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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었던 콘클라베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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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황이 사흘째 의식불명인데도, 바티칸은 묘하게 활발히 굴러가고 있었음. 그 초짜 교황이 선출되자마자 속사포처럼 쏟아낸 인사명령이 희한할 정도로 효율적인 인사였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셈이었음.

"제3차 기자회견 시작하겠습니다."

국무원장 벨리니는 언론에 나서서, 내사원장 아데예미가 권고사직되었고 사도궁무처장 트랑블레는 파면되었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음. 둘 다 교황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명망 있는 추기경들이었기에, 이런 추문과 비리로 낙마했다는 사실에 여론이 들썩거렸음.

이렇게 여론이 뒤숭숭할 때 내세울 건 뭐다? 새 교황이다! 흑발에 젊고 예쁜데다 극적 스토리까지 있는 교황 뽑아놨으면 이럴 때 써야지!

이리하여 벨리니는 새 교황이 병원에 실려간 이유에 대해 언론에 절절한 사연을 풀어냈음. 탈레반이 지배하는 험지에서 기적처럼 교구를 유지해온 카불 대주교. 추기경의 의무를 다하고자 바티칸으로 향하던 도중 총격을 당했지만, 그 상처를 숨겨가며 콘클라베의 문이 닫히기 직전에 간신히 도착하였도다. 그리고 콘클라베가 끝나고 귀국하는 즉시 순교할 운명이었으나, 성령께서 역사하사 그를 교황으로 택하셨으니 이야말로 축복이 아니겠는가. 주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

안그래도 신임 교황에 대한 관심이 하늘을 찌르던 상황이라, 이 사연은 큰 반향을 일으켰음. 심지어 새 교황이 젊고 외모도 수려해서 대중적 화제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음. 멕시코 빈민가 출신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과거에 콩고 내전지역에서 활약했던 거라던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사목했던 시절까지 낱낱이 파헤쳐졌음.

"그 짐승같은 탈레반 놈들은! 그놈들이 믿는 신에게 교황 성하의 무사 회복을 간절히 빌어야 할 거요!"

사도궁무처장 테데스코가 인터뷰에서 폭언을 쏟아냈지만 벨리니조차 딱히 제지하지 않았음. 탈레반이 추기경을 쏴죽이려 한 것만으로도 심각한 도발인데, 그 추기경이 교황이 되어버렸다면? 심지어 그 총상 때문에 교황이 사망한다면? 가톨릭 전체의 수장이 탈레반에게 살해당한 결과가 되는 것이었음. 이건 기독교 계열 국가들은 물론이고 정상운영 중인 무슬림 국가들조차 비난할 일이라, 아무리 탈레반이라도 그렇게까지 국제사회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음.

게다가 주변 상황도 탈레반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음. 시스티나 인근에서 발생한 차량폭탄 테러로 극단주의 무슬림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고 있던 시기에, 젊고 인기있는 새 교황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비난이었음. 가뜩이나 서방 국가들의 원조가 끊겨서 군대 월급 줄 예산도 없이 쪼들리던 탈레반은 '이러다가 또 전쟁이 나면 정권 유지를 장담할 수 없다' 는 계산 하에 결국 고개를 숙였음. 교황의 상태에 유감을 표하며, 그날 베니테스를 쏘았던 군인을 처벌하겠다고 꼬리자르기를 시도한 것이었음. 그리고 카불 교구에 대한 탄압도 눈치봐가며 중단하게 되었음.

테데스코는 베니테스와 처음 나눈 대화를 떠올렸음.

'목자가 피를 흘리고 죽으면, 최소한 그 곳에도 양들이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겠지요.'

'사람들은 카불에 교구가 존재하는지조차도 몰라요. 국무원장이신 벨리니 예하조차 대체 아프간에 가톨릭 신자가 몇이나 되냐고 무시하셨고요. 인류복음화성의 지원이 갈수록 인색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추기경인 제가 순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 보이냐, 꼬맹이? 이제 카불 교구에 대해 전세계가 다 알게 됐어. 네 신도들도 무사해. 네가 원하던 거 다 이루어졌잖아. 이제 너만 일어나면 되는 거야.

제발.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테데스코는 울적하게 사도궁무처장 집무실 서랍을 뒤적거렸음. 지난 사흘간 테데스코는 교황이 임명한 이 직책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었음. 처장 권한으로 궁무처의 모든 기록과 장부를 열람하면서, 전임자인 트랑블레의 비리 증거들을 탈탈 털기 시작한 거임. 궁무처 직원들 중에는 트랑블레의 비리와 연루된 이들도 많았기에 당황을 금치 못했지만 테데스코는 개의치 않았음.

"어차피 난 '임시' 궁무처장이라서 여기 오래 있지도 않을 거야. 성하께서 깨어나시면 난 바로 사표 내고 베네치아로 돌아갈 거라구. 근데 내가 그 직원놈들이랑 잘 지내려고 노력할 이유가 뭔데?"

테데스코는 거침없이 증거들을 털어냈음. 벨리니는 처음에는 새 교황이 하필이면 테데스코 따위를 사도궁무처장에 임명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지만, 결국 "성하께서 사람을 잘 뽑으셨군..." 하고 마지못해 인정하게 되었음. 이건 테데스코가 외부 인사이기에, 그리고 임시직이기에 할 수 있는 짓이었음. 만약 궁무처 직원 중 한 명을 승진시켜서 처장으로 삼았다면 다른 직원들과의 의리 때문에라도 이렇게 막나가지는 못했겠지.

한편, 추기경단 단장 로렌스는 좀더 "종교적인"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음. 콘클라베 종료 절차를 관리하고, 각자 교구로 돌아가야 할 추기경들은 돌아가게 하고, 남은 추기경들은 모아서 교황의 회복을 비는 특별 미사와 기도회를 봉헌했음.

콘클라베가 지긋지긋해서 다들 빨리 집에 가고 싶어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대부분의 추기경들은 바티칸에 남아 있기를 택했음. 새로 뽑은 교황에게 제대로 순명 서약까지 하지 않고서는 영 찝찝해서 도저히 집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음. 게다가 새 교황이 성당 한복판에 쓰러져 숨이 멎어버리는 그 사태는 이 할배들 모두에게 악몽이자 트라우마였기에, 진지하게 교황의 회복을 신께 빌고 싶다는 추기경들도 적지 않았음.

문제는 이게 추기경들만이 아니었다는 거임. 로마에는 새 교황을 보기 위한 여행객들 수만 명이 와 있었는데, 새 교황을 보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에도 상당수는 계속 남아서 기다리겠다고 주장했음. 신앙을 떠나서 이 역사적 순간에 참여하는 게 목적인 관광객들 입장에서는, 새 교황이 총상으로 사경을 헤매는 동안 추기경들이 특별 미사를 드린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희귀한 역사적 순간이었음. 교황청이 그 많은 사람들을 그냥 방치하기도 곤란하다 보니 결국 그들도 미사에 참여시키게 되었음.

"...알도, 내가 성하의 회복을 비는 미사를 바치고 싶다고 했던 건, 이런 대규모로 하자는 뜻은 아니었네만."

성 베드로 광장에 가득한 군중을 본 로렌스가 허옇게 질리자, 벨리니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음.

"자, 힘내게, 토마스. 달리 누가 하겠나? 성하께서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자네를 단장으로 임명하신 거였잖아."

미사 집전을 위해 발코니에 나서면서, 로렌스는 자기가 교황도 아니건만 왠지 교황으로서 미사를 집전하는 듯한 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음. 맙소사, 혹시 이건 성하의 복수인가? 그토록 날 교황 만들고 싶어하시더니, 이런 식으로라도 간접적으로 목적을 달성하시는 건가?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로렌스가 읊자, 수만 관중들로부터 대답이 돌아왔음.

"아멘."

로렌스는 눈을 질끈 감았음. 그래. 이 미사의 목적을 생각하자. 이 많은 사람들이 성하의 회복을 빌고 있는 거야. 설마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마냥 무시하시겠어?

"Oremus pro Pontifice nostro Innocentius."
(우리의 교황 인노첸시오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로렌스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었음. 최소한 이렇게 뭔가를 계속 하는 동안에는, 로렌스는 베니테스가 자기 눈앞에서 숨결이 사라지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었음. 벌써 사흘째인데 병원에서는 아직도 교황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없고, 의사가 아니라서 실질적인 도움도 줄 수 없는 로렌스로서는, 이렇게 신께 비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음.

미사를 마치고 산타 마르타의 집으로 돌아온 뒤, 로렌스는 오디토리움에 추기경들만 모아서 또다시 작은 기도회를 열었음. 이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본인이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음.

그리고, 기도회에 드나드는 추기경들이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리는 소리를, 로렌스는 애써 무시했음.

"...벌써 사흘째야..."

"...어쩌면 정말 깨어나지 못하실지도..."

"...그럼 새 교황은 누가 해야..."

로렌스는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사흘째에 접어들면서 추기경들이 슬슬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로렌스도 느낄 수 있었음. 환자가 의식을 잃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회복될 확률은 반비례로 줄어드는 것이었음. 게다가 호흡이 멈춘 시간이 꽤 길었으니, 깨어나더라도 뇌손상이 남을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목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음.

로렌스는 귀를 막고 그 모든 가능성을 무시했음. 하지만 타고난 관리자인 로렌스의 가슴 한 구석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재잘거리기 시작했음. 이대로 인노첸시오 14세가 선종해서 사상 최단 재위기록을 세운 교황이 되는 건 아닐까? 또다시 새로운 콘클라베를 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로렌스는 자기 손으로 "또" 교황의 장례 미사를 치러야 한다면 심장이 끊어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음.

"아,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성하께서는 돌아오실 겁니다."

...트랑블레?

기도회가 끝났는데도, 트랑블레는 아직도 오디토리움 구석에 남아서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음. 그 몰골은 보기에도 딱할 정도였음.

"친애하는 조,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다가 몸 상합니다."

로렌스는 트랑블레를 증오했음. 그 인간의 비리 행적과, 특히 베니테스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음. 하지만 팔십을 앞둔 노인이 저러다 잘못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음.

사실 트랑블레는 더 이상 로렌스가 뭘 할 것도 없이 이미 추기경단 전체에서 소외되어 있었음. 아데예미는 권고사직 당하자마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트랑블레는 파면당했는데도 왜 이리 아득바득 바티칸에 붙어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추기경들의 감상이었음. 누가 물어보자 트랑블레는 "그분이 내게 끝까지 여기 남아서 지켜보라고 하셨다" 는 알 수 없는 대답을 남겼음.

"...트랑블레 영감, 여기서 혼자 궁상떨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쇼. 가뜩이나 이런 시기에 노인네 송장까지 치우고 싶진 않단 말이오."

테데스코가 투덜거리며 거들었음. 로렌스는 테데스코에게 처리를 맡기고 본인은 사라지기로 했음.

"그래. 고프레도, 자네가 조를 방으로 데려다주게. 나는 가서 정리할 게 있어서."

로렌스가 자리를 피하자, 테데스코는 다가가서 트랑블레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음.

"자, 일어나쇼, 영감. 갑시다."

"더, 더 여기서 기도하게 해주시죠."

"왜 이렇게 애쓰는 거요? 여긴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이런다고 애틋하게 봐줄 사람도 없소. 난 당신 싫어하지만, 성하께서 저렇게 되신 게 뭐 당신 탓도 아니고..."

그 말에 트랑블레가 움찔하더니 속삭였음.

"...테데스코 추기경, 내 고해성사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뭐요? 내가 왜?"

"내, 내 후임자니까. 사도궁무처장이니까. 이제는 당신이 어부의 반지를 관리하니까."

트랑블레는 울음을 터뜨릴 듯 털어놓았음.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신임 교황 성하께서 선종하시면 내 탓일 수도 있단 말입니다. 내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그분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심해지지는 않았을지도..."

그 말에 테데스코의 표정이 변했음.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몇 분 후.

"고프레도! 이게 뭐하는 짓인가!!"

로렌스는 허겁지겁 달려와서, 온몸으로 발버둥치는 테데스코를 붙잡았음.

"이거 놔!!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릴 거야!!"

트랑블레는 방금 테데스코의 주먹에 맞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쥔 채 파들파들 떨고 있었음. 코와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음. 테데스코는 미친 듯이 격분하고 있었지만 로렌스가 붙잡아서 또 달려들지는 못했음.

"그만하게, 고프레도! 이 무슨 추태인가!"

"이거 놓으라고!! 저 새끼가 뭔 짓을 했는지 알아? 나이 먹을만큼 처먹은 늙은 놈이, 자기보다 한참 어리고 쬐깐한 막내한테 표 달라고 협박하다가, 안 통하니까 일부러 병원 보낼라고 상처를 헤집어놓고...!"

"지, 진짜로 죽일 생각까진 없었..."

"닥쳐 새끼야!!"

"그만! 나도 아네! 성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어!"

그 말에 테데스코는 아연해져서 로렌스를 돌아보았음.

"알고 있었다고...? 토마스, 그럼 왜 자네는 저놈을 가만두는 거야?!"

"성하께서 용서하셨네! 자신에게 총을 쏜 탈레반도 용서하셨는데, 이런 일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면서..."

테데스코가 기가 막혀 한 마디 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음.

세 추기경 모두가 뻣뻣하게 움직임을 멈추었음. 테데스코의 개인 핸드폰이었음. 그리고 발신자 번호로는 교황 주치의가 떠 있었음.

"오, 주여..."

교황의 신변에 변화가 생기면 가장 먼저 연락을 받는 사람은 현 사도궁무처장인 테데스코였음. 지금 주치의에게서 들려오는 소식은, 아주 좋은 소식일 수도, 아주 나쁜 소식일 수도 있는 것이었음.

"스, 스피커폰으로 받게."

로렌스가 숨을 죽이고 속삭였음. 테데스코는 침을 꿀꺽 삼키며 슬그머니 통화 버튼을 눌렀음.

"나다. 무슨 일이야?"

"깨어나셨습니다."

테데스코가 말을 더듬었음.

"뭐, 뭐머뭐뭐?"

"성하께서 약 한 시간 전에 깨어나셨습니다. 기억과 의사능력 모두 온전하시고, 대화도 가능하십니다."

만세! 로렌스는 흐느끼듯 한숨을 토해내며 벽을 붙잡았음. 테데스코는 이탈리아어로 뭐라고 외치며 성호를 그었음. 트랑블레는 왈칵 울음을 터뜨릴 듯이 얼굴을 감쌌음. 정확히 사흘만에 깨어나시다니, 이런 점까지 예수를 닮으실 필요는 없었는데... 세 추기경들 중에서 가장 먼저 목소리를 되찾은 사람은 로렌스였음.

"여, 여보게? 나 로렌스 단장일세. 혹시 성하께서 방문자를 맞을 수 있는 상태이신가? 내가 바로 감세!"

"네, 실은 성하께서 찾으셨습니다. 로렌스 단장님과 테데스코 예하 두 분을 불러달라고 하십니다."

"그래!! 그럼 바로 준비해서 가겠네!"

전화가 끊어졌음. 테데스코는 갑자기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오디토리움 밖으로 뛰쳐나갔음.

"이봐, 토마스! 난 궁무처 사무실에 잠시 들렀다 가야 해. 병원에서 보자구!"

"그래. 나도 전화 몇 통만 하고 바로 가겠네!"

로렌스는 가장 먼저 벨리니에게 전화를 걸었음. 소식을 들은 벨리니는 짧게 탄성을 내뱉은 뒤, 정말 다행이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음. 그 다음에는 레이와 만도르프에게 각각 연락해서, 당장 성하를 찾아뵈어야 하니 자기 오후 일정을 빼겠다고 전달했음.

그런데 로렌스가 병원으로 향하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레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음.

"레이? 무슨 일인가?"

"예하, 저는... 제가... 제 양심에 큰 부담이 있습니다."

레이가 이렇게 쩔쩔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로렌스는 당혹스러워졌음.

"제발 이해해주십시오. 저는 만약 성하께서 잘못되신다면, 이 비밀을 무덤까지 품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성하께서 무사히 깨어나셨고, 실제로 교황직을 수행하게 되신다고 생각하니, 제가 어찌해야 할지..."

"레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콘클라베 때 기억하십니까? 베니테스 추기경에 대해 조사해보라고 하셨잖습니까. 스위스 병원에 대해..."

아, 온갖 뒷조사와 폭로가 난무하던 콘클라베 시절. 불과 며칠 전인데도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음.

"사실은 일반 병원이 아니라 의료원이었습니다."

"무슨 의료원?"

레이는 그 문장을 말하기를 매우 괴로워했음.

"그게, 소위 '성전환' 전문이었습니다."

잠시 침묵.

"...그게 무슨 말인가, 레이."

"예하께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성하께서 한 번이라도 면도를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면도기 포장조차 뜯지 않으시고..."

그 순간 로렌스의 핸드폰이 울렸음. 교황 주치의였음. 로렌스는 즉시 통화 버튼을 눌렀음.

"뭔가? 지금 병원으로 출발하려던 참인데."

"단장님, 성하를 뵙기에 앞서, 잠시 저와 대화하실 수 있겠습니까?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2-1.
베니테스는 눈을 떴을 때 여러 의미로 놀랐음.

우선은 살아서 병원에서 깨어났다는 사실부터 의외였음. 죽지 않은 건가. 살아남았나. 자기 수명이 며칠 안 남았다는 전제에서 모든 행동을 해 왔던 베니테스로서는, 갑자기 수명이 왕창 늘어나버린 기분이 되었음. 전반적인 인생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할 상황이었음.

그 다음으로 놀란 것은, 자기가 교황이라는 사실이었음. 정확히는 "아직도" 교황이라는 사실.

뜻밖에 교황으로 선출되긴 했지만, 사실 베니테스는 자기가 진짜 교황 노릇을 하게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음. 왜냐하면 자궁과 여성기가 있으니까. 선출 직후에 병원으로 실려왔으니 당연히 신체 비밀도 밝혀졌을 테고, 그래서 지금쯤이면 이미 세상 전체에 까발려져서, 교황 선출은 무효화됐을 거고 성직 자격도 박탈당했으려나. 그리 생각했음. 베니테스가 기를 쓰고 인사명령을 내렸던 이유는 그 인적구성이라면 사도좌가 "또" 공석이 되더라도 대처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음.

그런데 놀랍게도 베니테스는 여전히 교황이었음. 언론은 그의 험지 사역을 칭송했고, 탈레반에서는 그의 상태에 유감을 표시하며 카불 교구를 당분간 방관하겠다고 했고, 바티칸에서는 그의 회복을 비는 특별 미사가 매일같이 열리고 있다고 했음.

그리고 그를 살려내느라 벌써 사흘째 집에도 못 간 주치의는 퀭한 얼굴로 대답했음. 교황의 몸에서 일반적으로 없어야 할 것들을 발견했을 때 좀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지난 사흘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고.

"...성하, 사제들에게 고해성사의 비밀이 평생 불가침인 것처럼, 저희 의사들에게도 환자의 비밀유지의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말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다고요? 사흘이나?"

그 말에 주치의는 모욕당했다는 반응을 보였음.

"만약 역대 주치의들이 교황의 신체에서 뭔가 발견할 때마다 그걸 퍼뜨리고 다녔다면, 교황청의 역사는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선대 교황도 심장질환을 숨겼다던가. 하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음.

"그래도 이건 장애나 질병 같은 게 아니잖아요. 성별 문제는 가톨릭 교리상 아주 중대한 건데..."

"외람되오나, 성하, 저는 세례 안 받았고 무신론자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제게 관심사가 아닙니다."

교황 주치의가 무신론자라고?! 베니테스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지자, 주치의가 건조하게 대답했음.

"실은 그게 선대 교황께서 저를 주치의로 채용하신 이유였습니다. 본인을 교황으로 보지 않고 그냥 환자로 대해줘서 편하셨다나요."

너무도 선대 교황다운 행동이라, 베니테스는 웃어버렸음. 내 성별을 아시고도 추기경으로 임명하신 내 위대한 전임자시여. '가톨릭 교리를 따르지 않는 주치의' 라는 또 다른 형태로 내 안전을 보장하신 건가요.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비밀이 계속 지켜질 수도 있는 건가? 내가 진짜로 교황직을 수행하게 되는 건가? 베니테스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채로 잠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음.

'주님, 제 삶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고 하긴 했지만,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뭐 이런 기막힌 인생이 다 있담. 콘클라베가 끝나면 죽을 거라 각오했었는데, 죽는 대신에 그 죽을 각오로 세계 교회를 이끄는 수장이 되라는 건가. 베니테스는 이게 진짜로 신의 뜻인지 가늠하기 위해 멍해져 있다가, 다시 주치의에게 말을 걸었음.

"하지만 이 비밀이 계속 지켜질 수는 없겠지요?"

"네, 성하, 현실적으로 힘들 겁니다."

지난 사흘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콘클라베 직후라서 교황청 전체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특수 상황인데다, 주치의가 자기 재량으로 교황의 의료기록이 외부 공유되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 보통은 교황이 이 정도로 위독한 상태라면 교황청의 고위직 몇 명이라도 그 의료기록을 열람하게 되어 있었음.

게다가 베니테스는 로렌스의 능력을 믿었음. 한밤중에 선대 교황의 봉인을 깨뜨리면서까지 트랑블레의 비밀을 알아내어 폭로하던 그 과감한 행보를. 로렌스가 베니테스를 명백히 흠모하는 것과 별개로, 분명히 그에 대해서도 뭔가 다른 방식으로 뒷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리라 짐작했음. 이런 상황에서 트랑블레처럼 억지로 숨기려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은 결코 베니테스의 체질이 아니었음. 내가 주님 앞에서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 대처하는 게 낫지.

"...우선, 내가 깨어났다고 교황청에 연락해주세요."

베니테스는 침착한 미소를 지었음.

"그리고, 닥터, 보통 교황의 유고시에 교황청의 처리 절차가 어떻게 되죠?"



3.
로렌스는 주치의가 준 의료기록에서 눈을 떼지 못했음.

자궁과 여성기. 로렌스는 혼란한 머릿속에서, 레이가 들려주었던 정보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것을 짜맞춰 보았음. 성하의 몸에는 자궁과 여성기가 있다. 레이의 정보에 따르면 성하께서는 스위스의 성전환 의료원에 진료 예약을 했지만 취소하셨다. 그럼 수술로 이걸 제거하고 남자가 되려고 하신 건가? 하지만 취소하셨고?

지금 로렌스가 느끼는 충격은, 베니테스의 성별보다는, 베니테스에게 '숨겨진 비밀이 있다' 는 그 사실 자체였음. 추문과 비리가 가득했던 그 콘클라베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오점이 없었던 무결한 후보. 로렌스는 자신을 그 지저분한 콘클라베에서 끌어내어 구원해준 천사로 베니테스를 숭배해왔지만, 기어이 그 천사에게마저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꼈음.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콘클라베의 더러운 소용돌이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음.

로렌스는 떨리는 손으로 병실 문을 열었음.

"기다리고 있었어요."

베니테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음.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창문에서 비쳐들어와 그 야윈 몸을 감쌌음. 아름다우시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 로렌스는 그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을 느꼈음. 흑발의 인펙토레 추기경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매혹은 지금도 유효했음.

베니테스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는데, 무언가 동영상을 보고 있다가 로렌스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중단했음. 슬쩍 보니 그것은 로렌스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집전한 특별 미사를 촬영한 동영상이었음.

"사흘간 날 위해 많이 기도하셨더라고요. 고마워요. 나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을 텐데."

"...성하."

로렌스는 침대 곁 의자에 주저앉았음.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한 채 주저하고 있자, 베니테스가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아 주었음. 뼈만 남은 손.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 말만은 진심이었음. 조금 전 알게 된 엄청난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로렌스는 여전히 베니테스가 살아줘서 정말 기뻤고 다행이라 생각했음.

로렌스는 베니테스의 손을 붙들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음. 말을 시작하고 싶지가 않았음. 지금은 기쁜 순간이니까. 무사히 깨어나신 성하와 마주보고 손을 잡고 있는 이 행복한 순간을, 굳이 의혹과 비밀 이야기를 시작해서 망치고 싶지 않았음. 다시 그 지긋지긋한 콘클라베의 분위기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음.

마침내 베니테스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음.

"주치의가 의료기록을 보여주었나요."

"...네."

"내게 질문하고 싶은 것들이 있겠지요."

"네."

로렌스는 목을 가다듬었음.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해내는 것이 로렌스의 특징이었음.

"우선, 스위스 의료원에서의 치료에 대해 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베니테스의 표정이 묘해졌음. 분명히 주치의는 내 최근 의료기록만 보여줬을 텐데? 오래 전에 있었던 스위스 의료원 예약에 대해서는 어떻게 안 거지?

"역시 날 따로 조사하고 계셨군요."

"...네, 성하. 그랬습니다."

로렌스는 갑자기 교황의 뒤를 밟는 파파라치라도 된 것 같아서 수치스러움을 느꼈음. 아데예미나 트랑블레는 자기 비밀을 구차하게 숨기고 변명하는 인간들이다 보니, 그 비밀을 캐내는 것이 별로 미안하지 않았는데, 베니테스는 변명도 애원도 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니 낯선 기분이었음.

"치료 같은 건 없었어요. 고려는 했었지만요. 주님께 길을 보여달라 기도했고, 결국은 그 치료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지요."

"그 치료라는 게 무엇이었습니까?"

"의료용어로는 음순융합 교정 수술. 여성 포경수술이라고도 부르는 거요."

그랬구나. 레이의 말을 듣고 짐작했던 대로였음. 로렌스는 가슴이 꽉 조이는 느낌에 다시 고개를 숙였음.

"토마스, 난 멕시코 극빈자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보다 더 대접받는 곳이요. 유감스럽게도 그런 남아 선호 사상도 세계적인 현상이겠죠."

베니테스의 말투는 담담했음.

"부모님은 내가 남자라고 믿으셨고, 나도 내가 남자라고 믿었어요. 내 상황이 좀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죠. 그리고 신학교 생활은... 아시다시피 아주 정숙하잖아요. 몸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니까요."

"그럼, 전혀 모르셨던 겁니까?"

로렌스가 고개를 들었음. 사실 주치의는 아무 설명을 해 주지 않았음. 그냥 교황의 의료기록를 보여주고, 그 곳에 자궁과 여성기가 있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을 뿐. 로렌스로서는 베니테스가 자기 성별을 일부러 속이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고 의심할만한 상황이었음.

"네. 전혀요. 돌이켜보면 내가 주로 고통받는 여성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정체성을 반영했다는 생각은 드네요. 하지만 내가 다른 청년들과 신체적으로 다르다고 믿을 만한 이유는 전혀 없었어요."

"그럼 언제부터 알게 되신..."

"바그다드 차량폭탄 테러 때요. 생전 처음으로 종합검진이라는 것을 받았는데, 그때 의사들이 발견하고 알려주었어요. 당연히 나도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요."

베니테스는 로렌스의 손을 꽉 쥐었음.

"아주 힘든 시간이었어요. 사제로서 평생에 걸쳐 죄 속에서 살아온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때 교황 성하께 사임서를 냈고, 로마에 와서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지요."

"선대 교황 성하께서 아셨다고요? 그런데도 성직자로 계속 일해도 좋다고 하셨던 겁니까?"

로렌스는 믿기지 않아서 반문했음. 베니테스가 젊은 나이에 대주교에 추기경까지 올라가며 벼락출세를 거듭한 것은 선대 교황의 총애가 아주 큰 이유를 차지했음. 그런데 베니테스의 성별을 알면서도 그런 고위 성직자로 임명했던 거라고?

"네, 아셨어요. 내 몸에서 여성의 부위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을 생각도 했었지만, 비행기를 타기로 한 전날에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베니테스가 빙그레 웃었음.

"난 주님께서 만드신 존재니까요. 있는 그대로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작품에 손을 대는 것이 더 큰 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 지금도..."

"주님께서 만드신 그대로예요."

인노첸시오Innocentius.

갑자기 그 이름이 다시 떠올랐음. 특이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처음으로 그 이름을 선택하는 순간 베니테스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기 시작했음. 여성의 신체 부위를 지닌 채 평생을 가톨릭 사제로 살아왔고, 그 상태로 뜻밖에 교황으로 선출되어버렸는데, 이름을 정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베니테스가 자동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는 염색체로 인해 나를 여성이라 정의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이 보는 그대로예요."

빈센트 베니테스의 몸은 신께서 만드신 그대로 순전하고 무결하다는 것. 가톨릭 교리에 따라 신을 완전한 창조자로 믿는 한, 신의 창조물인 베니테스의 몸 역시 그 자체로 완벽하며 손댈 것이 없다는 것. 로렌스는 왜 베니테스가 수술을 받지 않고 성직에 종사하기로 결정했는지, 그리고 선대 교황이 그 선택을 존중하며 심지어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음.

로렌스는 마음이 가벼워졌음. 아까부터 그를 짓누르던 그 환멸감. 콘클라베에서 유일하게 결함이 없는 후보였던 베니테스마저 결국은 숨겨진 결함을 지닌 인간이었다는 그 비참한 깨달음에서 해방된 기분이었음. 역시 베니테스는 끝까지 무결했던 것이었음. 스스로의 이름을 "인노첸시오" 라고 선언하며, 나는 아무 결함이 없이 깨끗하다고 선포했던 그 순간까지도.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입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말했음.

"...왜 제게 이 사실을 알려주신 겁니까?"

물론 베니테스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로렌스는 레이의 조사 덕분에 결국은 진실에 도달했겠지. 하지만 정작 베니테스는 레이가 자기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음. 게다가 주치의는 비밀을 지킬 생각이었다고 했음. 그런데도 굳이 자기 쪽에서 자발적으로 주치의를 시켜서 로렌스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한 거임.

"당신이 알았으면 했어요. 토마스. 그 첫날 미사에서 당신이 했던 설교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확신이야말로 가장 큰 죄라는 것."

베니테스는, 로렌스가 깊이 사랑하는 그 눈망울을 똑바로 뜨면서, 그를 바라보았음.

"나는 세상의 확신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이 좀더 유용하게 쓰임받을 수도 있겠지요."

로렌스의 설교를 인용하는 베니테스를 보면서, 반대로 로렌스는 자신이 베니테스에게 결정적으로 끌렸던 그의 연설을 떠올렸음.

'주님의 대리인인 교황이라면, 주님이 만드신 인류 전체를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이어야 해요.'

'사랑이 아닌 증오에 빠지는 순간, 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집단만을 섬기는 교황이 되고 말 거예요. 특정한 집단만을 위한 교회가 되고 말 거라고요. 그건 더 이상 보편 교회라 할 수 없어요.'

로렌스는 보편 교회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음. 평소 파벌을 가리지 않고 웬만하면 모든 사람과 두루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그것이었음. 그런데 그의 앞에 있는 베니테스는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어선 사람이었음. 무슬림의 땅에서 가톨릭 교구를 유지한 사람. 아메리카에서 태어나 자란 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사목했고 지금은 유럽 도시인 로마의 주교가 된 사람. 남자와 여자의 신체를 둘 다 지닌 사람.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보편 교회를 위한 교황이 되겠지. 로렌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기쁨을 느꼈음. 뜻밖의 선물처럼 찾아와준 나의 교황.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하. 주치의가 의료기록을 보여주면서... 성하께 여성의 부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제 첫 감정은 안도감이었습니다."

"네?"

"저는, 훨씬 더 끔찍한 것을 상상했단 말입니다! 주치의가 단 둘이 이야기하자고 하길래, 성하께서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거나, 치명적인 장애가 남았다거나, 그런 것일 줄 알고 두려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로렌스는 눈물을 삼켰음. 그것은 사흘 전, 눈앞에서 베니테스가 숨이 멎은 채 실려가는 광경을 보아야 했을 때부터 내내 로렌스를 쫓아다닌 악몽이었음. 베니테스가 죽거나, 식물인간이 되거나, 깨어나도 오래 못 살거나... 그 모든 끔찍한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로렌스는 무진 애를 써야만 했음. 그래서 지금 살아있는 베니테스와 똑바로 눈을 마주보며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도록 감사하게 느껴졌음.

"아, 아,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베니테스가 끄덕이자, 로렌스는 두 팔로 그 야윈 몸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감쌌음. 너무 꽉 쥐면 부서져버릴까봐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듯이.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로..."

로렌스의 목소리가 떨리자, 베니테스가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었음. 그 손길만으로도 로렌스의 심장이 두근거렸음. 이분이 내가 섬길 교황이시다. 이분을 위해 충성하고 이분을 지켜드리자, 하는 감정이 샘솟았음.

"이 비밀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지켜드리겠습니다, 성하. 제 부하인 레이가 낌새를 챘지만, 그 친구는 제가 다룰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조금 전 대화했던 주치의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바그다드에서 저를 검사했던 의사는 폭격으로 죽었어요. 선대 교황 성하께서도 선종하셨고."

"그럼 더 이상은 없는 겁니까?"

"음, 그게 말이죠."

베니테스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음. 로렌스는 왠지 그 웃음이 불길하게 느껴졌음.

"지금쯤 테데스코 추기경이 주치의와 대화하고 있을 거예요."

"?!!!"

로렌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감각과 함께 후다닥 뒤로 물러섰음. 갑자기 주치의가 전화로 했던 말이 떠올랐음. '성하께서 찾으셨습니다. 로렌스 단장님과 테데스코 예하 두 분을 불러달라고 하십니다.'

"성하! 설마... 테데스코한테도... 이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이신 겁니까?!"

"이미 알게 되었을걸요. 내가 주치의한테 내린 지시는 두 가지였거든요. 추기경단 단장 로렌스와 사도궁무처장 테데스코에게 내 의료기록을 보여주라고."



2-2.
"닥터, 보통 교황의 유고시에 교황청의 처리 절차가 어떻게 되죠?"

주치의는 이 교황님이 지금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건조하게 대답했음.

"사도궁무처장이 가장 먼저 연락을 받아 교황의 상태를 확인하고, 추기경단이 새로운 교황을 선출합니다."

"네, 그럼 사도궁무처장과 추기경단 단장에게 제 의료기록을 전달해주세요."

내내 건조한 톤이었던 주치의가 그 지시에 처음으로 살짝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음. 현 사도궁무처장 테데스코가 어떤 인간인지, 그리고 선대 교황을 얼마나 지독하게 괴롭혔는지는 그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음.

"...괜찮으시겠습니까?"

"지난 사흘 동안 날 위해 막아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더 이상 그래줄 필요 없어요. 원래 했어야 했던 대로, 그 두 사람에게 제 의료기록을 전달하세요."



4.
콘클라베 첫날, 식당에서 새 추기경이 소개되었을 때, 테데스코의 첫 느낌은 '저거 사기꾼 아냐?' 였음.

인펙토레 추기경이라는 것부터가 너무 수상했음. 저런 비실한 꼬맹이가 탈레반과 싸우는 카불 대주교라는 것도 믿기지 않았음. 그래서 테데스코는 박수를 치지 않았음. 로렌스를 비롯하여 추기경단 전체가 "새로운 형제" 를 향해 박수를 치는 동안에도, 테데스코는 삐딱한 표정으로 그 사기꾼을 쳐다보기만 했음.

하지만 테데스코가 했던 모든 의심 속에서도, 이건 상상조차 못 했던 가능성이었음.

'자궁...? 그리고 저 아래에 달린 건 대체...'

테데스코의 머릿속이 마구 뒤엉켰음. 왜 내내 몰랐을까! 베니테스가 쓰러질 때마다 매번 테데스코는 베니테스의 몸을 안거나 업거나 들어 옮겨야 했음. 그때마다 작다, 가냘프다, 소년 같다고 생각했음. 성인 남자의 몸과는 명백히 촉감이나 골격이 다르다고 느꼈으니까. 그게 진짜로 남자가 아니라서 그런 거였어?! 어쩐지 손발목은 그리 가늘면서 가슴만 이상하게 두툼하더라니!

주치의는 기록을 보여주면서 베니테스는 여성이 아니라 간성이라고 설명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음. 간성이든 간장이든 어쨌든 남자는 아니라는 거잖아. 남자가 아닌데 사제 서품을 받으면 안 되는 거잖아. 교황은 더더욱 안 되는 거잖아! 이제 난 어떻게 하지?

왜 하필 나한테 이걸 알려준 거지?

가장 미치겠는 건 테데스코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다름아닌 교황 본인의 지시를 통해서라는 것이었음. 교황의 자격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이 비밀을, 베니테스는 그냥 테데스코에게 내어주었음.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몰랐더라면 마냥 베니테스가 깨어났다는 사실에만 기뻐하면서 앞으로 그를 교황으로 섬길 수 있었을텐데. 왜, 왜 쓸데없이 이걸 알아버려서.

테데스코는 떨리는 손으로 병실 문을 열었음.

로렌스가 바짝 경계하며 일어나더니, 마치 충실한 사냥개처럼 침대 곁을 가로막고 섰음. 공격을 당하면 자기 몸으로 베니테스를 감싸서 지키기라도 할 것처럼.

"고프레도! 자네 성하께 무슨 짓이라도 하면..."

테데스코와 베니테스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음.

"뭔 소리야! 내가 무슨 트랑블레인 줄 알아?!"
"자리를 비켜 주세요, 토마스."

로렌스는 몹시 불안한 눈길로 속삭였음.

"성하, 저는 문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저를 부르십시오."

아니, 저 인간은 날 뭘로 보는 거야! 로렌스와 테데스코는 문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서로 눈을 부라렸음.

둘만 남게 되자, 테데스코는 침대 곁에 털썩 앉았음.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고민하다 꺼낸 첫 마디는 이것이었음.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성하."

"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이렇게 앉아서 대화하셔도 됩니까? 누워 계셔야 하는 거면 빨리 누우시지요. 이러다 또 쓰러지시면 그때는 진짜로 가만 안 둘 겁니다."

"괜찮아요. 사흘간 충분히 누워만 있었어요."

일단 상대가 괜찮다는 것부터 확인한 뒤, 테데스코는 이를 빠드득 갈면서 본론을 꺼냈음.

"왜 저한테 이 사실을 알려주신 겁니까?"

"당신이 알기를 바랐으니까요."

"말장난 마시고, 성하. 제가 앞으로 이 정보를 가지고 대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만약 제가 이걸 다 까발리고, 성하께서 교황 자격이 없으시다고 공격하면, 그땐 어쩌실 생각입니까?"

베니테스의 표정은 평온했음.

"예, 그렇게 해 주시면 고맙겠네요. 그럼 나는 폐위될 거고, 원하지도 않았던 교황 자리에 선출되기 전으로 돌아가서, 내 원래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겠지요."

"원래 계획? 전세계에 카불 교구의 실상을 알리고, 거기로 돌아가서 죽는 것 말입니까?"

"나는 처음부터 이 콘클라베에 죽으러 왔었어요. 알고 계셨잖아요. 교황이 된 건 예상 밖의 일이었어요."

그 말에 테데스코는 입안으로 욕설 몇 개를 씨부리며 한숨을 푹푹 쉬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였음.

"성하... 이 불초한 자가 잠시 교황 성하를 예전과 같이 대하는 불경함을 범하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네, 허락해요."

"빈첸초, 넌 지금 아주 비겁한 수를 쓰고 있어."

말투가 싹 바뀌는 것과 동시에, 테데스코는 주먹을 꽉 쥐었음. 그는 지금 대단히 분노하고 있었음.

"이건 비겁해. 네 목숨 가지고 날 협박하고 있잖아. 지금 교황 자격에 문제가 있는 건 너인데, 내가 그걸 세상에 알리면, 넌 교황 그만두고 죽어버리겠다는 거야? 내가 절대로 널 죽게 못한다는 걸 알면서!"

"아뇨. 난..."

"난 계속 널 살리려고 애썼어! 네가 픽픽 쓰러질 때마다 매번 옆에서 수습해야 했던 게 누군데? 근데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런 엄청난 비밀을 알려줘 놓고, 내가 그걸 고발하면 넌 죽는다고? 뭐 이런 엿같은..."

"고프레도!"

베니테스가 날카롭게 잘랐음. 테데스코를 예하라는 존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음.

"미안해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럼 뭔데."

"내가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줘요. 내가 교황이 아니게 되더라도 더 이상 죽지 않을지도 모르죠. 이제 카불의 상황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난 당신이 다른 판단을 해주기를 바랐어요."

베니테스는 또렷하게 말했음.

"당신이 오늘 알게 된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교황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미친..."

"내 목숨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교황의 자격에 대해서만 판단해 줘요. 나는 콘클라베에서 그렇게 했었어요. 내 목숨이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교황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만 표를 주었었죠. 내가 뽑은 사람은 끝내 당선되지 못했지만."

테데스코는 한 손을 들어 머리를 헤집었음.

"왜? 왜 나한테 그런 판단을 내리게 하는 거야? 난 네 적이야. 내가 모르게 놔두는 게 너한테 좋았을 텐데."

"어차피 당신도 알게 되었을 테니까요. 이번 콘클라베에서 아데예미와 트랑블레에게 벌어진 일은 내게도 깨달음을 주었어요. 아무리 감추려고 애써도 비밀은 다 드러난다는 것을. 내 비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당신이 오늘 내릴 판단은 결국 언젠가 내려야 할 판단이에요."

그 말대로 이 비밀은 앞으로 계속 감추기는 힘든 성격의 것이었음. 언젠가는 적대 세력인 테데스코에게도 알려졌을 것이고, 테데스코는 이 간성 교황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만 했겠지.

"그래도 왜 하필 지금인데? 넌 아직 즉위식조차 안 했어. 몇 년간 네 교황 자리를 안정적으로 굳혀놓고 나중에 들통나게 할 수도 있었잖아."

"내가 폐위되어야 한다면 오히려 즉위식조차 안 한 지금이 좋은 기회예요. 한창 활동 중인 교황이 폐위되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교회에 부담이 덜하겠지요."

"이 와중에 교회에 부담 안 주고 폐위될 궁리나 하고 있는 거야? 교황이 됐으면 폐위 안될 방법을 찾아야지!"

"마치 내가 원해서 교황이 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런 거야? 교황 선출됐는데 하기가 싫어서, 적군인 나한테 폐위시켜달라고 유도하는 거야?"

"아뇨. 만약 주님께서 날 교황으로 택하셨다면 난 순종할 생각이에요."

베니테스의 목소리는 단호했음.

"난 주님이 콩고에 가라 하시니 콩고에 갔고, 아프간에 가라 하시면 아프간에 갔어요. 주님이 죽으라 하시면 죽을 생각이었으니, 내게 교황이 되라 하시면 그 역시 못할 것도 없겠지요. 하지만 내가 교황이 되는 것이 정말로 주님의 뜻인지 난 확신이 없어요. 그래서 이번 콘클라베에서 나와 끝까지 경쟁했던 두 명의 교황 후보들을 오늘 부른 거예요. 로렌스와 당신을."

그 순간 테데스코는 깨달았음.

"처음부터 이럴려고 날 사도궁무처장으로 임명했구나? 그리고 로렌스는 단장으로 임명한 거고?"

"네. 이제 아셨네요."

새 교황의 손에 어부의 반지를 끼워주는 사람은 사도궁무처장이었고, 목에 팔리움을 둘러주는 사람은 추기경단 단장이었음. 반대로 교황이 죽거나 사임할 때 어부의 반지를 파괴하는 사람은 사도궁무처장이었고, 다음 교황 선출을 지휘하는 사람은 추기경단 단장이었음. 테데스코와 로렌스를 각기 그 직위에 임명하고, 자기 성별을 알려줌으로써, 베니테스는 선언한 것이었음.

나는 당신들 둘의 인정 없이는 교황이 되지 않겠노라.

이 꼬맹이는 교황 선출 수락하고 쓰러지는 순간에도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구나. 병원에 실려가면 자기 비밀이 들통날 거라고. 그리고 사도궁무처장인 내가 그 비밀을 가장 먼저 알게 될 거라고. 근데 뜻밖에도 주치의가 비밀을 지켜주는 바람에, 그냥 들통내라고 지시까지 해가면서 내가 알게 한 거네. 맙소사, 그 짧은 순간에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거야? 왜 갑자기 선대 교황 영감을 대하는 듯한 기시감이 들지?

"...로렌스는 이미 네 비밀을 알고도 널 교황으로 인정했나 보네. 아까 표정을 보니까."

"네. 그러더라고요."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뇨. 당신의 양심에 따라 결정하길 원해요. 양심이야말로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곳이니까요. 로렌스가 그랬고, 선대 교황께서도 그러셨던 것처럼."

마지막 말에 테데스코가 빤히 쳐다보았음.

"선대 교황이? 그 양반도 알고 있었어?"

"네. 사실 내 성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바그다드 차량폭탄 테러 후 병원에 실려갔을 때였어요. 그 전까지는 남자라고만 알고 있었고요. 의사들에게서 처음 그 사실을 들은 뒤, 교황 성하께 사직서를 냈는데..."

베니테스는 자신이 수술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 것과, 선대 교황이 그의 성별을 알면서도 추기경으로 임명했던 사연들을 전부 설명했음.

그랬구나. 어쩐지, 이 꼬맹이는 자기 성별을 속이고 서품받을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면에서 베니테스의 행동 방식은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 그때도 베니테스는 자기 비밀을 얼마든지 감출 수 있었는데도 굳이 선대 교황에게 모든 것을 자백했고 판단을 구했음. 그리고 지금도 로렌스와 테데스코에게 그걸 알려주면서 동일한 선택권을 준 것이었음. 선대 교황이 그러했듯이, 이 비밀을 알면서도 베니테스를 성직자로 인정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짜증나는 것은, 테데스코는 선대 교황과 사사건건 충돌했음에도, 그 양반이 왜 베니테스를 받아들였는지 이해할 것 같다는 점이었음. 테데스코 본인이 베니테스를 관찰한 것은 겨우 콘클라베 사흘 동안만이었고, 심지어 그 기간 내내 베니테스가 부상 탓에 제대로 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테데스코는 그에게 매력과 경외감을 느꼈고 급기야는 교황으로 뽑았음. 하물며 현역에서 뛰는 베니테스를 지켜보았던 선대 교황이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 성별 따위 제쳐두고 이 사람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겠지.

"...젠장."

테데스코는 이제 판단을 내려야 했음. 자기가 알게 된 이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지.

보수적인 가톨릭 전통주의자로서는, 당연히 이건 펄펄 뛰며 성직 박탈을 요구해야 할 사유였음. 하지만 테데스코는 자기가 베니테스를 공격하거나 성직을 박탈시키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애초에 이 정보를 알았을 때의 첫 반응이, '왜 성별을 숨겼냐' 가 아니라 '왜 나한테 굳이 이걸 알려줬냐' 였다는 사실부터가, 테데스코가 방금 얻은 이 무기를 베니테스를 향해 휘두르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음.

처음 만난 날, 베니테스의 상처 가득한 몸을 보았던 날부터, '이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 고 내내 생각했음. 그 감정은 성별을 알게 된 지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해졌음. 여자의 신체 부위를 가진 사람이 그런 험지에서 평생 헌신해왔다고? 똑같이 총상을 입고 채찍질을 당하더라도, 그게 남자인 경우와 여자인 경우에는 지켜보는 사람의 심경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음. 그런 베니테스를 지켜주지 않고 도리어 공격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음.

아, 내가 이 꼬맹이를 생각보다 너무 많이 좋아하는구나.

"고프레도."

테데스코가 한참 고민하자, 베니테스는 특유의 잔잔한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불렀음.

"이건 내게도 당황스러운 일이에요. 내가 콘클라베 사흘 동안 죽도록 고생한 건 전부 로렌스를 교황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어요. 나 자신은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이고, 버려져야 할 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의 보신을 위해서는 철저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마지막에 보니 내가 교황이 되어 있더라고요."

베니테스가 쓸쓸하게 웃었음.

"난 주님께서 그분이 택하시는 사람을 다음 교황으로 이끄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게 나일 가능성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거든요.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내가 주님이 택하신 사람일까요. 아니면 추기경단이 역사상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빨리 되돌리고 다른 교황을 뽑아야 하는 걸까요."

그 점에 대해서라면 테데스코는 지난 사흘간 생각할 기회가 많았음. 베니테스가 내내 깨어나지 않아서,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고 다른 교황을 뽑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루하루 시달려야 했으니까. 신임 교황의 의식불명이 길어지자 불안감을 드러내며 다음 콘클라베의 가능성을 수군거리는 여론도 많았음.

그리고 그때마다 테데스코의 머릿속에서 아주 강렬하게 들었던 생각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었음. 빈센트 베니테스는 이렇게 죽을 리가 없다. 내가 지켜본 그 사람은 분명 주님께서 택하신 교황이셨고, 나는 그에게 표를 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추기경단의 그 누구도 그 사람보다 더 나은 교황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이 지금도 유효한가? 신임 교황의 몸에 자궁과 여성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도? 과거의 테데스코였다면, 여성의 신체 부위를 가진 사람을 교황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음. 하지만 베니테스의 굳센 눈동자를 보면 더 이상 자신이 없어졌음. 특히 마지막 투표에서 베니테스를 뽑으며 느꼈던 그 이상한 기분.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과 바람은, 마치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신 듯한...

"...난, 난 마지막 투표에서 널 뽑았었어."

"그럼 지금은요? 이제 내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도, 당신은 과연 나를 뽑을까요?"

글쎄, 과연 누구를 뽑을까? 테데스코는 한 번도 로렌스를 교황으로 지지한 적은 없어서 그쪽은 고려하지 않았음. 테데스코가 지금 고려하고 있는 교황 후보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 지금 콘클라베를 한다면 나는 베니테스가 아닌 나 자신을 뽑을까? 나는 남자이고 내 몸에 남성기가 있으니, 그것으로 베니테스보다 내가 더 교황의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콘클라베 첫날부터 테데스코가 원했던 시나리오이기도 했음. 자신이 교황이 되고, 베니테스를 곁에 두면서 지켜주는 것. 베니테스한테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것만 먹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사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건 테데스코의 개인적인 욕망일 뿐이지 딱히 교회를 위한 비전은 아니었음. 교회를 위해서는 누가 교황이 되는 것이 더 옳은 일일까.

오디토리움에서 창백한 얼굴로 성호를 긋던 베니테스의 모습이 떠올랐음.

'부디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미래의 교회를 만들어 갈 교황을 내려주시기를. 아멘.'

마치 예수를 연상케 하던 그 신성한 모습. 그것은 테데스코가 처음 느낀 감정이 아니었음. 옆구리 상처와 채찍 자국이 가득한 몸으로, 나는 기꺼이 죽음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하던 날부터, 테데스코는 베니테스를 보면서 예수를 느꼈음.

그 예수가 지금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를 똑바로 보며 말하는 듯했음.

자,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요한복음 13:27)

테데스코는 유다가 되고 싶지 않았음.

"...난, 그래도 널 뽑을 거야."

테데스코의 목소리가 떨리자, 베니테스는 앙상한 손을 내밀어 테데스코의 손을 잡아주었음.

"젠장. 오해하지 마. 내가 여성 사제 서품을 지지하는 일은 평생 없을 거야. 이걸로 내가 전향했다는 생각 따위 하지 마. 하지만 빈첸초, 너는... 내가 널 뽑은 건..."

고개를 든 테데스코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음.

"난 그날 분명히 성령께서 널 택하셨다고 느꼈어. 내가 느낀 것을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것뿐이야."

"그렇군요."

베니테스의 대답은 간결했음. 테데스코는 길게 한숨을 쉬었음.

"이제, 다시는 널 빈첸초라 부를 수 없겠지."

"원하면 계속 그렇게 해도 돼요."

"아니, 아닙니다. 성하. 제발 그만하십쇼. 오늘 제가 저지른 불경함을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지나친 너그러움을 베푸셨습니다."

테데스코는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웃었음.

"차라리 성하께서 제게 교황의 권위를 들이대며, 비밀을 지키라고 복종을 요구하셨다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히 교황을 제 양심에 따라 판단하라니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그게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인걸요. 인간에게 양심과 자유 의지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실 겁니까? 성하의 치세 동안 밤낮으로 논쟁과 말다툼이 끊이지 않겠군요."

"예. 자신 있어요. 당신이 이제껏 나한테 논쟁에서 이겨 본 적이 없다는 걸 잊으셨나요?"

베니테스가 눈동자를 반짝였음. 과연 사실이기에 테데스코는 반박할 수가 없었음. 맙소사, 우리가 대체 어떤 교황을 맞이하게 된 거지? 인노첸시오 14세가 만들어갈 시대에 대해 묘한 기대감이 샘솟았음. 부디 그 시대가 길고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건대는, 속히 쾌유하시고 앞으로는 제발 몸을 좀 챙기십쇼. 이제는 더 이상 혼자만의 몸이 아니십니다. 이렇게나 야위셔서 대체 어쩌시려고..."

테데스코가 베니테스의 뼈만 남은 손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혀를 끌끌 찼음. 베니테스는 웃었음.

"고마워요. 노력해볼게요."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성하. 푹 쉬시고 얼른 쾌차하십쇼."

테데스코가 천천히 병실 문을 닫고 나오자, 밖에서 내내 기다리던 로렌스가 급히 달려들었음.

"고프레도! 대체... 흡?"

테데스코가 두 팔로 와락 끌어안았음.

"축하하네, 토마스."

"뭐, 뭐가?"

"단장으로서 사상 최고로 성공적인 콘클라베를 열었던 것을 축하해. 저분은 정말로 위대한 교황이 되실 거야."

로렌스의 입이 벌어졌음.

"자, 자네, 고프레도, 그럼..."

"응. 난 이만 갈게, 토마스.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라서 말이야. 새 교황 성하를 위해 어부의 반지도 맞춰야 하고, 즉위식도..."

베니테스의 그 앙상한 손을 다시 떠올리며 테데스코는 궁시렁거렸음. 교황의 손가락이 그리 가늘다면 어부의 반지를 어떤 사이즈로 제작해야 하는 걸까. 수단도 가장 작은 치수조차 저분한테는 너무 클 것 같은데.

병원 밖으로 나오는 길, 테데스코는 기가 막혀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음. 이번 사건에서 베니테스가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음. 이렇게 극우파의 수장인 테데스코가 교황의 최대 비밀을 묵인해버렸고, 그걸 교황 주치의와 추기경단 단장이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교황의 비밀이 진짜로 들통나더라도 극우파는 그걸로 교황을 공격할 동력을 잃어버린 셈이었음. 테데스코 추기경이 즉위 초반부터 그걸 알면서도 내내 눈감아주고 있었다고 증언하게 될 테니까.

이미 선종한 선대 교황이 내려다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음. 그래, 당신이 이겼소. 내가 졌소. 당신이 죽기 전에 히든 카드처럼 임명해둔 저 막내 추기경은 대단한 걸물이오. 이제 난 저분께 마음을 빼앗겼고 평생 충성하게 되겠지.



5.
「산 위의 등불이 고을 전체를 비추듯, 카불을 밝게 비추는 빛이셨던 베니테스 신부님. 부디 이제는 세상 전체를 비추는 빛이 되실 분을 뽑아 주세요. 살아서 다시 뵙지 못한다면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베니테스는 잠시 눈을 감고 카불을 떠올렸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 천국에서밖에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 하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생각보다 좀 오래 미루어야 할 것으로 보였음.

그에게는 이제 새로운 교구가 생겼음. 콩고를 떠나 바그다드로, 바그다드를 떠나 카불로 교구를 옮길 때마다, 베니테스는 언제나 신도들과 눈물의 작별을 했고, 그 다음에는 새로 파견된 교구를 위해 헌신하며 모든 것을 바쳤음. 다만 이번 교구는 좀 특별해 보였음.

그의 교구는 이제 전세계가 되었음. 그리고 그를 사제로 파견한 이는 교황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셨음. 그는 이제 특정 교구에 파견된 사제가 아니라, 신의 명령으로 보편 교회 전체의 대사제가 되었음.

"세상 전체를 비추는 빛이라..."

베니테스는 빙긋 웃었음. 새로운 교구가 주어졌을 때의 감정은 언제나 낯선 것이었음. 하지만 평생에 걸쳐 베니테스가 끝없이 익혀 온 기술이 있다면, 자신에게 맡겨진 땅과 그 땅의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었음. 이 세계가 나의 교구이고 인류 전체가 나의 교구민이라면, 나는 내 삶을 바쳐 그들을 사랑하리라.

베니테스는 처음으로 교황이 되고 싶어졌음.

그래서 지금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흰 수단을 걸치면서, 옆에서 주치의가 건조하게 떠드는 것을 듣고 있었음.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하.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이라도 어지러우시거나, 피곤하시거나, 통증이 느껴지시면 바로 중단하고 쉬셔야 합니다."

"성하, 제발 의사 말 들으세요. 추기경단 전체를 대표해서 말씀드리는데, 저희들 모두 다시는 교황께서 쓰러지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옆에서 로렌스가 애원하다시피 하자, 베니테스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음. 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아주는데 내가 어찌 쓰러지겠습니까.

성 베드로 성당의 중앙 발코니에서 추기경의 선포가 시작되었음.

"Annuntio vobis gaudium magnum: Habemus Papam! Eminentissimum ac Reverendissimum Dominum, Dominum Vincent, Sanctae Romanae Ecclesiae Cardinalem Benitez, qui sibi nomen imposuit Innocentius."
(매우 기쁜 소식을 발표하겠습니다. 새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지극히 탁월하시고 공경하올 분,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 빈센트 베니테스께서는, 스스로를 인노첸시오로 명명하셨습니다.)

사실 이 선포는 이미 큰 의미가 없었음. 원래는 새 교황의 이름과 정체를 처음으로 알리는 문장이지만, 지금은 새 교황이 누구인지 다들 알고 있으니까. 창문 밖의 군중들이 기다리는 것은 바로 교황 본인의 등장이었음. 그 동안 병원에만 있느라 한 번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사진과 동영상으로만 공개된 교황을.

열린 발코니를 통해 햇살이 비치며 신선한 바람이 들어왔음. 마치 시스티나 성당의 깨진 창문으로 들어왔던 그 빛과 바람을 떠올리게 해서, 베니테스는 미소지었음.

다들 오래 기다렸지요. 지금 갑니다.

몇 걸음을 내딛자, 찬란하도록 눈부신 햇살과 함께, 우레와 같은 환호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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