때 북산 5번 권준호?!!!!!!"


벼락처럼 들춰진 오래된 기억에 마성지가 순간 코트 위에서 고함치듯 이름을 내질렀다.


"이제 기억나?"


그리고 당사자는 림을 통과한 볼을 유유히 드리블 하며 마성지의 앞으로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쩌렁쩌렁하고 톤 높은 목소리가 코트위를 채웠다. 땀을 흘리며 아이들과 부대끼는 그 길지 않은 시간에도 정이 들 수 있냐고 묻는다면 마성지는 그러하다. 본디 정이 많고 농구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마성지는 팬들과 농구 꿈나무들에게 늘 다정했다. 자신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기다려오면서 진지하게 경기까지 뛴 아이들에게 설명이 더 필요할까. 한 명 한 명 악수하고 사인에 사진까지 찍어준 마성지가 권준호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아이들과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에 빛이 더해지는 것을 확인한 어른 두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을 배웅하고 코트 위를 정리하며 마성지가 말을 붙였다.


"여기 클럽 관련한 법률 자문도 하고 있겠죠?"

"하하,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네요."

"계좌 알려줘요."

"처음 만남에 너무 과분한 걸요? 물론 후원금은 언제든 환영이에요, 마성지 프로."

"감사는 내가 해야 할 것 같네요."




마성지를 집까지 데려다 준 권준호는 저녁 먹고 가라는 말에 붙들려 함께 집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미 토요일을 오전 오후 시간을 거의 다 뺏었다 생각한지라 권준호는 예의와 경우의 포장을 씌워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마성지는 그런 포장이나 체면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통찰을 더 중시하는 남자라 그런 게 통하지 않았다. 주장이자 에이스의 기백이 돌아온 모습은 함부로 거절하기 힘든 힘이 있었다. 권준호는 곤란한 듯 웃으며 마성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성지는 손님 들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타올을 건네주고 욕실을 안내하는데 까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거절할 타이밍도 명분도 놓친 권준호가 순순히 집주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잠시 뒤, 깔끔해진 몸과 새 옷으로 환복한 두 사람이 다시 거실에서 마주했다.



"손님을 주방에 세우는 건 내 방식이 아닌데-"

"오늘 하루 경기 뛰어준 데에 대한 소소한 초과수당이라 치고 넘어가요. 마성지 프로 연봉이 얼만데 하루를 내가 거의 통으로 썼잖아요. 이거라도 해야지."

"정환이한테도 이렇게 예의 차려요?"

"공적인 자리는 당연히 그러고 둘만 있거나 사적인 자리는 편히 불러요."

"우리 솔직히 동갑이고, 이미 그 때 붙을만큼 붙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말 트자."

"하하, 그럴까?"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주방에 들어선 권준호가 양해를 구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흔쾌히 떨어진 답변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잘 정리된 냉장고는 신선한 야채와 과일, 육류가 적당한 양으로 채워져 있었다. 바쁜 프로 생활에서도 자기 몸 챙기는 건 철저히 놓치지 않는 마성지 다운 습관이었다. 눈으로 식재료를 훑은 권준호가 날랜 손으로 몇 가지를 집어 들었다. 칼을 쥐려는 마성지를 만류하며 대신 칼을 집어든 권준호가 손을 바삐 움직였다. 재료를 다듬고 불 위에 올리는 태가 자연스러웠다.


"땀 흘렸는데 맥주 어때? 대리 내가 불러줄게."


권준호는 대답 대신 웃으며 맥주 한 캔을 집어 마성지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딱 한 캔만. 시즌 곧 시작이잖아."

"와, 변호사 양반 프로보다 더 독하네."

"땀 흘렸고 고생했으니까 이것만. 대신 시원하게 마실 거 만들어줄게."


아일랜드에 앉은 마성지에게만 맥주를 밀어주고 권준호는 맥주에 입도 대지 않았다. 불 위에서 요리들이 익어가는 동안, 권준호의 손이 냉장고에서 얼음과 탄산수를 꺼내 들었다. 스무디용으로 상비해두는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즙을 섞어 만든 음료가 마성지와 권준호의 앞에 한잔씩 놓였다. 놀란 눈빛으로 권준호와 유리잔을 번갈아 보던 마성지가 잔을 받아 마셨다. 시원하고 청량감 있게 넘어가는 음료였다.


"너는 마셔도 괜찮지 않아? 대리 불러 준대도."

"네가 참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마셔."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한 말투에 마성지가 잠시 표정을 굳혔다. 여지껏 그렇게 연애를 해도 저를 거쳐간 연인들 중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해주지 않았었다. 당연한 말이 참으로 낯설었다.


낯선 것은 그 말 만이 아니었다. 권준호가 차려준 음식들은 지극히 익숙한데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습관적으로 차리고 먹었고, 클럽 하우스에서도 주식처럼 먹는 스타일이었다. 다만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의 집에서 차려 주는 것이 너무나 낯선 그림이었다.


"누가보면 네가 운동하는 줄 알겠네. 평소에 이렇게 먹어?"

"설마 그럴리가. 너 먹을거라 이렇게 차려 봤어. 평소라면 이것보다 좀 더 풍성하게 하겠지만 지금은 페넌트 레이스 바로 앞두고 몸 만드는 시기니까."

"나 때문에 그런거야? 한 끼 정돈 괜찮은데."

"나 때문에 한 끼 풀고 나면 그 다음날 식단 더 조여야 하잖아."



잠시 굳었던 손이 이내 부지런히 플레이트 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관리용 식단이라 맛은 크게 기대 안했지만 예상외로 맛까지 괜찮아서 먹는 입이 즐거웠다. 심플해보이지만 군데군데 손길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었고, 무엇보다 탄단지 영양 밸런스가 훌륭히 잘 잡혀 있어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었다.


"식단 짜는 솜씨가 보통 아니다? 이런 것도 공부했었어?"

"하하, 나도 운동 했어서 기본적으로 아는 것도 있고. 형한테 이것저것 물어서 나름대로 보강을 했지."

"형님도 운동하셔? 아님 이쪽 업계?"

"전혀 관계 없어. 의사라 잘 아는 거지."

"이야, 닥터 검수까지 거친 식단이라니. 나 오늘 좀 호강한다?"

"나랑 애들이야 말로 호강했지. 고마워."


순하게 눈매를 휘며 감사를 표하는 얼굴에 마성지는 함께 표정을 풀었다. 첫 날 마주했던 웃는 얼굴과 지금의 웃는 얼굴의 농도가 다름이 아주 분명히 느껴졌다. 전자는 프로의 얼굴이고 후자는 평범한 청년의 얼굴이다. 아마도 이 얼굴을 보는게 더 힘들겠지 이 녀석은.


"내 집에서 남이 이렇게 식단 차려주는 것도 다 먹어보네."

"이게 뭐 큰 일이라고. 연애 그 정도로 해봤으면서."

"연애를 그렇게 했는데도 이런 건 처음이라면?"

"마성지 프로 그거 지금 상당히 넌센스라는 거 알아요?"

"내가 생각해도 참 웃겨. 근데 그게 사실이야. 나 딱히 애인이랑 같이 살면서도 이런 거 못 받아 봤거든."


마성지는 생긴 건 화려하지만 의외로 연애에서는 순정에 퍼주는 타입이었다. 늘 자신이 먼저 해주려 했고 양보하고 굽히고 들어갔다. 본래 정이 많은 성격이기도 했고, 잦은 원정과 스케쥴로 곁을 비우는데에 대한 죄책감이 연애에서 마성지를 을로 만들었다. 전혀 줄이 그어지지 않는 단어의 조합에 말문이 딱히 막혀본 적 없는 권준호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권준호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자 마성지가 일부러 목소리 톤을 올려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운동도 안 하면서 프로 선수의 니즈를 너무 잘 아는데? 혹시...권준호 전남친 프로? 그래서 내 파혼 건 때 그렇게 소리 높인거야?"

"하하, 프로는 아니야. 같은 과 선배 잠시 만난 게 다고 프로는 만난 적도 없어."



여상한 듯 웃으며 과거사를 잠시 흘린 권준호가 말을 멈추고 안경을 벗었다. 눈가에 피로가 몰린듯 가만히 눈 주변을 누르던 권준호가 안경을 다시 쓰지 않은 얼굴로 가만 가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안경 하나 벗었는데 묘하게 헐벗은 듯한 느낌이 들어 마성지는 어쩐지 목덜미가 간질간질 했다.

담담하게 이어나가는 대화에서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오랜 짝사랑의 산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권준호의 기나긴 짝사랑의 상대는 프로길을 갈 정도로 유망한 운동 선수였다. 학생 때 부터 시작한 제법 오래된 순정이었다. 그 순정은 해주고픈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준호의 순정은 보답받지 못했다.

권준호가 열렬히 사랑한 농구가 그랬듯이 권준호의 첫사랑도 미소 지어줄 뿐 손을 잡아주지는 않았다. 오랜 기간 동안 순애해온 상대에게 해주고픈 것들은 권준호의 안에서만 착실히 쌓아져갔다. 그 길고 긴 외사랑과 인내의 시간이 오랜 미련처럼, 습관처럼, 인처럼 권준호의 몸과 기억 구석 구석에 내려 앉아 있았다.

마성지는 뚯하지 않게 듣게 된 권준호의 보답받지 못한 짝사랑에 잔을 들었다. 권준호가 만들어준 그 누군가를 위해 준비해왔을 잔이었다. 마성지는 잔을 부딪히며 그 자식 참 보는 눈도 없다며 권준호 대신 험담을 해주었다. 이번에는 권준호가 항상 퍼주기만 했던 마성지의 연애사에 잔을 들었다. 항상 퍼주기만 했던 마성지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잔을 기울였다.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접은 외사랑과 을로 시작하여 을로 끝난 연애. 둘 다 참 답이 없다며 서로의 답 없는 연애사에 잔을 한 번 더 부딪혔다. 알콜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차가운 잔이 시원하게 넘어갔다. 토요일 밤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슬램덩크 성지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