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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00:00
부족장은 부족민들에게 전투와 약탈의 성공만 알리긴 했으나 날아온 전서구에는 꽤 많은 내용이 적혀있었음. 태웅이 전투의 선두로 많은 활약을 했다는 것, 태웅의 전략 덕분에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약탈품의 양은 겨울을 충분히 넘길 만큼 얻었다는 것, 그리고 부족장의 아들은 의욕만 앞서다가 반쯤 녹은 진흙을 밟고 미끄러져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 등 사실상 태웅의 후계 싸움의 승리를 알리는 내용 뿐이었음.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부족민 목숨까지 담보로 잡아가며 일을 저질렀건만 아들놈은 공은 세우기는 커녕 대가리만 깨졌고 기껏 무리하여 일으킨 전쟁은 태웅이 마지막 승기를 꽂는 무대로 전락해버렸음.이제 남은 건 금의환향하는 태웅을 기다리는 일과 후계자리를 태웅에게 넘기는 일 뿐이었음.
이쯤되니 부족장은 들끓던 머리가 되려 차분해졌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애초에 서태웅은 후계 자리 따위 관심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후계 다툼에 끼어든거지. 아무리 전 부족장의 입김이 세다 한들 곰의 힘줄보다 더한 쇠고집에다 귀찮은 건 질색하는 태웅이 친지의 등쌀에 떠밀려 후계 다툼같이 귀찮은 일에 자진해서 들어왔을 리는 없었음. 사냥 밖에 모르고 그 외에는 세상 무심하던 태웅이 갑자기 후계 싸움에 뛰어들게 만든 원인, 그건 서쪽의 빨간 머리였음. 부족장은 차게 식은 눈으로 태웅과 그의 반려가 사는 집을 바라보았음.
정말 패배를 인정하는 것 밖에 남은 게 없나?
이미 부귀영화를 위해서 부족민의 목숨을 저울 위에 달아본 부족장이었음. 거리 낄 일은 아무것도 남지않았지.


태웅이 부상없이 무사히 돌아오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뒤로 백호는 한껏 들떠있었음. 그동안은 걱정하느라 잠도 자는둥 마는둥이었고 입덧도 올라와 밥먹기가 버거웠는데 마음이 편해지니 몸도 한결 편해졌음. 다만 작은 문제가 하나 있긴 했음. 계절이 계절인데다 식량 창고가 불타는 바람에 임산부인 백호가 먹을만한 게 그닥 없다는 점이었음. 고기야 태웅이 잔뜩 잡아둬 많았지만 백호가 먹고싶은 건 새콤달콤한 과일이었음. 하지만 한겨울에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음. 식량창고가 멀쩡했다면 절인 것이라도 먹을 수 있었을텐데 창고가 불타버렸으니 고기만 먹는 수 밖에 없었음. 힘겨워하는 백호에 부족민들은 전사들이 돌아오면 약탈품에 먹을만한 게 있을거라고 다독였지만 전사들이 돌아오려면 최소 보름은 있어야했음. 백호는 점점 식사량이 줄어들어갔음.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 백호의 집을 찾아왔음. 백호에게 낯선 사람은 아니었음. 서쪽 마을에서 잡혀온 자그만 여자아이였음. 서쪽 마을이 건재할 때는 종종 놀아주곤 했는데 약탈혼으로 끌려온 뒤에는 그 애의 엄마가 만나지도 못하게 막았고 백호도 죄책감때문에 굳이 아이를 찾아가진 않았음. 생판 남보다 못한 사이였는데 그런 애가 오니 백호는 좀 당황스러웠지. 그래도 어린 아이라 백호는 최대한 상냥하게 대했음. 아이는 백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음. 빨갛고 조그만 열매가 다닥다닥 매달린 나뭇가지였음.

"이걸 나한테?"

백호가 어리둥절해하자 아이가 쭈볏거리며 백호의 배를 가리켰음.

"달고 새큼해요. 맛있어요."

그제야 아이의 의도를 알아챈 백호의 눈이 붉어졌음. 백호는 아이에게 연신 고맙다 중얼거렸음. 그리고 아이에게 잠시 기다리라 한 뒤 육포를 한아름 가져와 아이에게 건네주었음.

"이거 다같이 나눠먹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육포를 받아들며 말했음.

"이거 호수 근처에 많이 있어요."

그 말을 남기고 아이는 팔랑팔랑 사라졌음. 백호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 열매 하나를 입에 넣었음. 아이 말대로 새콤달콤한 맛있는 과일이었음.



백호와 헤어진 아이는 곧장 집으로 가지않고 누군가를 찾았음.

"갖다주고 왔어요."

낯선 이는 아이에게 잘했다 말하고 밤 하나를 건넸음. 아이는 약속받은 밤을 품에 넣고 육포를 내밀었음.

"다같이 나눠먹으래요."

아이의 손에 들려있던 육포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음. 아이는 붉어진 손등과 흙이 묻어버린 육포때문에 엉엉 울며 골목에서 뛰쳐나왔음. 아이의 영문 모를 울음 소리에 아이의 엄마가 나와 아이를 서둘러 안았음. 그 모습을 보던 낯선 이의 눈에는 분노와 슬픔이 서려있었음.


부족장은 약탈혼으로 끌려온 서쪽 유민들을 살폈음. 진즉 체념한 이들도 있긴 하였으나 혼인을 올린지 1년도 채 지나지않아 아직 분노와 원망이 그대로인 자들도 있었음. 부족장은 특히나 가족을 잃은 자들, 그들 중 가장 원망이 깊어보이는 자 하나를 골라냈음. 동쪽 부족의 약탈로 인해 아비와 반려, 아들까지 잃은 자였음. 부족장인 자신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는게 못마땅하긴 하였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적합한 인물이었음. 부족장은 그에게 서쪽 부족이 당한 건 중간에 간자짓을 한 빨간 머리, 백호 때문이라고 속살거렸음.
이제 저 치는 부족 후계자의 반려가 될 것이고 아이도 낳아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아비도 반려도 아들도 잃은 너와는 다르게. 부족장은 제 말에 눈에 불을 튀기는 서쪽의 유민을 흡족하게 바라보았음. 복수하고 싶지않느냐.
서쪽의 유민은 저를 졸로 쓰려는 부족장의 의도를 파악했음. 한창 부족이 후계 다툼으로 떠들썩했으니까.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유민은 기꺼이 그의 광대놀음에 동참해주기로 했음. 제 아비와 반려와 아들을 죽인 건 강백호가 아니었지만 그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생각하지않았음. 제 친족들을 죽인 자들에 대한 당장의 복수는 불가했지만 언젠가는 할 것이었고 제 첫번째 복수는 강백호여야했음.

아이가 가져다 준 나무열매를 아껴먹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백호는 이틀도 지나지않아 열매를 몽땅 먹어버렸음. 그도 그럴게 한 번 입에 넣으니 침샘이 폭발한 것처럼 군침이 돌고 계속 먹고싶어졌음. 아꺼먹는다고 아껴먹었는데 다음날 마지막 열매를 입에 털어넣은 백호가 아쉬운 눈빛으로 빈 나뭇가지를 보았음. 더 먹을 수 없으려나?
결국 며칠동안 고민하던 백호는 숲으로 향했음. 고기는 너무 물렸고 입 안을 새콤하게 채우는 열매가 너무너무 먹고싶었음. 아예 모르는 장소도 아니었음. 지난번에 태웅과 화해했던 장소의 근처였고 길도 험하지않았음. 그 때는 못 봤는데 그 새 생겼던가. 백호는 입맛을 다시며 조심스럽게 숲으로 향했음.

호수는 여전히 아름다웠음. 백호는 천천히 호수 주변을 걸으며 열매를 찾았음. 날씨가 조금 풀린 탓인지 군데군데 녹은 땅이 많았음. 곧 봄이 오겠네. 아기가 추울 때 태어나지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음. 호수 주변을 반쯤 걷다보니 붉은 열매가 달린 나무가 보였음. 이거구나. 백호는 신이 나서 그 자리에 서서 열매를 뚝뚝 따먹었음. 오랜만에 잔뜩 느끼는 새콤달콤함에 백호는 정신이 팔려있었음. 숲 속에서 누군가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할 정도였음. 나무 하나를 털어먹은 백호는 곧 돌아올 태웅에게도 주기 위해 옆의 나무로 걸음을 옮겼음. 그와 동시에 숲에서 날아온 무언가 백호의 발을 휘감았음. 두 발이 날아온 줄에 묶이자 놀란 백호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그대로 호수로 넘어지고 말았음. 꽁꽁 얼어있는 호수의 표면에 부딪힌다고 생각한 백호가 배를 움켜쥐고 낙법 자세를 취했음. 하지만 백호의 등 뒤로 묵직한 통증 대신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음. 단단하게 얼어있을거라 생각한 호수는 얇게만 얼어있었음. 놀란 백호가 발버둥을 쳤지만 발은 묶여있었고 생각보다 호수가 깊었음. 백호가 급하게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지만 뾰족한 무언가가 물 밖으로 나가려는 백호의 팔을 찔렀음. 내 가족은 다 죽이고 너만 행복하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던 백호가 물 밖에서 들리는 말에 멍하니 물 밖을 바라보았음. 뾰족한 나무 막대가 백호가 빠진 곳을 사정없이 찔러댔음. 정신을 차린 백호가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묶인 다리와 차가운 물의 온도에 몸이 점점 굳어갔음. 결국 점점 백호의 몸이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음.

서쪽의 유민은 호수 아래로 빨간 머리가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떴음. 지난밤에 미리 얼음을 깨둔 보람이 있었음. 아마 오늘밤이 지나고 내일밤까지 지나면 깨진 부분의 얼음은 다시 꽁꽁 얼어붙을 것이고 제 죄는 그대로 얼음 아래 묻힐 것이었음. 서쪽 유민은 덜덜 떨리는 손을 허리에 문질렀음. 첫번째 복수가 성공했다는 기쁨보다 기묘한 역겨움이 제 속을 뒤집었음. 유민은 입을 틀어막은 채 마을 쪽으로 뛰었음.




부족장은 백호를 처리했다는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음. 수고했다는 말을 하며 제 어깨를 치는 부족장을 속으로 노려보며 유민은 언젠가 네 놈의 목도 꺾겠다 생각했음. 부족장은 그런 유민의 속셈을 알았고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음. 부족장은 이 일이 저만 아는 비밀이 되기를 바랬음. 졸로 쓴 자의 말에 따르면 아이를 미끼로 썼다고 하는데 일이 좀 커지겠지만 아직 전사들이 돌아오려면 시간은 좀 남았고 그 사이에 다 처리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음.

날이 어두워지자 부족장은 부족민 몇 명을 잡아들였음. 전시 상황에 타 부족과 내통했다며 조작된 증거를 내민 부족장은 그들을 즉결 처형하겠다했음. 증거는 빈약했으나 잡혀온 이들 대부분이 서쪽 유민이라 내통의 심증은 충분했음. 그러나 간자의 수장으로 지목된 이가 체포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벌써 혀가 잘려있다는 점 그리고 간자짓을 하기엔 너무 어린아이까지 잡혀온 것을 본 전 부족장은 부족장이 무언가 흉계를 꾸몄다고 생각했음. 전 부족장은 급히 사람을 보내 백호가 무사한지 살피라 했지만 곧 백호가 집에 없다는 말에 낭패감이 돌았음.

약탈해온 서쪽 유민들과 맺어진 자들은 대부분 부족장의 파벌이 아니었으니 저들을 죽인다 해도 부족장의 파벌이 와해될 일은 없었음. 그렇다면 저들의 반려들은 서태웅 측에 붙을 터였지만 반려인 백호가 실종된 서태웅은 그를 찾느라 부족 내의 일에 관여할 여력이 없을 터였음. 낭패감이 서린 전 부족장의 얼굴에 부족장이 히죽 웃었음. 서태웅의 빨간머리 반려야 봄이 되고 호수가 녹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음. 그 때 서태웅이 복수하겠다고 나설 수 있지만 지금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을 죄다 죽이고 나면 심증 뿐이니 저를 죽일 수도 없었고 서태웅이 제 반려에게 하는 꼴을 보니 복수는 커녕 그 뒤를 따라갈 것 같기도 했음. 진작 그것을 죽였어야 했다며 부족장은 호수 밑에 가라앉아있을 백호를 떠올렸음.

사람들을 처형장으로 끌고가려하자 비명이 계곡을 가득 메웠음. 아무리 그래도 중간 재판 절차를 건너뛰는 건 아니라며 다른 이들이 말리려 했지만 부족장은 간자를 감싸려는거냐며 그들을 협박했고 결국 별다른 수도 써보지 못한 채 사람들은 처형장으로 끌려갔음. 처형장에 몰아넣어진 사람들 중 수장으로 지목되었던, 백호를 죽인 자가 끌려나왔음. 이미 혀가 잘려 가만히 냅둬도 죽을 판국이었지만 본보기는 필요했음. 독기가 바짝 올라 저를 노려보는 눈빛을 가소롭게 보며 부족장은 처형을 명했음. 처형인이 칼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이 터져나왔음. 처형인도 같은 부족민의 가족을 죽여야하는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으나 부족장을 거역할 수 없었음. 높게 치켜든 칼에 달빛이 반사돼 번쩍이자 무릎을 꿇은 자가 눈을 질끈 감았음.
그 때 어디선가 화살 하나가 날아와 처형인의 팔에 꽂혔음. 처형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음. 그곳엔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 있었음.

"재판도 없이 냅다 죽이는건 어디 율법이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부족장도 무릎을 꿇은 이도 모두가 놀랐음.
백호가 끌려온 사람들 앞에 서자 처형인이 주춤거리며 물러났음. 그 꼴에 부족장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했음. 저 녀석이 죽어 없어져야 일이 풀리는데 살아 돌아오다니, 일이 틀어져도 한참 틀어지고 있었음.
제 앞에 백호가 나타나자 무릎을 꿇은 이가 놀라 백호를 빤히 바라보았음. 백호는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음.

백호가 살아난 건 우연과 기적이 합쳐진 덕분이었음. 백호는 우선 암살자가 사라지길 기다리며 차분히 호수 아래로 내려갔음. 암살자의 원망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은 저 혼자가 아니었고 어떻게든 아이를 지켜야했음. 호수 바닥까지 내려간 백호는 목걸이를 풀었음. 태웅이 백호의 목에 걸어준 목걸이에는 맹수의 엄니가 달려있었고 백호는 호수 아래에서 엄니로 다리에 묶인 줄을 풀 수 있었음. 다리가 풀렸을 쯤에는 백호의 숨이 모자랐지만 백호는 견디며 암살자가 사라지길 기다렸음. 마침내 그가 자리를 뜨고 백호는 시야가 흐려지기 직전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음. 간신히 물 밖으로 나온 백호가 배를 감싸쥐며 진흙 위를 뒹굴었음. 빠르게 식어가는 체온을 어떻게든 보온해야했음. 점차 아파오는 아랫배에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아직 괜찮을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백호는 열심히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쳤음. 그러나 다리 사이가 점점 뜨거워지고 기어이 진흙 위로 피가 떨어지자 백호는 더이상 움직이는 걸 그만두고 배를 감싸쥐었음.
왜 벌써 가려는거야. 너 입힐 옷도 잔뜩 만들거고 너 쓸 활도 만드는 중이었는데. 너 줄 것들 잔뜩 있는데... 백호가 울음을 삼키며 진흙 위로 고꾸라졌음.
정신을 잃은 백호가 눈을 뜬 건 사방이 어두워진 뒤였음. 여전히 춥고 배가 아팠지만 몸에 진흙을 발라둬서 그런지 동상에 걸린 곳은 없었음. 백호는 어두워진 눈으로 마을 쪽을 바라보았음. 백호도 인간인지라 저와 아이에게 해코지를 한 자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않은 것은 아니었음. 아직 만나보지 못한 아이 하나 잃은 것도 이렇게 힘든데 아비에 반려에 자식까지 잃은 그의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일테지. 백호가 아랫배를 감싼 채 비틀비틀 일어났음. 백호는 그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될 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음. 그러나 간신히 돌아온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음. 지나가는 이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은 백호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음. 곧 전사들도 돌아오는데 즉결처형이라니,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음. 설마 하는 마음에 처형장으로 가자 저를 죽이려 한 암살자와 나무 열매를 준 아이가 처형대상자로 있는 걸 보고 암살의 내막을 알아챘음. 백호는 암살자의 목을 겨누는 처형인의 칼을 향해 망설임없이 화살을 쏘았음.

백호는 부족장에게 전사들이 돌아온 뒤 재판을 열 것을 요구했음. 이미 부족 내에서 사냥꾼으로 명망이 있는 백호였고 재판도 없이 부당하다는 걸 느끼고 있던 부족민들도 백호의 목소리에 가담했음. 그러나 부족장은 지금은 전시상황이므로 즉결처형이 가능하다 외쳤음. 백호가 전 부족장을 슬쩍 보자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음. 틀린 말은 아닌듯했음. 그러나 이곳에서 물러선다면 제 뒤에 있는 사람들은 즉결처형을 당할 테고 제 아이를 죽이려든 게 부족장이라는 사실은 그대로 묻힐 것이었음. 백호의 눈이 어두워지더니 활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겼음. 화살의 끝은 부족장을 향했음. 주위에서 기겁하며 백호를 말렸지만 백호는 솔직한 심정으로 눈에 보이는게 없었음. 지금 뱃속의 아이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 원수를 죽이지 않을 수 있겠어. 분노가 화산처럼 들끓어댔음. 아마 활시위를 놓는다면 백호는 더이상 이 부족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고 태웅과 헤어지게 될 것이었음. 당장 부족장을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에 족쇄가 걸린 것처럼 손은 쉽사리 시위를 놓지 못했음. 그래도...... 백호의 눈에 채 입혀보지도 못했던 조그만 옷이 어른거렸음. 이제 입힐 아이도 없는데. 백호가 이를 악물었음.
저에게 화살을 겨눈 백호의 행동이 느려지자 부족장은 그 틈을 타 백호를 잡으라 길길이 날뛰었음. 그러나 부족장의 발악은 오래 가지않았음. 백호는 시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고 백호의 화살이 부족장의 목을 무참히 꿰뚫어 그의 마지막 말은 비명도 되지 못한 채 잔뜩 막힌 숨소리만 뱉다 말았음.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 부족장을 보던 백호의 눈에서 눈물이 뚝 흘러내렸음.

태웅이 돌아왔을 땐 모든 게 다 끝이 나 있었음. 약탈은 무사히 성공했지만 부족장은 사망했고 그 살인범은 차기 후계자로 유력한 태웅의 반려, 강백호였음. 돌아온 전사들은 망연자실했고 부족장의 아들과 그의 파벌은 백호를 처형해야한다 주장했으나 마을에 남아 있던 부족민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백호를 변호하니 부족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음. 아수라장인 부족에서 조용한 곳은 오직 하나, 태웅과 백호의 집이었음. 백호는 부족장을 살해했으나 몸상태가 좋지않아 자택에 구금된 상태였음. 태웅은 실권을 장악해 부족의 혼돈을 잠재우는 것 대신 백호의 곁에 머물렀음. 백호는 부족장을 죽인 이후로 몸에서 열이 펄펄 끓어올랐음. 태웅이 전사들을 재촉해 이틀 정도 빨리 도착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으면 백호는 이미 이세상에 없었을 정도로 크게 앓아 누웠음. 의원과 약제사는 백호의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낮고 몸도 마음도 무언가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판단했음. 약제사가 백호의 아이가 사산된 게 그 이유라고 꼽았고 태웅은 그 날 이후로 집에서 꼼짝않고 백호를 간호했음. 차라리 네 고집대로 사냥을 나갈 걸 그랬나. 아무리 위험해도 이 꼴보다는 나았을거라 태웅이 후회했음.

백호가 정신을 차린 건 일주일이 꼬박 지난 뒤였음. 갑갑함에 눈을 뜬 백호는 저를 껴안은 채 잠든 태웅을 멍하니 바라보았음. 얘가 왜 여기에 있지 같은 1차원적 생각을 지나 지난 과거가 줄줄이 엮은 사탕마냥 쏟아졌음. 백호가 손을 내려 아랫배를 더듬자 아주 조금이지만 도톰하게 나와있던 배가 이전처럼 밋밋해진 게 느껴졌음. 정말 가버렸구나. 백호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태웅의 가슴팍을 적셨음. 선잠에 들었던 태웅이 가슴을 간질이는 감각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하염없이 우는 백호의 얼굴이었음. 가슴이 철렁한 태웅이 백호의 눈물을 조심조심 닦아냈음. 뭐라고 위로라도 해주고싶은데, 그동안 할 말이 너무 많았는데 정작 우는 백호의 얼굴을 보니 모든 생각이 휘발되어 날아가버렸음. 결국 제 가슴에 안겨 엉엉 우는 백호를 보며 태웅이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 라는 말 한 마디 뿐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