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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4 21:36

어릴 때의 이명헌은, 요컨대 성격이 그닥 좋지 않았다.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천성이 아주 나쁘거나 악한 건 또 절대 아니었다. 
언젠가 김낙수가 그랬다. 저건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성격이 괴팍하거나 고약한 거 아니냐고.
최동오가 격하게 동의했고 어지간하면 이명헌을 감쌀 신혈철이나 정성구조차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어차피 한 시간 안에 자기도 마음쓰여 포카리 하나 사들고 가서 달래줄 거면서 굳이 안 해도 될 말로 정우성을 기어이 울린 직후여서 그랬을 것이다. 

이명헌은 퍽 사람 마음을 잘 알았다. 
상황 판단력이나 두뇌 회전시키는 것도 잘했고 눈치도 기가 막히게 빨랐다. 눈치를 안 봐서 그렇지. 
필요하면 얼마든지 예의바르고 싹싹하고 다정하게 굴 수도 있었다.
실제로 가족이나 좋아하는 교사들 같은 어른에게는 곧잘 살갑게 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다 지들이 잘난 줄 알고 살아온 드쎈 운동부 사이에서도 화 한번 안내고 기강을 잡을 수도 있었다. 
이명헌에게는 선이 확실하게 존재해서, 모르고 그 선을 넘는 사람에게는 순식간에 마음을 난도질해 돌려주는 재주도 가지고 있었다. 

그 시기의 이명헌은 어렸고, 취향이 까다로웠고, 그로 인한 오만과 괴팍함이 수용되고도 남을 뛰어난 실력이 있었으니까. 
아주 쉽게 표현하자면, 이명헌은 절대적으로 갑의 위치였다. 

그게 그래도 고등학생 시절까지야 운동부 후배놈들 대상으로나 성격을 써먹어서, 기어오르거나 과하게 친근하게 구는 후배들한테 선넘지말라 경고하고 기강잡는 수준에서 끝났는데.

갓 성인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자기한테 순진하게 호감 가진 놈들한테도 이명헌은 으레 하던대로 굴어버렸다. 
그나마 좋게 표현하자면 걔 좀 어장관리하는 것 같지 않냐, 인거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사람 마음 갖고 노는 쓰레기새끼 아냐?가 되는 거고. 

그래도 이명헌은 신경 안 썼다. 
이명헌한테 홀린 놈들은 으레 날카롭게 찢긴 마음을 돌려받으면서도 이명헌이 처연하게 지어주는 미안하다는 말에 울지도 못하고 알았다 하고 지가 마음 접었다. 그러면 뒷말이 나오다가도 본인들이 그런 거 아니라고 알아서 해명까지 해주니 금방 사그라든다. 

실은, 이명헌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 내가 좋아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지들이 나 좋다고 매달린 건데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해? 
그렇다고 저 좋다는 애들이 수줍게 건네는 호의를 쳐내지는 않았다.
뻔히 알면서도. 
그러다 선을 넘는 순간, 잔인하게 거절할 거면서도. 

만약 이명헌과 같은 대학으로 진학한 사람이 이명헌의 헛소리 한정으로 참지 않는 김낙수나, 세심하고 진중한 구석이 있는 신현철이었으면 그런 그를 말리고 충고를 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명헌이 대학 내내 자의반타의반으로 붙어다닌 최동오는 외모와는 달리 무른 구석이 있는 데다 자기 연애사업을 관리하기에도 바빠 이명헌을 말릴 여력이 없었다. 함께 붙어다닌 정대만은 이명헌과는 달리 무자각 상태긴 했으나 만만치 않은 유죄인간이어서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단을 냈다. 
요즘 말로, 업보를 아주 차곡차곡 잘도 쌓았다. 

서른 한 살의 이명헌은 십여년 전의 철없던 자신을 생각하며 좋아하지도 않고 잘 마시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미친 놈, 그때 정신차렸어야지-


바에서도 가장 어둡고 구석진 자리에 틀어박힌 명헌의 시선이, 가게 정 중앙의 밝은 테이블에서 상대와 얘기를 나누는 남자에게로 향한다. 
왁스로 올린 머리, 한쪽 귀의 이어커프와 반짝이는 시계, 화려한 셔츠와 그 밑으로 설핏 보이는 보기 좋은 적당한 근육까지. 

이명헌은 권준호의 저런 모습이 지독하게 낯설었고, 짙은 눈썹이나 단정한 얼굴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끔찍하게도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명헌의 생각과는 별개로 앞에 앉은 상대는 좋아 죽으려는 게 훤히 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게이나 바이가 주로 모이는 곳에서 저만한 피지컬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헌 자신은 물론이고 권준호보다도 더 작고 마르고, 척봐도 선이 얇은 날티나는 미형의 남자와 하하호호 얘기를 나누는(정확히는 끈적한 스킨십을 동반한) 권준호를 보며 이명헌은 목이 타서 한 차례 더, 술을 들이켰다. 


내가 쟤를, 저렇게 만든 걸까. 
 

***




이명헌은 권준호가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라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 더 넓고 좋은 무대에 멋지게 입성한 이명헌에게는 자극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자극적인 것들 사이의 권준호는 뭐랄까, 영 재미없고 심심했다. 
속이 훤히 보였고, 정직하고 강직했으며, 천성이 다정했다. 

그런 건, 이명헌에게 그닥 구미 당기지 않았다. 
그게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정대만을 보러왔다며 단정하다 못해 수수한 차림새로 조심스레 이명헌에게 말을 걸었던 권준호를, 이명헌은 아직도 기억한다. 
자신은 제대로 기억이 안났는데 권준호는 눈이 토끼같이 동그래지며 이명헌을 알아보고 산왕의 이명헌 선수 맞냐고 물었거든. 
실은 그런 식으로 말붙이는 사람이 하도 많았어서 반쯤은 귀찮고 반쯤은 얜 또 어디서 봤을까 상투적인 궁금증이 들던 끝에 정대만이 나와서 권준호를 반겼다. 
친화력이 좋은 정대만이지만 유난히 반가워하며 신나하길래 들어보니 북산에서 같이 농구부를 했었다고. 
아 그래, 안경 낀 선수가 있긴 했지.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 첫 만남 아닌 첫 만남을 계기로, 그들은 제법 많이 마주쳤다. 정대만은 사람을 좋아했고, 특히 북산의 친구나 후배들을 매우 아꼈으며, 걔들 중 대학농구로 진출해 훈련하느라 바쁜 채치수나 아직 미성년자인 후배들, 대학 대신 취업을 택한 그의 다른 친구들과 달리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권준호를 뻔질 k대 근처로 불러냈다.
낯가림이라곤 없는 최동오는 권준호랑 금방 친해졌다. 이명헌만 시큰둥하게 굴었다. 

그러다, 듣자하니 인간관계도 좋고, 의대라 아무리 1학년이라지만 공부할 것도 있을 테고, 근데도 정대만이 부르기만 하면 오는 권준호가 신기하다고 문득 생각하다가, 자신을 향해있는 권준호 시선을 알아차렸다. 

아, 이거였어?

약간은 흥미가 당겼고, 동시에 맥이 빠졌다.
정대만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엘리트 모범생도 실은 별거 없네, 그냥 그 정도 생각이 들어서. 

이명헌은 그냥 궁금했다.
얘가 날 얼마나 좋아하나, 어디까지 받아줄까.

이명헌 딴에, 선을 넘지 않는 수준으로 툭툭 흘려봤다. 그러니까 의식하면 어라 싶은데, 그냥 보면 친구 사이에도 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좀 더 친근하게 인사도 받아주고 먼저 시덥잖은 카.톡도 보내보고.
뭐가 먹고 싶다, 뭘 해보고 싶다, 뭘 가지고 싶다. 안경 너머로 눈이 반짝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먹으러 가자고, 함께 해보자고 조심스레 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예상보다 재밌는 일이었다. 
계속 지켜봤다. 권준호는 정석적인 사람이라 아주 천천히 자기 마음을 조금씩 더 이명헌에게 주었다. 
한번은 이명헌이 가벼운 감기에 걸렸는데 그 소식을 듣고는 폭우가 내리던 와중에도 아침부터 그들의 자취방을 찾아 죽과 약을 사다주고 돌아갔다. 

그게 좋아서, 이명헌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쟤는 내 선 안에 들어오면 안되는데. 
권준호는 자극적이지 않았고, 흥미롭지도 않았다.

이명헌의 판단은 그랬고, 그의 판단은 대체로 다 맞았으니까, 이번에도 맞아야 했다. 

그래서 이명헌은 선을 다시 긋기로 결정했다. 아주 선명한 선을. 

간만에 술을 제법 많이 마신 날이었다. 정확히는 술이 쎈 최동오랑, 술 마셔도 상관 없는 권준호만. 정대만이나 이명헌은 가볍게 즐긴 정도였는데 둘이 뭐 맛있는 술이 있다고 좋아하더니, 안되겠다고 숙취해소제를 사오겠다며 최동오는 창백한 얼굴로 나갔고 권준호는 잠깐만 자야겠다며 누워버렸다. 

권준호 눈만 감고 있고 안 자는 거 알면서도, 이명헌은 괜히 정대만 붙잡고 말했었다. 

'준호같은 사람은 연애할 때 재미없겠다뿅.'
'...갑자기?'
'그냥 그렇지않냐뿅. 권준호는 좀...자극적이지가 않잖아뿅. 너무 지루하지.'
'...야 그래도 준호 착해. 저런 애 흔치 않아.'
'착하기만 하면 뭐하냐뿅. 멀쩡하게 생겼는데 꾸밀 줄도 모르고... 그리고 권준호같은 애들이 딱 그렇잖아뿅.'
'...뭐.'
'흠, 상대가 조금만 호의가지고 잘해줘도 혼자 착각하는 타입이다뿅. 내가 여자면 권준호는 안만나지뿅. 부담스럽잖아. 나는 호의인데 자꾸 들이대면 싫지 않겠냐뿅.'
'야아, 이명헌, 너 말이 좀 심하다. 그만해.'
'...뭐야 정대만. 네가 왜 정색을 하는건데뿅?'
'뭐야, 니네 뭐야? 왜 그래? 준호는 자냐?'

때마침 들어온 최동오가 아니었다면 그때 정대만한테 한 대 맞았을 터였다. 

이명헌은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권준호는 그때, 정말 진심이었던 거다.
그 전 주인가에 정대만 붙잡고 자기가 게이인 것 같다고, 이명헌을 좋아한다고, 너밖에 말할 사람이 없다고 너무 무섭고 미안한데 근데 걔가 좋다고. 그 단정한 권준호가. 펑펑 울면서 겨우 털어놓길래, 정대만이 그걸 겨우 달래서 아니라고 이명헌 괜찮은 애라고, 남자한테 고백받은 적도 있고 한데 괜찮았다고, 그리고 걔도 너 좋게 본다고. 그랬단다. 

그걸 몰라서.
걔 마음도 몰랐고,
이명헌은 자기 마음도 몰랐어서.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는데, 말을 하다보니 더 더 잔인하게 해버렸다.
그냥, 적당히 에둘러서 말만 했어도 되는데. 
안 해도 될 말들까지.  

실은,
권준호가 평소 이명헌을 만나러 올 때면 엄청 신경 많이 써서 꾸미고 오는 것도 알았고, 
그렇게 꾸며서 온 그 나잇대 같이 풋풋한 옷차림새도 마음에 들었고, 
다정하게 챙겨주고 사근하게 말 붙여오는 것도 좋았고, 
괜한 허세나 가오 없이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인 것도 괜찮았는데.

술기운에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순순히 사과하자 정대만은 아직 누워있는 권준호 흘깃 보고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사과를 그냥 받아줬다. 권준호가 잔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거다. 

당장 바뀐 건 없었다. 분명 그 말들을 다 들었을 텐데.
그런데, 지나고 보니 조금씩 권준호가 일상에서 빠져있었다. 

학기 말이어서 바쁘다는 핑계로 시작했다가,
가족들과 여행을 간다고 했다가,
몸이 아프다고 했다가,
그렇게 오는 횟수가 줄고 연락이 줄고 문득 만난 지 3달이 넘었음을 깨달은 이명헌은 자기도 모르게 정대만에게 물었다. 권준호는 요즘 왜 안 오냐고. 정대만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걔 요즘 공부하느라 엄청 바빠. 작년에야 걔가 굳이 시간 내서 우리 보러 와준거지. 걔가 맘 안 먹으면 보기 힘들걸 이제. 

이상하게 헛헛했다. 그렇구나, 하면서도 그럼 작년에는 시간 내서 와줬는데 지금은 왜 안 오는데?
답을 알면서도 자꾸만 속으로 되물었다. 

그 뒤로 이명헌은 권준호를 보지 못했다.
이제는 정대만이 시간을 내어 권준호를 보러 갔는데, 이명헌은 거기에 끼기엔 또 사이가 애매했어서. 
서너번 정대만의 경기를 보러 온 권준호를 만난 적은 있는데 금방 돌아가버려서 제대로 말을 할 시기가 없었다. 
허전했다. 크진 않았고, 금방 다른 자극들로 채워질 허전함이었지만.




그러니까 이게, 권준호랑 이명헌의 망한 첫사랑 이야기다.
정확히는, 이명헌이 망친 서로의 첫사랑 이야기. 

이명헌은 그 사실을, 좀 더 시간이 흘러서 깨달았다. 
몇 차례의 연애를 거치면서 자꾸만 그 재미없고 지루하던 권준호를 애인에게 겹쳐보는 경험을 한 뒤에야.
아픈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애인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다 자신도 모르게 권준호는 안 그랬는데- 떠올린 후에야. 

어른이 되어가며 성격을 많이 죽이고, 철이 든 후에야,
이명헌은 알게 되었다.
 





 








아 왤케 길어졌지
아무튼 이렇게 자기도 지 맘 모르고 어려서 성격 좀 고약했던 이명헌...권준호한테 업보스택 쌓았는데 나중에 철들고 게이바에서 우연히 만나는거...
근데 안경도 안 쓰고 개까리하게 꾸미고 자기가 말했던 거랑 정반대로 놀고 있는 권준호 보면서 당황해하는 이명헌...
근데 또 그러고 그 다음날 낮에 약속 잡고 만나는데 자기가 알던 그 단정한 권준호여서 그대로 속절없이 다시 사랑에 깊이 빠져버리면 좋겠다

막상....권준호는 그 때 그 마음아픈 풋풋한 첫사랑 이후로 명헌이 말이 계속 신경쓰여서.... 그렇게 안 되려고 하다보니 어른이 되어서는 자극적이고 꾸밀 줄도 알고 진중한 호감보단 적당히 서로 즐기면서 연애하고 마는, 그런 사람이 됐는데...
이제는 이명헌이 취향도 아니고 그냥 약간 아련한 정도?의 친구로만 느껴지는데...

이명헌은 이제와서야 업보 청산하고 권준호 쟁취해야하는 상황이 된 거 그런 게 보고 싶었음


준호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