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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4 18:00
태웅백호


여긴 호열이가 태웅이에게 전해줌.

ㅡ 이거 백호 일기장. 거의 가계부 수준이니까 그냥 그런줄 알고 이젠 네가 받아라.

아무 말 없이 받아든 수 권의 노트는 인근 상점가나 은행에서 매년 나눠주는 흔한 다이어리였음.
개중 제일 낡고 손때묻은, 표지의 연도가 가장 오래된 걸 펼쳐봄.

[콩나물 20엔 두부 30엔]
[내일 쌀 사기]
[쌀 1500엔 쌀은 항상 비싸다. 하지만 안 살 수도 없고]
[노트 50엔 연필 50엔 아빠 셔츠 2000엔]

쭉 넘기다 두세 권쯤 지났을 때 태웅의 시선이 머문 곳

[케이크 2000엔. 엄마, 생일 축하해. 거기 안 춥지?]
[꽃 1000엔. 꽃은 되게 비싸다. 엄마 아들 중학생 된대]

그렇게 페이지가 더 넘어가는데 어느 순간 글자가 종이를 찢도록 새겨져 있음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엄마 나 어떡해 아빠 눈떠봐 엄마 나 좀 도와줘 엄마 아빠 제발]

거기까지 읽은 태웅이는 나머지 메모는 읽지 못한 채 탁 덮어 버리곤 바로 백호한테 전화를 걸었음

ㅡ 어?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ㅡ 강백호.

저녁 늦은 시간이라 살짝 어리둥절한 백호의 목소리 위로 태웅의 목소리가 얹혀들어옴

ㅡ 난 절대 너 외롭게 안 해, 너 두고 아무 데도 안 가.
ㅡ 어? 뭐?
ㅡ 미국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매일 연락할게. 아니, 매 시간 연락할게.
ㅡ ..너 뭐 잘못 먹었냐?
ㅡ 사랑해.
ㅡ 아니 진짜 얘 왜이래... 서태웅, 괜찮아?
ㅡ 사랑한다고.
ㅡ 어, 그래. 나도 알지. 고맙다아...

그 시각 반대로 태웅의 일기장을 받아 읽고 있던 백호

[러닝 5키로, 슛 200개]
[선배와 1on1]
[북산 진학 결정]

이런 것만 적혀 있는 일기장같지 않은 일기장에 어느 순간 스며든 건.

[강백호.]
[강백호의 플레이는 거칠지만 강력하다]
[파워로 밀린 건 오랜만이다. 바보자식 힘 하나는 인정]
[강백호, 강백호, 강백호, 강백호, 강백호]
[멍청이가 울었다. 내가 잘못한 건데. 자기가 운다.]

쭉 나오는 자기 이름에 얼굴이 터질 만큼 과열돼 있던 순간.
산왕전이 있었던 날의 날짜 뒤로 이어지는 글.

[돌아와. 기다린다. 넌 할 수 있어.]
[너 없는 농구는 재미 없다. 나한테 그런 짜릿한 걸 보여 주고 왜 안 돌아오는데]
[건강해 보여 다행이다]
[다시 같이 뛰고 싶다]
[사랑한다]

이렇게 적혀 있어서 새 집으로 보낼 이삿짐 싸던 백호 잠깐 울컥해서 울며 웃었을 듯




현준수겸


이미 다 까고 산 사이라 딱히 결혼이고 뭐고 그냥 지금이랑 별 차이 없는 상황이고 바뀐건 그냥 서류제출 완료했단 정도?
오히려 이게 뭐야 우리 결혼한 거 맞아? 나도 몰라. 서류에 그게 맞다니까 맞겠지. 결혼 되게 쉬운거네 이러고있음.

그러다 나름 신혼 첫날(이지만 사고는 이미 애저녁에 쳐 둠) 수겸이 방에서 아무 생각 없이 씻고 온다는 수겸이 기다리며 책장 뒤적이던 현준이 발견한 김수겸 일기장.

이성은 읽으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또 궁금증에 못이겨 펼쳐보는데.

[내일 할 일. 4시반 기상. 트레이닝 스케줄 점검. 5시 러닝. 6시 등교. 부원들 커리큘럼 작성. 7시 아침훈련. 4시 오후훈련. 6시 x x와 개인면담. 8시 전술분석. 10시 개인훈련]
[내일 할 일. 4시 기상. 트레이닝 및 스케줄 점검. 4시반 러닝. 6시 등교. 부원들 커리큘럼 작성. 7시 아침훈련. 3시반 오후훈련(성현준에게 전임) 연습시합 스케줄 조정차 외근 및 상대팀 전력파악. 7시 상대팀 최근 경기 비디오 판독. 10시반 개인훈련]

이건 일기장이라기보다는 그냥 스케줄러 수준인 빼곡한 수겸의 노트.
읽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걸 매일 했구나 새삼 느끼며 종잇장을 넘기는데.

[어쩌지. ㅇㅇ가 그만두고 싶단다. 내 방식이 너무 거칠었나]
[x x가 오늘 아침 러닝 중 토했다. 키로 수를 줄여야 하나. 아니면 속도 조절을 할까. 그런데 그걸로 운동이 되나. 어떡할까]

이런 고민 가득한 메모들을 읽으며 하... 하고 한숨 쉬며 넘긴 종잇장에는.

[아파. 힘들다. 병원에서 미쳤냐 소릴 또 들었다. 그래 나 미쳤다]
[신경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신경안정제 부작용으로 온 몸이 뼛속부터 가렵고, 수면제 때문에 입이 쓰고 마른다]
[살기싫다힘들다짜증난다피곤하다다때려치고죽고싶다]
[아니야 김수겸 정신차리자 너 괜찮다 아직은 버틸 기운 있다 정신차리자 살아라 버텨라 고작 이걸로 무너지지 마라]

이거 보고 노트 탁 덮은 현준이 밖으로 나가서 막 씻고 나와 머리말리던 수겸이 덥석 끌어안음

ㅡ 어엉? 야, 놔! 아 귀찮게 또 왜 이래! 저리 안 떨어질래?!
ㅡ 감독님, 고생 많다.
ㅡ 엉?
ㅡ 이제 내가 같이 해 줄게.
ㅡ 아 너 진짜 오늘 뭔 일 있어? 징그럽게 자꾸 왜 이러지?

이러면서도 싫지 않다는 듯 제 품에 폭 안기는 수겸이 보고 웃으며 마주 안아주는 현준이.




태섭대만


여긴 교제사실 아는 순간 일단 양가 부모님들부터 아이고 감사합니다 수준이라...
일기장이 뭐야 육아일기까지 이미 부모님들끼리 돌려보셨을 듯.

ㅡ 어머, 대만이는 태어날 땐 꽤 작았네요~
ㅡ 송군은 의외로 크게 났네요?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몸이 딴딴한가?

부모님들 이러고 계시고, 자연스레 살림 합치게 된 때
이삿짐 속에서 대놓고 큰 글자로 다.이.어.리. 뽝 박힌 노트 발견한 태섭이
어라 정대만 성격에 저런 걸 써? 하고 슬그머니 펼쳐 보는데

[농구는 정말 재미있다. 언젠가 꼭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
[오늘 @@팀 경기를 보고 왔다. 흉내를 내 봤는데 잘 안 된다. 연습해야겠다]

이런 귀여운 얘기들 잔뜩이라 실실 웃던 태섭이

[중학 MVP란 말 이젠 지겹다. 난 그냥 정대만인데 왜 아무도 내 이름을 안 불러 주지?]
[무리했단다. 무릎이 망가졌다. 목발 없이는 걸을 수도 없다.]

여기서부터 슬슬 어두워지는 태섭의 표정

[지나가다 코트에서 뛰는 애들을 봤다. 나도 뛰고 싶다]
[완치랬는데 왜 계속 아프지. 아파. 아파. 아프다고!]
[난 못 뛰는데 왜 너희들은 잘만 뛸 수 있으면서 그따위로 플레이를 하냐. 그럴 거면 그 몸 나 줘]

쭉 이런 식이라 태섭이 그저 한숨만 쉬고 있는데 어느 순간 기록이 딱 끊김
뭐지 하고 쭉 넘겨보니 몇 년간의 공백 뒤 극히 최근 날짜로 커다랗게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한 마디

[행복하다!!!]

저게 자신이 프로포즈한 날 쓴 글이라 태섭이 이제야 겨우 웃을듯

그리고 대만이는 형 미안해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형 대신 내가 살아남아서 미안해 하는 사죄의 글 줄창 읽고 숨도 못 쉬고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눈부신 사람을 만났다]
[또 보고 싶다]
[형, 이러라고 나한테 기회 준 거야? 이 사람 살리라고? 이 사람 잡으라고?]
[나 오늘 고백하러 간다. 형 나 좀 도와 줘]
[형 덕분이다. 나 진짜 잘 살게. 형 고마워. 정대만 사랑한다]

이런 거 적힌 태섭이 일기장 보고 오열터져서 저기 딴방에서 짐 정리하던 태섭이 혼비백산해서 뛰어와 정대만 달래주자




슬램덩크 태웅백호 루하나 현준수겸 하나후지 태섭대만 료미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