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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3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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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ㄴㅈㅈㅇ



루스터는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차가운 벽에 손을 대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띄엄띄엄 벽에 붙어있는 작은 전등의 불빛은 미약해서 나선형 계단의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것은 깊은 어둠 밑에서 올라오는 음산한 바람 소리뿐이다. 마치 비디오 게임 속에서 몇 번 보았던 방공호나 지하 던전을 탐험하는 기분이 들어, 루스터는 상황에 걸맞지 않게 조금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것이 게임이라면 루스터는 원코인으로 클리어를 해야 하는 고난도의 플레이를 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보면 길고 좁은 복도가 그를 맞이한다. 복도 끝의 비밀을 어둠으로 감추려는 것처럼 전등의 불빛은 여전히 뿌옇고 흐리기만 하다. 루스터는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 기능의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복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 것인지 그 끝은 새까맣게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루스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의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불빛을 껐다. 이곳이 얼마나 크고 넓은 곳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루스터는 이동하기 직전 신중하게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나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도 루스터가 아닌 누군가의 숨소리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루스터보다 먼저 계단을 내려갔던 붕대를 두른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천천히 복도를 걷던 도중, 벽 왼편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문을 하나 발견했다. 루스터는 문 옆의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살짝 열려있는 문틈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얼핏 사람의 그림자가 여럿 보인 것 같았지만, 이렇게 좁은 틈새로는 제대로 내부를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루스터는 최대한 몸을 낮춘 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언제든지 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몸의 긴장을 풀지 않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긴 또 뭐야?"


루스터는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파일럿 생도들을 위한 교육장. 그 장소를 그대로 옮겨둔 듯한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커다란 모니터, 화이트보드, 단상, 흐트러짐 없이 배치되어 있는 25개의 책상과 의자들. 하지만 루스터가 기괴함을 느낀 것은 그곳이 교육장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문틈 사이로 보았을 때 사람으로 착각했던 마네킹들 때문이었다. 얼굴 없는 마네킹들은 파일럿들이 입는 근무복을 입은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사람을 대신하여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파일럿 외에 교관 역할을 맡기라도 한 것인지, 단상 앞에도 마네킹이 하나 서있다. 루스터가 마네킹을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한 발자국 더 걸어 들어간 순간, 갑자기 모니터의 화면이 켜졌다. 그리고 커다랗고 촌스러운 폰트가 화면에 떠올랐다.


<제이크 세러신의 행복한 인생>


루스터는 순간적으로 경직되어 그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화면의 글자가 흐릿하게 녹아내리듯 사라지더니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듯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금발의 귀여운 아기가 요람에 누워 작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꺄르륵 웃고 있다. 하지만 노이즈가 섞인듯한 오르골 소리 때문에 그 웃음소리는 선명하게 들리지 않는다.


"착하네, 우리 아기."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기는 손발을 바르작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물고 빨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흔들거리고 천장에 달린 비행기 모빌을 비추었다. 카메라를 고정했던 삼각대가 옆으로 넘어진 모양이었다. 영상의 구석에 하얀색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여성과 하얗게 샌 머리를 한 남자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오르골의 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서 화면이 까맣게 암전 되더니 잠시 후 화면이 전환된다.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금발의 아이가 블록을 가지고 노는 모습. 방금 전, 요람에 누워있던 아기가 조금 자란듯한 모습이다. 아이는 블록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더니 박수를 치며 웃었다.


"우리 제이키는 똑똑하기도 하지."


어느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텍사스 사투리인가? 멍하니 화면의 영상을 보는 도중에도 루스터는 스쳐 지나가듯이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는 발그레한 뺨을 한 채 행복하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다시 블록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까맣게 변하더니 잠시 후 새로운 영상이 흘러나온다. 그런 식으로 몇 개의 영상을 이어 붙인 것처럼 짤막한 영상의 연속이다. 커다란 대형견과 놀고 있는 아이, 의자에 앉은 채 두꺼운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아이, 제 몸에 꼭 맞는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은 아이...루스터가 모르는 제이크 세러신의 과거들.

영상 속의 행맨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칭찬하는 목소리와 가끔씩 화면에 비치는 얼굴은 매번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행맨의 부모님은 없었다. 물론 루스터는 행맨의 부모님이 두 분 모두 사업으로 몹시 바쁘신 분들이라는 것을 안다. 루스터 역시 행맨과 이혼하기 전까지 결혼식을 포함해 만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영상을 찍은 사람들은 베이비 시터나 개인 교사, 집안일을 돕는 고용인들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터는 이 영상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행맨의 부모님이 영상에 비치지 않은 것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작위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영상은 항상 하얀 벽을 배경으로 한 실내였고, 단 한 번도 실외에서 촬영된 영상이 없었다. 영상의 제목이 '제이크 세러신의 행복한 인생'인 만큼 막연하게 홈비디오 같은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것은 추억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한 영상 같았다.



그렇게 영상 속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 루스터가 알고 있는 제이크 세러신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화면 속, 흰색의 정장을 입은 행맨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루스터는 이 당시의 행맨을 알고 있다. 어떻게 그 모습을 모를 수가 있을까. 오히려 평생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루스터와 행맨의 결혼식 당일 영상이었다. 행맨은 카메라 건너편 무언가를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아마 루스터가 칵테일을 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잊고 춤을 추다가 그것을 쏟아버렸을 무렵일 것이다. 루스터는 그 어떠한 가식도 없이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행맨의 미소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제이크..."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그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화면의 영상이 멈췄다. 그리고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붓으로 덧칠을 하듯 한가운데에 붉은색의 획이 크게 그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철퍽'거리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리더니 화면 속 행맨의 얼굴은 붉은색으로 뒤덮였다. 놀란 루스터가 눈을 크게 뜨며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의자에 앉아있던 마네킹들이 일제히 루스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끼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괴한 각도로 목이 꺾인 마네킹들은 눈코입이 없는 매끈한 플라스틱 재질이었지만, 분명 루스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쪽을 향한 마네킹의 얼굴에 붉은색의 물감이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그 얼굴은 붉은색으로 얼굴이 덧칠된 화면 속의 행맨과 비슷해 보였다. 그들은 느릿하게 검지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입이 있어야 하는 곳에 가져다 댄다. 마치 그에게 '조용히'하라는 경고를 하는 것 같았다. 루스터는 얼음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듯한 기분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일까? 왜 이런 곳이 존재하고 다른 이도 아닌 행맨의 영상을 틀어주는 것일까? 루스터는 방에서 나가기 위해 문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지만, '철컥'거리는 소리만 날 뿐 문은 잠겨 있었다. 루스터가 아무리 몸을 부딪혀봐도 이곳의 문은 전부 튼튼하게 제작되어 있는 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루스터의 등 뒤 커다란 모니터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자장가. 그리고 그것을 흥얼거리는 것은 분명 행맨의 목소리였다. 루스터는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본다. 루스터를 노려보고 있던 얼굴 없는 마네킹들도 어느새 고개를 돌려 모니터의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커다란 모니터 너머, 어쩐지 눈에 익은 새하얀 방이 CCTV의 화면처럼 비치고 있다. 행맨의 흥얼거림은 계속해서 들려오지만, 그 새하얀 방에 행맨의 모습은 없었다. 그저 텅 비어있는 방의 모습만이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잠시 새하얀 방을 비추던 화면은 노이즈가 낀 것처럼 지지직거리더니 빠르게 화면이 전환된다. 그리고 유쾌한 음악과 함께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90년대 초반의 광고처럼 화질과 음질이 썩 좋지 않아 굉장히 위화감이 느껴진다.


"오늘도 S.S의 연구진들은 최선을 다해 인류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여성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구식 컴퓨터의 모니터를 들여다보거나 두툼한 서류를 빠르게 넘기고 있다. 카메라는 깔끔하고 넓은 연구실의 풍경을 줌아웃해서 보여주고, 필기체로 S.S라고 쓰인 흰색로고가 천천히 화면 중앙으로 내려온다.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영원한 행복을 위해."


다시 한번 화면에 노이즈가 끼고 영상 속 연구실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화면이 전환되어 방금 전보다 훨씬 화질이 좋지 못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보글보글 공기방울이 올라오고 있는 물속의 모습. 수조의 내부를 찍고 있는 것일까? 화질 때문인지 뿌옇게 보여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붉은색의 무언가가 수조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만을 루스터는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제이키, 할 수 있잖아."


노이즈가 낀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영상에서 흘러나온다. 보글보글 공기방울은 계속 올라오고 있고, 루스터는 숨을 죽인 채 모니터를 노려보듯이 가만히 응시한다. 아니, 정확히는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속을 떠다니던 붉은 덩어리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떠오르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할 수 있잖아, 제이키."


여성은 방금 전과 비슷한 문장을 다시 한번 더 내뱉는다. 하지만 음성 합성이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의 높낮이가 이상하게 들렸다. 그리고 화면은 지지직거리며 노이즈가 끼더니 다시 광고 화면으로 돌아왔다. 지나칠 정도로 밝고 유쾌한 음악. 정신없이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진들. 방금 전과 다를 것 없는 영상이지만, 누군가의 음성을 변조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리야, 못 해. 할 수 있어. 안 돼. 아파. 그만해. 괜찮아. 하지 마. 괜찮아. 부탁입니다. 할 수 있어. 제발, 멈춰줘. 아파. 그만해. 그만해. 계속하세요. 그만해. 그만, 괜찮아. 괜찮아. 괜찮―"


망가진 테이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던 목소리가 끊기고, '삐이-'하는 고주파음과 함께 컬러 바 영상이 떴다. 그리고 '화면 조정 중입니다.'라는 문구가 뜬 채 모니터의 화면은 그대로 바뀌지 않는다. 루스터는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있어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지금 자신이 본 영상들은 대체 뭘까? 제정신을 유지한 채 영상을 끝까지 본 자신을 칭찬해야 할지 아닐지 몹시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어떠한 악의적인 장난처럼 편집해 둔 이 영상을 루스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제이크,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브래들리 브래드쇼는 제이크 세러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 극히 일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행맨은 비밀이 많은 남자였고, 과거 남편이었던 루스터에게마저 그것들을 숨기고 살아왔던 것이다. 물론 루스터는 '비밀'을 갖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몰래 바람을 피우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면 모를까, 적어도 루스터가 알고 있는 행맨은 항상 루스터만을 사랑했고, 그 애정은 단 한 번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약간의 비밀 정도는 '신비로움'으로 치부하고 모른 척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행맨이 깊숙이 숨겨두었던 비밀들은 단순히 위험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규격 외의 일들로 느껴졌다. 지금으로서는 완전한 추측이 불가능하지만, 루스터는 이곳이 행맨과 연관 깊은 장소이며 루스터를 이곳에 가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범인은 루스터의 목숨을 인질 삼아 행맨을 협박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루스터는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행맨이 어디에 있든 그를 이 위험한 건물에 혼자 남겨둘 수는 없었다. 루스터는 문고리를 다시 한번 돌려보았지만 역시 굳게 잠겨 있었다. 문을 뜯어낼 수는 없는 걸까 고민하던 찰나 한 박자 늦게 문고리에 열쇠를 꽂는 열쇠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런 힌트도 없이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보다 열쇠만 찾으면 된다는 점에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루스터는 몇 달 전, 골든 워리어즈의 부대원 몇 명과 함께 방탈출 게임룸에 다녀왔던 것을 떠올린다. 자칭 방탈출 매니아인 한 부대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초심자인 루스터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답은 항상 의외의 곳'에 있다고 했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기 좋은 눈길을 주지도 않을 곳' 말이다.

그 조언을 떠올리며 루스터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교육장의 풍경과 똑같아서 루스터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앞에 있던 화이트보드의 구석이었다.


H_NGM_N


눈에 익은 글자가 보이고 루스터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곳에 아무 이유 없이 행맨의 콜사인이 적혀있을 리가 없었다. 열쇠를 찾는 힌트라고 생각한 루스터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기로 한다. 혹시 비어있는 글자를 채우는 건가 싶어 마커를 찾아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필기구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손끝으로 A를 덧그려보기도 하고 괜스레 화이트 보드판에 "A"라고 속삭여보기도 했지만, 아무 변화도 없어서 루스터는 괜스레 머쓱해졌다. 골든 워리어즈의 부대원 역시 루스터는 그다지 추리 쪽으로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실제로 그 당시 숨겨진 메시지를 해석해 비밀번호를 찾아내지 않고, 힘으로 자물쇠를 뜯어 상자를 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루스터는 방탈출 게임의 모니터 요원에게 혼나고 소품의 수리비를 지불해야만 했다. 루스터는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며 다시 힌트가 될만한 것을 찾아내기로 한다. 



그리고 잠시 후, 루스터는 한 가지 굉장한 사실을 알아냈다. 마네킹들의 근무복 명찰에는 각자 그들만의 이름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지금 루스터가 확인하고 있는 마네킹의 명찰에는 'Jordan'이라는 성씨가 적혀있다. 혹시나 해서 뒷자리에 앉은 마네킹의 명찰을 확인해 보면 'Fisher'라고 적혀있다. 근처에 있는 마네킹의 명찰들도 꼼꼼히 확인해 본 결과, 알파벳 순서가 아닌 무작위로 앉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A'로 시작되는 성씨를 가진 마네킹을 찾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루스터는 자신의 놀라운 관찰력을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 자신이 겪는 이 모든 일들과 상황들이 마냥 유쾌한 것은 아니었기에 우쭐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루스터의 추측은 절반만 맞았던 모양이다.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마네킹들의 명찰을 확인해 보았지만, 'A'로 시작하는 성씨를 가진 마네킹만 쏙 빠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Zam'이라는 성씨를 가진 마네킹도 찾았는데 말이다.


"하나, 둘, 셋, 넷..."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앉아있는 마네킹들을 세어보는데 25개밖에 없다. 'A'로 시작하는 성씨를 가진 마네킹만 없는 걸 보면, 화이트보드의 힌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 것 같기는 했다. 대체 뭘 놓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B'가 없는 거라면, 'B는 여기 있잖아, Bradshaw!'같은 재치 넘치는 답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루스터는 몇 번이고 마네킹을 세어보지만, 역시 숫자가 맞지를 않는다. 여기가 진짜 방탈출 게임룸이라면 모니터 요원에게 힌트를 요청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 정말 유감스러웠다. 루스터는 멍하니 책상에 걸터앉았다. '답은 항상 의외의 곳'에 있다니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루스터는 다시 한번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


그리고 단상 앞에 있던 마네킹에 루스터의 시선이 멈추었다. 겉에 항공 점퍼를 입고 있어서 대충 파일럿 마네킹들만 보고 있었는데, 교관 마네킹 역시 안쪽에 근무복을 입고 있었다. 루스터는 재빨리 교관 마네킹의 항공 점퍼 안쪽, 근무복의 명찰을 확인한다.

'Anderson'

루스터는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기분을 꾹 억누르고 마네킹의 몸 여기저기를 확인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점퍼의 주머니, 옷 안쪽을 꼼꼼히 수색해 보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이런 방을 만든 것일까. 행맨 역시 이곳을 지나왔을까? 루스터는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것을 느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얼른 이 방에서 나가 행맨을 찾고 그와 함께 이 이상한 곳에서 탈출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루스터는 이를 악물고 마네킹을 꼼꼼히 확인하기 위해 그 등뒤로 걸어간다.

그리고 교관 마네킹과 동일한 시점. 파일럿 마네킹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는 각도. 책상 앞에 앉아있던 파일럿 마네킹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검지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키고 있다. 루스터는 그것들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루스터는 짧게 숨을 들이켜고 마네킹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마네킹들은 일제히 교관 마네킹을 가리키고 있다.


"이 마네킹이 정답인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여기서 뭘 어떻게..."


루스터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찰나, '띠리링- 띠리링-'하고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이 타이밍에 전화가 걸려오다니 루스터로서는 기뻐해야 할지 당황스러워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커다란 마트에서 행맨과 전화할 때의 대화는 그리 썩 좋지 않게 끝났었다. 행맨은 무언가를 감추듯이 루스터에게 일방적인 통보만을 했고, 이 기괴하고 이상한 일에 휘말린 당사자인 루스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을 헤맬 뿐이다. 동료들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라는 낙관적인 추측도 해 본 적 있지만, 안 좋게 헤어진 '전' 남편을 이런 시답잖은 장난에 끌어들일 리가 없었다. 루스터는 퍼석해진 제 입술을 한 번 문지르고 일부러 핸드폰의 벨소리가 세 번쯤 울렸을 쯤에 전화를 받았다.


"...제이크."
"목소리가 울리지 않는 걸 보면 마트에서 나왔나 보네?"
"거기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여긴 '위험'하다고 했잖아. 네가 훈련받은 군인이라고 해도 모든 위험에서 안전한 건 아니거든?"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데?"
"......"
"제이크, 이런 상황에서까지 너랑 말싸움하기 싫어. 난 그냥 이곳에서 나가고 싶을 뿐이야."
"알아, 그래서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루스터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행맨의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행맨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빼놓고 있다. 하늘 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윙맨을 버리고 날아가는 주제에 왜 이런 대답을 해오는 것일까. 차라리 출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며 루스터를 닦달하는 쪽이 훨씬 이해가 되고 행맨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나는 너와 '함께'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나 혼자 무사하다고 그걸로 만족하고 안심할리가 없잖아."
"......"
"우리가 이혼하고 법적으로 완전한 타인이 된 것은 알아. 네가 '전남편'이 된 나를 불편해하는 것도 이해하고.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줘. 우리 관계가 어떠하든 네가 위험에 처하면 난 항상 널 구하러 갈 거야."
"세이비어는 내가 해내야 멋지게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인데..."
"알아. 하지만 나도 한 번쯤은 잘난 척할 수 있는 기회를 줘."


루스터가 가볍게 농담을 섞어 말하자, 행맨이 작게 코웃음을 친다. 아주 조금이지만 긴장이 풀린 것 같은 웃음소리다. 루스터는 문득 행맨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보고 싶어졌다.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내젓고 있을까, 아니면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주제에 허세를 부리듯 입꼬리만 올려 웃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루스터는 행맨이 눈앞에 있다면 그를 꼭 안아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브래드쇼, 너 지금 어디야?"
"나? 으음, 마트 지하에 있는 이상한 방."
"거기 이상한 방 많아. 구체적으로 말해봐."
"와우, 그거 굉장히 소름 끼치는 말이네. 내가 있는 곳은 이상한 마네킹이 많은 곳. 교육장처럼 꾸며져 있어."
"아, 거기..."


행맨의 목소리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울적하게 가라앉는다. 행맨 역시 이 방을 지나온 것이라면 '그 영상'을 봤다는 뜻이고, 굉장히 불쾌한 영상인만큼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행맨은 차분하게 루스터가 지금 어느 상황에 처해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는 "거기서 막혔단 말이야? 엄청 쉽잖아."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을 해온다. 루스터를 바보 취급하기보다는 '그거 정말 쉽고 간단한 문제인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네킹들이 교관의 머리를 가리키고 있잖아. 마네킹 머리를 부수면 안에 열쇠가 들어있어."
"머리를 부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답이 나오는데."
"마네킹 얼굴 안 봤어? 얼굴에 과녁 표시가 있어."
"...뭐?"


루스터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교관 마네킹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마네킹들은 붉은색의 물감이 얼굴에 번진 형태로 불규칙한 모양을 띠고 있었지만, 교관의 얼굴은 원 안에 원이 들어간 과녁 형태의 문양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방탈출 매니아인 골든 워리어즈 부대원이 말했던 '무심코 스쳐 지나가기 좋은 눈길을 주지도 않을 곳'이 바로 이런 곳을 말하는 것이었나 보다.


"방에서 나가는 방법까지 전부 알려준 셈이니까 알아서 나가. 난 전화 끊는다."
"잠깐 제이크...!"
"왜?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핸드폰 방전되면 너한테 연락 못하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충전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돼."


사실 루스터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이 방에서 <제이크 세러신의 행복한 인생>이라는 영상을 틀어줬는지. 대체 이곳은 어디길래 방탈출 게임룸처럼 꾸며진 방이 계속해서 연달아 나오는 것인지. 그리고 범인은 무슨 목적으로 이런 방을 만들었고, 행맨과 루스터를 납치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행맨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으며 무슨 위험에 처한 상황인지. 그 외에도 루스터는 행맨이 알고 있는 이곳에 대한 모든 이야기와 비밀들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루스터는 지금 행맨에게 그런 질문을 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오히려 마음을 굳히고 루스터 혼자 이곳에서 내보낸 다음, 자신은 이 정체 모를 곳에 남아 있으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루스터는 머릿속에서 넘쳐흐르는 수많은 질문들을 삼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몸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곧 구하러 갈게, 제이크. 그러니까 다치지 마."
"...너나 몸 조심해."


웅얼거리는 듯한 행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그대로 전화는 끊겼다. 루스터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행맨의 말대로 마네킹의 머리를 부수기로 했다. 마체테를 이런 곳에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방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루스터는 눈을 질끈 감고 "미안해, 앤더슨."하고 중얼거리며 시원스레 마체테를 휘둘렀다. 요란하게 플라스틱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마네킹의 머리 절반은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조각조각 바닥으로 흩뿌려진다. 고개를 들면 책상 앞에 앉은 파일럿 마네킹들은 일제히 양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있다. 그 찝찝한 광경에 루스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플라스틱 조각 사이에서 열쇠 하나를 주워 들었다.



잠긴 문을 연 루스터는 서둘러 방에서 나와 어두운 복도로 되돌아온다. 마네킹들로 채워진 교육장에서 나오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처음 눈을 떴던 새하얀 방이 비교적 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신적으로 조금 지쳐버린 루스터는 벽에 손을 짚고 천천히 복도를 걷기 시작한다. 저 멀리 복도의 끝, 비상등이 흐릿하게 빛을 발하는 것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이 어두운 복도에서 빨리 나가고 싶어 루스터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행맨이 말한 대로 이 지하에는 '이상한 방'이 많은 모양이었다. 몇 걸음 채 걷지도 않았는데 복도 양 옆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여러 개 보인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방들일까? 행맨은 그 모든 방들을 확인하고 나온 것일까? 하지만 루스터는 문에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 걷는다. 방 안에 무엇이 있든 그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정신적 피로감만 배로 늘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스터는 이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복도의 저 편 희뿌연 전구 하나가 망가진 것인지 불안하게 깜빡이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누군가 미동도 없이 조용히 서있다. 검게 피가 말라붙어 있는 낡은 회색 점프슈트. 손톱이 몇 개 뽑혀 엉망진창으로 짓무른 손 끝. 얼굴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수상한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루스터행맨
2023.03.28 00: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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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 무슨 시설일까???? 행맨이 어릴때부터의 모습이 영상으로 남아있는데 배경이 모두 흰 벽이라는 묘사 나올때 레알로 소름돋았어 센세ㅠㅠㅠㅠㅠㅠ
[Code: 08e7]
2023.03.28 00:2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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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맨이 살아있어도 무사히 몸 다친데 없이 살아있을지 너무 걱정되고 아아아아ㅠㅠㅠㅠㅠㅠㅠ 붕대로 감은 남자 나올때 행맨일까봐 가슴이 철렁 떨어져가지고ㅠㅠㅠㅠ 손톱이 부러졌다니ㅠㅠㅠㅠ
[Code: 08e7]
2023.03.28 00: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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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아니 부러진것도 아니고 뽑혔다니ㅠㅠㅠㅠㅠㅠㅠㅠ 행맨이 뭔가 연구의 결과물같은건가ㅠㅠㅠㅠㅠㅠㅠ 이혼하고 연락도 안되었던게 걸려 왜 그랬던거야ㅠㅠㅠㅠㅠㅠㅠ
[Code: 08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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