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사생활에 폭탄이 떨어졌다 해도, 마무리해야 할 일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이연화는 흉계에 부상을 입었다가 회복된 6명의 후보들 앞에 나서 진심 어린 사죄와 함께 이 혼사의 향방을 전달했다. 

일단, 이 혼사의 최종 후보는 선정하지 않기로 했다. 원칙대로 따르자면 당시 가장 먼저 도착했던 아비 대협이 우승자라고 해야겠으나, 그는 안타깝게도 '신 만성도'와의 전투를 벌이다가 실종되었다(사실 목숨을 잃었다 둘러대려 했으나, 적비성은 아무리 가짜 신분이라도 자신이 그 따위 놈들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꾸며내지 말라며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놀란 표정을 지었던 후보들은, 그러면 마지막 시험을 따로 준비하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조심스레 꺼냈다. 이연화는 슬프게 고개를 젓고는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공개 혼사를 시작하면서 훼방을 놓는 자들이 있으리란 것쯤은 짐작했지만, 이토록 대담하게 첩자를 심어 공격해 올 줄은 몰랐다. 천만다행히도후보들이 크게 다치지 않았으며, 자신과 백천원이 적의 본거지를 뿌리뽑았으나, 이번 일을 겪는 와중 한 가지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연화는 결국 이상이를 떨쳐낼 수 없으며, 이상이는 평화롭게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이다. 설령 자신이 누군가를 택해 반려로 맞는다 해도, 그 혼사는 축하할 경사라기보다 예견된 비극과도 같을 것이다. 

"하여, 제게는 혼사가 그리 적절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애초부터 이루기 어려운 꿈이자 욕심이었던 게지요. 되지 않을 일을 두고 여러 분들께 폐를 끼친 듯하여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이연화가 쓰고도 단정한 미소를 띤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후보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교환했지만, 이연화의 단호한 분위기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어두워졌다. 개중 놀라움과 낙담을 가장 먼저 수습하고, 양손을 모아 예를 표한 사람은 종려명이었다.

"문주. 문주가 적들의 손에 홀로 납거되신 이후, 성치 않은 몸으로도 주범들을 모두 참살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설령 혼인으로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해도, 영웅과의 인연은 세상의 누구나 바라는 기쁜 일입니다. 본 공자는 문주의 뜻을 이해하고 존중합니다만, 후에 문주의 마음이 바뀌신다면 매우 반길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습니다만, 친절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종려명의 산뜻한 말에, 이연화가 엷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종려명의 얼굴로도 웃음기가 떠올랐다.

"혹시라도 후에 저희 의방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종려명을 찾으십시오. 힘이 닿는 대로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종 공자."
"그...풍양산장에도, 언제든 방문하셔도 좋습니다. 모든 이가 매우 기쁘게 맞을 것입니다."

구소양이 벌건 얼굴로 덧붙였다. 청년은 이연화의 무용담을 들은 이후, 그에게 더욱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된 듯했다. 사인백과 경설형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진한 아쉬움을 표하며 언제든 이연화를 도울 수 있으면 기쁘겠다는 말을 전했다. 후보들의 진실한 태도에, 이연화는 쌀알만한 양심이 따끔거리는 감각을 내리누르며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이 귀갓길 짐을 꾸리기 위해 발길을 돌릴 즈음, 추영인은 이연화에게 건넬 말이 있는 듯 혼자 남아 쭈뼛거리고 있었다. 이연화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 건넸다.

"추 공자. 이런 흉한 일을 겪으시게 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크게 다치신 곳은 없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예, 예에. 오히려 제가 죄송스럽습니다. 멍청하게 바꿔치기를 당하는 바람에, 문주가 위험해지셨지 않습니까...."

추영인이 민망하게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작정하고 다가온 첩자를 어찌 예측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적들 중에서도 꽤나 고수였으니, 추 공자가 막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더 해를 당하지 않으신 것이 다행스러울 뿐입니다. 부디 자책하지 마시고, 조심히 댁으로 돌아가시지요."
"예, 곧 출발해야지요. 다행히 제 몸종들도 무사한지라, 크게 힘들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리고, 저...문주."

작게 부른 추영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조용히 기다리자, 젊은 공자는 이연화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건넸다.

"염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라, 아마도 문주가 가시는 길에 드리워질 어둠이 걱정이시겠지요. 하지만...세상에 반려로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짙은 그림자는, 문주의 능력과 성품이 빼어나다는 반증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삶의 일부에 초점을 맞추어 비관하지 마시고, 언젠가 원하는 바를 이루시어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합니다."

이연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맥락과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그는 일전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아. 빛 아래 서 있는데, 어떻게 그림자가 없을 수 있겠어? 언젠가 방다병도, 이상이를 혹평하는 내게 그런 말을 했었는데. 이연화의 입가로 살짝 미소가 스쳤다. 어쩌면 추영인을 대할 때 처음으로 내비친 진심이었다. 추영인이 빨개진 얼굴로 허둥거렸다. 

"저, 죄송합니다. 제가 뭐라고, 주제넘는 말이었지요." 
"아닙니다. 고마운 사람들이 몇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추 공자." 

이연화가 손사래를 치며 건넨 답에, 추영인은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그럼, 늘 건강하십시오, 문주.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뵙게 된다면 정말 기쁠 것입니다."

추영인이 깊이 예를 표했다. 이연화는 마주 공손히 인사하고 발길을 돌렸다. 멀찍이서 이연화의 마지막 전언을 지켜보던 백천원 사람들은, 진지하면서도 매우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함께 이 큰 연극을 꾸며주느라 고생했네. 당분간 머물면서 밀린 사건 처리를 도와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석수의 옆에 양윤춘이 서 있었다. 이연화가 웃음 띤 얼굴로 인사했다.

"양 대인. 황궁에서도 이번 소식을 들었나 봅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이 문주. 큰 변고 없이 소동이 마무리되어 진심으로 다행입니다. 폐하께서 상황을 파악하고, 신 만성도에 연루된 조정 인사가 있다면 색출하여 압송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양윤춘이 잠시 주저하는 기색을 띠었다. 이연화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몇 발짝 떨어진 후에야, 이연화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제 혼사에 대해서도 신경이 쓰이셨나 보지요?"
"아무래도요. 저...문주께서, 후손을 생산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아, 그건 맞습니다. 설령 가능했다 해도 후손을 생산할 마음 따위는 없었겠지만요."
"그렇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양윤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남자는 갑작스레 자신의 어마어마한 무례를 깨달은 듯 새파래졌다.

"아, 그게 다행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진정하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잘 압니다. 다행이 맞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해졌을 수도 있으니까요."
"양윤춘, 문주께 무슨 말을 했길래 그리 기겁합니까?"

석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이연화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 대인은 실수하지 않으셨네. 좋은 일을 좋은 일이라 말씀하신 것뿐이지. 양 대인, 믿기 어려우시다면 창선 의방의 종려명 공자께 확인해 보십시오. 그가 확증해줄 것입니다." 양윤춘이 무안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이연화는 그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며 발길을 돌렸다. 대희국이나 남윤이나, 왕실이나 황실에 관련된 사람들은 적통이란 것에 과히 집착하곤 했다. 거리의 고아로 자란 이연화에게는 깊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었다. 오히려 그 적통이란 허울 때문에 생긴 사건들을 떠올리면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의 중심에 섰던 공개 혼사는, 그렇게 어떤 승자도 남기지 않은 채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워낙 흥미진진했기에, 거리에서는 이연화에 대한 말이 끊이질 않았다. 이연화는 며칠 동안 일부러 백천원에서 조용히 일에 몰두하며 소문이 수그러지길 기다렸다. 시선이 이만큼 쏠렸을 때에는, 어디로 운신하더라도 과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모하게 몸을 던지신 끝에 원하는 대로 다 이루셨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무요 대사가 찻잔을 채우며 혀를 차듯 물었다. 이연화가 무슨 소리냐는 듯 능청스러운 얼굴로 한 손을 내저었다. 아비와 보도사를 방문했을 때처럼, 먼 발치에 엎드린 불여우가 열심히 간식을 뜯고 있었다.

"으음,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별 문제랄 건 없어요."
"문제가 없다면, 정말 그저 소승과 차나 드시러 오셨다고요?"

대사가 매우 회의적인 눈으로 물었다. 이연화가 짐짓 비탄 어린 한숨을 쉬었다.

"대사와 제 인연이 꽤 깊다고 여겼는데, 제 말을 좀처럼 믿지 못하시는군요."
"문주와 인연이 깊으니 문주의 말을 좀처럼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연화가 입맛을 다셨다. 괜히 시간을 끌며 말을 돌리고 있긴 했지만, 어차피 무요에게 물을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막상 꺼내려니 영 입이 떨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저, 이건 제 지인의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이연화가 옛적부터 이어져 온 관용구를 뱉자, 무요는 눈썹을 높이 들고는 과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문주의 지인의 이야기로군요." 잠시 고민하다가, 이연화는 결국 쓴 약을 단숨에 넘기는 기분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폭 각색하여 요약했다. 세상 천지에 이런 비밀을 털어놓을 사람이라곤 무요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연륜과 함께 예전보다 한결 견고해진 부동심을 가진 사람답지 않게, 무요는 특정 대목마다 눈을 크게 뜨며 이연화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연화가 말을 맺고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물었을 때, 노승은 수염을 매만지며 한동안 침묵하다 말했다.

"그거 큰일이군요."
"큰일인 건 나도 알고 그도 압니다. 그래서, 대사가 보시기엔 뭐가 현명한 길이겠습니까?"
"둘 중 하나는 오랜 친구였고, 하나는 제자 비슷한 사람이란 말이지요. 둘 모두 각인을 유지하길 원하고요?"
"그렇다니까요. 처음엔 각인의 영향인가 싶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것만은 아닌 것 같고. 아주 머리가 터질 것 같습...같다고 합니다. 각인이 어디 보통 일입니까? 그게 얼마나 중한 일인지는 안 해봤어도 알아요. 다들 생각을 얼마나 잘 해보고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각인해봐야 한 쪽은 계속 같이 있지도 못할 테고, 한 쪽은 집안에 제대로 알리지도 못할 텐데. 대체 왜 그런 고통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까? 다들 그 지인이 너무 중요해서 그런다는데, 상대가 소중하다 해서 꼭 다 함께 고난을 겪을 건 없잖습니까."

불평불만을 마친 이연화가 답답함에 차를 훌쩍 들이켰다. 이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무요 대사가 말했다.

"그래서, 그 둘은 그렇다 칩시다. 그럼 문주는요?"
"예?"
"문주 생각은 어떤지 묻는 겁니다. 지금껏 그 둘 얘기만 주구장창 했잖아요. 그 둘에 대한 문주의-."
"제 지인이요."
"뭐 그래요. 그 지인의 마음은 어떻답니까?"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이건 어쨌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그 친구라면 모를까, 그 어린애는 정말이지."

이연화가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방다병의 고백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쿵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단칼에 거절하면 되잖아요. 당장 그러기 불편하면, 좀 있다 거절하든가. 뭐 그리 어려운 문제입니까?"

노승이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연화는 어쩐지 억울함에 사로잡혀 미간을 좁혔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간단해요. 어려움이란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지요. 문주가-아니, 그 지인이 싫으면, 그냥 싫다 하면 될 일이지요. 그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건, 아마도 그 둘도 지인에게 꽤 소중하기 때문이겠지요."
"그야 그렇지만...그것과 각인은 다른 문제이지 않습니까. 저-아니, 그 지인은 그 둘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한 번도요?"
"성적 욕구와 각인은 다르잖아요."

이연화가 뻔뻔하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무요가 마주 어깨를 으쓱했다.

"그 둘이 소중하고, 그들에게 그런 욕구를 품었던 적도 있다 하니, 마음의 방향이 완벽히 다르진 않은 듯한데. 그럼 서로의 속도가 다른 거로군요. 그렇게 말해요. 아직 마음의 속도가 같지 않으니, 어찌 흘러가는지 좀 두고 보자고 말입니다. 막연한 상황이 정 불편하면 기한이라도 정해 주든가요. 그 기한이 끝났을 때 가타부타 얘기해주면 되겠군요."

방향이 다르지 않다는 말에 뭐라 반박하려다가, 이연화는 잠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썩 나빠 보이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거절하게 되겠지만-이연화는 적비성보다도, 방다병과 각인을 유지하는 자신을 좀처럼 상상할 수가 없었다-내가 네 마음을 진지하게 여겨, 충분히 고려했다는 느낌을 주는 일은 중요했다. 때문에 며칠 전의 자신 역시 방다병에게 여유를 달라 하지 않았던가? 또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게 되면, 방다병과 적비성도 초반의 격정을 다소 잃을지 몰랐다. 어느 정도의 기한을 두면 되려나. 어쨌든 다음 희락기가 오기 전이 좋을 테니, 한 달 정도면 충분할까? 고심하는 이연화를 응시하다, 무요 대사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왜 각인을 유지하면 안 된다는 겁니까? 그러면 곧 세상이 끝날 것처럼 이야기하네요."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내 마음이 어떤지는 둘째 치고, 난 각인하기에 좋은 대상이 아니에요." 
"음. 또 그 얘기로군요." 

무요 대사가 알겠다는 듯이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했다. 굉장히 신경 쓰이는 투였다. 이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함정으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이었으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뜻입니까?"
"아, 아닙니다. 문주의 자책이 계속되는 게 안타깝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너무 오래된 습관은 끊기 어렵지요."

노승이 지나가듯이 던지며 찻잔을 채웠다. 이연화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이건-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사실이잖습니까. 이연화의 주변엔 늘 위험한 사건이 끊이지 않아요.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뭐, 그 둘 주변에선 사건이 없답니까? 보도사에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여러 소식을 듣는데, 그쪽도 만만치 않던걸요."

무요가 놀리듯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이연화는 쉽게 반박하지 못하고 불손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금원맹주와 떠오르는 협객의 행보도 그리 잠잠하지는 않았다. 다만 적비성은 잠재적 적수를 살려두지 않는 손속 때문에 원수가 적었고, 방다병은 특유의 밝고 관대하며 시원스러운 성격 때문에 악심을 품은 자가 아직 적을 뿐이었다. 무요가 쯧쯧 혀를 찼다.

"변명거리를 찾으려 들지 말고, 자기 마음에만 귀를 기울이도록 하시지요. 예전에는 강한 적을 만나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좋아하며 달려들던 분이, 어째 주변 사람 일이 되면 겁쟁이가 되시네요."
"이건 적이 아니잖습니까, 몇 없는 친인이지...아니, 그런데 왜 자꾸 제 일처럼 얘기하십니까? 이건 제 지인 이야기인데요."
"아이구, 그랬지요. 소승이 실수했군요. 어쨌든, 그 지인은 좀 진지하게 시간을 두고 숙고하는 게 좋겠습니다. 본인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바라는 게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어요. 자욱한 안개를 흩어내야 수면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법이지요."
"그 지인의 마음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 둘...아니, 적어도 하나를 위해서는 그냥 시작조차 않는 게 나아요."
"그걸 어찌 압니까? 그 지인이 점술사라도 된답니까? 남의 미래에 뭐가 가장 좋을지 멋대로 결정해버리는 건 오만이고 독단이에요."

무요가 어이없게 받은 말에, 이연화는 잠시 말문이 막혀 뚱해졌다. 오만이라는 단어는 그의 취약점 비슷한 것이었다. 괜히 곁눈으로 무요를 흘겨보며, 이연화가 투덜거렸다. 

"각인도 못하시는 승려 주제에, 현기 섞인 말은 참 잘하십니다." 
"그러게, 왜 각인도 못하는 승려를 찾아와 그런 고민을 말한답니까?"
"이런 고민을 어디다 말합니까? 스승님도 안 계시지, 사모님께는 죽어도 말씀 못 드리겠고."

이연화가 꿍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무요가 피식 웃었다. 노승은 이연화의 빈 찻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문주는 언짢겠지만, 소승은 조금 반가운 마음도 드는군요." 이연화가 괴상한 표정을 짓고 무요를 보았다.

"노망 드셨습니까?"
"쯧, 다짜고짜 그러십니까. 그런 상황이 반갑다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문주가 다른 이들과 푸닥거리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같아 반갑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고강한 사람도 외로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산에 틀어박혀 백 년쯤 외롭게 살고 싶습니다."
"허허,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차나 드세요."

무요는 정말 조금 즐거운 듯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연화는 잠시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에 삐죽거렸지만, 결국 승려가 따라준 차를 마시며 무요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을 두고 내 마음을 살펴보라고? 이연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도사를 나와 백천원을 향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각인을 유지할 수도 없을 텐데. 자신이 시간을 두고 할 일이라곤 그저 거절의 말을 유려하게 자아내는 것 정도였다. 적당한 말로는 안 되겠지. 이제는 웬만해서 잘 속지도 않으니, 내 진심이어야 해. 골똘히 생각하던 이연화가 푹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무요의 말처럼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할지도 몰랐다. 각인한 상대를 진실 이외의 것으로 얼렁뚱땅 속일 수는 없었다. 결국 스스로가 그 이유를 정말 믿어야만 상대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이연화!"

부르는 목소리에, 이연화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다병이 멀리서 불여우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을 발견한 얼굴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비단 한낮의 햇빛을 받아서만은 아니었다.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상대의 표정이 새삼스러웠다. 방다병은 날 볼 때마다 늘 저렇게 반가워했지. 그렇게 여러 번 속이고, 두고 떠나고, 집에 잡혀가도록 만들었는데도. 이연화의 앞에 다다른 방다병이 물었다.

"보도사에 다녀오는 길이야?"
"응, 잠시 대사를 보고 오느라고. 너는?"

이연화가 상대를 짧게 훑어보았다. 그 손에 작은 서신이 들려 있었다. 종이의 크기와 재질로 보아, 아마 천기당에서 온 소식인 듯했다. 목을 가다듬은 방다병이 물었다.

"저기, 이연화. 나랑 같이 천기산장에 가지 않을래?"

이연화의 눈이 커졌다.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상이 마구 휘몰아쳤다. 설마, 가족들에게 이런 상황을 함께 공표하러 가자고 제안하려는 참은 아니겠지? 그 의심이 잠깐이나마 얼굴에 비쳤는지, 방다병이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아, 아니! 우리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어머니가 부르셨어, 집안 어르신께 일이 생겨서 좀 와 달라고. 너도 함께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거든."
"하 당주가? 무슨 일인데?"
"자세히 적어두진 않으셨어. 하지만 우리를 함께 부르시는 걸 보니, 무슨 사건이 생긴 거겠지."

방다병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연화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다소 묘한 시점이었으나, 오히려 다행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방다병은 형탐 혹은 협객으로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으니, 사건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과의 일에 상대적으로 덜 신경 쓰게 될지도 몰랐다.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하 당주가 곤경에 처했다면 도와야지." 방다병의 안색이 밝아졌다. 청년은 당장 짐을 꾸려야겠다며 불여우와 함께 앞장서 걸었다. 그 뒷모습을 향해, 이연화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방다병이 퍼뜩 돌아보았다. 

"저기, 방다병. 그리고...네가 했던 얘기 말인데. 그러니까, 전에 나한테 했던 이야기들 말이야."

이연화가 눈가를 살짝 만지며 건네자, 방다병의 얼굴로 긴장이 흘렀다. 굳어지다 못해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청년을 향해, 이연화는 천천히 말했다.

"난 전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각인 말이야.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건 중대한 문제이니 생각과 말을 정리할 시간을 줬으면 해. 길어도 한 달을 넘기진 않을 거야."

잔뜩 경직되어 있던 방다병은, 이연화가 말을 마쳤을 때 조금 안도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당연히 이해해.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존중할게." 방다병이 신실하게 말했다. 이연화는 아주 옅은 미소를 순간적으로 띠고는, 청년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발길을 옮겼다. 비록 생각해 보겠다고 이야기했으나, 이연화의 마음 속에서 결과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현재의 그는 둘 중 누구와도 각인을 유지할 마음이 없었다. 적비성이 말한 편의성에 마음이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절대 안 된다며 바락거리던 방다병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되지 않을 일이었다.

둘 다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네. 이연화가 내심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어쨌든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낙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적비성이 대놓고 낙담하는 모습 따위는 잘 상상되지도 않았다). 방다병이 너무 오래 처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활달한 방 공자로 빨리 돌아오려나. 선택의 여파를 어찌 추슬러야 할지 이르게 고민하며, 이연화는 방다병과 함께 꽃나무가 가득한 산을 걸었다. 주인의 시끄러운 속을 알 길 없이, 강아지는 헥헥거리며 즐겁게 그들을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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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찬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한 게 30화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원래 이번 편 정도까지만 쓰려고 시작했던 썰인데, 진행하다 보니 뒤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일단 1부 완이라고 적어둠ㅋㅋㅋㅠㅠ 엄청 긴 글이었는데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