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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막이 없어 텅 비어있는 허전한 다리 사이로 쭈뼛쭈뼛 잔 소름이 돋았다. 걸음을 땔 때마다 마당을 쓰는 비처럼 바닥으로 끌리는 치맛자락, 허리를 꽉 죄는 비단끈, 높게 땋아 올린 머리를 고정하는 머리장식이 가벼운 뜀박질에도 빠져버릴 것처럼 불안했다.

움직임을 방해하는 옷차림이 불편해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입었어야 할 사냥복을 입은 누이를 바라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경을 치실거야.
-오라버니만 실수하지 않으면 돼.


자신의 말에 가볍게 코웃음을 친 그녀가 적삼 위로 청록색 쾌자를 겹쳐 입었다. 누이는 그 의복이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그녀가 구겨진 부분을 탁탁 쳐내며 옷자락을 말끔히 정리했다.


-어머니도 우리가 옷을 바꿔 입었는지 모르실 걸?


그렇게 말하는 누이가 개구쟁이처럼 입술을 말아 웃었다. 격자무늬가 새겨진 푸른 비단을 이마에 맨 그녀는 거울을 마주하는 것처럼 자신을 꼭 닮아 있었다.

열다섯인 자신은 또래에 비해 왜소한 골격이었고, 열둘인 누이는 여자아이 치고 성장이 빨라 자신과 체격이 비등했다. 평소에도 쌍둥이가 아니냐는 이야길 밥 먹듯이 듣고 자란 남매였다. 이제 옷까지 바꿔 입으니 누가 오라비이고 누가 누이인지 겉보기엔 좀처럼 구분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여기서 그만하자.


그럼에도 좀처럼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권세가 크고 작은 양반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다. 그러자 입술을 삐죽 내민 누이가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든지 내가 바라는 거 한 가지 들어주기로 했잖아. 약속한 거 잊었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그러 길래 누가 하나 뿐인 누이의 탄생일도 잊어버리래?


팔짱을 단단히 낀 누이가 새초롬한 눈초리로 자신을 흘겼다. 스승을 따라 훈련을 갔다가 누이의 탄생일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온 게 문제였다. 돌아선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약조했더랬다. 그리고 누이는 해마다 열리는 사냥대회를 앞두고 자신도 까맣게 잊고 있던 약속을 언급하며 소원을 빌었다.


‘오늘 하루만 오라버니가 되어보고 싶어.’


그녀가 약조를 이런 식으로 사용할 줄 알았더라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나도 무가의 여인이라고. 활은 오라버니 친구들보다 내가 더 잘 쏠 걸?
-여긴 태자 전하까지 오시는 자리잖아.
-입 뻥끗하지 않고, 아버지 뒤만 졸졸 쫓아다닐게. 응? 얌전히 있으면 아무도 눈치 못 챈다니까?


일 년에 한 번 황실 전용 사냥터를 개방하는 날이었다. 올해는 병상에 누운 황제를 대리해 황태자가 대회에 참가했다.

자신과 누이가 서로인 척을 했다는 걸 들키면 부모님께 꾸중을 듣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엔 태자를 능멸했다는 죄로 가문 전체가 문책 받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옷까지 가로채 입은 누이는 말린다고 해서 고집을 꺾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베냐민 아가씨는 걱정일랑 붙들어 매고 여기서 이 오라버니가 가져오는 사냥감만 기다리고 계시어요.


장난스런 어조로 호언장담을 하는 누이가 어깨로 활대를 멨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막사에 홀로 남겨둔 채 훌쩍 밖으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게 불과 한 시진 전 일이었다.

우거진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시야를 벗어나 뒤로 밀려났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바늘보다 따갑게 피부를 찔렀다.


“이랴!”


손에 쥔 고삐를 한 번 더 손등에 감아 내며 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히이힝! 거친 울음소리를 터뜨린 말이 이전보다 더 빠른 속력을 내며 숲을 달렸다.

불미스러운 일은 누이가 천막을 나선지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아 벌어졌다. 황태자를 호위해야 할 무사들이 부상을 입은 모습으로 산을 내려왔다. 사냥터를 급습한 자객들이 황태자 일행을 습격한 것이다.

자객이 쏜 화살이 태자가 타고 있던 군마를 맞췄다고 했다. 놀란 군마는 태자를 태우고 깊은 산 속으로 달려 나갔다. 두 무리로 나뉜 자객은 호위무사의 발목을 잡고, 태자의 뒤를 쫓았다. 목숨으로 지켜야 할 주군을 눈앞에서 놓친 그들은 상황을 알리기 위해 부상을 안은 채 막사로 돌아왔다.

근처에 있는 군영으로 파발이 띄워졌고, 호각을 듣고 모인 귀족들은 수색대를 꾸렸다. 누이로 가장한 자신이 나설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태자 전하와 함께 계시던 민 공자의 흔적 또한 쫓을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숙인 무사가 침통하게 말했다. 누이의 소식을 듣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른 이들이 붙잡기도 전에 태자의 호위무사들이 타고 온 군마의 안장에 뛰어 올랐다. 군마를 빼앗긴 무사가 넋 놓은 틈을 타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거기서 내려오너라!’


민 장군이 당혹스러운 낯으로 자신을 말렸다. 그러나 제 마음을 대변하듯 앞발을 펄쩍 들어 올린 군마는 저를 붙잡는 무사들을 뿌리치고 곧장 숲으로 달려갔다.

말이 거칠게 땅을 박차자 말 등에 올라탄 자신의 몸도 크게 흔들렸다. 말 갈퀴가 뺨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낮추고 달리는 말 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았다. 한 몸이 되어 산의 심장부로 달리던 말이 어느 한 장소에 멈춰서 거칠게 날뛰었다.


“워, 워워! 그만 진정해!”


팔을 뻗어 들썽거리는 말의 목을 조심스럽게 긁어내렸다. 숨통이 끊어진 군마를 보고 흥분한 모양이었다. 다리에 박힌 화살을 보니 태자를 태우던 군마가 분명했다.

훌쩍, 안장에서 뛰어 내려와 주변을 살폈다. 마구잡이로 짓밟힌 수풀, 날카로운 검상을 입은 나무들, 비에 젖은 흙바닥에는 크기가 다른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빗속에 흔적들이 아직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여기에 태자가 있었다는 얘기였다.

호위무사는 누이가 태자와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와 같이 산속으로 도망친 것이리라. 날이 좋지 않았다. 이 이상 추격에 오랜 시간이 걸리면 비에 흔적이 쓸려 내려가 행방을 찾기 어려워질게 분명했다.


“누이가 무사해야 할 텐데...”


수세가 명백하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태자라면 어떻게 행동을 했을까. 유일한 이동수단인 군마를 잃고 다수인 자객에게 쫓기는 상황이다. 정면으로 맞서 싸우면 개죽음뿐이니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몸을 숨기고 아군을 기다리는 편이 현명할 터였다. 다행히 이곳은 황실 사냥터고, 사냥터의 지리에 대해선 자객보다 태자가 한 수 위였다.


“우선 물부터 찾아야겠어.”


대부분 은신처는 개울이나 강 같은 수원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러니 숲에 흐르는 물줄기부터 찾아야 했다. 수색에 갈피를 잡자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하며 시간을 버릴 수 없었다. 다시금 말에 올라타 발자국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삐를 틀었다.

한참을 달리자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말에서 내려 근처 나무에 고삐를 묶어두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개울이 들리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무의식적으로 검을 찾아 텅 빈 허리춤을 잡았다. 그제야 누이가 실종되었다는 말에 눈이 멀어 무기도 없이 무작정 군마를 훔쳐 타고 달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날붙이 하나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자객과 마주친다면 자신에게 승산은 없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이었다.


“베냐민 오빠!”


무심코 지나쳤던 수풀에서 온몸에 흙먼지를 덕지덕지 묻힌 누이가 튀어 나왔다. 그녀가 두 팔을 벌려 와락 가슴에 안겨왔다. 갸우뚱 기운 몸이 누이를 끌어안은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너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다친 데 하나도 없어. 여기 팔꿈치가 까진 게 전부야.”


무릎 사이로 풀썩 주저앉은 누이가 팔꿈치를 들어 올려 보였다. 화살에 빗겨 맞았는지 의복이 찢어져 있을 뿐, 벌써 딱지가 앉은 상처는 깊지 않았다.

누이의 어깨 너머로 그녀가 숨어있던 수풀을 살폈다. 수풀은 그 밑에 있는 땅굴을 가리는 눈속임이었던 모양이다. 눈어림으로 보아도 겨우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어디에도 태자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계속 혼자 있었어?”
“아니, 태자 전하와 함께 도망쳤는데...”


질문에 누이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불안스럽게 흔들렸다.


“전하께서 나를 감싸시다가 자상을 입으셨어.”
“뭐?”
“피 때문에 족적을 지울 수 없다고, 땅굴 위치만 알려주시고 미끼가 되셨어.”


자상이라니, 자객의 칼에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몰라도 부상을 입은 몸으로 자객을 따돌리긴 어려울 터였다.


“어떻게 하지, 오라버니? 전하께 정말 큰일이라도 생기면...!”
“전하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는지 기억해?”
“잘 모르겠어. 반 시진은 아직 넘지 않은 거 같은데...”


누이는 태자가 사라진 방향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반 시진이라면 충분히 뒤쫓을 수 있는 거리였다. 벌써 숲에는 이른 땅거미가 내려오고 있었다. 해가 지면 태자의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근처 나무에 내가 타고 온 군마를 묶어두었어. 넌 그 아이를 타고 산을 내려가.”
“말은 한 필 뿐이잖아. 오라버니는 어떻게 하려고?”
“전하를 찾으러 가봐야겠어.”


누이가 일어서는 자신의 팔목을 붙잡았다. 장시간 비를 맞아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자신을 말렸다.


“베냐민, 절대 안 돼.”
“넌 아버지께 여기 위치를 알려드려. 그래야 나도, 태자 전하도 살아.”
“전하는 다른 사람들이 찾을 거야. 오라버니까지 위험하게 나설 필요 없잖아!”


팔목을 꽉 잡은 누이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끈에 고정된 칼집을 한 손으로 빼들었다.


“이 검은 내가 가져갈게.”
“가지 마, 오라버니!”


아버지는 황가를 지키는 검이었다.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위험에 빠진 태자를 못 본 척 지나갈 순 없었다. 자신을 부르는 누이를 뒤로한 채 땅을 박차고 달렸다.

얼마나 깊은 숲속까지 들어왔을까. 교전이 벌어진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게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날 선 쇠붙이가 사납게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


칼날이 칼날을 막는 섬뜩한 소음이 가까워질수록 인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검은 복면을 사내 둘이 짙푸른 철릭 입은 소년을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의 발밑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쓰러진 시체도 보였다. 소년은 한 손으로 검을 세우고, 다른 한 손으론 붉게 물든 허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소년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자객이 고함을 질렀다.


“이곳이 네 무덤이다, 파이브 하그리브스!”


단순하지만 적의를 담은 소리였다. 자객이 그에게 달려드는 순간 칼자루를 움켜쥐고 칼집에서 날카로운 도신을 뽑아 들었다. 허리에 찰 수 없어 거추장스러울 뿐인 칼집을 소년에게 달려드는 자객의 등을 향해 힘껏 던졌다.


“아악!”


자신이 던진 칼집은 자객의 뒤통수를 깨뜨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관자놀이에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틈을 타 태자의 칼끝이 자객의 늑골을 꿰뚫었다. 그 순간 무방비해진 그의 등으로 날선 공격이 들어왔다.


“전하, 피하세요!”


간발 차이로 그들 사이를 끼어든 자신의 검이 태자의 사각을 노리는 살수를 막아냈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히자 검이 전신을 부르르 떨며 울었다. 상대는 성인 남자, 자신은 아직 사춘기도 지나지 못한 소년이었다. 둘 사이에 힘의 차이가 명백하기에 자객은 교차된 검에 그대로 체중을 실어 자신을 넘어뜨리려 했다.

체격이 비슷하다면 자신도 힘으로 대항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는 자충수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부드럽게 손목을 돌려 도신을 비틀었다.


“이 새끼가?!”


길을 잃은 상대방의 칼날이 칼등을 타고 넘어왔다. 당황한 자객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주도권은 이미 이쪽으로 넘어온 뒤였다. 물 흐르듯 상대방의 공격을 흘려 넘기고, 밑으로 떨어지는 칼끝을 칼등으로 내리 눌렀다. 상체를 방어하고 있던 검이 붙잡히자 자객의 가슴이 열렸다.

급소가 노출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자객이 황급하게 합을 떼며 거리를 벌렸다. 마음 같아서는 쫓아가 끝을 내고 싶지만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태자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자객의 가슴을 찌르면서 허리에 난 자상이 더 벌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가쁜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적에게 도망갈 시간을 주다니 실력에 자신이 넘치나 보군.”
“전하를 지키는 게 최우선이었습니다.”
“그 얼굴... 네 오라비를 찾으러 왔나?”


태자와 등을 맞댄 채 사방을 경계했다. 사각이 사라지자 자객은 좀처럼 쉽게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이미 찾았습니다. 지금은 전하를 구하러 온 것입니다.”
“나와 개죽음을 당하러 온 게 아니고?”


머리수는 양쪽이 모두 같지만 여전히 불리한 건 태자와 자신이었다. 둘 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열세인 사내아이에 불과했고 개중에 하나는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무가에서 자란 여인들은 모두 그대 같은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겁을 상실했냐고 비꼰 거다.”
“아마, 제가 특이한 편일 겁니다.”


동시에 피식, 하고 등 뒤에서 태자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겁을 모르는 건 자신이 아니라 태자 쪽이었다.


“얼마나 버티실 수 있습니까?”
“글쎄, 한 시진도 못 넘길 것 같은데. 네 오라비를 구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일대일도 버거운 상황에서 태자가 쓰러지면 곤란했다. 궁지에 몰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으려는 찰나였다.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자객들이 동시에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태자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를 검의 간격 밖으로 밀치고 자신은 등으로 땅을 굴렀다.


휘잉!


허공을 가르는 칼날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갔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공기가 아닌 태자와 자신의 목이 베일 뻔 했다. 그러나 급습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크윽...!”


자신이 밀치는 바람에 균형을 잃은 태자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통증을 참기 어려웠는지 악다문 입술로 삼키지 못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곧장 그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키가 작은 자객이 자신의 앞을 막아섰다. 다른 하나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태자를 노렸다. 발이 묶이자 다급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태자전하 위험합니다!”
“피하게 내버려둘 것 같으냐!”


자객은 두 손으로 붙잡고 있던 칼자루를 한 손으로 쥐었다. 품에서 꺼낸 단도가 빈손에 들렸다. 그때였다. 아까 땅을 구르며 주먹에 쥔 흙을 자객의 눈에 거칠게 뿌렸다.


“아악! 이 계집이 내 눈을-!”


흙이 시야를 가로막는 순간 몸을 낮춰 자객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체중을 실어 상대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허억, 컥! 그러나 자객은 마른기침을 내뱉으면서도 손에 쥔 단도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높게 쳐든 단도가 순식간에 자신의 왼쪽 어깨로 내리 꽂혔다. 칼날은 살갗을 찢고 근육을 관통해 들어갔다.


“아, 윽!”


단도가 박힌 어깨가 타는 듯이 뜨거웠다. 몸속을 날카롭게 후벼 파는 통증에 생리적이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검을 놓칠 순 없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 떨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자객의 턱 밑을 겨냥한 칼끝을 위로 밀어 올렸다. 검신은 그대로 자객의 정수리를 꼬챙이처럼 꿰뚫었다.


“전하!”


주검이 된 자객이 고꾸라지자 가려져 있던 태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태자의 발밑으로 흙먼지가 일었다. 가까스로 자객의 공세를 막는데 성공했지만 그뿐이었다. 검을 쳐내기엔 역부족인지 그의 걸음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어깨에 박힌 단도를 뽑아 들었다. 칼에 패인 홈을 타고 제 것일게 분명한 핏방울이 흘러 내렸다. 자신이 던진 단검이 사내의 견갑골에 꽂혔다. 동시에 자객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태자가 복부로 검을 박아 넣었다. 주르륵, 마지막 하나 남은 자객이 태자의 발밑으로 쓰러졌다.

그제야 태자를 제대로 마주볼 수 있었다. 열다섯, 아니 열넷은 됐을까?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어려 보이는 앳된 얼굴이다.


“어깨를 다쳤군.”


자객에게 쫓겨 흐트러진 숨결, 벌어진 자상에서 스미는 혈흔이 허리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었다. 혼자서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전하의 상처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나는 다친 팔을 늘어뜨린 채 절뚝이는 걸음으로 태자의 곁에 다가갔다. 어느새 사방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숲에서 밤을 보내기는 위험했다. 피 냄새를 맡고 짐승이 몰려들 수도 있었다.

태자를 부축하기 위해 그의 오른팔을 자신의 어깨로 걸쳤다. 으윽, 상처를 짓누르는 통증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다고 여기에 태자를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은 물가로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피 냄새를 씻어내야-”


거기까지 말한 순간 멀리서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전하! 태자 전하! 어디에 계십니까!


나무들 사이로 어둠을 속속히 밝히는 횃불들이 보였다. 하나 둘 씩 번져가기 시작하는 불빛이 이윽고 산에 내린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


“수색대가 근처까지 왔나 봐요.”


누이가 아버지에게 위치를 정확히 알린 모양이었다. 입가에 피어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태자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얼음장 같이 창백하게 굳은 그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태자가 입술을 무겁게 달싹거렸다.


“너 왜 열이...”
“태자 전하! 전하께서 여기에 계시다! 이리로 모여!”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 자신들을 발견한 군사가 횃불을 머리 위로 크게 흔들었다. 이윽고 그 신호를 보고 다른 방향에 가 있던 군사들이 몰려들었다. 비로소 팽팽한 실처럼 당겨져 있던 긴장이 가위를 가져다 댄 것처럼 툭, 하고 끊어졌다.

잊고 있던 어깨의 통증이 짙어졌다. 지독한 고뿔이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리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급소를 찔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빠르게 상태가 나빠질 리는 없었다. 자신을 찌른 단도에 무언가 발라져있지 않은 이상은,


“전하, 무사하십니까?!”


사색이 된 낯을 한 무사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세상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한 박자 늦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부상 입은 태자의 품으로 몸이 고꾸라졌다. 풀썩,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자신의 등을 태자가 와락 끌어안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등이 나무의 밑동에 부딪혔다.


“당장 의원을 데려와!”


태자가 당혹스런 목소리로 의원을 찾았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창백하게 질린 태자의 낯빛이 보였다.


“민 장군의 여식이 독에 당했다!”


전하의 옥체부터 챙기세요. 그렇게 대꾸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신에 퍼진 독에 성대까지 마비됐는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끝에서부터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몸은 이제 얼음장보다 더 차게 식어갔다. 새까만 어둠이 정신을 까마득하게 삼켜냈다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누이와 옷을 바꾸어 입었다는 걸 들키면 어머니께 크게 혼날지도 모르겠어. 그러한 실없는 걱정을 마지막으로 의식은 아득히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