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hygall.com/523418098



전투는 귀비의 예상보다는 어렵고, 황실군의 걱정보다는 쉬웠다. 우리군이 불안정한 지반을 밟거나 방향을 헤매는 것 같으면 마치다는 지체 없이 화살을 쏘아 바른 길을 알려주었다. 귀비마마를 지키러 따라온 호위병들은 화살을 쏘는 족족 정확한 지점에 가 맞는 신궁 솜씨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타카노 장군조차 놀란 눈을 치켜 떴다. 


미끼가 된 병사들이 벼랑에서 줄을 타고 낙하하기 시작할 때는 정상에서 지켜보던 무리들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 마치다는 이때가 가장 긴장되었는데, 우리군이 용감하게 뛰어내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매듭을 푸는 낙법은 처음이라 몸에 익기까지는 퍽 위태로웠다. 매듭을 제대로 풀지 못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병사들이 있는가 하면, 애초에 매듭의 폭을 잘못 정하여서 한번에 너무 많이 낙하한 병사들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스스로 매듭을 해결하지 못하면 구조를 기다리다 얼어 죽을 운명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미 뼈를 다치는 부상을 입지는 않았을까 우려되었다. 


"저런. 너무 과격한 작전이었을까."
"마마의 책략은 훌륭하였습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타카노 장군이 즉시 위로하였다. 의외였다. 과묵하고 감정표현이랄 것이 거의 없던 타카노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더한다. 익히 알고있던 인물과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다는 줄곧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낙하작전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타카노를 바라보았다. 황제와 귀비가 그를 자신들의 인물로 낙점하였다는 사실을 눈치챘을까? 하여 적극적으로 줄서기라도 시작하였나? 아부의 소리인지, 진실의 소리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차차 알게 되리라. 


"..고맙네, 타카노 장군."


바짝 추격해오던 동란군은 가파른 절벽만 남기고 황실군이 사라지자 처음에는 의아해 하였다. 바른 길목 마다 붉은 표식이 남겨져 있는 점을 수상하게 여긴 눈치빠른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결국 오합지졸이었다. 그들은 황실군이 추락하여 전멸하였다고 판단하고는 함성을 내질렀다. 매복해 있던 우리군은 그 함성소리를 신호삼아 동란군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혼비백산한 그들을 일거에 진압하였다. 



생존한 동란군을 모두 포박했다. 그 중 가장 입이 싸보이는 자에게 근거지를 토설하게 하였다. 원래는 하산하여 추국장에 끌고 가 심문할 내용이나, 산중에서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백사가 아직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가 지기 전 그 자를 찾아내지 못하면 영영 놓칠 수도 있었다.


이때부터가 진정한 고비의 시작이었다. 근거지를 색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백사였다. 그는 쥐새끼처럼 황실군을 따돌리고 도망쳤다. 잔머리는 또 얼마나 좋은지, 황실군이 붉은 표식이 달린 길만 밟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표식이 없는 길로 달아났다. 표식이 없는 길은 위험천만하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 알 것이다. 그럼에도 궁지에 몰리자 그런 길만 골라 탔다. 지리에 어두운 황실군은 귀비마마께 의지하던 안전장치를 포기하고 온 미오산을 뒤지고 다녀야 하는 위기에 봉착했다. 


전투를 치를 때보다 피해가 급증했다. 정상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이 사태를 지켜보던 호위대는 동료들을 죽음에 눈물을 훔쳤다. 병사들의 반응은 귀비의 심리적 부담감을 부추겼다. 백사를 세 번째 놓쳤을 때부터는, 마치다는 응원이나 걱정도 잊고 멍하게 추격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시야가 침침해진 것을 느꼈다. 해가 기우는 서녘을 올려다 보았다. 해가 지면 우리군의 피해는 말도 못하게 커지고 끝내 백사는 붙잡지 못하리라. 


'지휘관이 정신을 놓고 있으면 피를 보는 건 발로 뛰는 병사들이다.'


크게 반성하고는 화살을 꺼내들었다.


"해가 지고 있네. 이대로는 놓쳐버리고 말 거야. 타카노 장군!"
"예, 마마!"
"백사가 나타나면 알려주게."


마치다는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는 백사가 돌아다닌 족적으로부터 그 자의 다음 도주로를 예상했다. 시야가 살짝 어둑해졌지만, 모습을 나타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쏜다! 마치다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마마, 나타났습니다! 백사입니다!"


타카노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살이 쏜살같이 날라들어 백사의 어깨를 꿰뚫었다. 멀리서도 백사의 몸에서 튀는 피를 볼 수 있었다. 저 정도면 치명상은 피해갔지만 걸음을 둔하게 할 정도의 부상은 입었을 것이다. 


"가자! 어느 방향으로 도망칠지 알 것 같으니."


타카노 장군과 병사들은 귀비마마를 따라 신속히 움직였다. 하산은 등산보다 훨씬 어려웠다. 정오보다 발밑이 어두워 한 발짝 한 발짝이 외줄타기 같았다. 병사들은 아이가 어머니를 따르듯 그때그때 마다 일러주는 귀비마마의 주의를 새겨들으며 가파른 산길을 집중하여 탔다. 


"마마! 폐하께서는 귀비마마의 신변의 안전을 가장 우선하십니다. 이리 서두르시다가 발이 미끄러지기라도 하시면..."
"지금 넘어지는 것이 대수인가, 장군!"
"백사도 부상을 당했으니 멀리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천천히 가셔도.."
"백사는 어깨를 맞았네. 다리가 아닐세!"


정신없이 휘몰아친 추격전이었다. 앞장서는 자 따로, 말리는 자 따로, 뒤따르는 자 따로인 산만한 추격전. 그럼에도 하늘이 돕는지 피 흘리며 도망치는 백사의 등짝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앗, 백사가 보인다! 가서 붙잡아라!"
"조심! 이 근방은 모두 절벽이니 모두 조심하라!"


타카노 장군의 명령에 득달같이 앞서나가는 병사들에게 마치다는 미친듯이 소리질렀다. 함부로 달렸다간 목숨이 달아날 협곡이거늘! 그리고서 그 순간, 타카노의 우려대로, 발을 헛디뎌 마치다 자신도 벼랑으로 미끄러질 뻔 하였다. 다행히 타카노 장군이 굳세게 붙잡아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마치다는 바닥에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맙네.."
"존체는 무사하십니까?"
"나는 괜찮네."


발목이 시큰거렸으나 큰 부상은 아니어서 말하지 않았다. 쑤시는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발목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있더니 걸음이 절뚝거렸다. 마치다는 저도 모르게 타카노 장군의 눈치를 보았다. 타카노는 귀찮게 말리지 않았다. 백사를 붙잡고자 하는 귀비마마의 강인한 의지를 이해하고는 얼른 부축하기만 하였다.


"백사를 포위하였습니다, 마마."
"가세."


백사는 촘촘하게 둘러싸인 창 끝에 무력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새하얀 가면은 아직도 벗지 않은 채였다. 동란군의 증언에 따르면 백사는 저 가면을 절대 벗지 않는단다. 심지어 실명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참으로 수수께기 같은 사내였다. 덕분에 공포감과 위엄이 살긴 하였다. 특히 북부인의 눈에는 그야말로 노채신의 현현과도 같은 모습이다. 하필 어깨에서 튄 핏방울이 가면에 묻어 더 섬뜩하다. 이처럼 포위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마치다는 몸이 얼어 눈 앞에서 그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저 자를 포박하라."
"나를 묶어 어찌할 셈이냐."


걸걸하고 쉰 목소리가 가면 사이로 으스스하게 새어나왔다. 목소리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나이가 좀 있는 자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다던 증언도 일치하는 듯 했다. 


"네 놈은 역심을 품고 모반을 일으켜 나라를 혼란하게 하였다. 또 어지러운 민심을 선동해 소박하게 살아가려고 한 가엾은 백성들을 역적으로 만들었다. 대역부도한 짓거리를 일삼은 죄인에게 내려줄 자비는 없다. 네 놈은 참형을 당하고 그 머리만 본보기로 저잣거리에 전시될 것이다. 그리고 역적의 가문은 3대를 멸할 것이니 네 자식과 손주까지도 무사치는 못할 것이다!"


위엄 서린 호령이었다. 병사들은 귀비마마의 위엄에 힘입어 더 날카롭게 창끝을 겨누었다. 


그러나 실은, 마치다는 노채신의 모습을 한 백사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속내를 숨기고자 더 위엄을 과시하였는데, 어쩐지 이 백사라는 자는 귀비의 속내를 간파하기라도 한 듯 웃기 시작하였다.


"무엄하다! 감히 어느 안전인 줄 알고 방종한 웃음소리를 내느냐!"


타카노가 검을 뽑아들고는 백사를 위협했다. 그러나 백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안전이냐고? 크하핫! 천하를 호령하는 제국의 귀비 안전 아닌가? 매일 밤마다 황제에게 온갖 요사스러운 희롱을 당하고 있다지. 북부 출신의 왕자에서 가련한 노리개로 전락한 불쌍한 자니라."


마치다는 뒷걸음질 치며 옷깃을 추스렸다. 누구인가. 누구이길래 이처럼 상세히 알고 있는가. 설마 귀비의 신세는 서북의 변방에서도 소문이 파다할 만큼 온 세상이 다 아는 우스갯거리가 되어 있단 말인가!


"..정체가 무엇이냐."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를 해방하여라.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귀비에 대한 소문이 벌써 백성들의 귀에도 들어갔느냐?"
"소문이 궁에만 갇혀 있을 리가. 귀가 뚫려 있으면 소문은 바람결에 떠돌며 들리게 마련이니."


'소문이 바람결에 떠돈다.' 익숙한 풍의 말이다. 풍류에 익숙한 북부 왕족의 언어습관... 온몸의 피가 멎는 듯 했다. 마치다는 주춤거리며 그 자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서는 아주 작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누구냐. 대답해."
"그만 두어라."
"크윽!"


가면을 잡았다. 벗겨야 하는데, 그러기가 두렵다. 마치다는 가면을 잡고 한참을 망설였다. 병사들은 갑자기 이상해진 귀비마마를 이상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벗길테냐."
"...."
"후회할텐데."
"어차피 추국장에 가면 속옷까지 벗겨지게 되어 있어."
"추국장에 가는 대신 나를 풀어주면 벗기지 않아도 될 텐데."
"턱도 없는 소리!"


어디서 도망칠 궁리를! 감히 황실군의 지휘관이자 제국의 귀비인 자신을 구슬려 도망을 계획하다니! 너무나도 괘씸했다. 마치다는 멈칫한 손을 다시 움직여 과감하게 가면을 벗겼다. 드디어 백사의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리고, 마치다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케이타.."
"아바마마."


병사들이 몹시 놀라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후회할 거라고 내 분명 경고하지 않았느냐."
"어찌... 분명 서북민들이 대거 동원된 동란이라고..."
"서북의 왕족을 꼬드겨 난을 일으켰으니까."









*
*

그가 왕으로 옹립되었을 당시, 북국은 국력이 쇠할대로 쇠해 있었다. 왕에게도 한때는 나라를 부강하게 이끌어 보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전망은 어두워졌다. 북국엔 장래를 촉망받는 유일하다시피 한 인재가 있었다. 그의 아들, 케이타 왕자.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다섯살배기 아기 때부터 외모가 출중하고 영특하기로 소문나, 대신들과 백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컸다. 왕도 아들 사랑 하나는 끔찍했다.


왕자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왕은 위기감을 느꼈다. 아들을 너무 사랑했지만 동시에 미워하고 멀리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왕자가 장성하고부터는 일부러 여러 나라에 유학을 보내어 아예 국내에 머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 왕자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왕은 반갑게 아들을 맞았지만 그리움의 해갈은 잠시뿐이었다. 훌륭하게 내실을 닦은 왕자는 왕의 눈에도 준비된 제왕으로 보였다. 왕이 느끼는 기분은 더는 위기감이 아니었다. 위협이었다.


아들을 경쟁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애썼다. 그러나 케이타 왕자는 명실상부 왕의 경쟁자가 되어 있었다. 이길 수 없는 경쟁자는 찍어내야 하는 법. 왕은 아들을 추락시키려고 갖은 수를 썼다. 허나 올곧은 왕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미워도 피붙이를 죽일 수는 없다. 하여 왕의 분노는 백성들에게 굴절되었다. 미련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왕이어도 날 때부터 왕도의 길을 걸어온 자로서 한 가지는 확신한다. 케이타가 왕좌를 물려받더라도 절대 북국이 다시 일어서는 일은 없다. 이 나라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백성들의 살림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국이고, 군대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제국의 침략도 머지않았다. 그런데 멍청한 백성들은 왕자가 나라를 물려받으면 갑자기 태평성세가 이루어질 줄 안다. 절대 그럴 일은 없거늘! 어째서 백성들은 왕자는 과대평가하고, 왕은 과소평가하는가. 쳐죽일 것들...! 하등 쓸모없는 것들! 버러지들!


왕자가 음인으로 발현하던 날, 왕은 평생 이 순간만 기다린 사람처럼 왕자의 모든 것을 구속했다. 행동거지도, 배우고자 하는 학문도, 외출반경도 엄히 제한했다. 억울함을 호소한 왕자는 가출까지 감행하며 반항을 일삼았다. 그러나 바르게 자란 버릇은 어쩔 수 없는지 이내 얌전하게 음인으로서의 수업을 받았다. 백성들은 천천히 왕자를 잊었다. 왕자로서 수행하던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으니 백성들의 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눈에서 멀어지니 자연스레 마음도 멀어졌다. 왕좌까지 위협할 만큼 인기를 구가하던 왕자는 한때의 반짝거림으로 남았다. 왕은 다시 왕자를 아끼고 사랑했다. 나름 진심이었다.

*
*








아비의 사랑을 의심한 적은 없다. 다만 존경할 만한 아비는 아니라 여겼다. 그리 생각한다는 사실이 아들로서 죄송스럽고 민망했다. 세상천지의 어떤 아들이 아버지를 무시하고 마음 편할 수 있으랴. 그러나 지금은, 무시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욕지거리를 입에 다 담아도 모자랄 만큼 비난을 퍼붓고 싶었다. 


"그래서 백사였던 것인가."


이상하다 생각하긴 하였다. 동란은 서북민이 일으켰는데 어째서 주동한 자는 북부의 대표적인 공포의 상징을 제 이름으로 차용하였을까. 과연, 그의 정체가 북부의 왕이라면 자연스러웠다. 그 와중에 북부민 대신 서북민을 동원한 까닭은 대체 무엇인지. 그래도 왕이라고 희생은 남의 백성들을 시키고, 자기 팔 안으로 굽은 백성은 지켜야겠다는 비겁한 책임감이었을까.


"서북왕이 이 제안을 수락하였단 말입니까. 실패하면 자신의 백성들이 죽어나갈 이 허술한 동란에 가담하겠다고, 그리하더이까."
"말은 바로 해야지. 그들이 나에게 가담한 게 아니다! 불씨를 제공한 자는 나지만, 불길을 일으켜 전의를 불태운 자는 서북 왕이다. 서북왕은 백사의 얼굴 조차 몰라. 그럼에도 분기탱천하여 동란을 일으켰으니 진짜 주동자는 서북 왕이 아니겠느냐."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마치다는 남 듣기 부끄러운 수준낮은 궤변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아비가 부끄럽고 통한스러웠다. 화를 견딜 수 없어 바닥을 힘껏 치자 손바닥이 찢겨나갔다. 


"제발 변명은 그만두십시오! 백사가 주동자라는 건 명명백백하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금 꼬리자르기를 시도하려는 겁니까!"


생각을 바꿨다. 비겁하게나마 왕으로서 책임감을 가졌는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북부 왕에게 백성은 지켜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소자가 아버님이 역적이라는 사실을 친절히 논설해드리지요. 반역을 일으킬 당시에는 성패 여부가 불투명했을 겁니다. 보나마나 실패할 모반이었겠으나, 어리석은 자가 일을 도모할 땐 과도한 자신감을 가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버님은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였을 겁니다. 성공할 때와 실패할 때."
"...."
"동란이 성공하면, 아버님은 그때 정체를 밝힐 작정이셨겠지요. 이득이 확실히 보장될 때 서북 왕과 전공을 나눠 가지려고요. 그렇게 잇속을 챙겨 자신의 나라를 세우면, 나라를 채울 재료가 필요할 터. 이를 위해 남겨둔 것이 북부 백성들입니다. 소자의 말이 틀렸습니까?"


서북 지역의 마을을 정처없이 떠돌고 있던 시로가 떠오른다. 그 아이는 왕자 저하가 제국의 귀비가 되어 북부를 배신하고 저 혼자 배불리 먹고사는 줄 안다. 필시 북부 왕이 감언이설로 선동하는 것을 어른들 어깨 너머로 듣고, 제국의 발길질에 망가진 나라를 북부 왕이 재건해주리라 믿었으리라. 그리되면 자신의 삶에도 볕이 들 줄만 알고... 


"네 말이 맞다. 반대로, 반역이 실패할 시에는, 서북 왕과 그 백성들만 꼬리자르기를 하면 되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이야.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데 이용을 하지 말란 말이냐. 오히려 그것이 어리석은 자니라."


뻔뻔하다. 뻔뻔하다 못해 저열하기까지 하다. 죄는 불쌍한 백성들에게 전가하고, 주동자인 자신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채 도망칠 예정이었다, 그것을 스스로 당당히 밝히다니! 대저 그 말이 당당하게 나온단 말인가!

 
북부 왕의 밑바닥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본래 동란이 진압되자마자 도망에 성공했어야 계획에 맞으나 붙잡히고 말았다. 헌데 잡히고보니 아들의 손 아닌가. 북부 왕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아들의 권세를 이용해 달아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것이 아들의 인생을 어떻게 망쳐버리는지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한동안 훌륭한 군주를 가까이서 모신 입장으로, 제 아비는 너무나도 소인배였다. 왕으로서 생각하는 꼬락서니가 이리도 치졸할 수가! 노름판 협잡꾼들의 모의도 아니고 이게 무엇인가! 


땅이 꺼질 듯한 절망감이 찾아왔다. 어찌되었든 마치다는 아비를 풀어줄 생각이 없다. 아비를 풀어주면 어리석은 분탕질이 어디선가 또 반복될 테지만, 아비와 함께 잡혀가면 어지러운 동란이 마무리되어 황상의 치세가 잘 펼쳐질 것이다. 여부가 있을까. 다만 애석하게도, 귀비가 절실하게 지키고자 했던 북부는 끝났다... 이제는 일부 가담했느냐 대거 가담했느냐 따위를 논할 수위를 넘어버렸다. 북부의 왕이 반란의 주동자다. 이리 되면 북부민은 죄 지은 자, 아닌 자 가릴 것 없이 몰살이다. 게다가 아비의 죄가 연좌될테니 마치다도 공멸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어진 셈이다. 


‘아... 분명 모든 것이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쉬운 건 하나도 없었지만 좋은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미적지근하게 귀비를 모시던 황실군은 충직한 수복이 되어 미래의 황후를 보필할 예정이었고, 황상의 사랑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비록 고된 싸움이 기다리고 있지만, 제국의 국모 자리도 제대로 책임지고자 세심하게 노력중이었다. 그런데 공들여 쌓은 탑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것도 복원할 수 없는 가루가 되어...


허망하게 미오산의 자갈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모난 자갈에 살갗이 찢겨 피가 흘렀다. 아파야 하는데 아무 감각이 없었다. 오히려 감각이 일어나는 곳은 겉이 아니라 속이었다. 마치다는 텅 비어버린 속에 차오르는 불길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그 기운에 집어삼켜졌다.


"어찌 모반을 계획하셨습니까. 이리 될 것을 정녕 모르셨단 말입니까? 아바마마도, 소자도, 우리 가련한 북부 백성들도 모두 죽게 생겼습니다. 어찌 이러셨습니까! 어찌—!!"


원망하여 따져묻는 소리에 비통함의 날이 서렸다. 그 날로 실제 피부를 베어낼 수 있다면 목에서 피를 백번 토하고도 남을 만큼 날카로웠다. 북부 왕의 충혈된 눈에도 더욱 핏발이 섰다.


"아무리 몰락한 왕국의 왕족이어도 네 출신이 고귀하다. 네가 매일 수치스러운 고문을 당해 기력이 쇠하고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 들었다. 아랫것들에게도 수모를 당하고 산다는데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아비가 어디 있겠느냐!"
"반란의 명분이라는 것이 고작 그것이옵니까!!!" 


우아하기만 하던 귀비의 입에서 짐승같은 울부짖음이 토해져 나온다. 병사들은 숨을 죽이고 귀비의 발악을 지켜보았다. 


"감히 제국에 대질할 머리도 군사력도 없으면서!! 나라를 세우더라도 백성들 고혈 짜내는 무능하고 나태한 왕 말고 무엇이 되시렵니까!! 가만히 땅바닥에 빌붙어 떡고물 받아먹을 기회나 노릴 것이지... 어찌 어리석은 동란으로 소자가 이루어 온 것들을 산산히 부수어버리십니까!!"
"이 가슴에 대못이 박히고 그것이 곪아 썩어문드러졌다. 원한이 뼈에 사무치고 피눈물이 났다. 명예를 지키고 죽든, 복수를 하여 피를 보든,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 가슴의 고통을 호소하는 아비의 목소리가 커지자, 마치다는 더 큰 목소리로 아비의 호소를 찍어눌렀다.


"정녕 그 원한이 소자의 아픔을 통감하는 감정이기는 하옵니까? 망국의 군주이신 아버님 자신의 상처를 말씀하시는 건 아닙니까!"
"뭐라!!"


피붙이로서 정말 가슴이 아프기는 하였던 북부 왕은 아들의 모진 말에 분노했다. 마치다도 움찔하여 잠깐 할말을 잃었으나, 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사사로운 정이 끼어들기에는, 북부 왕은 너무 많은 것을 망가트려 놓았다.


"소자를 생각하시어 저지른 짓거리라 칩시다. 응당 그 수모를 당한 제가 뭐든 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고귀한 왕족 출신으로서 후궁 자리에 앉았으니, 그 동안 무엇 하나라도 좋은 일을 도모했을 것이라고 왜 생각을 못하십니까! 아버님마저 소자를 그저 노리개로 여기셨단 말입니까...?"
"...."
"소자, 이 자리에서 아버님의 마음 속에 든 진실을 꺼내 보여드리지요. 사실 아버님은 귀비가 몸이라도 팔아 백성들을 지키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허나 인정할 수 없었겠지요. 아들이 그런 비참한 처지에 있는 것도,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조차 백성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도. 아버님은 구하지 못한 백성을 아들이 구제하다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아니 되었던 겝니다. 아버님이 반역을 한 진짜 이유요? 다른 게 아닙니다! 지난 날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예전처럼 으스댈 구실을 찾은 것 뿐입니다!"
"네 이놈.. 결코 그렇지 않,"
"아니라고요! 소자에게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셨으면 큰 오산이옵니다! 아버님이 어떤 분인지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참으로 부끄럽고 개탄스럽습니다...!!!"
 

진실을 낱낱이 폭로하는 아들의 발악 앞에서, 북부 왕도 드디어 입을 닫았다. 마치다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 허탈감, 수치심, 분노, 두려움... 눈물을 일으킬 감정은 수도 없었다. 허나 지금의 눈물을 일으킨 건 황상을 향한 미안함이다. 이를 어찌하나... 같이 이 나라를 키우자고 약조하였는데. 곁을 지켜드리겠다고 서약하였는데! 줄줄이 떨어진 눈물이 자갈 바닥을 적셨다. 


이윽고 그는 냉정함을 되찾았다. 아직 지휘관인 마치다가 아무 명령도 없이 시간을 허비하니 병사들도 할일을 못하고 멀뚱히 서있다. 사사로운 이유로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치다는 눈가에서 눈물의 흔적을 모두 훔쳐내었고,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던 신체도 다시 일으켰다. 손에 쥔 백사의 가면은 두동강 내버렸다. 깨끗한 파열음이 산중에 메아리쳤다.


"타카노 장군."
"..예, 마마."


숨막히는 긴장감을 깨고 타카노가 귀비 앞에 목례했다. 


"나는 역적의 아들로 처형될 위기에 있네. 아무리 귀비의 권세를 내세우려 해도, 아무리 황상의 총애에 기대려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었어. 설혹 용서를 받는다 해도 내가 상량할 사안이 아니지..."
"...." 
"나는 지휘관으로서의 자격이 없네. 이제 자네가 지휘관이네."


귀비는 죄인이 포박당하는 자세로 두 손을 올렸다. 찬바람이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타카노는 잠시 망설였으나 곧 명을 받잡았다.


"마마를 포박하겠습니다."










모든 걸 잃게 된 마치다가 느꼈을 분노와 좌절감 이 그림 보고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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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4 01:26
ㅇㅇ
부케비 딱 자기 전이었는데 센세 오셨다ㅠㅠㅠ
[Code: bdff]
2023.02.04 01:42
ㅇㅇ
포박당하는 자세라니ㅠㅠㅠ 죄가 없는데 왜 포박하라고해 포박하라고 하지마ㅠㅠㅠㅠ
[Code: bdff]
2023.02.04 01: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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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케비는 센세가 천재라고 생각해....
[Code: c3f5]
2023.02.04 01: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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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이제 어떡해…
[Code: f76c]
2023.02.04 02: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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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미친 상상못한 반전...부케비는 진짜로 센세가 다시 돌아온게 너무 좋아요ㅠㅠㅠㅠ 아버지랑 핏줄 끊어버리고 노부랑만 살아ㅠㅠㅠㅠㅠㅠ
[Code: 7b84]
2023.02.04 02: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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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 용서를 왜 못받아ㅠㅠㅠㅠ 노부야 느그 케이 지켜주겠다고 했잖아ㅠㅠㅠㅠㅠ 노부가 용서해주고 지켜줄거야ㅠㅠㅠㅠㅠ
[Code: 062a]
2023.02.04 02: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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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상황에서도 노부 생각하면서 우는거 찐사랑ㅠㅠ 즈그 케이가 자기 생각하면서 우는걸 노부가 알아야 하는데ㅠㅠㅠ 노부는 절대 즈그 케이 죄인 취급 안할테니까 먼저 처형해달라는 말만 안했으면 좋겠다ㅠㅠㅠ
[Code: f506]
2023.02.04 02: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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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 센세는
세 : 신이다

마치다 분노할 때 내가 다 소름끼침ㅠㅠㅠㅠㅠ무슨일이냐 진짜 몰입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와 센세ㅠㅠㅠㅠ
[Code: db23]
2023.02.04 02: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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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 속상해하고 분노할 거 생각하니까 또 이마친다ㅠㅠㅠㅠㅠㅠㅠ귀비치다 드디어 행복해지나했는데 다시 가시밭길이네 찌통ㅠㅠㅠㅠㅠㅠ
[Code: db23]
2023.02.04 03: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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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나는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나 이런 대작을 읽고 있다는 거에 감사해.... 와 진짜 반전때문에 나도 같이 두근두근거렸다 ㅠㅠㅠ미친 ㅠㅠㅠ방금전까지 이제 같이 손 맞잡고 부부 될 계획으로 꽁냥거리던 놉맟인데 이게 뭐냐고 도대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거냐고..... 아 궁지에 몰린 귀비 너무 안쓰럽고 원통한데 그만큼 꼴려서 너무 미안해.......
[Code: 822d]
2023.02.04 03: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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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박 당한 상태로 노부한테 가서 노부가 즈그 케이 포박당한거 보면 그때부턴 노부가 난리나는거 아니냐... 노부가 받을 충격은 어쩌냐ㅠㅠㅠ 놉맟 꽁냥거리면서 노부가 무사히만 다녀오세요, 케이. 이랬는데.. 느그 케이 몸은 무사하긴 한데 고것이ㅠㅠㅠ
[Code: 250c]
2023.02.04 04: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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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만 이렇게되면 노부의 사랑이 변함없어도 대신들이 역적의 아들이라고 황후 오르는거 반대하겠네?? 나 부케비는 노부가 즈그 케이 지켜준다고 했을때 이런상황까지 생각도 못하고 숙비쪽만 생각했는데 센세는 이 상황도 생각하신게 분명해ㅠㅠ 노부가 무조건 지켜줄테니까 이건 걱정 안하는데 노부가 지켜주는 과정이 더 힘들어 질까봐 걱정이다ㅠㅠㅠ
[Code: 7431]
2023.02.04 08: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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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가 계속 부케비고 나도 계속 부케비해서 센세가 이런 스토리로 돌아오는 것도 보고 존버는 승리한다 센세 억나더 사랑해ㅠㅠ
[Code: 823b]
2023.02.04 09: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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놉맟 쌍방 되고 노부 케이 하면서 꿀떨어졌었는데ㅠㅠㅠㅠㅠㅠㅠ 어떻게 이런일이ㅠㅠㅠㅠㅠㅠㅠ
[Code: 2f7b]
2023.02.04 11: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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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왜 아빠가 나와서 놉맟 괴롭히는데 노부야 저놈은 그냥 죽이자... 센세 이 사건 풀고 놉맟 출차순까지 하려면 영원히 어나더 주셔야 하는거 알지ㅠㅠㅠㅠ
[Code: b294]
2023.02.04 12: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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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어찌냐 진짜 아ㅠㅠㅠㅠ 저 아버지란 놈 저저 개새끼ㅠㅠㅠㅠㅠㅠ
[Code: 5c3b]
2023.02.04 13:4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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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진짜 미쳤나봐 노부입장에선 갑자기 장인이 나와서 장인 본인 아내 그리고 뱃속(에 생길지도 모르는) 아기까지 삼대를 멸해야 할 판이잖아 이럴수가 있나.... 진짜 어떡해 근데 왠지 노부가 이미 어느정도 알고있었을것같기도 하고 그래서 귀비가 모국이랑 인연 완전히 끊도록 지휘 맡긴건가? 뭔가 청혼도 결연하게 하는 거 보면 앞으로 힘들어질거 미리 알고 각오시킨거같기도 하고.... 으악세상에 센세 너무 재밌어요 저는 평생 센세를 따르리
[Code: 0576]
2023.02.04 16: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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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스에에에에헤엑!!!! 언제 왔다가셧어어어!!
[Code: abfe]
2023.02.04 22:1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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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센세.....센세.......ㅠㅠㅠㅠㅠ
[Code: 2f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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