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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18:10
미쿠니 렌타로
부라쿠민(3등국민 취급받던 전근대 최하층 계급. 현재도 차별 남아있음) 양아버지 밑에서 자라났기에 쪽국에서 차별받았음. 어린시절임에도 뼛속 깊이 차별이 뭔지 알았다고..
미쿠니는 1937년 14세에 쿨럭 칭다오로 떠나 일용직 노동자로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14~16세(1937~1939) 어느매에 푸산에서 도시락 장사를 했다고함
일본군들이 돌아다니던 당시 중국과 일제강점기의 푸산에서
10대인 미쿠니는 일본인들의 중국 & 조선인들을 향한 폭언과 차별을 많이 보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이야기
"1937년, 일중 전쟁이 발발하며 군화소리가 커지기만 하고있었다.
그무렵 부산역 앞은 일본인 手配師*가 오기를 기다리는 조선인 노동자들로 넘쳐났다.
어느 때였나, 의미를 알수없는 고함소리를 듣고 멈춰서니,
한 조선인을 일본인 手配師가 「나쁜 놈, 가만히 있어」「요보**, 가만히 있어」(ナップンノム、カマニイッソ, ヨボ、カマニイッソ) 라고 외치며 스틱으로 때려눕히고있었다.
그 말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귀에 맴돌아 잊을수가 없다"
(*手配師 : 노동자들에게 일 구해다주는 사람)
(** 댓보니 여보(요보) ヨボ 는 조선인 멸칭어라고함)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미쿠니는 징용장이 날아오자 외국으로 도망 가려했으나 경찰에 붙잡혔는데, 그 도망을 신고한게 어머니였음. 안그래도 차별받던 가족인데 아들이 징용기피자가 되면 전부 죽을수도 있어서 ...
전쟁으로 끌려간 미쿠니는 일부러 담요를 덮어 열을 내 아픈척하며 뒤로 빠져 전쟁이 끝날때까지 총 한발 쏘지않았고, 그렇게 "(일본을 위해 사람을 죽이지않은) 일본의 비국민"인채로 살아남아서 기뻤다고함
어쨋든 어릴때 여러 일을 겪으며 자라난 미쿠니는 일본 내 민족차별과 일본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를 극혐하게 되었음.
미쿠니는 1951년 긴자에서 캐스팅 되었고(27세)
부락민 차별, 조선인 강제노동자 영화(세번째 해협. 참고로 일본 첫 펄럭 로케영화), 일본군 잔학성 폭로 영화에 출연하거나
차별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평화헌법 개헌 반대, 천황 비판, 차별금지, 전체주의 반대에 목소리를 높이는 (일본에선 사회주의/좌파라고 부르는) 배우가 되었음
어쨋든
사회주의 계열 감독에다가 (도쿄재판 다큐멘터리 감독)
미쿠니가 연기하는 모습을 볼수있는
"썩은 사무라이 문화에서 일본의 가식과 전체주의가 시작된것이다"를 말한다고 해석되기도 하는
할복
오늘 저녁 9시
곥올나에서 보니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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