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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5 16:00
#플로이드길들이기
창 밖으로 지저귀는 새소리, 햇볕에 데워져 온기를 머금은 이불 촉감, 창문을 넘어 번지는 햇살들. 메이저는 몽롱한 정신으로 꾸물거리다 번쩍 떠오른 생각에 팔을 푸드덕거렸다.
어제 마크와 키스했다.
그랬다. 동생의 짝으로 점찍었다고 해 놓고선 그에게 달려가 입맞췄다. 첫키스의 맛은 달지도 동화같지도 않았다. 혀가 입 안을 헤집을 때마다 머릿속이 같이 뒤엉켜만 갔다. 닿은 숨결은 축축했고 가슴 가장 안쪽이 자꾸 저릿해 숨조차 제대로 들이쉬기 버거웠다. 심장이 자꾸 바닥으로 쾅쾅 내동댕이쳐지는 것만 같은 충격을 느끼며 메이저는 깨달았다. 왜 비련의 주인공이 단 한 번의 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지.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면서도 허리를 꼭 안은 마크의 손은 단단하게 자신을 받쳐줘서 눈물이 났다. 갑작스러웠던 첫키스의 끝은 메이저가 흐느끼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는 자격이 없는데, 더 좋은 사람을 두고 나를 봐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메이저는 전장에 애인을 보낸 이처럼 서러웠다. 지난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마지막으로 본 마크가 어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가지지 못했을 때는 그저 포근하고 아름답던 모든 것들이 메이저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다. 손에 남은 건 더럽게 끈적거리는 무언가뿐.
다시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나왔다. 이번 눈물은 익숙했다.
메이저에게는 결핍이 있었다. 오로지 메이저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닌, 메이저가 나약해 생긴 고통이었으니까. 가문의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치열해야만 했던 가족들 사이에서 메이저의 마음은 늘 풍랑에 흔들리는 종이배마냥 젖어 부식되고 다시 말라비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처음 마크를 발견했을 때 메이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메이저는 마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누리고 거느리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하는 자신만의 왕국의 젊은 왕. 메이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들. 하지만 메이저만이 아는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마크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작은 비밀이자 손에 꼽을 만큼 드문, 메이저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사람과의 기억이었다.
그날도 메이저는 혼자였다. 비슷비슷한 저택의 그저 그런 파티. 자신을 괴롭히지는 않아도 말을 걸지 않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메이저는 정원으로 향했다. 석양이 지는 하늘 아래 벌 한 마리가 힘없는 날갯짓을 하며 메이저의 손에 앉았다. 분명 배가 고픈 게 틀림없었다. 꽃에게 데려다 주면 기운을 차리지 않을까? 메이저의 발걸음이 분주히 움직이며 정원 깊숙한 곳까지 다다른 끝에 느리게 멈췄다. 키보다 한참은 높이 뛰어야 꽃에게 닿을텐데... 메이저는 열심히 폴짝폴짝 뛰다 발목이 꺾인 채 주저앉았다. 발목에 올라오는 아린 통증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벌을 살폈지만 이미 작은 친구는 사라진 채였다.
“나는 잘 하는 게 없어...”
”거기까지 데려다 줬으면 알아서 찾아가야지.“
덤불이 움푹 패인 곳에 가만히 앉아있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메이저를 늘 다그치는 선생님처럼 엄한 눈으로 메이저를 일으켰다.
“...잘못했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해? 벌한테 꿀을 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 아냐?”
“맞아요...”
“잘했네. 나라면 안 그랬겠지만. 어쨌든 넌 잘못한 거 없어.”
그 말에 우습게도 눈가가 따끔거렸다. 메이저는 코를 문지르면서 소년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은 늘 그랬다. 메이저가 생각하고 행동하면 도통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저지른다고 하면서, 메이저가 생각 없이 있을 때만 모두 메이저에게 잘 했다고 말했다. 언제 그가 선의로 한 행동으로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나?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없었다.
그래서, 잘했다는 그 한 마디가 뭐라고 메이저는 아픈 것도 잊어버린 채로 눈 앞의 소년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둘은 파티장 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악과 바람소리를 배경삼아 쭈그려 앉은 채로 조잘거렸다. 소년의 이름은 마크라고 했다. 멋진 이름이었다. 게다가 마크는 메이저의 이름을 듣고도 놀리기는커녕 대수롭지 않게 그를 대했다. 네가 왜 우리 아빠랑 같은 이름이라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아이들보다 훨씬 멋있었다.
”나는 벌이랑도 친구가 되고 싶어. 백설공주는 그렇게 하던데.“
”그건 벌이 백설공주의 왕국의 백성이라 그래. 백설공주는 벌을 지키고 벌은 백설공주를 해치지 않는 거야.“
”그치만 왕은 무서워. 나는 잘 못할 것 같아...“
”그러면 널 지켜줄 사람을 만나면 돼. 그건 뭘 먹고 뭘 입냐보다 훨씬 중요한 거야.“
”형아는?“
”나는 지키고 싶어. 자기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머저리한테 얽매여 있는 건 지긋지긋해.“
좋은 학교에 들어가 인맥을 쌓고 사업을 확장해 거대한 내 세상을 만들 거야. 그의 말은 메이저가 소망하는 착한 일들과는 하나도 닮은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 나도 형이 지켜주면 안돼? 메이저는 그 말을 하려다 입 안으로 삼켰다. 메이저가 생각하고 하는 말들은 모두 안좋은 결과를 불러왔으니까.
”너도 내가 지켜줄게.“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렇게 쳐다봤잖아.“
그런 건 말 안해도 다 보여. 마크는 메이저의 구두 앞코를 털어주며 씩 웃었다.
그게 다였다. 둘의 대화는 메이저의 대화가 늘 그랬듯 다음 따윈 없었고 마크는 그 뒤로도 세상의 정중앙을 우뚝 지키며 군림했다. 가장자리를 떠나는 순간 갈 곳이 없어지는 메이저만이 마크를 계속 보며 그 날을 기억하고 되뇌었다. 마크는 잊어버렸을 지도 몰라, 라는 말은 어느새 마크는 잊어버렸겠지, 라는 말로 바뀌었고 메이저 역시 점차 흐릿해지는 대화를 오래된 일들 사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묻어버리고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메이저는 마크에게 건 기대를 잡고 있었다. 그날 보여준 모습은 분명 다른 이들과 달랐으니까. 마크는 메이저의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그건 마크의 뒤에 붙는 세러신보다, 그의 결좋은 금발과 다부진 턱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래서 메이저는 아주 오래되어 바스라진 기억을 소중하게 쥐고 선자리에 나갔다. 어쩌면 우리가 나눈 것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당신이 그대로라면, 우리는 잘 맞는 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메이저가 하고 싶은 말은 그뿐이었다.
마크가 정말 좋은 사람이어서 메이저에게 이리도 아까울 줄은 메이저는 결코 몰랐다.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마크에게 얼씬도 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 서러웠다.
밥에게 자꾸 문자가 왔다. 전화는 안 해서 다행이었다. 소리내어 운 것도 아닌데 목이 꽉 잠겨 있었으니까. 내용도 별 얘기는 없었다. 점심은 먹었냐, 오늘 날씨가 좋으니 산책이라도 하라는 뭐 그런 내용들. 배도 안고프고 커튼을 친 방안은 우중충했지만 메이저는 정성껏 답장을 했다. 그리고 메세지함을 하나씩 세었다. 밥에게 온 메세지, 광고, 광고, 광고.
마크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나같아도 연락 안했겠다… 생각나서 왔다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키스를 하더니 울어제껴서 뒷처리나 하게 만들고. 괜찮다. 어차피 이런 건 익숙했다. 사람들은 늘 친절하게 다가와 말없이 사라지곤 했다. 메이저는 시작에 서툴고 끝내는 게 능숙한 사람이었다. 기실 메이저가 가장 서투른 건 두 번째를 시작하는 일이었다. 메이저는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할 것도 없으니 가만히 있어야지.
...
어디서 자꾸 진동이 울리는 것만 같아 벌떡 일어나기를 2번. 여전히 핸드폰은 그대로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자꾸 뒤척이는 자신이 한심하고 서글펐다. 지금도 내 핸드폰은 그대론데... 아니, 진짜 어디선가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메이저의 핸드폰은 가만히 있는데 대체 어디서? 메이저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진동의 근원지를 찾아 헤맸다. 침대 아래, 탁자 위, 화장실, 옷장 안, 그리고 소파...? 널부러진 옷더미 사이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겨진 옷들을 헤집다 보니 툭 떨어진 핸드폰 하나가 여전히 시끄럽게 진동을 울렸다.
“찰리 영...?”
이걸 받아야 하나. 누구 건지도 모르겠는데...? 메이저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액정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 좋은 아침이에요. 메이저. 잘 잤나요?
“네?”
메이저는 다시 액정을 확인했다. 찰리 영, 모르는 사람인데. 아닌가? 혹시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일까? 그런데 이 핸드폰은 언제 넣어놓은 거지? 내가 받을 줄은 어떻게 알고?
/ 어젯밤에 많이 지친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웠어요. 푹 잤나요?
푹 잤나? 메이저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 다행이에요. 이따 저녁에 데리러 갈게요.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탁 트인 곳에 가면 마음이 좀 풀릴 거에요. 4시까지 갈테니 준비해 둬요.
“...근데 누구세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잠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이저는 다급하게 변명을 웅얼거렸다.
“제가 방금 이 핸드폰을 발견했거든요! 여기가 어디냐면 제 방이고, 저는 메이저 메이저 플로이드인데 어떻게 이 핸드폰이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이 핸드폰의 주인을 아시나요?“
/ ...만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보다 메이저, 이런 적이 이전에도 있었나요?
“네? 아뇨? 처음이에요. 그게 이상한 걸까요?”
/ 물론 아니죠. 다행입니다. 그럼 4시까지 데리러 오겠습니다.
“저...!”
/ 안된다는 답은 받지 않겠어요.
“핸드폰도 가지고 갈까요? 그러니까, 지금 통화하는 이 핸드폰요.”
/ ...네. 가지고 와주세요.
“네에...”
통화가 끊어지고 나서야 찰리 영이 누군지 물어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메이저는 찝찝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미적미적 걸음을 옮겼다. 4시까지 온다니 지금부터 슬슬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정말 누구지?
야속한 액정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
[ 형, 갈 때 뭐 좀 사갈까. ] 밥
[ 햄버거? 밀크쉐이크랑 같이 사갈까. 오랫만에? ] 밥
[ 나 지금 나가서 같이 못 먹을 것 같아ㅠㅠ ]
[ 응? 어디 가는데? ] 밥
[ 어... 몰라. 찰리 영이라는 사람이 만나자는데? ]
[ 아니 형 ] 밥
[ 어딘데 ] 밥
[ 나가지말고잠깐 ] 밥
[ 형 ] 밥
뭐라고 해야 안 이상하게 들리지? 고민하고 있는데 자켓 안주머니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아까 그 남자였다. 받아야 하나? 옷을 입긴 했는데 나가는 게 맞는지 아닌지 몰라 입구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은 지가 벌써 10분째였다. 슬슬 다리도 저리고, 일어나고 싶고...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우물쭈물거리는데 따갑게 내리쬐던 햇볕 아래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오래 기다렸어요?”
그토록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던 마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창 밖으로 지저귀는 새소리, 햇볕에 데워져 온기를 머금은 이불 촉감, 창문을 넘어 번지는 햇살들. 메이저는 몽롱한 정신으로 꾸물거리다 번쩍 떠오른 생각에 팔을 푸드덕거렸다.
어제 마크와 키스했다.
그랬다. 동생의 짝으로 점찍었다고 해 놓고선 그에게 달려가 입맞췄다. 첫키스의 맛은 달지도 동화같지도 않았다. 혀가 입 안을 헤집을 때마다 머릿속이 같이 뒤엉켜만 갔다. 닿은 숨결은 축축했고 가슴 가장 안쪽이 자꾸 저릿해 숨조차 제대로 들이쉬기 버거웠다. 심장이 자꾸 바닥으로 쾅쾅 내동댕이쳐지는 것만 같은 충격을 느끼며 메이저는 깨달았다. 왜 비련의 주인공이 단 한 번의 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지.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면서도 허리를 꼭 안은 마크의 손은 단단하게 자신을 받쳐줘서 눈물이 났다. 갑작스러웠던 첫키스의 끝은 메이저가 흐느끼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는 자격이 없는데, 더 좋은 사람을 두고 나를 봐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메이저는 전장에 애인을 보낸 이처럼 서러웠다. 지난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마지막으로 본 마크가 어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가지지 못했을 때는 그저 포근하고 아름답던 모든 것들이 메이저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다. 손에 남은 건 더럽게 끈적거리는 무언가뿐.
다시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나왔다. 이번 눈물은 익숙했다.
메이저에게는 결핍이 있었다. 오로지 메이저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닌, 메이저가 나약해 생긴 고통이었으니까. 가문의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치열해야만 했던 가족들 사이에서 메이저의 마음은 늘 풍랑에 흔들리는 종이배마냥 젖어 부식되고 다시 말라비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처음 마크를 발견했을 때 메이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메이저는 마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누리고 거느리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하는 자신만의 왕국의 젊은 왕. 메이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들. 하지만 메이저만이 아는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마크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작은 비밀이자 손에 꼽을 만큼 드문, 메이저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사람과의 기억이었다.
그날도 메이저는 혼자였다. 비슷비슷한 저택의 그저 그런 파티. 자신을 괴롭히지는 않아도 말을 걸지 않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메이저는 정원으로 향했다. 석양이 지는 하늘 아래 벌 한 마리가 힘없는 날갯짓을 하며 메이저의 손에 앉았다. 분명 배가 고픈 게 틀림없었다. 꽃에게 데려다 주면 기운을 차리지 않을까? 메이저의 발걸음이 분주히 움직이며 정원 깊숙한 곳까지 다다른 끝에 느리게 멈췄다. 키보다 한참은 높이 뛰어야 꽃에게 닿을텐데... 메이저는 열심히 폴짝폴짝 뛰다 발목이 꺾인 채 주저앉았다. 발목에 올라오는 아린 통증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벌을 살폈지만 이미 작은 친구는 사라진 채였다.
“나는 잘 하는 게 없어...”
”거기까지 데려다 줬으면 알아서 찾아가야지.“
덤불이 움푹 패인 곳에 가만히 앉아있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메이저를 늘 다그치는 선생님처럼 엄한 눈으로 메이저를 일으켰다.
“...잘못했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해? 벌한테 꿀을 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 아냐?”
“맞아요...”
“잘했네. 나라면 안 그랬겠지만. 어쨌든 넌 잘못한 거 없어.”
그 말에 우습게도 눈가가 따끔거렸다. 메이저는 코를 문지르면서 소년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은 늘 그랬다. 메이저가 생각하고 행동하면 도통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저지른다고 하면서, 메이저가 생각 없이 있을 때만 모두 메이저에게 잘 했다고 말했다. 언제 그가 선의로 한 행동으로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나?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없었다.
그래서, 잘했다는 그 한 마디가 뭐라고 메이저는 아픈 것도 잊어버린 채로 눈 앞의 소년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둘은 파티장 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악과 바람소리를 배경삼아 쭈그려 앉은 채로 조잘거렸다. 소년의 이름은 마크라고 했다. 멋진 이름이었다. 게다가 마크는 메이저의 이름을 듣고도 놀리기는커녕 대수롭지 않게 그를 대했다. 네가 왜 우리 아빠랑 같은 이름이라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아이들보다 훨씬 멋있었다.
”나는 벌이랑도 친구가 되고 싶어. 백설공주는 그렇게 하던데.“
”그건 벌이 백설공주의 왕국의 백성이라 그래. 백설공주는 벌을 지키고 벌은 백설공주를 해치지 않는 거야.“
”그치만 왕은 무서워. 나는 잘 못할 것 같아...“
”그러면 널 지켜줄 사람을 만나면 돼. 그건 뭘 먹고 뭘 입냐보다 훨씬 중요한 거야.“
”형아는?“
”나는 지키고 싶어. 자기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머저리한테 얽매여 있는 건 지긋지긋해.“
좋은 학교에 들어가 인맥을 쌓고 사업을 확장해 거대한 내 세상을 만들 거야. 그의 말은 메이저가 소망하는 착한 일들과는 하나도 닮은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 나도 형이 지켜주면 안돼? 메이저는 그 말을 하려다 입 안으로 삼켰다. 메이저가 생각하고 하는 말들은 모두 안좋은 결과를 불러왔으니까.
”너도 내가 지켜줄게.“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렇게 쳐다봤잖아.“
그런 건 말 안해도 다 보여. 마크는 메이저의 구두 앞코를 털어주며 씩 웃었다.
그게 다였다. 둘의 대화는 메이저의 대화가 늘 그랬듯 다음 따윈 없었고 마크는 그 뒤로도 세상의 정중앙을 우뚝 지키며 군림했다. 가장자리를 떠나는 순간 갈 곳이 없어지는 메이저만이 마크를 계속 보며 그 날을 기억하고 되뇌었다. 마크는 잊어버렸을 지도 몰라, 라는 말은 어느새 마크는 잊어버렸겠지, 라는 말로 바뀌었고 메이저 역시 점차 흐릿해지는 대화를 오래된 일들 사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묻어버리고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메이저는 마크에게 건 기대를 잡고 있었다. 그날 보여준 모습은 분명 다른 이들과 달랐으니까. 마크는 메이저의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그건 마크의 뒤에 붙는 세러신보다, 그의 결좋은 금발과 다부진 턱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래서 메이저는 아주 오래되어 바스라진 기억을 소중하게 쥐고 선자리에 나갔다. 어쩌면 우리가 나눈 것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당신이 그대로라면, 우리는 잘 맞는 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메이저가 하고 싶은 말은 그뿐이었다.
마크가 정말 좋은 사람이어서 메이저에게 이리도 아까울 줄은 메이저는 결코 몰랐다.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마크에게 얼씬도 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 서러웠다.
밥에게 자꾸 문자가 왔다. 전화는 안 해서 다행이었다. 소리내어 운 것도 아닌데 목이 꽉 잠겨 있었으니까. 내용도 별 얘기는 없었다. 점심은 먹었냐, 오늘 날씨가 좋으니 산책이라도 하라는 뭐 그런 내용들. 배도 안고프고 커튼을 친 방안은 우중충했지만 메이저는 정성껏 답장을 했다. 그리고 메세지함을 하나씩 세었다. 밥에게 온 메세지, 광고, 광고, 광고.
마크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나같아도 연락 안했겠다… 생각나서 왔다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키스를 하더니 울어제껴서 뒷처리나 하게 만들고. 괜찮다. 어차피 이런 건 익숙했다. 사람들은 늘 친절하게 다가와 말없이 사라지곤 했다. 메이저는 시작에 서툴고 끝내는 게 능숙한 사람이었다. 기실 메이저가 가장 서투른 건 두 번째를 시작하는 일이었다. 메이저는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할 것도 없으니 가만히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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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자꾸 진동이 울리는 것만 같아 벌떡 일어나기를 2번. 여전히 핸드폰은 그대로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자꾸 뒤척이는 자신이 한심하고 서글펐다. 지금도 내 핸드폰은 그대론데... 아니, 진짜 어디선가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메이저의 핸드폰은 가만히 있는데 대체 어디서? 메이저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진동의 근원지를 찾아 헤맸다. 침대 아래, 탁자 위, 화장실, 옷장 안, 그리고 소파...? 널부러진 옷더미 사이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겨진 옷들을 헤집다 보니 툭 떨어진 핸드폰 하나가 여전히 시끄럽게 진동을 울렸다.
“찰리 영...?”
이걸 받아야 하나. 누구 건지도 모르겠는데...? 메이저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액정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 좋은 아침이에요. 메이저. 잘 잤나요?
“네?”
메이저는 다시 액정을 확인했다. 찰리 영, 모르는 사람인데. 아닌가? 혹시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일까? 그런데 이 핸드폰은 언제 넣어놓은 거지? 내가 받을 줄은 어떻게 알고?
/ 어젯밤에 많이 지친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웠어요. 푹 잤나요?
푹 잤나? 메이저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 다행이에요. 이따 저녁에 데리러 갈게요.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탁 트인 곳에 가면 마음이 좀 풀릴 거에요. 4시까지 갈테니 준비해 둬요.
“...근데 누구세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잠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이저는 다급하게 변명을 웅얼거렸다.
“제가 방금 이 핸드폰을 발견했거든요! 여기가 어디냐면 제 방이고, 저는 메이저 메이저 플로이드인데 어떻게 이 핸드폰이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이 핸드폰의 주인을 아시나요?“
/ ...만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보다 메이저, 이런 적이 이전에도 있었나요?
“네? 아뇨? 처음이에요. 그게 이상한 걸까요?”
/ 물론 아니죠. 다행입니다. 그럼 4시까지 데리러 오겠습니다.
“저...!”
/ 안된다는 답은 받지 않겠어요.
“핸드폰도 가지고 갈까요? 그러니까, 지금 통화하는 이 핸드폰요.”
/ ...네. 가지고 와주세요.
“네에...”
통화가 끊어지고 나서야 찰리 영이 누군지 물어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메이저는 찝찝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미적미적 걸음을 옮겼다. 4시까지 온다니 지금부터 슬슬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정말 누구지?
야속한 액정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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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갈 때 뭐 좀 사갈까. ] 밥
[ 햄버거? 밀크쉐이크랑 같이 사갈까. 오랫만에? ] 밥
[ 나 지금 나가서 같이 못 먹을 것 같아ㅠㅠ ]
[ 응? 어디 가는데? ] 밥
[ 어... 몰라. 찰리 영이라는 사람이 만나자는데? ]
[ 아니 형 ] 밥
[ 어딘데 ] 밥
[ 나가지말고잠깐 ] 밥
[ 형 ] 밥
뭐라고 해야 안 이상하게 들리지? 고민하고 있는데 자켓 안주머니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아까 그 남자였다. 받아야 하나? 옷을 입긴 했는데 나가는 게 맞는지 아닌지 몰라 입구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은 지가 벌써 10분째였다. 슬슬 다리도 저리고, 일어나고 싶고...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우물쭈물거리는데 따갑게 내리쬐던 햇볕 아래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오래 기다렸어요?”
그토록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던 마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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