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기다려준 맨밥이 있으면 너무 늦어서 미안... 바빴던 데다가 능력부족이라서 계속 갈아엎고 그러느라ㅜㅜ
붙잡고 있다가 더 늦어지느니? 분량 짧게? 해서 간단히 쉬어가는? 편으로라도? 일단 올리는 게 나을 것? 같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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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이크를 뒤쫓아 달려나갔을 때 이미 제이크는 사라지고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미친 사람처럼 건물 여기 저기를 뒤지는 밥을 동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밥은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만졌다. 밥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키스를 했다, 제이크는. 성급하고 격렬하고 왜인지 모르게 절박한. 벌을 주려는 사람이 대체 왜 그런 식으로 키스를 했을까. 아니, 벌을 주겠다는 이유로 남자가 남자에게 키스를 한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것도 이틀 후 결혼할 남자가. 그리고는 제 정신이 든 순간 밥을 밀쳐냈다. 정작 입술을 겹쳐온 것은 본인이면서 밥을 마치 더러운 오물 보듯 쳐다보며. 나가기 전 제이크의 얼굴에 떠올랐던 경멸과 혐오가 다시 떠올라 그를 괴롭힌다. 제이크가 키스해 줬다고 제정신을 잃고 빠져버린 멍청한 자신에게도 분노가 치민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던컨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것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서 비서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가 또 일어나서 서성거린다. 아직도 기관차처럼 폭주하고 있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워서 그만 도망치고 싶다. 제이크가 또 이상한 짓을 했다고, 사장님은 원래 그렇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세하고 싶다. 그러나 그러면 안될 것 같다. 여태 도망쳐 왔지만, 적어도 이번만은 그렇게 도망치면 안될 것 같은 것이다. 머리 속에 엉킨 실타래가 한가득 들어 있고, 밥은 지금 자꾸 미끄러지는 실뭉치의 끄트머리를 손톱 끝으로 간신히 잡고 있는 듯 했다. 이걸 놓치면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예감, 혹은 확신이 들었다. 밥은 탕비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의자에 주저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제이크는 제시카가 영상을 찍도록 빌미를 주었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시카가 편집해 올린 사진도, 영상에서 자신에게 덮어씌워진 거짓말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제이크는 제시카가 한 짓보다도 밥이 그의 지시를 어기고 그렉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더 화를 냈다. 그리고 밥이 '이 일을 알게 되더라도 존은 모두 웃어 넘길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드디어 폭발해 버렸다. 밥에게 다른 사람의 믿음과 애정을 배신했다고, 그동안 다른 남자들도 그렇게 만나오며 그런 식으로 몸을 굴렸냐고, 존과 개방 연애를 하고 있느냐고 화를 내며 물었다. 이 일과 전혀 상관없는 존 글렌을 들먹인 것도 이상하고, 여기에서 밥이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얘기를 또 꺼낸 것도 이상하다. 상황과 문맥이 맞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제시카의 영상 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제이크는 밥과 그렉의 일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적대적이었다. 한낱 비서가 원나잇을 즐기든지 말든지, 혹은 남자친구가 새로 생기든지 말든지 상사로서는 아무 상관도 없어야 맞을 텐데도 옷까지 찢어버리며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했다. 그러면서 이상한 말들을 했다. 밥이 혼자 몰래 지켜왔을 거라는 비밀, 배신. 그리고 방금도 밥의 배신으로 인해 상처받을 다른 사람에 대해 얘기했다. 밥은 그동안 제이크가 알고 있을 자신의 비밀이란 사장을 짝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라고 믿어 왔는데 그것과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제이크는 그때도 지금도 밥이 감히 자기를 짝사랑한다고 화를 냈던 게 아니었다. 그는 매번 다른 사람의 존재에 대해 얘기해 온 것이다. 제이크가 밥에게 숨겨진 연인이 있을 거라 믿고 있다고 전제하면 그의 말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은...


"존."


밥이 깊은 한숨과 함께 그 이름을 토해냈다. 갑자기 띵 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제서야 뒤죽박죽이었던 모든 퍼즐들이 촤라락 제 자리로 끼워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제이크는 줄곧 존에 대해 얘기해 온 것이다. 존과 밥이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밥이 그렉과 하룻밤을 보냄으로써 존을 버려두고 부정을 저질렀다고 믿는 거다. 그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촌형을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밥이 존과의 사랑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긴다고 생각한다면 제이크가 분노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존이 사실을 알게 되면 상처받을 게 뻔하니까, 밥이 부정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그렉과의 관계를 정리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사실을 숨겨주겠다고까지 한 것이다. 대체 어디서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제이크만 알 일이다. 

그러다 문득 제이크와 처음 만났던 날 생각이 난다. 존은 밥을 "나한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자 가장 훌륭한 복좌기 파트너야."라고 소개했다. 밥은 그때 민망해 하고 머쓱해 하기는 했어도 굳이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존이 원래 아끼는 사람들에게 애정 표현을 잘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익숙해져 있기도 했고, 사실 복좌기 파트너로서 존에게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그걸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게 해석할 수도 있을 거라는 걸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렇지만 고작 그 이유 만으로 6년이나 밥을 존의 연인으로 단정지었다고? 저 철두철미한 제이크 세러신이?

그런데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그가 정작 밥에게 키스를 했다. 형의 연인에게. 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대체 왜지. 대체 뭐야! 그게 부정을 저지른 형의 연인에게 벌을 주는 방법인가? 그 몸을 내게도 한번 줄 수 있었지 않냐고 화를 내면서? 미칠 것 같다. 거대한 깜짝카메라에 당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절반쯤 풀어낸 실타래에 옹이가 있어 턱 걸려 빠져나오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너무 힘을 주어 잡아채면 톡 끊어져 버려서 실을 못 쓰게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가만 놓아두면 이대로 아무 것도 아니게 돼 버릴 것 같기도 했다. 머리가 아파오지만 밥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며 실을 더 당겨본다. 기억을 헤집으며 그 장면에서 자신의 어지러운 자아를 제거해서 제3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관계였으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굴려도 되는 몸이었으면- 나는, 나는 대체 무엇을- 그럼 나한테도 한번 줄 수 있는 건가?"

"내가 지금껏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지켜봐 왔는지 알아? 무슨 일이 있어도 존에게 상처 주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내 자신은 매일 매일 말라 죽어 가는데도 참고 참고 또 눌러 참으며 버텨 왔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선을 넘지 않으려고 수천 피트 상공의 그 가느다란 줄 위에서 매 시간 매 분 매 초 외줄타기를 하며 견뎌 왔는데! 어떤 형태로든 다 좋으니까 내 곁에만 있으면 그걸로 행복한 거라고 스스로 자조하면서!"

"그런 아무 것도 아닌 관계를 지켜주기 위해 나는 여태 그 고통을 참아온 거였어?"



제이크가 피를 토하듯 내뱉은 말들은 마치, 마치- 제이크가 누군가에 대한 마음을 꾹 꾹 눌러 참고 살아왔다는 것처럼 들렸다. 밥은 제이크가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하며 지켜주려 했던 관계가 존과 밥의 관계라는 것은 이해했으나 그것이 왜 '제이'크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알아야 했다. 4번, 아니 정확히는 3번이나 그의 결혼식에 베스트맨으로 섰던 밥에게 결혼식에 오지 말라고 한 것도. 싫다고 거절하는데도 억지로 들러리로 임명하고서 예복까지 다 맞춰준 사람 주제에, 이제 와서 느닷없이 오지 말라고 한 이유도 알아야 했다. 밥은 초조하게 엄지손가락의 살점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그건 말야, 이 바보야-" 라고 소리지르는 것을 밥의 이성이 틀어막는다. 밥이 생각하는 그것일 리가 없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 제이크 세러신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 아름답고 멋진 여자들을 얼마든지 골라 사귀고 결혼할 수 있는 제이크가 대체 무슨 이유로 로버트 플로이드를 자기 곁에 두기 위해 오랫동안 고통받는 걸 기꺼이 감수했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결혼을 앞둔 남자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을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기에는 너무 위태로운 타이밍이다. 밥은 자꾸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의심을 짓누르기 위해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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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고 혼란스러운 데에 더해 몹시 화도 난다. 제이크가 그를 오해한 것도, 오해를 밥에게 정식으로 물어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에 기반해서 밥을 평가하고 배신자라 명명하며 징벌하는 것에도 분노를 느낀다. 제이크가 자기 입으로 그동안 고통받았다고 말했지만, 그게 밥을 이렇게 취급할 정당한 이유를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매번 자기 입으로 밥 플로이드는 너무 고지식하다고 투덜거리던 사람이 이렇게나 밥을 모르다니. 밥이 연인을 두고 다른 남자를 침대에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다니. 

게다가 만약, 천만분의 일 정도의 확률로 '제이크가 밥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지만 존과 연인 사이인 걸로 오해해서 여태 거리를 두어 온 것'이라면. 밥은 다시 부글부글 올라오는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그동안 외줄타기를 해 온 것은 제이크 혼자만이 아닌 것이다. 밥이 겪은 외사랑의 고통은? 다섯번이나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밥의 고통은?
 
금방이라도 터질듯 들끓던 감정들이 탕비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잠시 멈칫한다. 곧 던컨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무슨 일 있어, 밥? 지금 많이 바쁜데 나와줄 수 있어?"

"어, 그래 미안. 곧 나갈게. 어... 혹시 사장님 들어오셨어?"

"아니. 바로 휴가 들어가신다고 연락만 왔어. 그리고 인사팀장 연결해 달라고 하셔서 연결해 드렸지."


밥은 고개를 끄덕이고 탕비실을 나갔다. 지금 심정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만 같고 자기도 휴가를 내어 제이크를 찾으러 가고 싶지만, 그러면 던컨 혼자 남겨져서 고생을 할 게 뻔하다.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하러 간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밥은 계속 제이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개인 폰도 업무용 폰도 받지 않는다. 일부러 받지 않는 건지 결혼 준비로 정말 바빠서 못 받는 건지 모르겠다. 집으로 건 전화는 스탭이 받아서 사장은 집으로 오지 않았다고, 사장이 집에 오면 알려주겠다고 대답했다. 운전기사인 프랭클린은 아침에 회사에 내려준 이후 사장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후에 제이크는 결혼식을 대비해 마사지를 받고 피부관리를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밥이 샵에 전화를 걸기도 전에 샵에서 먼저 밥에게 '왜 세러신 사장님이 약속을 펑크내고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를 물어왔다. 답답한 속만 타들어간다.

존에게도 전화를 했지만 역시 받지 않는다. 미션은 끝났어도 후속 업무로 아직 바쁜가. 그는 존에게 음성 메시지만 남겨 두었다. 


"존? 저예요. 이 메시지를 들으시는 대로 제게 전화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급한 일이에요, 아주 중요하고. 제이크가 존과 저에 대해 크게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상황이 심각해요. 꼭 전화 부탁합니다."


집중하기 힘든데도 겨우 겨우 일을 하고 퇴근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에 인사팀장이 찾아왔다. 어서 회사를 나가 제이크를 찾아볼 마음으로 급히 가방을 챙기고 있는 밥에게 팀장은 어색하게 손을 비비며 말했다.


"축하해요, 플로이드씨. 세러신 호텔그룹 캘리포니아 본부 경영지원 디렉터로 승진하게 됐네."

"네?"


너무 뜬금없는 말이라 밥이 얼빠진 얼굴로 되묻자 인사팀장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쪽 디렉터가 건강 악화로 지난달 사표를 냈던 것 기억하지? (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공석이었고 기획팀장이 업무대행을 하고 있었는데, 아까 사장님이 구두로 지시하시더군. 로버트 플로이드를 그 자리로 승진시켜서 보내라고 말이야."

"제가요? 저를 왜... 제가 왜 갑자기 승진을?"


팀장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축하해 주고 있는 그의 표정도 좀 어리둥절해 보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던컨이 밥의 등을 찰싹 때리며 웃었다.


"이야, 6년동안 고생하더니 매니저인 팀장도 아니고 아예 디렉터급으로 가는 거야? 대단하네! 사장님이 네 노고를 높이 사신 모양이지?"

"아니... 아냐, 뭔가 잘못됐어. 사장님은 나한텐 아무 얘기도 없었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그렇게 높은 자리로 승진할 만한 연차가 됐거나 성과를 쌓은 것도 아니잖아. 혹시 뭐 잘못 들으신 게 아닐까요? 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인데 저로 잘못 들으셨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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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EA인 로버트 플로이드를 승진시킨다고 또박 또박 말씀하셨어. 나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두번이나 확인했는걸. 사장님 껌딱지 같은 밥을 캘리포니아로 보내는 게 맞냐고 말이야. 그랬다가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혼이 났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냐고. 플로이드가 나보다 빨리 승진하는 게 샘나서 그러냐는 소리까지 들었잖아. 사장님이 정식 서명은 결혼 휴가 다녀온 후에 하시겠다고 했으니 당장은 당신만 알고 있어. 인사발령은 휴가가 끝나는 날 기준이니까 아마 바로 가야 할 거야, 거기 기획팀장이 제발 자기 일 좀 덜어달라고 매일 징징거리고 있었거든. 여튼 축하해."


멍하게 서 있는 밥을 놓아두고 팀장은 마치 의사봉을 두드리듯 밥의 책상을 두번 땅 땅 두드리더니 비서실을 나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승진이라니, 물론 승진을 하면 좋겠지. 게다가 캘리포니아 본부의 디렉터라니. 캘리포니아 본부 산하에 있는 호텔과 리조트만 해도 몇개더라. 그걸 모두 관리하는 일인 거다. 디렉터 위엔 이사들과 사장 뿐이다. 영광스럽기 그지 없어야 하는데, 문제는 밥이 승진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빌어먹을, 정말 전혀 원하지 않는다. 여기 댈러스 본사에서 승진하고 그대로 여기서 근무한다면야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이대로라면 그는 승진과 동시에 LA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냥 내치기엔 자기도 찔리니까 승진을 시켜서 쫓아버리려는 거잖아! 얼굴을 보면서 제대로 얘기하지도 않고 비겁하게!"


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붉으락 푸르락하는 얼굴을 보고 던컨이 깜짝 놀라 "아니, 좋은 일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라고 달랬다. 밥은 허리에 손을 얹고 천장을 쳐다보며, 마구 소리지르고 싶은 걸 참아냈다. 제이크는 승진이라고 대충 둘러댄 다음에 그를 쫓아버리려는 것이다. 존과 밥이 연인일 거라는 이상한 오해를 하고 밥이 존을 놔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오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서,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그를 옆에서 내치려고 하는 거다. 그래, 하나는 명확해졌다. 제이크는 밥을 마음에 두었던 게 아닌 모양이다. 어떤 형태로든 밥이 옆에만 있어주면 된다고 했던 말도 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내뱉은 거짓말인 거다. 밥이었다면 제이크가 바람을 피우든 말든 결혼을 다섯번 하든 말든 안간힘을 써 가며 옆에 달라붙어 있을 텐데. 제이크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밥이지만 막상 아니라는 걸 깨닫자 또 마음 한쪽이 무너진다.

제이크에게 전화를 걸지만 여전히 받지 않는다. 밥은 가방을 집어들고 회사를 뛰쳐 나왔다. 제이크를 찾아야 했다. 사장을 찾아내서 대체 그 예쁜 머리 속에 무슨 멍청한 생각이 들어차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래, 어차피 제이크 세러신의 목적지는 LA 결혼식장 뿐이다. 이렇게 밥을 내치고 연락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가 갈 곳은 그 장소 뿐이다. 결국은 밥을 만나게 되겠지. 오지 말라고 했다고 뒤에 나동그라져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모진 소리를 듣게 되어도 할 수 없다. 찾아가서 담판을 지어야지. 

택시에서 내려 집까지 달려 올라갔다. 전세기 출발은 내일이다. 사장님, 웃기지 마세요. 오지 말라고 하면 제가 못 갈 것 같습니까? 이를 갈며 밥은 캐리어를 열고 옷과 여행용품들을 마구 집어넣었다. 제가 하지 말라고 순순히 안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 주지 않으면 못 알아먹을 소리를 남발해 놓고 자기가 도망치다니 비겁해요. 키스해 놓고 꽁무니를 빼다니. 비참하고 괴로운 건 난데 오히려 자기가 그렇게 아파 보이는 얼굴로 떠나 버리는 법이 어딨어요. 

투지를 불태우지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제이크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고 존 글렌에게서도 아직 답이 없다. 오늘 다섯번이나 전화를 받은 그웬은 아직도 사장님이 집에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밥은 일단 집을 박차고 나가 제이크의 건물로 내달렸다. 그를 잘 아는 경비를 통과해서 30층까지 거침없이 올라갔다. 그웬이 문을 열어주며 "사장님 아직 안 오셨다니까요."라고 말한다.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 연락이 안 되는데, 급한 일이라서 집에서 기다릴까 해서요."


그웬이 혀를 쯧쯧 차며 그를 들여보내 주었다. 그는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제이크를 기다렸다. 5분, 10분, 시간이 흘러도 사장은 집에 돌아오지 않고 밤만 깊어간다. 그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걸 들은 요리사가 간단히 먹을 걸 챙겨주었다. 입맛은 하나도 없지만 예의 상 깨작거리며 맛을 본다. 그리고 또 거실을 서성거린다.

제이크가 돌아오면 물어볼 말을 열심히 생각한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키스는 왜 하신 겁니까. 제 마음을 알고 계신 건 아니겠죠? 저와 존은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우린 그냥 복좌기 파트너였을 뿐입니다. 대체 왜 존과 연인 관계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동안 왜 힘들어 하셨습니까. 그리고 또 묻지만 키스는 대체 왜 하신 겁니까. 키스는 좋았나요, 애나하고 한 것 만큼이나.

그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거실의 여기저기를 괜히 둘러본다. 아침에 아직도 비몽사몽인 사장을 기다리거나, 몸이 좋지 않은 사장을 모시고 들어오거나 했을 때마다 기다리던 곳이라 익숙하다. 둘러보고는 있어도 사실 딱히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어서 무어라도 눈에 담으려는 요량이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단순하지만 튼튼한 원목 책장 앞에 선다. 밥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손가락으로 하나 하나 짚어본다. 그도 알고 있는 제목들의 소설도 몇권 있고 에세이집이나 자서전도 보인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책장이다. 언젠가 제이크가 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책장이 무슨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이라고 자랑한 적이 있다. 가격이 웬만한 자동차 한 대 값이라면서. 그때 밥은 "사장님은 책도 안 읽으시잖아요. 이건 책장이 아니고 그냥 장식품인 거네요." 라고 대꾸했었다. 제이크는 그 책장에 꽂힌 백권이 넘는 책들 중에서 적어도 세권은 읽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꽂혀있는 책등을 쭈욱 따라가던 그의 손이 고급스런 하드커버 책들 사이에 얄팍하게 끼어 있는 책 한권에 멈추었다. 옆에 있는 책들과 같은 색이라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제목은 그저 '추억(Memories)'이다. 제목만 작게 씌어 있고 저자의 이름도 없다. 소설인지 시인지도 알 수 없는데, 괜히 호기심이 발동해서 책등을 잡고 끄집어 내 본다. 책들 사이에 빡빡하게 꽂혀 있어 쉽게 꺼내어지지 않았으나 밥은 고집스럽게 쭉 빼냈다. 그리고 책장을 연다.

놀랍게도 그것은 책이 아니라 사진 앨범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을 꽂아두는 앨범이 아니라 인쇄를 해서 책처럼 만든 사진집이다. 결혼사진집.

제이크의 첫번째 결혼식부터 4번째 결혼식까지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제이크 세러신의 뻔뻔함도 보통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난 실패한 결혼의 흔적을 더 이상 보려고 하지도 않을 텐데, 제이크는 그 결혼들이 마치 업적이라도 되는 양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 자랑스럽게 올려둔 것이다. 물론 모두가 볼 수 있는 건 아닐 테지, 그의 집에 들어오는 소수만 볼 수 있는 책장이니까. 그래도 새 아내가 될 사람이, 혹은 그가 집에 데려올 상대가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공개된 장소에 올려두었다는 게 참 대담한 것이다. 연인의 이전 결혼식 사진들을 보고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텐데. 하긴 비밀스러운 것일 수록 더 평이하고 쉬운 곳에 놓아두어야 오히려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법이다. 어지간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그런 독서광은 요즘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도 남의 책장에 꽂힌 책을 일부러 꺼내보지 않을 것이다.

앨범을 한장 한장 넘겼다. 이미 다 아는 사진들이다, 모두 그가 참석했으니까. 첫번째와 두번째 결혼식, 세번째 메이의 결혼 예행연습 때 사진, 네번째 결혼식 사진들이 순서대로 들어 있었다. 메이와는 결혼식 직전 들러리들까지 모두 모여 예행연습을 하고 파티를 했다. 사진에는 본식에서 입을 웨딩드레스 대신 수수하지만 품위있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메이와 베이지색 가벼운 정장 차림의 제이크가 서 있고, 양쪽 옆으로 밥을 포함한 들러리들이 제각기 편한 옷차림으로 서 있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둘은 파혼했으므로 그 사진은 세번째 결혼식 사진 대신이 되었다. 어쨌든, 그렇게 네번의 결혼식 사진이 모두 다 들어 있는 사진첩인 것이다.

밥은 자신이 들어 있는 사진을 찾아 보았다. 매번 사진의 오른쪽, 실제로는 신부의 왼쪽에 서 있는 제이크와 신부의 양 옆으로 신랑과 신부 들러리들이 네명이나 두명씩 서 있다. 그들 가운데 밥이 서 있다. 제이크의 바로 왼쪽 옆, 주인공을 빛내주기 위해 살짝 뒤로 물러난 자리가 그의 자리다. 다른 들러리들은 밥이 잘 알지 못하는 제이크의 친구들이거나 유명인들이었다. 첫번째 결혼식에 참석했던 하비, 두번째 결혼식에 참석했던 존만이 밥에게는 익숙한 얼굴이다. 

정작 밥 자신은 제이크의 결혼식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뭐하러 그런 걸 보관하면서 스스로 고문을 하겠는가. 결혼식 사진을 들여다 보면 더없이 멋있는 제이크와 눈이 마주치겠지만 더불어 그의 손을 맞잡고 옆에 서 있는 매력적인 아름다운 여성과도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밥이 설 수 있는 위치는 결국 그들을 보좌하는 뒷자리일 뿐이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될 뿐인데. 그래서 밥은 결혼식이 끝나고 사진작가가 들러리들에게 보내준 사진을 받자 마자 한번 쓱 보고 다 버리곤 했다. 

그는 앨범을 끝까지 다 보고 곱게 덮어 책장 위에 올려두려고 손을 뻗었다가 다시 앨범을 내렸다. 뒤통수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는 페이지를 넘겨대며 제이크와 케이트, 제이크와 제시카, 제이크와 메이, 그리고 제이크와 코린의 결혼 사진까지를 다시 훑어 보았다. 첫페이지로 돌아가서 끝까지 보고 다시 첫페이지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의 뒤통수를 간질거리는 느낌이 강해진다. 이번엔 신랑 신부와 들러리들만 찍힌 사진들만 계속 펼쳐보았다. 케이트, 제시카, 메이, 코린. 케이트, 제시카, 메이, 코린.

그러기를 몇번이나 한 뒤에야 이 이상한 느낌의 정체를 깨달았다. 밥은 여지껏 그가 제이크의 결혼식마다 제이크의 뒤에 서 있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들을 모아놓고 보니 밥이 서 있는 위치는 제이크의 뒤가 아니라 바로 옆자리였다. 물론 살짝 뒤로 물러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이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옆자리인 것이다. 들러리들의 위치 배정은 제이크 본인이 했다. 들러리가 4명이 될 때도, 2명이 될 때도 제이크가 자리를 지정해 주었고, 밥은 늘 제이크의 바로 옆이다. 

또 깨달은 것은, 신랑 들러리도 신부 들러리도 심지어 신부도 매번 바뀌었는데 매 결혼식에서 딱 두 명만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제이크와 밥. 신랑 자리에 선 제이크와 그 바로 옆에 뻘쭘하게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밥. 신부가 매번 바뀌니 신부 들러리도 매번 바뀌고, 신랑 들러리마저 매번 다른 사람인데 밥만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제이크의 이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러운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애니메이션처럼 종이를 촤라락 넘기면 제이크와 밥만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배경인 것처럼 변해버린다. 

과대망상도 유분수지. 하지만 책장에 다시 앨범을 돌려놓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문득 메이에게 전화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날 밤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멍하게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TV 화면에 어른거리는 영상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고요한 곳에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냥 켜 둔 것이었다. 화학 어쩌고 하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갑자기 메이를 떠올리게 된 이유는. 그는 지금 누군가가 너무 필요했는데 제이크도 존도 심지어 그렉도 옆에 없었다. 메이라면 그의 비논리적인 생각의 고리를 가차없이 끊어줄 것 같기도 했다.

메이는 두번만에 전화를 받았다.  


"바아압!"


약간 취기가 도는 목소리였으나 메이는 여느 때처럼 반가워 한다. 밥의 베베 꼬여 아프던 내장의 압력이 살짝 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메이는 학장의 퇴직기념 파티에서 술을 좀 마셨고 지금은 집에 돌아와 있다고 했다. 기분이 좋아서 혼자 와인을 한잔 더 하고 있다고. 그런 좋은 밤시간을 방해한 게 아니냐고 묻자 밥의 전화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했다. 


"밥, 차라리 우리 집으로 올래요? 우리 같이 마셔요!"

"저 술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밥은 소다를 마시면 되죠! 우리 냉장고에 소다도 있어요."


재잘 재잘 떠드는 메이를 간신히 달래며 밥은 메이와는 오늘 심각한 대화를 하기 힘들겠다 싶었다. 그저 안부 겸 전화했다고만 말하고 끊으려는데 메이가 말했다.


"모레죠, 그렇죠?"

"뭐가요?"

"제이크의 다음 결혼! 다섯번째 결혼 말예요. 엄밀히 말하면 4번째지만."

"아, 네."

"좋겠어요, 제이크 세러신은. 어디서 그 사람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그렇게 끝없이 나타나는 건지. 나는 제이크 이후에 아무도 못 만나고 있는데! 억울해요."


메이가 집에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 이유가 제이크의 결혼 때문이겠구나 하고 깨달았다. 헤어졌어도 아직 그때의 마음이 다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너무 쉽게 잊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대는 제이크가 원망스럽기도 하겠지. 밥은 제이크의 다른 아내들보다도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던 메이에게 유난히 마음이 쓰인다. 같은 과학 너드 계열이 아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 생각의 흐름을 깨며 메이가 씩씩하게 소리쳤다.


"하여튼! 밥도 모레 또 들러리를 서겠군요. 하여튼 제이크는 좀 이상해. 다른 들러리는 하나도 안 챙기면서 밥만 챙겨대요, 그쵸?"

"딱히 절 챙겨주시는지는 모르겠는데요. 맨날 혼나고 그래서."

"당신은 이제 제이크의 특별대우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밥이 뭐라고 하든 간에 제이크가 늘 웃어주고 받아주니까."

"어... 전 비서니까요?"

"제이크랑 당신 같은 사장-비서 관계는 본 적이 없는데용. 제이크는 매번 당황하는 당신 반응이 재미있어서 아침마다 나하고 키스를 더 오래 하기도 했고, 당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출근길에 도망도 치고 그랬잖아요. 당신이 온힘을 다해 부딪쳐 오는 걸 제이크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몰라요?"


술기운인지 메이는 유난히 수다스러웠다. 그 장난스러운 말에 밥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장의 어린애 같은 장난들이 그런 이유에서였다고? 


"그건 그냥 메이가 제이크를 좋게 봐주기 때문인 것 아닐까요? 사장님은 그냥 정말로 일을 빼먹고 도망가고 싶었을 겁니다."

"흥, 안 믿을 줄 알았어요. 그래도 제이크가 당신을 특별히 여긴다는 건 확실해요. 내 말이 맞다니까요? 내 결혼식 예행연습 할 때도 제이크한테 다른 신랑 들러리하고-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무슨 배우랬는데, 하여간 그 사람이랑 밥이랑 자리를 바꾸는 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막 펄펄 뛰면서 안된다고 했잖아요. 사진작가도 나도, 밥이 제이크 옆옆으로 가는 게 들러리들 키랑 몸집을 고려했을 때 가장 완벽하게 대칭이 된다고 계속 말했지만 제이크는 막무가내였거든요. 무조건 밥은 자기 옆에 서야 한대. 매번 그랬으니 전통이 됐대요. 너무 웃기지 않아요? 앞으로도 결혼을 몇번이나 더 할 계획이고 그 때마다 밥을 들러리로 세우겠다는 소리-"

"저기, 메이. 혹시... "


밥은 조심스럽게 메이의 종알거림을 자르고 말을 꺼냈다.


"혹시... 제이크가 누구 마음에 둔 다른 사람이 있다거나 그런 낌새는 없었죠? 물론 메이를 사랑했으니까 결혼하려고 했던 거지만요, 혹시나 해서요. 누군가 좋아하다가 실패했는데 마음을 못 접었다거나 그런... 그런 건 없었겠죠?"

"그건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베이의 가볍고 높던 목소리가 극적으로 낮아졌다. 밥은 메이가 보지도 못하는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어떻게 그런 흔치 않은 일이 '갑자기' 궁금해질 수가 있죠?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계기가 분명히 있을 텐데!"


메이의 논리적인 사고를 예상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밥이 지금 제이크와 있었던 일을 모조리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밥은 대충 어물거리며 그런 일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메이가 "이런 대화에는 와인이 한잔 더 필요해!" 라며 잠시 와인을 가지러 간 짧은 사이에 밥은 전화를 끊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이 채 끝나기 전에 메이가 다시 전화를 집어들었다. 


"사실은 제이크가 비슷한 얘기를 한 번 한 적이 있답니다, 선생님. 나랑 술을 잔뜩 먹고 진실게임 같은 걸 했거든요. 둘이 아주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좀 나눴어요. 고등학교 때 가장 창피했던 일이나 첫 경험 상대라든가 첫사랑이라든가 몇살까지 오줌을 못 가렸는지 하는 그런 것들."

"비슷한 얘기라면?"

"제이크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차마 고백도 못해봤대요. 그래서 내가 막 웃으며 물었어요, 천하의 제이크 세러신이 고백도 못해 본 사람이 누구냐고."

"어... 누군데요?"


밥의 가슴이 쿵쿵쿵쿵 뛴다. 


"얘기 안해줬어요. 그냥 자기 손이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만 했죠.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아, 맞다. '내 손이 닿아서는 안되는 사람'이라고 했군요, 정확히."

"그게 무슨 뜻일까요?"

"모르죠. 나는 그래서 제이크가 말하는 사람이 유부녀였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근데 또 그냥 유부녀라면 제이크가 안 뺏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손을 댔다간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지탄을 받을 유부녀를 짝사랑했다고 생각했죠. 내가 웃으면서 '혹시 숙모나 형수를 사랑하는 거야?'라고 물었는데 제이크는 대답도 않고 좀 슬퍼 보였어요."

"아..."

"혹시 제이크가 정말 그런 대상을 짝사랑한 건 아니겠죠? 밥이 묻는 게 너무 수상한데! 뭔가 알고 있는 거죠? 말해 봐요, 얼른!"


밥은 계속 졸라대는 메이를 간신히 달래고는 내일 결혼식 때문에 일찍 자야겠다고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땀이 나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숙히 찔러넣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확히는 반대편 건물의 불이 꺼진 30층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그렇게 밤을 샜다. 














그날 밤새 제이크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겨우 연락이 된 애나의 어시스턴트에게서, 제이크와 애나가 어제 오후에 예정보다 빨리 LA로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존 글렌도 여전히 답이 없다. 

전세기가 들러리들과 하객들을 태우기로 한 시각에 맞춰 공항에 나갔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댈러스에서 날아갈 하객들도, 제이크의 친구들도, 심지어 다른 한명의 들러리인 하비 마차도도 없었다. 분명 한달 전부터 수차례 안내를 받은 바로는 여기가 맞는데. 당황해서 항공사에 문의하고 공항에 문의해도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멍하게 공항에 서 있는 밥에게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하비 마차도다.


"혹시 공항과 시간이 바뀐 걸 몰랐던 건 아니죠? 
갑자기 변경됐다고 안내가 다시 왔던데요.
나는 이미 LA에 도착했고 세러신 호텔 배정된 방에 체크인 했습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아서 제이크에게 물어봤더니 
밥은 안 올 거라고, 내가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만 말하고는 
더 말도 못 걸게 하는군요.
둘이 싸웠습니까? 무슨 일 있었어요?
로버트 플로이드가 없는 제이크 세러신의 결혼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요?
신부 손가락에 끼워줄 반지는 누가 들고 있다가 신랑한테 건네주고요? 내가?
아 밥, 당신이 여기 있어야 하는데."



뒤이어 LA의 세러신 호텔로부터 '요청하신 대로 고객님의 스위트룸 예약이 취소되었으니 여행 일정에 참고하라'는 친절한 알림 메시지도 도착했다. 제이크는 정말로 밥이 자기 결혼식에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다. 

깊은 한숨을 쉬며 밥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배낭을 집어들었다. 













캘리포니아에는 개인의 사유권이 인정된 해변이 없다. 모든 해변은 대중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돈이 아주 많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사람들을 물리고 매우 조용하고 사적인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 엘 마타도어 같은 곳에서 거대한 바위와 푸른 바다와 흰 파도를 배경으로, 아무도 보지 않는 당신만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제이크 세러신과 애나 트렌튼의 결혼식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개인 경비원들 수십명이 결혼식이 거행되는 해변가에 무전기와 인이어와 테이저 등을 들고 바다와 해변을 삼엄하게 지켰다. 초대장을 들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근처에 진입도 할 수 없었다. 조깅을 하기 위해 해변을 달리던 사람이 이 작태를 두고 볼 수 없어서 말리부 시나 경찰에 항의전화를 한다고 해도 딱히 별다른 조치를 기대할 순 없었을 거다. 

애나 트렌튼은 결혼식 당일에서야 신랑 측 들러리가 단 한명, 하비 마차도이며 당연히 거기 있을 줄 알았던 비서는 정작 없는 걸 발견하고 놀랐지만, 신랑은 그저 자기 비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어쩔 수 없이 불참하게 되었다고만 설명했다. 하비 마차도가 입을 삐죽거리며 한마디 하려다가 세러신의 매서운 눈길에 입을 다물었다. 신부는 자신의 들러리와 수가 맞지 않으니 신랑 측 들러리를 한명 급하게 추가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제이크 세러신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예복을 맞춰줄 수도 없고 자기 옆에 세울 정도로 의미있는 관계를 가진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해군에 있는 그의 사촌형마저 독일발 비행기가 연착되어 늦어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지만." 제이크는 알쏭달쏭한 말을 덧붙였다. 애나는 몹시 불만이었지만 제이크가 그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며 행사를 진행하도록 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너한테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도 여기 없다니. 대체 밥은 왜 못 오는 건데?"


신부가 등장하길 기다리다가 하비 마차도가 제이크의 귀에 소근거린다. 흰 카페트 위에 꽃잎들이 뿌려진 신부의 길을 웃으며 바라보던 제이크의 표정이 냉랭해진다.


"네가 여기 있으니까 됐잖아. 왜 자꾸 밥이랑 존 얘기는 끄집어내는 거야?"

"네 결혼식에 로버트 폴로이드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밥 플로이드가 왜, 나한테 뭔데? 일개 비서일 뿐이잖아. 그리고 드디어 훈련을 끝내고 돌아온 존 형이랑 밥이 지금쯤 만났을 수도 있지. 말은 비행기 연착이라지만 사실은 여기 안 오고 둘이 따로 만나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난 관심 없어."


하비는 그 차가운 말투에 그만 입을 다문다. 

화창하고 맑은 날씨와 적절하게 해변에 부딪쳐 오는 흰 파도, 해변에 놓인 아름답고 화려한 꽃기둥들과 바람에 휘날리는 희고 가벼운 천들, 여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햇빛 아래에서 꽃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신부와 그리스 조각상 같은 신랑, 품위있고 멋지게 차려입은 소수의 하객들. 애나의 친구인 유명 팝가수가 그들을 위해 사랑노래를 불러준다. 마이크가 없어도 그 청량한 목소리는 해변 전체에 울려퍼진다. 모두가 완벽하고 로맨틱하다.

이 기쁘고 즐거운 날에 정작 새신랑(아주 '새'신랑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의 눈 아래에는 다크 서클이 짙게 드리워 있고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해 낯빛이 좋지 않은 걸 메이크업으로 가리고 있다는 것은 메이크업 디자이너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계속 그의 입가에 문신처럼 머물러 있는 웃음이 사실은 눈가에 닿아 있지 않다는 것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한번씩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버릇처럼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가 문득 그 사람이 거기 없음을 깨달으며 이를 악무는 것도. 아름다운 새 신부와 하객들과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이따금씩 절망과 슬픔이 지나가는 것도 아무도 못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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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풀먼 행맨밥

 
2024.06.24 07: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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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짜 어나더가 없으면 매일매일 그리워 하며 살거야 진짜 미쳤다 행맨 오지게 삽질하고 밥도 삽질하는데 와중에 걀혼식은 시작을 하고......
[Code: a23f]
2024.06.24 07:2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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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대화를 했으면 여기까지도 안왔어 진짜...1편 시작하면서 고백라고 끝났을 이야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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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4 08:30
ㅇㅇ
아아아아아ㅠㅠㅠㅠ 키스한 후에 제이크 눈빛에서 보였던 경멸과 혐오는 밥을 향한게 아니라 오히려 본인을 향한걸텐데ㅠㅠㅠㅠ 짝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실망, 그럼에도 밥을 너무 사랑해서 터져나오는 욕망을 멈출수없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 아니냐고 심지어 어쨌거나 밥은 존의 연인인데(제이크는 그렇게 오해중이니까ㅠㅠ) 그래서 아예 꽁꽁 숨어버리고 밥도 자신이랑 마주칠 수 없는 곳으로 발령시켜버리고 연락도 안 받고 결혼식에도 오지 못하게 만드는거 같은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제이크가 빨리 진실을 알았으면 좋겠다가도 이 개존잼얘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진짜 내마음은 몰까ㅠㅠㅠㅠ
[Code: 6f11]
2024.06.24 08:31
ㅇㅇ
제이크가 로버트한테 "형이랑 사겨요?" 한 마디만 했으면 결혼식 이딴거 다섯번씩이나 안했어ㅠㅠㅠㅠㅠㅠ
[Code: 6f11]
2024.06.24 09:12
ㅇㅇ
하 시발 진짜 존나 맛있다 진짜 미쳤네 하 도파민 개미쳤음 진짜 마약 오ㅐ 하냐 센세 무순 정주행하면 되는데 제이크한테 이입해서 한 번 밥한테 이입해서 한 번씩 읽으면 극락 2번이 호로록 하 시발 진짜 개맛있다존맛존꼴존잼!!!!!!!!!!!!!!!!!!!!!!!!!!!!!!!!!!!!!!!!!!!!!!!!!!!!!!!!!!!!!!!!!!!!!!!!!!!!!!!!!!!!!!!!!!!!!!!!!!
[Code: c985]
2024.06.24 23: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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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좋아..너무좋아!!!!!!!!!!!!!!!!!!!!!
[Code: d4fb]
2024.06.24 23: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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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서로를 사랑하고있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제이크의 오해가 너무 오래 묵어서 풀기힘들어보이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치만 캘리포니아로 보내버리다니ㅜ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밥 안보고 살 수 있냐고 제이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d4fb]
2024.06.25 09: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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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쉬…..!!! 내센세 오셨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믿고있었다구 ㅠㅠㅠㅠㅠ
[Code: 9210]
2024.06.28 08: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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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센세 텔레파시 보냈어야지!!! 수신오류로 며칠동안 숨 못쉬었잖아!!!! 내센세땜에 나 오늘도 숨쉼다 후하후하 제이크 바보자식!!! 밥아 돌진햐러!!!!!!
[Code: 0b1c]
2024.06.28 09:0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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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꼭 와야해 나의 산소 내 공게 센세가 말아주는 행맨밥 뿐이니까 ㅠㅠ
[Code: e7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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