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4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연화는 하품을 하며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오랜만의 온천으로 몸이 노골노골했다. 가볍게 내력을 뿜어 머리칼을 말리다가, 이연화는 문득 비뚜름한 머리장식 위편으로 새롭게 만져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깜박였다. 이게 뭐지? 면경 앞에 앉아 고개를 틀자, 아직 꽃송이를 붙인 나뭇가지가 보였다. 기억을 더듬던 이연화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의 머리를 정리해준 방다병이 꽂아놓은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연화는 그 꽃가지를 빼내 탁자 한편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조심스러운 손끝이 살짝 이지러진 꽃잎을 매만져 폈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려다 말고, 이연화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조용한 방 안으로 희미한 소리가 새어들어온 탓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귀를 기울이다, 이연화는 곧 재빠르게 겉옷을 걸치고는 문을 열었다. 같은 기척을 감지했는지, 방다병과 적비성도 막 방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잠깐 시선을 주고받은 후, 세 사람은 지체 없이 날아올라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했다.

발소리를 죽인 채 이동할수록, 그 울음 소리는 조금씩 명확해졌다. 서러운 흐느낌은 귀신이 아니라 분명 인간의 음성이었다. 마굿간 근처의 지붕에 올라서서, 세 사람은 자세를 낮추고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자리에 엎드려 지전을 태우며 울고 있었다. 옆에 놓아둔 작은 향불 하나가 초라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저 여자는 누구야?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 

방다병이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가서 물어봐야지." 이연화가 몸을 날려 근처에 내려앉자, 귀신처럼 쪼그려 앉았던 여자가 오히려 귀신을 마주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건넬 새도 없이, 상대는 마굿간 안쪽으로 몇 발짝 달리더니 갑자기 눈앞에서 훅 사라져 버렸다. 방다병이 놀란 소리를 냈다. 

"뭐야, 갑자기 없어졌어!"
"이쪽이다!"

마굿간 너머에서 적비성의 낮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따라 마굿간 외벽을 빙 돌아가니, 조금 전의 그 여자가 적비성을 마주하고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방다병이 신기한 눈으로 그 뒤를 살폈다. 마굿간 한편의 벽이 문처럼 빙글 돌아가도록 개조되어 있었다. 판자를 썰어 만든 간단한 장치였으나, 한밤에 본다면 쉬이 알아차릴 수 없을 법했다. 인기척이 들리면 이쪽으로 몸을 감추었나 보군. 내심 생각한 이연화가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골격이 단단한 여자였다. 적비성과 눈높이가 비슷할 정도였는데, 강건한 몸에 비해 이목구비는 양순하기 짝이 없었다. 눈매와 눈꼬리가 똑같이 처져 있어, 가만히 있어도 묘하게 억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세 사람에게 포위당하자, 여자는 새파랗게 질려 뒷걸음질을 치다가 마굿간 벽에 등을 쿵 부딪쳤다. 그 뺨이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여자가 정신없이 변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을 아직 정리하지 못해서, 아직 미련이 남아 그렇습니다. 맹세컨대 아무것도 훔치거나 망가뜨리지 않았으니, 부디, 부디 사정을 보아 주십시오."
"여긴 어떻게 들어왔소? 옷을 보니 여기서 일하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그 문은 당신이 만든 것이오?"

방다병이 여자를 훑어보며 물었다. 새파래졌던 낯빛을 벌겋게 붉힌 채, 여자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더듬거렸다.

"저, 그, 예전에 양연이 객잔에 몰래 들고 나는 샛길을 알려준 적이 있습니다. 새로 단장을 했어도 그 길은 변하지 않아서...이, 이 문은 제가 만든 게 맞습니다. 죄송합니다...하지만, 이곳 일꾼들에게 들키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양연?"
"예. 제...제...제 반려자입니다."

힘겹게 말을 마친 여자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단어를 꺼낸 것만으로도 힘겨운 모양이었다. "무슨 딱한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일단 진정하고 말씀해 보시오." 방다병이 달래는 투로 건네자, 여자는 오히려 마음의 둑이 터진 듯 반쯤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적비성은 한쪽 눈살을 찌푸렸고, 이연화는 얼른 여자에게 다가가 매끄럽게 건넸다.

"일단 진정하고 함께 들어가시지요. 우리는 객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이 있어 잠시 묵게 된 객일 뿐입니다. 그대가 흑심을 품고 비밀 통로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면 딱히 발설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몰래 지전과 향을 태우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남들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할 사연이 있는 듯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리 새벽에 마주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잠시 차나 한 잔 들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습니까?"

여자는 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꺽꺽거리는 울음 사이사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적비성은 퍽 귀찮은 얼굴이었지만, 별다른 말을 얹지는 않았다. 이연화의 손에 이끌려 안락한 방에 앉고 나서도, 여자는 차를 세 잔이나 비운 다음에야 코맹맹이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여자의 이름은 비영으로, 천부적으로 힘이 센 양인이었다. 고아로 길거리 생활을 오래 해온 비영은, 성년이 되기도 전부터 표국의 뒤를 따라다니며 짐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이 마을에 들러 만난 사람이 양연이었다. 양연은 솜씨가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악공이었는데, 혼사를 비롯한 경사가 있을 때 불려가 악기를 연주하고 보수를 받았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여자를 처음 마주친 날, 비영은 혼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나른 다음 근처에서 소일로 나무 조각을 깎고 있었다. 

"그때, 그때 양연이 저를 보고 말을 걸었어요. 저더러 손재주가 좋은데 공예가냐고 묻길래, 저 같은 사람이 무슨 공예가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양연이 저를 때렸어요. 다짜고짜 머리를 한 대 치더라고요."

비영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방다병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초면에 사람을 때렸다니. 그런데도 별로 싫지 않았나 보군요."
"음, 왜. 자길 때리는 사람이 취향일 수도 있는 것이지."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적비성을 힐끗 보았다. 코웃음을 치는 적비성의 앞에서, 비영이 허벅지를 움켜쥔 채 고개를 숙였다.

"양연은...양연은 왜 자신이 가진 재주를 낮잡아 보냐고 했어요. 제대로 일을 배워서 공예가가 될 수도 있을 텐데, 태어날 때부터 평생 짐꾼을 해야 한다는 점괘라도 받았냐고요. 예전에 소매치기였던 자신도 지금은 악기로 벌어먹는 참이니, 너라고 뭔들 못하겠냐 했지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는 생생한 아픔과 애정, 오래 전의 이야기임에도 바래지 않은 설렘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반사적인 안타까움을 추스르며, 이연화가 부드럽게 물었다. "지전을 태워 넋을 기리던 이가 그 사람입니까?" 그 질문에, 비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속눈썹이 재차 젖어들었다. 그러나 다시 엉엉 울지 않으려 애쓰면서, 비영은 흔들리는 목소리로나마 이야기를 이었다.

처음 만난 후, 비영은 헌성에 들를 때마다 양연을 찾았다. 그때마다 자신이 만든 조각이나 장신구 따위를 주었는데, 마음에 둔 사람에게 더 좋고 예쁜 것을 주고 싶어 애쓰다 보니 점차 실력이 늘게 되었다. 잘 만든 것이든 아니든, 양연은 늘 기쁘게 선물을 받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 솜씨가 눈에 띄었는지, 이곳에 살던 공예가 하나가 양연의 장신구를 보고는 제작자를 물었다. 양연은 신나서 비영을 소개했고, 비영은 곧 표국을 떠나 공예가의 제자가 되었다. 그 산하에서 어엿한 장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을 즈음, 비영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비녀를 선물하며 양연에게 청혼했다.

"제 벌이가 괜찮았지만, 양연은 악공 일을 계속했어요. 자기 일에 자부심이 있었거든요. 그런데...그런데."

비영이 이를 악물었다. 그 얼굴로 오래된 비탄이 스몄다. 여느 때처럼 결혼식에 불려갔던 날, 양연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비영은 자신의 넋이 절벽으로 굴러떨어져 산산조각나는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객잔의 일꾼이 새파랗게 질려 헐떡이며 비영을 부르러 왔다. 객잔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목 졸려 죽은 시체가 양연이라는 것이었다. 대경실색하여 달려가던 비영의 눈으로, 곧 객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한달음에 대문 앞으로 달려가니, 객잔 안에는 이미 큰 불길이 넘실거려 여러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하던 참이었다. 눈이 뒤집혀 안으로 들어갔으나, 비영은 연기 때문에 정신을 잃고 누군가의 손에 끌려 나오게 되었다.

결국 양연은 온전한 유해를 남기지 못했다. 마굿간에 누웠던 시신은 불길에 휘말려, 그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비영은 통곡하며 이 한을 풀어달라 했으나, 양연은 그 신분의 비천함과 불탄 시신에서 나온 도난품들로 인해 구할 가치가 없는 피해자로 치부되었다. 관리들은 양연이 물건을 훔치려다 몸싸움이 붙어 죽은 것이 아니겠느냐 말하며, 자업자득으로 인해 죽은 사람보다는 화재로 죽은 사람들이 더 억울할 것이라 오히려 비영을 나무랐다.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비영은 결국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양연이, 양연이 그럴 리가 없어요. 예전과 달라진 자신을 얼마나,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데...양연이 다시 그랬을 리가 없어요."
"당시에 부인의 시신을 발견하고 전해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근처에 살던 수아라는 친구였습니다. 객잔에서 일하던 청소부였는데, 양연과 친했어요."
"지금도 같은 곳에 살고 있습니까?"
"예? 예에. 집이 가까워서, 양연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도와주었지요."
"좋습니다. 그러면, 당시에 양연이 지니고 있었던 소지품들은 갖고 계십니까?"
"도난품이라고 가져간 것들 말고는 그렇습니다. 잡동사니들뿐이지만요."

비영의 눈가가 다시금 젖어들었다. 잠자코 듣던 방다병이 물었다.

"비록 훼손된 시신이라 하나 장례를 치렀다면 묘가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 야밤에 몰래 들어와 지전을 태우고 있었습니까?"
"그곳에 다시 객잔이 들어선다는 걸 알게 된 후로...양연이 가끔씩 꿈에 나왔어요. 저 마굿간에 불타 누운 참혹한 모습으로요. 수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자신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다시 음악을 연주하고 잔치가 열리는 꼴을 두고 볼 수 있느냐 하더군요. 하지만...하지만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달리 없어서, 마굿간에 험한 시체로 누워 있던 그 넋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어서...."

비영이 다시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연화는 그 꿈이 비영의 죄책감이리라고 짐작했으나, 그런 말을 건네 비영을 위로하려 들지는 않았다. 일평생 함께하겠다 다짐했던 이를 잃어버린 비탄을, 단숨에 연기처럼 날려버릴 비법 따위는 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훔친 비영이 말했다.

"이제 여섯 살밖에 안 된 아경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겁니다. 제 평생 양연처럼 소중한 이가 생길 거라고 기대하며 살지도 않았는데, 품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는 건 정말이지...."
"아경? 자녀가 있습니까?"

방다병이 놀라 물었다. 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양연의 몸이 약하고, 제가 여성체라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생각보다 빠르게 아이가 생겼어요. 덕분에 제가 지금껏 살았지요."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 얼굴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이연화가 말했다.

"사정을 잘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쉬시고, 내일 오시쯤 시장으로 내려갈 테니 댁에 안내해 주시지요."
"예?"
"부인의 소지품을 확인하고, 당시에 시신을 발견했다던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상황을 더 명백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하지만 다, 당시에 관에서 나온 분들이 말했습니다. 시신도 불타버린 데다, 화재 때문에 증거랄 것이 남지 않은 터라 진상을 밝히기는 불가능하다고요. 그런데 어떻게...아니, 어째서 저를 돕는다고 하십니까? 외람되오나 대협들은 저, 저나 양연을 알지도 못하시지 않습니까."

비영이 크게 뜬 눈으로 물었다. 초면의 사람들이 나서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방다병이 얼른 나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천기당 사람들로, 비록 관의 사람은 아니나 부당한 일을 보았을 때 외면하지 않소. 방금 우리에게 알려준 사건에는 불명확한 부분이 많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부인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라면, 비록 오래 전 일이라도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비영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장대한 체격의 공예가는, 곧 자리에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태도가 비장하다 못해 절박했다.

"대, 대협들. 제 목숨을 달라 하셔도 좋으니, 부디, 부디 양연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밝혀 주십시오."
"일어나십시오. 이렇게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닙니다. 저희가 먼저 이 객잔의 소문을 파헤치다가 이리 연이 닿은 것이니까요."
"객잔의 소문이요?"

이연화의 말에, 비영의 눈이 둥그레졌다. 놀란 얼굴의 여자에게, 방다병과 이연화는 객잔에 떠도는 귀신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마굿간의 울음소리 이야기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던 비영은, 취화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취화탕이 붉게 변한다고요?" 어리둥절한 말에, 세 사람이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했다.

"예. 매일 그러지는 않지만, 가끔 취화탕의 물이 피처럼 변하고 나무에 흰 옷가지가 걸려 있다 하더군요."
"그, 그 일에 대해서는 저도 정말 모릅니다. 저는 온천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지라...."

비영의 대답에, 이연화가 가만히 손끝을 맞대 문질렀다. 마굿간의 울음소리에 대한 소문이 먼저였을까, 취화탕의 물에 대한 소문이 먼저였을까? 마굿간에서 울던 여자야 그럴 법하다 하나, 몰래 숨어 귀신 이야기를 꾸민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두 사건 모두 양연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까?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연화는 이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비영을 향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내일 뵙는 것으로 하지요. 부인의 물건을 미리 준비해 주십시오." 연신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다가, 비영은 방다병이 건네준 수건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꾹꾹 누르고는 방을 나섰다.

"양연이라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는지, 아니면 도둑질을 하다 죽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 사람은 정말 안됐네."

방다병이 팔짱을 낀 채 한숨처럼 말했다. 이연화 역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그러게 말이야. 마음에 둔 이와 이어지면서 그렇게 행복했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그 가약이 저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로 만든 거나 마찬가지잖아." 자연스레 우러나온 말을 마치자마자, 이연화는 어쩐지 뺨이 따갑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슥 돌리니, 두 남자가 자신을 매우 의혹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참이었다. 앗, 이 녀석들. 내심 뜨끔한 이연화가 일부러 당당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봐?"
"이연화-."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다, 이연화."

적비성이 태연하게 못을 박았다. 발목을 인정사정없이 콱 붙드는 손길 같은 말에, 이연화의 미간이 우그러졌다(방다병은 말을 도대체 왜 그렇게밖에 못 하느냐 힐난하는 얼굴로 적비성을 쏘아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는 심정으로, 이연화는 비영이 열고 나간 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저 사람을 봐도 아무렇지 않아?" 퉁명스러운 불평과 염려스러운 푸념을 버무린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야기하려 애썼으나, 마음 한편에 늘 품고 있던 불안인지라 어쩔 수 없게도 진심의 일각이 묻어 있었다.

"나나 너희들이나 순탄하고 안전한 삶을 살기는 어려울 텐데, 언제 누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게다가 나는 절대 후사를 못 봐. 저 사람은 그나마 돌봐야 할 아이라도 있지, 나는 너희한테 비탄만 남기고 사라질 수도 있단 말이야. 어찌 마음 쓰지 않을 수가-."
"네가 왜 사라져!"

방다병이 이연화의 팔을 덥석 잡으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니, 내가 당장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이연화가 피로하게 중얼거리며 눈가를 만졌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건 방소보지. 약하잖나." "너!" 방다병이 고개를 돌린 채 화난 불여우처럼 으르렁거렸다. 한숨을 푹 뱉으며, 이연화는 붙잡히지 않은 왼팔을 양옆으로 휘휘 내저었다.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됐어, 그냥 해본 말이니 가서 잠이나 자. 내일 또 돌아다녀야 하잖아."

상황을 마무리하기 위해 건넨 말이었으나, 둘 중 누구도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이연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방다병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눈빛만 보아도 그 너머의 치열한 갈등이 짐작되었다. 지금껏 자신이 주장해 왔던 '혼례 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너희 정말 나와 혼인하고 싶어? 그게 진짜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해?' 따위의 걱정을 늘어놓는 이연화를 혼자 두기 싫은 마음이 방다병의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비성은...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이연화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금원맹주는 그저, '방소보가 안 나가면 나도 안 나간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여기서 자야겠으면 여기서 자. 이곳이 천기산장도 아니고, 보는 눈도 없는걸. 도리에 어긋나는 짓만 안 하면 되잖아. 각인하네 마네 할 때부터 이미 같이 잔 적이 여러 번인데 새삼스럽게."

이연화가 체념조로 건네자, 방다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타부타 말이 없어, 이연화는 일부러 잡힌 팔을 흔들며 상대를 흘겨보았다.

"뭐야, 방소보. 제대로 말을 해. 네 방으로 돌아갈 거야? 여기서 잘 거야?"
"...여기서 잘래."

방다병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이런 꼴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나도 참 큰일이다. 이연화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가서 베개 가져와." 고개를 끄덕한 청년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오랜만에 두 사람과 함께 누운 채, 이연화는 약간 껄끄러운 사실 하나를 새삼스레 받아들였다. 한편으로 부정하고 싶었으나, 역시 혼자보다는 두 명과 함께 누운 잠자리가 더 편안했다. 독의 영향은 없었으므로 이제 한기에 잠을 못 이루지는 않았지만, 두둑한 이불 안으로 두 장정의 체열이 더해지자 춥지 않은 것을 넘어 뜨끈뜨끈해 기분이 좋았다. 그래, 계속 이런 아침을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이 사달이 났지. 이연화가 내심 스스로를 책망하며 한숨을 삼켰다. 눈앞으로는 방다병의 뒷모습이 보였고, 뒤로는 적비성의 기척이 느껴졌다. 방다병이 최소한의 예는 포기할 수 없다며 하도 난리를 친 탓에, 그들은 이전보다 한결 거리를 둔 채 누워 있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아도 되잖아."

방다병이 작게 읊조렸다. 육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이연화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며 방다병의 뒤통수를 보았다.

"반려자를 잃어 괴롭다고 해서, 그 이를 만난 일이 저 사람에게 의미가 없겠어? 비영은 양연을 만난 덕에 좋아하는 일도 찾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는 행복도 누렸잖아. 비영은 분명히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나도 그럴 거고. 그러니까...너도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방다병이 쑥스러움과 진심이 선연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 귀가 살짝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무슨 말을 돌려주고 싶었지만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이연화는 그저 어색하게 뒤척여 자세를 고쳤다. 그 바람에 무심코 하반신이 닿았는지, 적비성이 무뚝뚝한 투로 지적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이연화. 오늘은 자칫하면 딴 마음을 먹을지도 모르니까."
"넌 진짜, 이런 얘기를 할 때조차 그런 경박한 소리를 하고 싶어?"

방다병이 어깨너머를 홱 돌아보며 어처구니없이 비난했다. 그 낯빛이 민망함에 타오르고 있었다. 적비성이 흥 소리를 냈다.

"가까이 붙으면 자극이 되는데 어쩌란 말이냐. 너는 아닌 것처럼 발뺌하지 마라."
"그럼 좀 떨어지면 되잖아, 난 지금은 안 그래! 취화탕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거고-아니, 이연화. 내가 거기서 음험한 마음을 가졌었다는 게 아니라!"
"알아, 알아. 그때 오해하지 않았어. 진정하고 누워서 자기나 해, 군자의 길을 걷는 방 공자."

이연화가 방다병의 팔을 토닥거리며 달래자, 방다병은 적비성을 흘겨보면서도 순순히 자리에 누웠다. "뭐야, 너도 알고 있었던 거잖아...." 기어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안하게 웅크린 채 투덜거리는 방다병을 보며 피식 웃다가, 이연화는 곧 흐린 낯빛을 했다. 지전을 태우며 울던 여자를 떠올리자 마음이 가라앉은 탓이었다. 만일 두 사람 중 누군가가 잘못된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그들을 기려야 할까? 금방 상상되지도 않았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을 꾹 감아 그 생각을 몰아내며, 이연화는 어떻게든 잠을 청하려 애썼다. 괜한 고민에서 벗어나려 열중한 사건이었건만, 피하려던 모닥불 곁으로 무의식중에 성큼 다가앉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