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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10:03



특별한 건 없었다고 생각해. 그저 그때의 내가 조금 우울했고, 너는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겼고, 그래서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못했고, 나는 그런 너를 밀어내지 못했고, 그래서 그냥 같이 살았고, 같이 살다보니 몸도 섞었고, 때로는 내가 너를, 때로는 네가 나를 원했지만, 세상에 어디 그런 사람들이 너와 나, 둘뿐이겠냐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또 얼마나 있겠냐며. 눈 가리고 아웅. 우리에게 특별한 건 없다고.

믿거나 말거나 자유겠지만, 이게 사랑은 아니지. 너는 이 말을 들으면 또 불같이 화를 내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그래서 자꾸만 갈구하게 되고, 맞닿고 싶어서 안달이 나고, 애가 타고, 갈증이 나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입을 맞추고, 혀를 섞고, 그러다 보면 또 몸을 섞고. 도대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냐고 또 소리를 지르고, 그러다 끝끝내 악에 받쳐 울면서 내게 매달리겠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니까. 우리가 한 게 사랑은 아니지. 사랑이 아닌 게 사랑이 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그러려니 하라고. 내 부재에 허전함을 느끼지도 말고, 공허함에 눈물을 쏟지도 말고, 그 불같은 성정으로 나를 찾아내겠다고 길길이 날뛰지도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해. 너 그런 거 잘하잖아. 횃대에 앉아서 관전하는 거. 답지 않게 내려와서 설치지 말고 잘하는 거나 계속 해.




*



행맨이 사라졌다. 말 같지도 않은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겨놓고. 사라질 거면 흔적도 다 지워놓고 아예 없던 사람처럼 굴던지. 흔적은 곳곳에 남겨두고 몸만 쏙 빠져나갔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편지를 내려놓은 루스터는 집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화장실에는 행맨이 쓰던 칫솔도 그대로, 끝부터 짜라니까 곧 죽어도 말 안 듣고 중간부터 눌러짠 치약도 그대로. 서재에는 행맨 자주 읽던 책이 그대로, 책에는 그가 그어놓은 연필 자국이 그대로,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메모가 그대로, 그 옆에는 루스터가 따라 쓴 낙서가 그대로. 부엌에는 행맨이 자주 타 마시던 프로틴 가루가 그대로, 그걸 마시던 여우가 그려진 머그컵이 그대로, 시발. 그만하자.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제일 중요한 행맨이 없는데.

루스터는 할 수만 있다면 전부 다 때려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행맨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그게 더 끔찍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소파에 털썩, 몸을 기대 앉았다. 몸이 무겁게 축 늘어졌다. 시선은 자연스레 벽면 한가운데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가야할 시간이었다. 그래, 떠나야 할 시간이지. 하지만 루스터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제 집은 여기니까. 행맨이 없어도 루스터가 돌아올 곳은 그의 흔적이 가득한 이곳이었다.



*



엘리트 파일럿의 격추 소식은 빨랐다. 격추 기록 말고, 격추 당했다는 소식 말이다. 루스터는 소식을 듣자마자 최대한 빨리 휴가를 냈다. 매버릭과 관계를 회복하고 난 뒤, 그에게 처음으로 한 일과 관련된 어떤 부탁이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빠른 비행편을 예약해 하늘을 날았다. 느려터진 민항기는 버지니아에서 캘리포니아까지 한참을 걸렸다. 루스터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 르무어로 향했다.

해가 진 하늘은 어두컴컴히 물들어 있었지만, 그 아래의 도시는 여전히 밝은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야경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아름다웠다. 타들어가는 누구의 속은 모르고, 참 좆같게도. 루스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그대로 휘두르면 유리창 하나 정도는 거뜬히 해먹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루스터는 이내 주먹에 힘을 빼고 택시에서 내렸다.


기지 앞까지 루스터를 마중나온 건, 행맨과 함께 르무어에서 근무하던 밥이었다. 밥은 창백해진 얼굴로 루스터를 기다리다가, 저보다 더 안색이 하얗게 질린 루스터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대비되는 시커먼 눈은 어쩐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쯤되니 밥은 제 가설에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행맨과 루스터는 사귄다. 라는 가설에. 그게 아니면 루스터의 이 모든 행위를 설명할 수 없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못말해줘. 지금 수색 중이고, 빠르면 내일 오전, 늦어도 오후에는 발견될 거야."


밥의 파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오물거리며 망설이던 작은 입이 다시 열렸다. 꽉 막힌 목구멍에서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상 탈출을 제 때 했으면."


그러니까 내일 오후에도 발견되지 않으면, 행맨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0이라는 뜻이었다. 루스터는 답지않게 휘청거렸다. 그를 붙잡은 건 밥이었다. 밥은 묵직하게 잡혀오는 루스터의 팔뚝을 움켜쥐고 다시 입을 오물거렸다. 루스터는 밥의 그런 습관이 할 말이 있지만 망설여질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알았다.


"할 말 있으면 해도 돼."

"...작전 나가기 전에 행맨이랑 잠깐 만났어."


밥은 목이 메이는듯 마른 기침을 몇 번 쿨럭였다. 그리고 한참동안 정적이 이어졌고, 루스터는 끈기있게 그를 기다렸다.


"만약 자기가 잘못되면 네가 찾아올 거라고 하더라."


새까맣게 죽어있가던 루스터의 눈빛이 일순간 번뜩였다.


"너한테 자기 소식 전해주지 말라고 했어. 절대로."

"...그래?"

"근데 난... 네가 알아야 할 것 같네."


어린 무기 관제사는 상황을 파악하는데에 유능했다. 작전에 나가기 전 행맨을 만난 건 기껏해야 3분 남짓한 시간이었고, 지금 루스터를 만난 것도 그보다 조금 더 긴 정도였지만, 밥이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식 알게되면 바로 연락할게. 근처에 괜찮은 호텔있어. 거기서 기다려."


밥은 망설이다가 루스터의 어깨를 몇번 다독이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들어갔다. 루스터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이 그를 집어삼켰다. 행맨이 죽었을지 살았을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제 정신으로 초조함을 견디는 것 뿐이라는 현실이 가혹했다.



*



행맨은 눈을 깜빡였다. 새하얀 천장과 코 끝을 찌르는 병원 냄새, 입가를 간지럽히는 건 호흡기일 거고, 팔에는 각종 링거줄이 주렁주렁, 곧 의사가 간호사가 달려오겠지. 나 살아있나보네. 파르르 떨리는 행맨의 눈꺼풀이 다시 녹색 눈 위을 덮었다.

주변이 웅성웅성 시끄러웠다. 행맨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병실 문 앞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루스터였다. 미친 수탉. 행맨은 힘없이 웃었다. 밥이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밥을 찾아가서 부탁한 이유는... 글쎄. 행맨은 자기도 제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행맨은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니까 단지 루스터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것 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행맨은 그 방법을 몰랐다. 행맨이 루스터를 찾는 건 습관이나 버릇이었고, 멀리 떨어져도 다시 되돌아 가는 건 관성이었다. 그러니까 행맨은 그게 절대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랑이고 그래서 저희들이 연인이라면 헤어지자, 한 마디면 해결될 일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저희들의 사이가 연인이 아닌 것도 당연했고. 여기서 따라오는 질문. 그럼 나는 네게서 어떻게 벗어나지? 그래서 행맨은 가끔 숨이 턱턱 막혔다. 제 콜사인처럼 정말 목을 메다는 게 아닌 이상 루스터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달랑 편지 한 장만 남겨놓고 자살 작전이나 다름없는 미션에 지원한 것이었다.



*



행맨이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 옆에는 수척해진 모습의 루스터가 있었다.


"...여기서 잤어?"


갈라지고 잠긴, 형편없는 목소리가 루스터를 깨웠다. 루스터는 잔뜩 웅크린 몸을 펴면서도 꽉 잡은 행맨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놓으면 파사삭 가루가 돼서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휴가 언제까지야?"


행맨은 다크서클이 시커멓게 내려온 루스터의 눈가를 매만지며 물었다. 그 손길과 말투가 퍽이나 다정해서 루스터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틀 뒤에 들어가야돼."

"그래. 그럼 그때까지 같이 있자."


행맨은 다시 루스터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루스터의 품에 안겨서 생각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결국 관성에 의해 튕겨져 돌아온 이 품이 꼭 제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 같다고. 마른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난 왜 널 벗어날 수 없어?



*



행맨이 또 사라졌다. 이번에는 편지보다 더 짧은 메모 한 장만 남겨놓고.


내가 너와 함께했던 모든 나날들은 너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나와, 그럼에도 처절하게 네게 매달렸던 내가 타협점을 찾기 위해 죽어라 싸우던 어떤 유예 기간일 뿐이야. 편지 한 장만 남겨놓고 전투기에 오른 그 날도, 그저 너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내가, 비굴하더라도 네게 매달리고 싶었던 나를 기어코 이겨먹고야 만 날이었지. 단지 그뿐이었어. 아마 오늘도.

네게서 도망치고 싶은 내가, 네 옆에 머물고 싶은 나를 이겨버린 날일 뿐이지. 잘지내 루스터.




*





행맨이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유는, 둘이 과거에 사귄 적이 있는데 그때 루스터가 시발탑이어서.... 이게 사랑이고 지금 저희들이 하는 게 연애면 그때는 대체 뭐였는데? 싶은 거지.
만약 이게 사랑이고 연애라면 그때 루스터랑 저는 진짜 별거 아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거라, 그게 너무 비참하고 좆같아서 절대로 인정 안하는 거임. 그걸 인정하면 자기는 그때 루스터를 열과 성을 다해 사랑했는데 루스터는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잖아.

근데 그러면서도 그 지독한 사랑을 멈추지는 못해서 거기에 습관, 버릇, 관성 같은 이름 붙여가며 루스터의 곁에 머무는 거. 그러다가 어느 날 너무 비참해서 목이라도 메달고 싶어지는 순간에는 본문처럼 편지나 메모 하나만 덜렁 남겨놓고 사라짐.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겠지 뭐....


루행 루스터행맨
2023.06.02 10: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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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랏다 이건 문학이다
[Code: 7947]
2023.06.02 10:1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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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미쳣다 ㅠㅠㅠㅠㅠ 언젠가 행맨이 그때의 관계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루스터 곁에 머무는 날이 올까 ㅠㅠㅠㅠ
[Code: 0762]
2023.06.02 10: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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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터에게서 벗어나 도망치고 싶은 행맨이지만 결국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슬프다...어찌되었든 자신은 루스터를 사랑하고 옆에 머물고 싶다는 거니까..( o̴̶̷̥᷅⌓o̴̶̷᷄ ) 과거의 슬픔은 뒤로 하고 루스터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맞춰 나가면 좋겠다ㅠㅠㅠㅠ
[Code: 1338]
2023.06.02 10:22
ㅇㅇ
자꾸 떠나는 행맨 맘 너무 아프다ㅠ 찌찌찢어짐ㅠ
[Code: e062]
2023.06.02 10: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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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할 수 없음 왜ㅠㅠㅠㅠㅠㅠ100만번 해야하는데
[Code: 9716]
2023.06.02 10: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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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둘이 하는 게 사랑이고 연애임을 인정하면 과거의 자신이 너무 비참해지니까 끝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행맨ㅠㅠ 과거의 루스터 왜 그랬냐고ㅠㅠ 떠나지 못하는걸 그저 습관이며 버릇이라고 여기면서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행맨 넘 슬퍼ㅠㅠ 과거의 업보 톡톡히 치르는 루스터도 안타깝다ㅠㅠㅠ
[Code: 3cf0]
2023.06.02 11: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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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는데 업보가 쎄다ㅠㅠㅠ 루스터 광공 만들려고 담금질 하는거 같음 왜 자꾸 떠나ㅠㅠ
[Code: 1c72]
2023.06.02 13: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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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였구나ㅠㅠㅠㅠㅠ어떡해..너무 맛있어......
[Code: cc65]
2023.06.02 15:1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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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루스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는걸 인정할 수 없어서 지금 루스터의 사랑을 부정해야하다니ㅠㅠㅠㅠ 떠났다가 결국 돌아오게 되고 그 다음에도 또 떠나게될 행맨도 그렇고 항상 그런 행맨을 지켜보고 쫓아가게될 루스터도 그렇고 마음 아프다ㅠㅠㅠ
[Code: a443]
2023.06.04 16:2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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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터 ㅠㅠㅠㅠㅠ 왜그랬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90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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