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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겨울
중후하고 웅장한 카잔스키 저택에도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평소보다 더 밝고 따뜻한 분위기의 저택은 비단 연말이어서 뿐만은 아니었다.
몇 년 전, 저택은 '손님'을 맞이했다.

클라우스 필리프 마리아 솅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

미정부는 길고 생경한 이름 대신 그를 이렇게 불렀다.
피감시자, 망명자, 그리고 사상이 의심되는 전 나치 부역자.

이 저택의 주인, 토마스 카잔스키 중장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슈타우펜베르크
조금 더 사이가 부드러워진 후에는
클라우스
지금은,

"슈슈."

길고 생경한 이름의 '손님'은 카잔스키의 '슈슈'이자 저택의 안주인이 되었다.
러시아 황궁만큼이나 화려하지만 차갑고 가라앉아있던 저택은 안주인을 맞은 후 활기를 띠었고 올해는 더 활기를 띠었다.
작은 아기 천사가 클라우스의 몸 안에 자리를 튼 덕분이다.
너무 몸이 상해서 아이는 꿈도 꾸지 않았건만 기적처럼 온 아이였다.
불안했던 초기를 지나 아이는 무사히 자리를 잡았고 이젠 제법 커서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말은, 지금 클라우스는 한창 입덧을 하고 있는 주수라는 의미이다.

잘 자라주는 아이가 고맙고 기특했지만 안 그래도 많이 먹는 편이 아닌 클라우스가 입덧으로 인해 가리는 것이 많아지자 카잔스키는 절로 애가 탔다.
그 뿐만 아니라 저택의 모든 이들이 클라우스의 식사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런 반려를 두고 어딜 간단 말인가.
슈슈, 그러니까 클라우스 슈타우펜베르크(정확히는 클라우스 슈타우펜베르크-카잔스키)는 저를 품에 안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남편을 달랬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커다란 몸을 구기고는 '나 연말모임에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온몸으로 항변하는 사람이 미 육군 중장이라니.

"카잔스키."

클라우스가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르자 큰 몸이 움찔한다.

"당신이 안 가면 어떡해요?"
"나 하나 빠진다고 티도 안 날 거요."
"중장인데 티가 안 나겠어요?"

어림도 없단 말로 제 말을 일축하는 클라우스에 중장은 어쩔 수 없이 주섬주섬 외출준비를 했다.
알고있다.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하는 자리다.
그래도 한 번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카잔스키 중장이 아닌 '톰'이 되어 마음껏 약점을 드러내고 칭얼거릴 수 있는 상대는 제 눈 앞의 반려 뿐이니까.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카잔스키는 클라우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늦지 않게 돌아오겠소."

그의 커다란 손이 클라우스의 뺨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살짝 부푼 배가 들어찼다.

"어머니 힘들게 하지 말고 잘 있으렴."

뱃속의 아이에게도 인사를 건넨 후에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따뜻함으로 가득한 저택을 나서자 매서운 미동부의 바람이 칼날처럼 휘몰아친다.
굵은 눈발이 흩날린다.
사랑하는 반려와 그 반려가 품은 제 아이를 가득 담은 잿빛눈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중장은 천천히 기사가 문을 연 차에 몸을 실었다.
늑대가 될 시간이었다.
제 짝과 제 새끼를 지키는 늑대.

연말모임은 미 육군의 주요 인사가 빠짐없이 참석하는 중요한 자리다.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각종 모임 참석을 피하던 카잔스키 중장도 이번만큼은 가야 윗선의 눈 밖에 나지 않는다.
물론 카잔스키 중장이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거나 아부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는 권력이 필요했다.
저와 제 아내,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를 지키기 위한 권력.
중장은 아직 부족하다.
정부는 맞설 수 있는 권력을 가지자마자 이를 드러내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비호하는 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꼬투리가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와 제 반려, 그리고 아이를 노리려나.

...그랬는데 말이지.

카잔스키 중장은 지금 한 무리의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질문과 선물을 받고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별들은 그런 저들의 아내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거나 못말린다는 듯 미소지었다.
기실, 감시자와 피감시자라는 지극히 건조한 관계로 시작한 카잔스키 중장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조용한 결합은 화젯거리였다.
온갖 역경을 뚫고 이어진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이라니.
게다가 그 당사자들은 흔치않은 미려한 외관이지 않은가.
서사와 설정을 글로 옮기면 클리셰 덩어리 로맨스 소설이 따로없을 정도지만 본디 클리셰는 예나 지금이나 클래식이다.
게다가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귀부인들은 남편을 통해 들은 이 러브스토리에 열광했다.
부인들은 카잔스키 중장과 그 반려의 소식을 듣기 위해 남편을 닦달했고 아내에게 소식을 전하는 남편들은 정신을 바짝차려야 했다.
어디서 어떻게 폭탄이 날아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의 임신 소식을 들은 후 하루 종일 실실 웃다가 퇴근할 때 말도 안 되게 큰 꽃다발을 들고 갔다고, 벌써부터 팔불출 티를 내니 군 망신은 다 시킨다며 반쯤 농담삼아 비웃었을 땐 뭘 잘했다고 비웃냐면서 노호성을 들었다.
칼같이 정시 퇴근을 하고 퇴근 전에는 늘 온화한 목소리로 무엇이 먹고 싶냐 물으며 전화한다는 말을 했을 때는 거의 모든 군 간부들이 침실 밖으로 내쫓겨 거실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억울하다는 듯 운을 떼면 임신기간 동안 부인들을 서운하게 했던 일들이 박격포처럼 쏟아져내렸다.
그러면 거실에서마저 쫓겨나 집무실에서 쪽잠을 자야했다.
조금이라도 그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할라 치면 지엄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은 좀 조용히 있어요!
졸지에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 된 장성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카잔스키 중장과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이들도 저들의 부인 앞에서는 쩔쩔맸다.
아무튼 일련의 이유로 부인들은 연말모임에 참석할 카잔스키 중장과의 만남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창작물로 치면 인기 작품의 주인공과 만나 대화까지 할 수 있다는데 그 누가 가만히 있으랴.
연말모임에서 카잔스키 중장 앞에서 허튼소리 했다간 각오하라는 마나님들의 서슬퍼런 협박에 장성들이 한껏 몸을 움츠린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카잔스키 중장은 생각지도 못하게 유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 다소 얼떨떨했다.
하도 안 나오다보니 다음번에는 좀 나오라고 일부러 이렇게 맞이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유야 어쨌든 반려의 임신 축하 소식에 얼떨떨해하면서도 매너있게 대응했다.
그렇게 연말모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마님, 밤이 늦었습니다."

시계가 새벽 한 시를 알렸다.
클라우스는 제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사용인에게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난 괜찮네."

클라우스는 체력과 상황이 되는 한 늘 남편의 퇴근을 맞이했다.
남편도 그런 클라우스를 알기에 너무 늦게까지 밖에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늦어야하면 늦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연락을 꼭 넣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말모임에서는 연락도 없고 늦어도 너무 늦는다.
클라우스의 눈이 점점 날카로워진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제 존재가 카잔스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를 잘 안다.
아가, 네 아버지가 이번에 상대방에게 된통 걸린 모양이다.
사람들은 클라우스가 그저 처연하고 사연많은 종이인형처럼 무기력하게 저택에 틀어박혀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기실, 카잔스키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우군이었다.
클라우스는 차분히 마음을 다잡고 여러 상황을 예상하는 중이었다.
삼십분이 흘렀다.
클라우스가 기다리던 묵직한 발걸음이 평소보다는 조금 다급하게 가까워졌다.

"슈슈!"
"자네, 왔는가?"
"아직 자리에 들지 않았소?"
"....자네가 연락도 없이 늦는데 어떻게 자겠나."

밖에서부터 응접실의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발견한 카잔스키는 겉옷도 벗지 않고 급히 온 참이었다.
평소였다면 제게 군대식으로 말하는 클라우스를 보며 긴장했을 카잔스키다.
클라우스는 상황을 꽤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으면 군대식으로 말했다.
그말인즉슨, 카잔스키는 오자마자 아무일도 없었음을 피력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사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묘하게 얼굴이 밝았다.
신났다고 해야하나.

"마침 잘 됐소. 연말모임에 가니 다양한 핑거푸드들이 많이 나오지 않겠소?"
"중장, 대체..."

클라우스는 제게 어떠한 연락도 없이 늦었으면서 이유는 말하지 않고 눈치까지 밥말아 먹은 남편에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당신이 생각나서 가져왔소."

카잔스키가 소중하게 품에서 꺼내는 상자에 클라우스는 말문이 막혔다.
상자를 열자 익숙하고 그리운 냄새가 퍼졌다.
바이에른의 겨울을 알리는 냄새, 레브쿠헨이었다.

"이게 대체...."
"처음보는 쿠키가 있어 물어보니 이게 바이에른 지방에서 먹는 뉘른베르크식 레브쿠헨이라고 해서.... 주방장에게 부탁해서 가져왔소. 부디 당신 입에 맞았으면 좋겠는데...."

크게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었으나 아이를 가진 후로 고향인 바이에른 지역의 음식들이 부쩍 그리워졌다.
그러나 클라우스의 신분으로 바이에른 지방은 커녕 제대로 된 독일 음식을 접할 방법은 없었다.
저택의 사용인들도 독일 음식에 익숙치 않았고 혹여나 괜히 책잡힐까 조심스러워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설움은 생각보다 컸다.
남몰래 서럽고 속상한 마음을 삭였다.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 눈에는 다 보였나보다.

"상관들이 있는 앞에서 부탁할 수가 없었소. 사람들이 갈 때까지 기다리느라 연락도 없이 걱정시켜서 미안하오."

덧붙여지는 말에 클라우스는 카잔스키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아, 어쩌면 좋을까.
세상 중요한 연말모임에서 고작 이 쿠키들을 얻은 게 신나서 연락할 생각도 못한 채 저택에 돌아온 당신을.
혹여라도 내 입맛에 맞지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는 당신을.
모든 이들이 갈 때까지 기다렸으면서 연락 못한 것을 미안해 하는 당신을.

눈이 붉어졌다.
임신을 해서 감정이 물러졌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처 벗지 못한 겉옷에서, 
조그만 쿠키들을 소중한 보석 감싸듯 한 커다란 손에서,
저를 바라보는 잿빛눈에서
깊은 사랑이 선명한 까닭에 마음이 물러져 흐르는 눈물이라 치부하질 못했다.
가장 단단한 얼음도 저이 앞에서는 힘도 못 쓰고 녹아내리리라.

클라우스는 볼품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면서 레브쿠헨 하나를 집었다.
카잔스키가 가져온 레브쿠헨을 따뜻한 우유와 함께 먹는 동안 한 번도 입덧이 오지 않았다.

고작 쿠키 몇 개로 눈물 흘리는 삶도 나쁘지는 않다고, 클라우스는 생각했다.

카잔스키 중장은 제게 레브쿠헨을 준 주방장에게서 레시피를 받아 직접 레브쿠헨 만들기에 도전했다.
정통 뉘른베르크식 레브쿠헨은 상당히 복잡하고 난이도 있었으나 그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카잔스키 저택은 연말에 레브쿠헨 냄새로 가득하다.
레브쿠헨을 만드는 것은 늘 카잔스키의 몫이다.
카잔스키의 몫이라는 것은 아들과 아버지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다.
톰 카잔스키 주니어가 어머니 슈슈에게서 네 아버지가 사람들 다 갈 때까지 기다려서 받아온 레브쿠헨을 먹으며 울었다는 에피소드를 듣는 것은 초등학교 입학 후 연말 식탁에서.
이후로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주니어에게 레브쿠헨은 가장 사랑하는 간식이고 연말을 알리는 상징이며 부모의 사랑이자 카잔스키 그 자체다.

그런 그가 매버릭에게 레브쿠헨을 만들어 주는 것은 조금 더 후의 일.
매버릭이 슈슈와 함께 레브쿠헨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은 그보다 조금 더 후의 일.


후편 https://hygall.com/512973839



아이스매브 아이스맨매버릭 아맵 시니어슈슈 킬머탐찌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 기다렸다가 가져온 야9선수 일화에서 따옴
+레브쿠헨(Lebkuchen)은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 즈음에 먹는 쿠키임. 바이에른의 겨울을 대표하는 간식임. 다양한 레시피가 있지만 보통 바이에른 지방의 뉘른베르크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정통으로 인정함. 정통 레브쿠헨은 재료들도 다양한데다가 밀가루 함량을 엄격하게 지키고 과정도 복잡해서 상당히 만들기 까다로움.

Fraenkische-Lebkuchen.jpeg.jpg
2022.12.11 22: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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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나 울어.....
[Code: 16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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