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2부 사건은 이번 편으로 끝나고, 이 뒤는 다병이의 허락 투쟁기로 몇 편 더 이어질 예정임!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은 조금 뚱해져 있었다. 그럴 일이 아니라고 애써 생각했지만, 어쩐지 뚱해지는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네 어머니와 대화한 적은 없지만, 천기당의 하 당주라면 수완이 좋고 소신이 강한 사람이라 들었지."

어젯밤부터 대차게 자신을 놀려먹는 적비성의 존재 역시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방다병은 입을 내민 채 상대를 마음껏 째려보았다. 번화가에 어울리지 않도록 시커먼 차림을 한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닭꼬치 하나를 먹고 있었다. 그 입가로 얄밉다 못해 속이 들끓는 미소가 은은히 번져 있었다. 그 장사치는 자신이 대마두에게 물건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까? 방다병이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상대와 똑같은 자세로 팔짱을 낀 채, 방다병이 허세를 부리듯이 말했다.

"네가 어머니에 대해 뭘 알아? 어머니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날 빼놓을 생각하지 마."
"강호인이 되겠다고 몇 년 동안이나 다툰 모양이던데. 이 문제 역시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겠군."

적비성이 태연하게 방다병을 후벼팠다. 군자를 지향하는 사람답지 않게도, 방다병은 상대가 든 꼬치를 적비성의 어딘가에 꽂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장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방다병은 외동아들이었기에, 각인에 관한 일은 집안의 중대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결론이 나기까지 시일이 소요된다 하여 불만을 가질 입장은 못 되었다. 그렇지만! 방다병의 팔짱 낀 팔로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 닭고기를 씹은 적비성이 대수롭잖게 건넸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너와 발을 맞출 생각은 없어. 네가 허락받지 못하는 기간 동안, 나는 각인을 유지할 거다. 그게 이연화를 위해서도 나아."

그건 안 된다고 빽 대꾸하려던 방다병은, 적비성이 덧붙인 말에 그만 불쌍하게 우그러졌다. 나도 원해. 그 말을 어렵사리 뱉던 얼굴이 떠오르자, 가슴 한편이 뻐근하게 조이듯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이연화의 심중에 그만큼 깊이 자리했다는 사실을 머리로 짐작하는 것과, 그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약의 영향으로 기절할 듯이 고통받던 와중이었으나, 방다병은 그 한 마디에 피어나다 못해 폭발하던 환희를 기억했다. 비록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꺼낸 말이라 해도, 이연화에게는 분명 각인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방다병의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여 적비성과의 관계까지 멈추거나 끊어내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 앞에서 적비성하고만은 안 된다 몇 차례나 떼를 쓰기는 했으나, 방다병은 결국 이연화가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할 사람은 못 되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내 냄새를 좋아하는데. 방다병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심 중얼거렸다. 심신이 지쳐 혼미할 때마다, 이연화는 무의식적으로 방다병의 목덜미를 찾아 체취를 요구했다. 등이 달아오를 만큼 기쁜 일이었지만, 어머니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그 일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목구멍 한편이 꽉 막힌 듯이 답답해졌다.

심란하면서도 소란스러운 마음을 누르기 위해, 방다병은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배려 따위는 필요 없거든? 이연화가 그럴 마음이 있다고 했으니, 나도 절대 소외되지 않을 거야."
"네 어머니는 별로 염려되지 않는 모양이지."
"어머니는 결국 수긍하실 거야. 그 일을 염려하진 않아."

방다병이 돌려준 말에,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의외라고 말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네가 부마가 되길 오래도록 바랐던 게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지금은 거의 포기하셨어. 형식적인 잔소리만 가끔 하시는 정도야. 내가 강호에 나가는 것도 오래도록 싫어하셨지만 결국 막지 않으셨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가 무탈히 잘 살아가길 바라실 뿐이지, 어떤 이유로든 마음을 꺾고 불행하게 지내는 걸 원하진 않으셔. 다만, 이 일에 부모님이 걱정하실 만한 부분이 없진 않으니...."

방다병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이야 이연화와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지만, 부모님의 눈에 이 상황은 매우 난감하게 비칠 수도 있었다. 후사는 고사하고, 혼인조차 제대로 올리기 어려운 각인이라니.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금원맹주까지 끼어 있는 이중 각인이라니! 어젯밤부터 구상하기 시작한 문장들을 머릿속에서 굴려보다, 방다병이 재차 한숨을 토했다.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걸릴 시간도 시간인데, 난 이연화가 더 걱정이야. 나한테 화를 내시거나 말씀하시는 건 내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어. 날 때리시든, 진법이나 기관에 가둬놓든 다 괜찮아. 하지만 만일 이연화한테 뭐라고 말씀하시면, 이연화가 어쩌겠어? 설령 부모님의 의도가 나쁘지 않다 해도, 분명 상처받을 거 아니야. 어디로 숨어버리려고 들지도 몰라."

사실 방다병이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그것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뜻은 정해져 있으니, 부모님이 어떻게 나오든 바뀔 일은 없었다. 적비성의 존재가 매우 신경 쓰였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고, 무슨 일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달랐다. 비록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방다병은 이연화가 각인 이후 처음으로 건넸던 말들이 모두 진심임을 의심치 않았다. 설령 네가 그러겠다고 해도 천기당에서 날 죽이려고 들걸. 넌 제대로 된 음인하고 혼인을 해야지. 그토록 이름을 날렸던 당대의 영웅인데도, 이연화는 마치 이 각인이 방다병에게 끔찍한 손해인 것처럼 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방다병의 양친이 저어하는 말을 꺼낸다면, 이연화는 덜컥 반응하여 자책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상당히 신빙성이 높아 보이는 상상에, 방다병이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그럼 네놈이 또 끈질기게 찾아내서 따라오겠지."

적비성이 대수롭잖게 말했다. 비관적인 생각에서 퍼뜩 빠져나온 방다병이 상대를 돌아보았다. 새삼스러운 시선을 던지자, 적비성이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널 떼어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적당히 떼어질 놈이었다면, 이미 내가 떼어놨을 거다." 방다병이 흥 소리를 냈다. "내가 무슨 밥풀이나 거머리야? 떼고 말고 하게." 괜히 꿍얼거리자, 금원맹주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만일 이중 각인이 자연적으로 사라질 만큼 긴 시간이 흐르면, 이연화는 널 절대 받아주지 않으려 들 거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방다병이 거북이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흐름이었다. 두 사람 중 자신이 소외되어, 결국은 적비성만이 각인 상대로 남게 되는 상황. 아무리 희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그런 상황에서의 이연화가 자신과 다시 각인하겠다며 달려드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연화는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하늘의 뜻을 따라 방다병에게 더 어울리는 상대를 찾으란 소리나 속 터지게 늘어놓을 터였다. 안 돼, 그건 정말 싫어! 창백해진 방다병이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사람들이 환성을 올렸다. 방다병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여현의 번화가 한가운데에 마련된 무대는, 선화루에서 만들었던 것에 뒤지지 않을 만큼 크고 화려했다. 사실 설약을 포함한 무용단원들은 구색만 대충 갖춘 무대라도 준비되면 다행이라 했으나, 그들에게는 짐작보다 많은 자원과 인력이 몰렸다. 흉악한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 무용단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신우련을 억류했고, 세우단을 미행했으니 충분히 그렇게 이야기할 만했다-채명홍을 비롯한 피해자의 가족들이 앞다투어 재물을 꺼낸 덕이었다. 모인 이들 모두가 기대 가득한 눈으로 무용단의 등장을 반겼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무용단에서 미리 나누어준 금색 꽃가지를 들고는 신난 환성을 내질렀다.

검을 든 무용수들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기루의 관객들에게 익숙해졌던 무용단은, 온갖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보내는 열렬한 관심에 조금 들뜬 듯했다. 방다병은 무용수들의 틈새에 사뭇 당연한 듯이 끼어 있는 이연화를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설약은 선화루에 약속한 공연도 아니니 선생이 굳이 나서실 필요가 없다 했으나, 이연화는 약속한 무대를 마무리짓지 못했으니 그만큼은 하고 가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악사들까지 자리를 잡고 나자, 무용수들이 둥글게 둘러서 자세를 취했다. 그 가운데에서 꽃처럼 솟아난 여랑이 무대에 드리워진 비단 고리를 타고 오르려 들 때, 방다병의 시야로 조금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고리를 매어 고정한 들보 위편으로, 흰색의 무언가가 언뜻 비쳤다. 방다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높은 곳이었기에, 각도 탓으로 그 정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언제, 누가 저런 물건을 위태롭게 올려놓았을까? 좋지 못한 예감으로 미간을 찌푸린 방다병이 칼자루에 손을 얹은 것과 동시에, 악사가 현을 퉁겨 첫 음을 냈다. 위편의 상황을 알지 못한 여랑이 고리를 잡고 힘을 한 차례 주자, 들보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던 물건은 이내 기우뚱하더니 휙 뒤집어져 추락하기 시작했다. 크고 둥근 항아리 안에서, 시커먼 먹물이 쏟아져 나와 무용수들을 덮쳤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먹물 세례는 무용수들의 옷이나 머리를 더럽히지 못했다. 이미 위를 바라보던 무용수 한 명이, 빼들었던 검을 휘둘러 검은 액체를 날려버린 탓이었다. 기이한 서술이었으나 사실이었다. 넓은 면적을 고속으로 쓸고 지나간 검기에, 먹물은 마치 흐릿한 안개처럼 쪼개져 한낮의 햇빛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워낙 빠른 동작이라 놓쳐버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가 그 광경을 목도하고 더욱 놀란 소리를 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방다병은 칼자루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는군. 이대로라면, 오래지 않아 십 년 전의 기량을 뛰어넘겠어."

적비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만면에 띤 채 말했다. 방다병이 이상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넌 아직도 이연화와 겨룰 생각인 거야?"
"당연하지 않나? 각인과 비무는 별개의 일이야."

금원맹주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련하겠어." 방다병이 눈을 굴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가볍게 만지던 이연화는, 곧 별달리 힘을 주지도 않은 발로 훌쩍 뛰어 기둥 위에 올라섰다. 들보 위편을 슥 훑어본 이연화가 구경꾼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가 무대에 장난질을 쳐놓았나 봅니다. 아마도 이번 사건으로 피해를 보신 분이겠지요? 아, 저기 뛰어가네요. 아비!"

이연화가 한 손을 입가에 대고는 외쳤다. 적비성은 반사적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라 도망치던 사람의 뒷덜미를 잡았다. 적비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던 남자는, 곧 어렵겠다고 생각했는지 무용단을 향해 버럭버럭 외쳤다. 그 얼굴에는 정말 억울하고도 분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런 배은망덕한 것들, 너희가 이토록 많은 세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도 감히 무사할 것 같으냐? 너희를 보려 큰 돈을 내던 사람들을 감옥에 넣는 데에 일조하다니, 여현을 떠난들 편히 먹고 살지는 못할 것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그 대가를 받았을 뿐, 억울한 일을 당한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러는 겁니까? 정말 부당하다 여겨 원한을 품었다면 백천원이나 감찰사를 노릴 일이지, 애꿎은 무용단에 이리 음습한 행패를 부리다니. 이건 그저 소인배의 치졸한 화풀이일 뿐이오!"

성큼 나선 방다병이 단호히 쏘아붙이자, 주변 사람들이 노한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며 맞다는 소리를 연발했다. 귀한 구경을 이런 식으로 방해받고픈 이가 있을 리 없었다. 벌게진 얼굴로 무슨 욕설을 뱉으려던 남자는, 곧 말소리 대신 마차에 치인 듯한 비명을 올렸다. 그를 붙들고 있던 적비성이 그 얼굴을 무자비하게 후려친 탓이었다. 이빨이 두어 개 날아갈 정도로 강력한 일격에 놀라 숨을 삼켰던 사람들은, 이내 속이 시원했는지 잘했다며 박수를 쳤다(축 늘어진 남자를 대충 팽개쳐둔 채, 적비성은 별 해괴한 꼴을 다 보겠다는 듯이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는 일단락되었으나, 구경꾼들은 기절한 남자와 다소 어수선해진 무대를 번갈아보며 수군거렸다. 무용단에 원한을 가진 이들이 많다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어쩌면 정말로 세가에서 끈질기게 보복할지도 모르겠다, 방금 전의 검기는 대체 무엇이었느냐, 예인이 아니라 무림인 아니냐 등의 말이 어지럽게 뒤섞여 피어올랐다. 높다란 기둥 위에 올라선 채 잠시 고민하다가, 이연화는 곧 눈가를 가볍게 긁적였다.

그 손이 붉은 면사를 끌러냈을 때, 방다병은 잠깐 비명을 지를 뻔했고 적비성은 미간을 구겼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뚝 멎었다. 양손을 몸 앞에 모은 채 인사하며, 이연화는 사람들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여현에서 이렇게 이름을 밝히기는 처음이로군요. 소생은 이연화라 합니다.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아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어찌저찌 연이 닿아, 여현에 도착한 뒤 설약 낭자의 무대를 몇 번 도왔지요."
"이상이? 정말 이상이라고? 진짜로?"
"사고문주? 최근에 음인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여길 왜 와? 게다가 왜 무대에...."

갑작스러운 거물의 등장에, 사람들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경악한 소리를 흘리며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이연화가 곧 한 손을 들자, 우르르 끓어오르던 소음이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잠잠해졌다. 이연화의 손끝이 무대 위의 무용수들을 가리켰다(그들 역시 턱이 빠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렷하고 차분한 말이 이어졌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무용단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빼어난 춤사위만큼이나, 정과 의가 이루어지를 바라는 마음이 각별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세상에 큰 공을 세웠는데, 그로 인해 핍박을 받는 사건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안 될 일입니다. 옳은 일을 한 사람들이 그 대가로 화를 당한다면, 어느 누가 앞에 나서 옳은 일을 하려 들겠습니까."

이연화가 말하자, 사람들이 지당한 얘기라며 선뜻 동의의 소리를 냈다. 유난히 언성을 높여 찬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방다병은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으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틀린 구석은 없었으나, 화를 당해도 옳은 일을 할 사람이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어쩐지 묘한 심경이 되었다. 

"그러니 부디,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이 소문을 퍼뜨려 주시지요. 이 무용단이 차후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반드시 사고문 사람이 찾아가 사정을 살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연화는 물론 그 '사고문 사람'이 누구일지 지칭하지 않았으나, 그 안광과 태도에서 잠시 서늘하고 예리한 기세가 뻗쳐 나왔다. 무공을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잠시 조용해질 정도였으니, 눈과 귀가 있는 이라면 그 말을 '일이 잘못될 경우, 사고문주가 친히 걸음하여 확실하게 응징하겠다' 정도로 이해했을 터였다. 

"엄청난 고수인 것 같기는 한데...진짜 사고문주가 맞다고?" 

누군가가 작게 소곤거렸다. 그 말에 이끌린 것처럼, 군데군데에서 의혹의 소리가 피어올랐다. 방다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퍽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고문주 이상이는 세간 사람들에게 전설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갑작스레 무용수의 복장을 걸치고 나타난 사람을 그 전설 속의 인물과 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내가 나서서 보증해야 하나? 이연화가 연꽃 냄새를 풀거나, 영패를 꺼내는 상황보다야 그편이 나을 터였다. 방다병이 입을 열며 나서기 전,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누가 감히 의심하는 거요?"

위협적인 어조에, 일동이 그편을 돌아보았다. 시선의 끝에는 지극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턱을 살짝 든 석수가 냉랭하게 이었다. 그 손이 채찍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나는 백천원의 석수요. 저분은 사고문의 문주가 확실하니, 그 말씀에 거짓은 없소. 잠시 예인의 복장을 하고 계시다 하여, 부디 불손한 마음을 품는 자들이 없길 바라오."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은 경고에, 사람들은 흠칫했다가 곧 수긍의 소리를 냈다. 며칠 동안 사건 처리를 위해 열심히 돌아다닌 덕으로, 채찍을 지닌 석수의 모습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 손에 호송을 기다리는 죄수들이 벌써 수십이었다. "사고문주와 석 원주의 말씀이 맞소. 옳은 일을 행한 증인이 부당한 일을 당한다면, 감찰사 역시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오." 그 곁에 섰던 양윤춘이 덧붙였다. 싱긋 웃은 이연화가 면사를 다시 두른 채 말했다. 조금 전까지의 차가운 기색이 사라진, 활달하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자, 설약 낭자. 더 이상 무대에 수작질을 부린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멋진 춤을 보러 모이셨는데, 전처럼 방해받아서야 안 되겠지요. 여현의 모든 분들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자리인 만큼, 이런 작은 일로 마음이 상해 돌아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약이 힘차게 대답했다. 좋다는 말과 함께 기둥 위에서 훌쩍 내려온 이연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무용수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어쩐지 묘한 기분으로, 방다병은 무대에 선 채 춤을 추는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다른 무용수들과 함께, 이연화는 붉은빛과 금빛을 띤 새처럼 너울거렸다. 비록 절세의 무공 실력을 뽐내는 순간도 아니었고, 그 위엄과 기개로 영웅적인 면모를 과시하는 순간도 아니었으나, 적어도 이연화는 햇빛 아래에서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춤사위를 구경하며 연신 손뼉을 치거나 환성을 질렀다. 이연화의 한 동작에 저자 사람들이 들었던 모든 꽃가지가 피어나고 길가의 나뭇잎들이 흔들렸을 때에는, 근처의 산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이윽고 멋진 무대를 마친 무용단에게, 모였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선물을 건넸다. 주로 먹을 것들이었는데, 무용단 사람들은 매우 고마워하며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량들을 따로 모아두었다. 쉽게 상하는 음식들은 그 자리에서 맛보거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연화는 자신을 향한 선물들을 대부분 사양했으나, 한 여자가 작은 술병을 내밀었을 때에는 싱긋 웃으며 받아들었다(지켜보던 이들이 드디어 무언가를 받아주었다며 기뻐했다). 짧은 감사를 건넨 이연화가 머리를 뒤로 젖혔다. 비스듬히 선 채 술병을 기울이는 모습에서 호걸과 가인의 분위기가 동시에 풍겨, 어쩐지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때아닌 감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방다병은 문득 찾아든 상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연화 본인은 어떻게 여길지 알 수 없었으나, 이연화는 관심의 중심에 서는 일이 자연스러울 만큼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선고도는 저런 천성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끝내는 이연화를 부수려 든 것이겠지. 방다병이 우울하게 회상했다. 대중의 갈채를 받으면서도, 이상이는 항상 그 이면의 그늘에 짓눌려 왔다. 강렬한 명만큼이나 짙은 암은 그가 이름을 바꾼들 완벽히 사라지지 않고, 끈덕지게 따라와 이연화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게 이연화가 가장 바라는 삶일지는 모르겠지만...."

방다병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화봉초를 가져와 눈물과 함께 먹인 자신의 선택이, 이연화를 재차 시끌벅적하고 위험하며 피로한 삶으로 끌어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연화는 그런 방다병을 원망하며 다시 주어진 삶이 힘들다 말할지도 몰랐다. 적비성을 돌아보지 않은 채, 방다병은 이연화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래도, 나는 이연화가 건강히 살아 있어서 좋아."

지극히 이타적이면서도 이기적인 고백을 꺼낸 순간, 적비성은 퍽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왜 갑자기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냐?"
"금원맹주가 사람의 복잡한 마음을 어찌 알겠어."

방다병이 슬쩍 흘겨보며 꿍얼거렸다. 적비성이 미간을 좁힌 채 뭐라 쏘아붙이려던 때, 눈부신 옷과 장신구를 훌훌 벗어던진 이연화가 짐짓 어깨를 두드리며 걸어왔다. "아이고, 정말 다 끝났네. 이제 우리도 행낭을 챙길 수 있겠어." 홀가분하게 이야기하는 이연화를 향해, 적비성이 심술궂게 건넸다.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그런 것치고는 이름을 거리낌없이 팔아대는군."
"내 이름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쓰는 편이 낫지. 뭐 그렇게 아낄 만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연화가 대수롭잖게 대꾸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눈으로 이연화를 응시했다. 이상이든 이연화든, 자신을 아끼고 살피는 데에는 별 재주가 없었다. 역시 곁에 누군가가 붙어 있어야 해. 이연화가 용암에 뛰어드는 양초처럼 살지 않도록, 옆에서 계속 살펴주고 잔소리할 사람이 필요해! 내심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는 방다병을, 이연화가 괴이쩍은 눈길로 훑어보았다.

"왜 그렇게 봐? 네가 뭐라고 해도 그 조건은 못 바꿔, 하 당주에게 그렇게까지 죄를 짓고 싶진 않아."

이연화가 못을 박은 말에, 방다병은 그만 고개를 돌리며 눈을 굴렸다. "기대하지도 않았거든? 그리고, 어머니는 어차피 내 뜻을 따라주실 거라고!" "그럼 아무 문제 없겠네, 방 공자." 이연화가 얄밉게 이야기하며 발길을 돌렸다. 이연화의 왼편에 붙은 적비성이 작은 코웃음을 쳤다. 두 사람을 향해 대놓고 삐죽거리면서도, 방다병은 얼른 일행에 합류해 여현의 번화가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